1차 창작

인류의 탄생과 멸망

[FAITH : 안식의 레퀴엠] / 지수-성령 (로그) / 2020.02.24 업로드

참으로 자연적인 일이다. 늑대는 살기 위해 양을 잡아먹고, 양은 살기 위해 포식자를 피해 도망가는 것. 지구의 사이클은 그렇게 돌았다. 그것은 신 혹은 자연이 그 안에서 살아갈 생명체들을 위해 맞춰놓은 아주 완벽한 균형이었다.

아이는 종종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할 것 없는 새벽- 그 고요함이 무료해지면 작은 곤충들이 사는 이야기를 틀어놓고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날이 좋지 않아 집에만 있어야 하는 적적한 날에는 TV 속의 표범과 가젤을 번갈아 응원하기도 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배고픈 늑대가 굶을까 입술을 깨무는 주제에, 화면이 바뀌기라도 하면 노루더러 어서 도망쳐 목숨을 구하라며 주먹을 꼭 쥐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송 하나가 끝나고 나면 그것을 깨끗이 잊어버리기까지 한다. 그것은 저 멀리 사바나에서의 피 냄새 흐르는 먹이사슬이 당장 우리의 생사에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덕스럽게도 제가 뱉은 비유가 금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늑대와 양이라니. 늑대의 생은 양을 비롯한 초식동물을 해치고야 유지된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로 판단할 일이 아니며, 세상이 그리 정한 일이기에 인간이 손대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들은 어떠한가. 이 말 같잖은 의식에 당신들의 신념 외에 또 무엇이 걸려있단 말인가? 존재치도 않는 구원에 무고한 목숨 네 개의 가치가 있는가? 당신들이 아직 제정신이라면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을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해괴하다고요. 저한텐 성령씨와... 다른 사람들이 더 해괴한데."

지금 제멋대로인 것은 대체 누구인가. 당신들의 신이 정녕 이것을 용납할 거라 생각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종교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는다. 당신들의 신은 어떤 신이지? 저를 믿는 아이들만 어여삐 여긴다면 그것은 인간의 간사함을 그대로 닮은, 신이라 부를 수도 없는 존재이다. 희생이라는 이름의 극단적인 정성을 보이지 않아 노한다면 그것은 선하지 않기에 섬김받을 수 없는 신이다. 불완전한 인간 하나에 그분의 모든 말씀과 교리를 맡긴다면 그것은 전능하지 않기에 인간을 보살필 수 없는 신이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부조리를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무지하기에 이름을 가질 수 없는 신이다. 당신들은 대체 무슨 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세상에 내려진 지혜의 총량은 정해져 있으나 그것을 받고자 하는 인간이 너무 많아 조그맣게 쪼개서 나눠 가지다 보니 지혜의 빈부격차가 생기고 말았다는 설 이상으로 당신들을 적절하게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멍청한 사람들.

"제가 제 몸을 지키는 건 지극히 저를 위해서고, 생명으로서 당연한 일인데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면 좀 불쾌한데요. 성령씨, 저를 위해 걱정하는 거 아니잖아요."

어린아이의 장난도 아니고 어떻게 자기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부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을까. 이제는 슬슬 가엾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사회화가 덜 된 인간이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해 놓지 못하면서도 아닌 걸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머리는 아직 남아있는데, 당신은 그것조차 없구나.

당신이 맺고 끊은 관계들이 어떤 모양이었을지 머릿속에 가만히 그려본다. 혐오와 안타까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게 이런 상황을 마주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그렇다면 나라고 특별할 것이 있나? 나는 무엇 때문에, 내가 무어라고 이 사람을 붙들고 이리도 처절하게 울고 있지? 내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성령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제 대충 알겠어요. ...어린아이들은 좋아하는 색깔 크레파스를 들고 팔을 휘두르다가 그걸 부러뜨리더라고요. 아,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성령씨 어린 애 아니잖아요."

크레파스가 뭉개져 바닥이며 벽이며 지워지지 않을 칠을 남길 동안, 그 사태를 만든 작은 아이는 손에 남은 잔해들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도 배앓이 하나 없이 쑥쑥 크기만 하겠지. 그 애는 크레파스의 색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말을 며칠 전에 들었다면 같이 치킨 먹으러 가자는 말 정도는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의도적으로 주제를 바꾸기는 했어도 당신과 나, 둘 다 자신의 뇌까지 속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억지로 웃는다면 당신이 진심으로 미소짓는 순간은 내 친구들의 몸이 불타 사라질 때다. 외면과 방관은 언제나 좋지 않은 결말을 가져온다. 얼마 되지 않은 인생에 그런 사례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지금의 해결법은 실패였다. 성공할 거라 기대했던 것도 아니지만.

당신의 마지막 말에 꽤나 오래 침묵했다. 아니, 정확히는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빛 탓일까.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끔찍이 해를 입을 것 같은 금색의 눈. 그것이 호랑이의 것과 닮았다고 종종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순간만치 당신이 맹수로 보인 적이 있었나. 배가 불러 삼키지도 않을 먹이를 발톱으로 찢고 노는 흉측한 짐승으로.

"성령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요."

그 눈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당신이 이 행위로 얻는 것이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 않아도, 어울려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니, 짜증 나게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이유가 사라졌다 말하는 것이 옳겠다. 인류는 사랑으로 탄생하고 사랑으로 멸망할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나 역시 그 지혜를 충분히 얻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 바보 같은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것부터가 이미 내 머리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은 채 당신과 눈을 마주한다는 것은 스스로 감금실에 갇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머리가 완벽하게 멈추기 전에 구명보트는 여기를 떠날 것이고, 그 안에는 분명 나를 포함한 일반 사람들 모두가 있을 것이다. 완전히 이별하기 전까지만 사랑하면 된다.

그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눈부시게 빛났고, 아이는 태양과도 같은 빛이 온몸을 적시는 것을 느끼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이 찬란한 곳이 아닌 그 뒤, 당신의 음울한 심연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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