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Salvatio humanus

[FAITH : 안식의 레퀴엠] / 엔딩 이후 / 2020.02.17 업로드

지옥 같았던 열흘이 지나 다시 찾은 집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가족의 재회에는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그 안에서 아이는 다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 그 후로는 늘 같은 일상이었다. 아, 자매에게 정신과 치료 일정이 추가된 것 말고는. 다행히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가 효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랬다.

아이는 한 달간 TV에서 하는 뉴스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매일 만질 수밖에 없는 휴대폰에서 그들의 이름을 볼 때면, 혹은 그들의 단체의 이름을 볼 때면 그는 기기의 화면을 끄고 허공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곤 했다. 그러다가 누가 이름이라도 부를라치면 겨우 깨어나는 것이다.

이 집에서 그 크루즈의 일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부모님은 애써 그 전과 같이 행동해 주었고, 동생과 아이는 그 이야기를 입은커녕 머리에도 담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종종 애매한 사이의 지인들에게 걱정 섞인 연락을 받을 때면 아이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선한 것을 안다. 처음 한두 번은 고맙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연락이 다발로 쏟아지니 하나하나 답장하는 입장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 잘 지내?

- 너 소식 들었어.

-괜찮아?

지금 메시지 알림을 울려대는 사람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장이었던 친구다. 반장이란 직책이 그러하듯 아이도 그냥저냥 이야기만 몇 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학 시간에 같은 조였던 것도 같고.

- 응. 괜찮아. 넌 잘 지내?

대충 예의만 차린 답문을 전송하고 휴대폰을 이불 위에 대충 엎어둔 채 거실로 나가면, 커튼을 쳐두지 않은 창문 밖으로 비가 내렸다. 아이는 비 오는 날을 꾸준히 좋아했었다. 잠이 안 오면 이어폰을 끼고 빗소리를 틀 정도로. 남들은 우중충해서 싫다고 해도 아이는 그 차분한 분위기를 분명히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 길었던 열흘이 지나고, 분명 다른 것을 알면서도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아지면 아이는 그 속에서 있을 리 없는 소금 냄새를 맡았다.

창문가에 부딪혀 쪼개지는 물방울을 한참 보고 있을 즈음, 문득 맨발이 시려 실내화를 신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파 위로 올라가 대충 눈에 보이는 책을 전부 펼쳐놓고 그중 하나라도 또박또박 읽어보려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장을 머릿속에 효율적으로 넣을 수 없게 된 지 딱 한 달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창가의 빗방울처럼 쪼개져 형체를 구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컨디션이 더 좋지 않은 날이면 아는 단어도 잊고 몇 분 동안 책장의 빈 모퉁이를 노려보기도 했다.

집은 유난히 고요했다. 부모님도, 동생도 각자의 할 일을 위해 어딘가로 흩어지고 남은 것은 아이 혼자였다. 열 발짝은 떨어진 제 방에서 울리는 카톡 소리와 의미 없는 게임 알림 등이 빗소리를 뚫고 너무도 선명하게 귀에 박히는 바람에, 아이는 책을 다시 모두 덮어버리고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현장을 벗어난다고 해서 모든 상처가 완치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이 정도로 망가질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전부 원래대로인데 자신만 어딘가로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학교는 물론 휴학을 냈다. 누군가는 일부러 바쁘게 사는 게 도움이 될 거라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지금 학교를 나가면 모든 것이 짐일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걱정도, 새로 배울 전공지식도, 교수의 말 한마디까지 전부 다. 병원 등의 정말 필요한 일정 외에는 현관문 밖을 나서지도 못해 친한 친구들의 얼굴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들 중에는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집 밖으로 끌어내 힘이 되어주려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고맙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왜인지 밖에 나가면 '그 사람들'을 마주칠 것만 같아 아이는 쉽게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아이가 아낌없이 사랑해버린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들었던 내용에 따르면 경찰이 출동했다고는 한다. 그에 관련한 기사도 자주 나는 것 같고. 하지만 언론에서 다루는 것은 아주 표면적인 것들이었다. 아이가 경찰 조사에서 이야기한 것의 대부분은 자료 내부에 깊이 숨어들어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잠들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혹 누군가가 안다고 해도 지금 아이의 꼴을 보면 열던 입술도 닫을 것이었다.

물론 그곳의 사람들 모두와 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몇몇이랑은 휴대폰 번호를, 몇몇이랑은 SNS 아이디를 주고받았었고 실제로 몇 번의 연락이 오갔다. 아이가 견딜 수 있는 것은 딱 그쯤까지였다. 얼굴도 목소리도 없이 글자만으로 가벼운 안부를 묻고 자연스레 종결되는 대화. 가장 밑바닥에 깔아두고 싶은 기억들이 위로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면 더 무언가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가까스로 보트를 타고 탈출해 집까지 오는 그 오랜 과정 동안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만약 다시 만나면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럴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그때도 지금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아이는 벌떡 일어나 집안의 모든 커튼을 꼼꼼하게 쳤다. 그 단어를 꺼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아이에게 그 사람은 너무도 버거운 존재였다. 그러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초저녁처럼 어두운 집을 둘러보고 이곳은 크루즈가 아니라는 것을 소리 내서 열 번은 되뇌었다.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며, 현재까지 이어질 리 없다는 말도 같이.

한 번 해보지 않았나.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가정을 스스로 탈출해 지금의 보금자리를 찾기까지의 여정을, 아이는 오직 자신의 선택만으로 이뤄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기본적인 목표 외의 모든 것은 지금 억지로 쥐어도 흘러내릴 뿐이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밤새 내릴지도 모르겠다. 내일은 병원에 가는 날인데 길이 온통 젖어 물웅덩이투성이일 것이다. 그 말은 걷는 내내 바닷바람이 불어 드는 착각에 사로잡힐 것이며, 지나가는 사람이 그들 중 하나로 보여 소스라치는 일이 한 번 이상 있을 것이란 말이었다.

탁자에 있는 리모컨을 눌러 TV를 켜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버튼이 눌리고 기계가 켜지는 짧은 시간에 아이는 매번 같은 환청을 들었다. 감금실에 계시는 사제분들은 의식 전에 꺼내드리니... 애니메이션 채널에는 아이도 어렸을 때 자주 보았던 만화가 나오고 있었다. 볼륨을 여섯 번은 더 올린 것 같다. 성우의 목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활자보다는 나았지만 영상매체 역시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아동용 애니메이션은 시청하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이러지 않으면 아이는 꼭 악몽을 꾸었다. 시체가 나온 날의 악몽? 안내방송이 잘못 나와 한 번에 제 사람 열여섯을 잃은 날의 악몽? 아니, 그 사람들이 제게 따뜻하게 굴어주었던 장면들의 악몽이었다.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진심으로 아껴주던 순간들이 끝날 기세 없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밤에는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잠들 수 있었지만, 낮에 배터리가 닳아 꺼지듯 취하는 잠에는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었을 때 부모님 중 누군가가 TV를 끄고 아이를 방에 데려다 놓는 식이었다.

저번에도 틀었던 에피소드네. 그래서 결말이 어땠더라. 당연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는 요새 기억력마저 깜박이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그마저도 익숙했다. 요새는 일상적인 것도 자꾸만 잊어버리는 바람에 탁자 위 메모지 닳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깬 직후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30분 동안이나 가만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핸드폰 화면을 켜거나 달력을 볼 생각을 못 했다는 게 문제지.

여러모로 참 많이 망가진 정신이었다.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내고는 있는 게 장할 지경이다. 큰 소리를 오래 들어서인지, 생각이 많아서인지 두통이 밀려왔다. 아이는 몸을 웅크리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들어 있는 순간이 가장 편한 순간이었으므로.

커튼 너머 빗방울이 더욱 거세졌다. 회색 하늘은 점점 더 빛을 잃고, 아이가 몸을 누인 소파는 그만큼 그림자 속에 잠겼다.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아이는 눈을 뜨면 세상이 온통 물에 잠겨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을 삼켰다.

Libera me, m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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