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순례 일기 : 다이앤 아르터스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다이앤의 오아시스의 백일장 / 2020.03.09 업로드

겉부분에 친필로 '다이앤 아르터스'라고 쓰여진 얇은 책 한 권이다. 종이의 질은 꽤 좋아 보이나, 몇 달을 들고 다녀서인지 완전히 깨끗하지는 않다.

제국력 585년 2월 5일.
순례의 시작. 걱정이 앞선다. 모인 사람들을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다 너무 낯설다. 아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제국력 585년 2월 6일.
공지가 떨어진 모양이다. 내일부터 용의 영역으로 이동이다, 역시 오지 말 걸 그랬나 싶다. 뭘 태워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정말 그렇게 걸어야 하다니. 다리 부서지진 않겠지.

제국력 585년 2월 7일.
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 하루 걸었는데 몸이 쑤시다.

제국력 585년 2월 8일.
어제 너무 힘들어서 꿀잠을 잤다. 그건 좋은데, 오늘도 걸어야 한다. 진짜 이건 사람 할 짓이 못 된다.

제국력 585년 2월 9일.
걷는 도중에 곤충이 발목에 붙었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다. 진짜 싫다...

제국력 585년 2월 10일.
나는 탈주를 할 생각이다.

제국력 585년 2월 11일.
못 했다.

제국력 585년 2월 12일.
일기 맨날 써야 하나.

제국력 585년 2월 13일.
아, 단장이 뭔 공지를 내린 것 같은데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집에 갈래.

제국력 585년 2월 14일.
발이 너무 아프다. 왜 적응이 안 되지. 혼자 걷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지? 이게 즐거운가? 나만 힘든 건가? 이건 악몽이다. 일어나면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

제국력 585년 2월 15일.
엄마 보고 싶다. 아빠도... 친구네 멍멍이도...

제국력 585년 2월 16일.
오늘 날짜만 쓰고 넘기면 안 되나?

제국력 585년 2월 17일.
사교성이 과하게 좋은 용 하나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되게 부담스럽다. 안 그래줬으면 좋겠다. 글자가 조금 삐뚤어져서 줄을 찍찍 그은 흔적이 있다. 방금도 이게 뭐냐며 다가와서 서둘러 숨겼다. 나한테 관심 좀 갖지 말아줬으면.

제국력 585년 2월 18일.
사교성이 좋은 용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도 있다. 나 빼고 마차 타고 오나? 왜 힘이 남지?

제국력 585년 2월 19일.
밥이 맛있었다.

제국력 585년 2월 20일.
밥이 맛있었다.

제국력 585년 2월 21일.
밥이 맛있었다.

여기부터 한동안 식사 메뉴에 대한 이야기와 걷기 힘들었다는 이야기 뿐이다.

제국력 585년 3월 1일.
단장이 곧 도착한단다. 진짜일까?

제국력 585년 3월 2일.
오늘은 밥이 맛없었다. 힘이 하나도 안 난다. 나 빼고 가라고 할까. 혼나겠지.

제국력 585년 3월 3일.
매일 쓰는 것도 지친다. 오늘 3일 맞나. 자고 싶다. 그냥...

제국력 585년 3월 4일.
간만에 좀 여유로운 행군이었다.

제국력 585년 3월 5일.
아, 피곤하다. 나는 왜 자는데도 피곤한가.

제국력 585년 3월 6일.
걷는 도중에 하도 힘들어서 다리를 두드리니까 티파레트가 물을 줬다. 좀 고맙긴 한데 이 물 어디서 떠온 거지? 얘가 만든 건가?

중간에 며칠 일기를 빼먹었다.

제국력 585년 3월 10일.
곧 도착한단다. 그 말 저번주에도 들었다.

제국력 585년 3월 11일.
다리가 튼튼해진 걸 느꼈다. 뒤에서 누가 장난친답시고 날 밀었는데 안 넘어져서 나도 놀랐다... 한 달을 걸어서 그런가.

제국력 585년 3월 12일.
진짜 곧인가? 저 멀리 눈으로 도착지가 보인다. 조금 신난다.

제국력 585년 3월 13일.
도착했다. 질리지도 않는지 도착하자마자 대련을 열었다. 난 거기 왜 참가했지. 하여튼 예상 외로 2등을 해서 조금 놀랍다. 칼을 원래 다뤄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왜 내가? 그래도 우승이 아니라 조금 아쉽긴 하다. 다음에 우승을 노려볼 수 있을까.

제국력 585년 3월 14일.
내일 소원나무 어쩌고를 한단다. 소원을 적으라는데 소원은 딱히 없고 재밌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맛있는 반찬 전부 양보하기를 적었다. 소세지 같은 거 나오면 못 먹고 울상 돼서 양보하면 좀 재밌지 않을까.

제국력 585년 3월 15일.
소원나무 당일이었다. 정어리 파이... 한숨 나온다. 식단 짜는 사람 누구지? 다른 애들한테 나누랬더니 애들이 다 파이를 날 주고 갔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파이 세 개나 먹었더니 질린다. 애들이 아이리스한테 달려가서 이름 맞히겠다고 난리였다. 솔직히 점수 얻으려고 나도 가려고 했는데 애들이 답 맞히는 걸 들어버려서 못 갔다. 한 쪽에서는 제니에르가 매우 높이 솟아 있었다. 소원은 구체적이고 빈틈없이 빌자. 한 쪽에서는 3인 목마가 생겼다. 진짜 저걸 무슨 시선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더라. 용 단장의 소원으로 화관을 만들어서 씌워주고 다녔다. 내가 쓰는 건 좀 어색했지만... 아게르의 새에게 나무열매를 따서 간식을 줬다. 내일은 이걸로 시럽 만들어야지. 이가일의 지팡이에 화관을 만들고 남은 꽃들을 둘러 꾸며주었다. 내가 손재주는 좀 좋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은 지났지만 단장한테 편지 쓰던 거 마무리해서 드리고 왔다. 단장... 좀 쉬어...

제국력 585년 3월 16일.
아침부터 과일시럽을 만들었다. 그리고 용의 제를 지냈다.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일기가 짧은 까닭은, 구체적으로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국력 585년 3월 17일.
참새 가면 마음에 든다. 이걸로 무슨 놀이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에 드니 됐다.

제국력 585년 3월 18일.
애들과 점점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 같다. 좀 걱정된다. 나도, 걔들도.

제국력 585년 3월 19일.
당분간 시럽은 안 만들고 싶다. 단 거 너무 많이 먹었어.

제국력 585년 3월 20일.
날짜 쓰는 게 왜 이리 귀찮냐. 펭귄 보고 싶다.

제국력 585년 3월 21일.
일주일 중 이틀 정도는 일기 안 쓰는 날을 만들어서 합법적으로 빼먹어야겠다.

제국력 585년 3월 22일.
애들이 싸우는 건지 투닥이는 건지, 막사에서 낮잠 자는데 밖이 시끄러웠다. 싸우면 필시 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나는 별 관심 없어서 더 잤다. 아, 시니컬한 프로스트가 싸움 나면 자기 불러달랬는데. 구경한다고.

제국력 585년 3월 23일.
오늘도 스프가 나왔다. 넘기기는 좋은데 좀 물린다.

제국력 585년 3월 24일.
요새 칭찬 도장을 못 받고 있다. 단장이 일을 하느라 바빠서 나오질 않는다. 나 선행 열심히 했는데. 쓰레기도 줍고... 그거 말고는 없는 듯, 뭔가 쓰려다 망설인 흔적이 있다.

제국력 585년 3월 25일.
빨래가 제 때 안 나온다. 또 이러네.

제국력 585년 3월 26일.
애들이 나무 심는다고 호들갑이길래 따라갔다. 대충 도와줬는데 엉성했는지 다른 애들이 나중에 마무리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 호두 나무는 심은 건가?

제국력 585년 3월 27일.
오늘은 또 재를 치우러 갔다는데 낮에 자느라 못 갔다.

제국력 585년 3월 28일.
오늘도 재 치우러 간다길래 가서 좀 도와주고 왔다. 이거 칭찬 도장 받을 수 있나?

제국력 585년 3월 29일.
오늘 한 끼 밖에 못 먹었더니 배고프다. 호숫가에서 생각이나 좀 하다 왔다.

제국력 585년 3월 30일.
요샌 이런 생각 잘 안 드는데 오늘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졌다. 부모님은 잘 지내시나. 편지 하나 주고 받질 못하니 궁금하다. 잘 계시겠지만, 아마 부모님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잠은 제대로 잘 주무시고 계신지 몰라. 아직 여정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밤이다.

이 이후로 일기 쓰는 간격이 점점 늘어난다.

제국력 585년 4월 4일.
일기를 한동안 못 썼다. 오늘도 별 다름없는 하루였다.

제국력 585년 4월 10일.
거의 일주일만인가 싶어서 보니 6일만이다. 이 정도면 괜찮지. 오늘 비가 왔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라 빨래 걷느라 고생했다. 다시 세탁해야 하나? 보급병들의 안색이 안 좋을 것 같다.

제국력 585년 4월 11일.
비 온 다음날이라 애들이 물웅덩이에서 놀고 있더라. 수룡은 그렇다 치고, 인간들은 거기 왜 있는데. 아니지, 생각해보니 쟤네 호수 놔두고 뭐한 거냐. 거긴 비가 와서 물이 불었나?

제국력 585년 4월 14일.
내일부터 출발이란다. 오늘은 푹 자야겠다. 하지만 내일부터 행군을 할 생각을 하면 잠이 올까... 그 때의 이동보다 더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나는 가는 도중에 죽는 게 아닌가?

제국력 585년 4월 15일.
몸이 한동안 운동을 안 했더니 죽어나게 힘들다. 그나마 애들이 물도 주고 도와줘서 살았지. 앞으로 어떻게 걷지...

제국력 585년 4월 21일.
나는 좀비다.

제국력 585년 4월 29일.
오늘도 몇 시간 못 잤다. 밤하늘을 보면서 밤을 보냈는데, 별이 예뻤다. 오늘 제일 좋아한 별은 산 위에 바로 걸려있던 밝은 별 하나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런데 글씨가 평소와 다르게 좀 난장판이다.

제국력 585년 5월 7일.
어제 일기가 상당히 감성이 넘쳤다. 잠결에 썼더니...

제국력 585년 5월 9일.
그러고 보니 벌써 5월이다. 고향은 아직도 춥겠지만, 슬슬 여름이 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제국력 585년 5월 15일.
585년 5월 15일. 5가 4개나 들어간다. 5개면 좋았을 텐데. 55월이나 55일은 없으니 555년이어야 하나. 지금보다 300년 전이군.

제국력 585년 5월 156일.
날짜를 쓰다가 틀렸는지 줄로 죽 그어놓고 옆에 고쳐놨다. 놀랍다. 한 달 동안 일기에 힘들다는 말이 없다. 당연하다. 힘든 날은 일기처럼 여유로운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안 썼다.

제국력 585년 5월 22일.
아, 솔직히 좀 죽을 것 같다. 사절단 다시는 안 해.

제국력 585년 5월 25일.
오늘도 5가 네 개.

제국력 585년 6월 8일.
슬슬 따뜻해진다. 솔직히 제복은 나라도 좀 쌀쌀했는데, 이젠 딱 좋다.

제국력 585년 6월 12일.
이제 일기를 매일 쓴다는 다짐은 사라진 것 같다.

제국력 585년 6월 17일.
오늘도 별을 봤다. 별자리 신화를 떠올려 보려고 했는데 몸이 힘들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고 생각이 안 났다.

제국력 585년 6월 24일.
그래도 막 한 달씩 일기 비우지는 않으니까 나름 잘하는 거 아닌가?

제국력 585년 6월 25일.
애들이랑 모닥불 앞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중간에 조는 애 봤다. 누군지는 말 안 하겠다.

제국력 585년 6월 26일.
어제 모닥불 파티가 재미있었는지 애들이 또 사람을 모았다. 근데 오늘은 자기 얘기가 아니라 무서운 이야기판이었다. 나도 고향에 전해져 내려오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줬다. 새벽에 잠결에 희미하게 들었는데, 누가 다른 애한테 화장실 같이 가자고 한 것 같다.

제국력 585년 6월 27일.
모닥불 파티 오늘은 하자는 사람이 없다. 너네 어제 많이 무서웠니?

제국력 585년 7월 1일.
벌써 7월이다. 근데 우린 아직도 멀었다. 언제 도착하는 거야? 나 이러다 진짜 쓰러져서 실려가면 어떡하지.

제국력 585년 7월 3일.
여태까지의 이동 중에 오늘이 제일 많이 걸은 날인 것 같다. 아르터스 가문의 샛별이 이렇게 진다.

제국력 585년 7월 7일.
은하수가 보였다. 날이 맑고 공기가 좋으니 이런 것도 보이는구나. 예쁘다. 살면서 처음 봤다.

제국력 585년 7월 15일.
내 생일. 케이크 먹고 싶다. 고향에서는 생일엔 무조건 일 안 하고 부모님 댁에 가서 같이 케이크도 먹고 그랬는데. 나 없는 7월 15일을 처음 맞는 부모님은 허전하실 것 같다.

제국력 585년 7월 16일.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소보다 적게 걸었다. 다행이다. 그 말은 내일 더 많이 걸어야 한다는 걸 수도 있지만.

제국력 585년 7월 20일.
걸어가다가 본 꽃이 예뻤다. 이름 알고 싶었는데 플로스가 너무 멀리 있어서... 아깝다.

제국력 585년 7월 23일.
구름이 사과 모양이었다. 사과시럽 먹고 싶네.

제국력 585년 7월 31일.
와, 4월에 출발해서 내일이면 8월인데 아직도 도착을 안 했다. 단장 말로는 곧이라는데, 내가 저 말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다.

제국력 585년 8월 1일.
8월의 시작. 산뜻하다. 아니, 덥다. 어느 지점을 통과할 때부터 갑자기 더워졌다. 아닌가? 8월이 돼서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제국력 585년 8월 2일.
아니다. 진짜 너무 덥다. 이건 사람 사는 날씨가 아니야.

제국력 585년 8월 6일.
오늘 드디어 마지막 걸음을 딛었다. 이걸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벌써 아찔하다. 단장 보고 그냥 나 놓고 가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그래도 시작한 건 끝내야지... 그리고 늘 그렇듯 대련을 이 컨디션에 했다. 이번엔 3등. 아쉽다. 지난 번에 몰리엔이랑 붙었을 때 내가 이겼는데 이번엔 졌다. 다음 번엔 우승을 노려보고 싶다. 검 좀 배워둘까?

제국력 585년 8월 7일.
다같이 티타임을 가졌다. 놀랍게도 세 단장이랑 같이. 단장들은 회의 있다고 오래 못 있었지만 그래도 앉아있던 것만으로 큰 성과다. 근데 홍차 맛있더라. 나중에 어떻게 타는지 물어봐야지.

제국력 585년 8월 8일.
이상한 꿈을 꿨다. 혼자 움직이는 깃펜, 표정이 바뀌는 동상, 베일로 가려진 우리들의 초상화, 불순물과 경비병, 우리를 모두 지켜보는 듯한 기록, 앨리스의 물병, 이상한 연기, 장미 향기, 까마득한 어둠. 그리고 깼을 때 손에 쥐어진 책장의 3골드. 무엇보다, 나는 자고 있었다. 이 일기를 백일장에 가져다 낸 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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