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린드버그와 악의에 관한 단상 (下)

진영공개로그 후편

시작하기에 앞서: 캐릭터가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습니다.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과거의 기억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첫 문단에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노동자 혐오, 능력주의 등이 언급됩니다. 최후반부에 가족간의 의절이 짤막하게 묘사됩니다.

“쥘 딜루티 린드버그”가 되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본 로그는 캐릭터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도덕적 결함과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열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쥘 린드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상해 보라. 자유라는 명목 하에 못마땅한 모든 장애물이 허용된 세계를. 밤이 되기 무섭게 귓가에 윙윙거리는 파리나 모기 소리가 들리는 세계를.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가 허락된 세계를. 아이를 낙태할 수 있는 세계를. 주류 종교에 순응하지 않아 직장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같은 성별끼리 사랑할 수 있는 세계, 육체적 정열 없이 동반자로 결합이 가능한 세계, 자기가 태어난 육신에 순응하지 않고 성별을 바꿀 수 있는 세계를. 자식은 부모를 거스르고 부모는 자식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는 세계를.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평등한 목숨을 요구하고자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로 인해 교통 정체가 일어나는 세계를. 뛰어난 재능이나 자질 없이도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세계를. 그런 세계가 얼마나 끔찍할지 이 자리를 빌어 상상해 보라. 자유는 독 바른 잔이다.

또한 쥘 린드버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걸 믿는 사람이 정말로 있다니.

“어둠의 마법하고 ‘총질’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 핀갈이 물었다. 쥘 린드버그는 검고 두툼한 교과서를 가방에 밀어넣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실상 두 소년의 눈색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벌꿀을 닮은 아이와 짐승의 노란 눈. 차이는 군중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존재할 따름이었다. 쥘은 가방을 마저 정리하며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쪽이 지죠.”

“그럼 좋아. 마음이 흔들리는 어둠의 마법사와 마음이 흔들리는 머글 총질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

“그러면 보기 괴로운 촌극이 되지 않을까요.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비명횡사하는 결말이 될 수도 있겠고요. 과정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결말이 비극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랍니다.”

“그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네가 된다면 어떨 것 같아?”

“중재해서 싸우지 못하게 하거나, 한 명을 응원해서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쏘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둘 다 나쁜 놈이면?”

“제가 좋은 놈을 응원한다고 말하진 않았어요. 제 이야기로 움직일 수 있는 쪽을 충동질해야죠.”

핀갈 모이레 모레이는 흐음, 소리를 냈다. 쥘은 말간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 자는 말로써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세상 속에서 오롯한 단독자Der Einzelne였다. 쥘은 그 모든 것을 일찍이 깨달았으므로 그를 그저 존재하게끔 두기로 했다. 그가 친우들이 베푸는 친애와 시선 속에 구속될 때까지. 사람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그것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변화였으므로 그의 손으로 떠밀 필요도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름띠가 까맣게 덮인 해역 위에서, 마법을 빌어 이루어지는 꽃비와 조가(弔歌) 속에서. 쥘은 넋나간 듯이 서있는 인어 혼혈을 곁눈질한 뒤 지금이 적기임을 알았다. 그는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뜨리며 입을 열었다.

“이종족들의 죽음은 과연 누가 들어줄까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절 본받을 사람으로 봐주시는 것도- 고맙지만 별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전 보기보다 닮지 않으시는 편이 나을 거라. 마음까지 함께하는 게 진정한 공감이잖아요, 다른 친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요. 그것이야말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전.”

레아 윈필드가 말했고, 쥘 린드버그는 내심 동의했다. 모든 선동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공감 또한 능력.

기실 선동질이란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말을 매끈하게 다듬어 건네면 그만이었다. 작가로서의 자질이 무르익기 전부터 쥘 딜루티 린드버그는 그런 쪽으로 천부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표현을 지어내는 솜씨가 꽤 좋았고, 시시한 내용을 가지고 퍽 그럴듯한 웅변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시간을 들여 끈질기게 듣고, 보고, 관찰하는 모든 순간이 그의 기쁨이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그의 심성은 다정에 가까웠다.

“사실 말이죠, 우린 인형이나 식물이 아니에요.”

그랬던 적도 없고요.

대단한 의도는 없었다. 그는 사회적인 동물이었고, 주변이 바라는 모습에 시시때때로 제 모습을 맞추어 갔을 뿐이다. 착한 아들. 귀염성 있는 동생. 말을 잘 듣는, 물을 잘 주지 않아도 괜찮은 식물. 잘 보이는 곳에 앉혀두기 좋은 인형. 순수 혈통의 집담회에선 은근한 부드러움으로 혈통 차별을 옹호했고,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길 싫어하는 친구- 예컨대 힐데가르트- 앞에선 말을 아꼈으며, 무턱대고 세상을 사랑하기엔 지나치게 영민한 이들- 헨, 에스마일- 에겐 온난한 손길을 내밀었으며, 환경에 발목 잡혀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는 이- 프러드- 를 마주할 땐 무능하게 웃었고, 적극적으로 죽음을 먹는 자들에 맞서 싸우는 벗- 세실, 루드비크- 과 더불어 대자보를 쓰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기만이었냐고 묻는다면 쥘 딜루티 린드버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악한 의도는 아니었어요.”

“제 의견은 그대로입니다. 악한 의도는 없어요. 그저 사람의 의도와, 그것을 둘러싼 맥락과, 그에 따라 도출되는 결과가 있을 뿐. 다만 그중 아주 가끔씩 의식적으로 스스로와 세상을 고찰하며, 이 굴레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선의가 되겠죠. 세상을 망가뜨리는 근본적인 것은, 생각을 포기하는 거에요.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져도, 이게 선하다고 믿기만 하면 의미가 없어요. 끊임없이 생각을 하다 보면 진리에 도달할 것이고요.” 에스마일 시프가 말했다. 쥘은 그를 바라보았다. 선하거나 악한 결과가 있었다고 해서 그게 곧 선의나 악의였다고는 할 수 없다면.

어느 세계에선 오브라이언*이고 어느 세계에선 무스타파 몬드**였을 것이며 어느 세계에선 나폴레옹***이었을 그는 악의 없이 웃었다. 곱슬거리는 머리 위로 월계관을 올려놓으며.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어.” 물기 어린 목소리는 울먹거림이, 울먹거림은 이내 흐느낌이 되고. 열한 살 먹은 줄리아 라이네케의 몸은 무너져 내렸다. “난 정말이지 모르겠어…….” 아버지를 원망해도 괜찮은 거냐고 울음을 토해내며 묻던 목소리. 쥘 린드버그는 저도 모르게 줄리아의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마냥 심장이 쿵쿵 뛰었다. 비밀 하나: 이 순간 그가 느낀 감정은 순전한 기쁨.

“괜찮고 말고요,” 쥘은 거듭거듭 말하며 줄리아의 등을 토닥였다. “다 괜찮을 거예요.”

딸을 아버지로부터 갈라놓고, 부서진 정신을 제 형태로 얼기설기 꼬매어 놓을 수 있다니. 말 몇 마디로 죽어가는 식물을 다시 틔워낼 수 있다니! 언어의 영향력이란 얼마나 근사하고, 또 얼마나 위대한가! 레이먼드 아서 메르체 말하길,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하고, 내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무릇 어려움에는 명예가 따르는 법.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웃음은 환하고 시절은 빛바램 없이 찬란하다. 아, 세월이여. 멈추지 말라, 나는 내일로 가겠다…….

채 이 년이 지나기 전, 그는 줄리아 라이네케와 루드밀라 잉크워스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직은 서투르게 신 노릇 하려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요?”

“아뇨, 난 신이 존재할 가능성이 꽤 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무스타파 몬드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신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현대 이전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신을 이런 책들에서 묘사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요?” 야만인이 물었다.

“글쎄요, 전혀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서 발현합니다.”

절대적이고 영구한 진실, 우리에게 거짓된 장난을 치지 않는 열정은 존재치 않는다. 실재란 외적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존재하며, 물질을 지배할 수 있기에 정신을 지배할 수 있으며, 절대적인 다수가 일 더하기 일이 삼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진리였다. 만일 불사조 기사단이 기득권을 쥔 세계였더라면 그는 존경받을 만한 말을 늘어놓는 이상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종교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세계였다면 종교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고.

대신에 그는 걸신들린 선동가가 되었다.

문이 열렸다. 열한 살의 임판데와 쥘이 나란히 걸어나왔다.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두 사람의 볼은 통통하고 인형처럼 생그러웠다. 임판데는 햇빛에 약했으므로 쥘은 자연히 그와 창문 사이에서 걷길 택했다. 소년은 평이한 음성으로 사람들의 심리를 서술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사람들은 대부분 이유가 있어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요. 결론을 정해두고 이유를 만들죠.”

“음, 결론과 이유……. 싫다와 나쁜 것은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 싫은 것을 나쁘다고들 한다. 임판데도 자주 그런다.” 임판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쉬운 이야기가 아닌데도 경청하는 그의 모습이 쥘을 기쁘게 만들었다. 무엇인가 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임판데의 손을 살그머니 잡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싫은 것과 나쁜 건 다르죠. 하지만 싫은 걸 나쁘다고 선언하면 내가 옳은 쪽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다들 거짓말하게 되나 봐요.”

스무 살의 그는 본인의 안위를 도모하다가도 종종 거짓말을 하곤 했다. 이것은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변치 않는다면 아무 생각도, 선택도 할 필요 없이 존재하는 게 낫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자유 의지를 부여받기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힐데가르트를 괴롭히는 것은 자유 의지의 상실이 아닌 반환이었다. 그리고 헨은 어땠더라.

기억 속의 그는 어둠에 잠긴 복도를 걸어내려갔다. 몇 발짝 앞에서 새하얀 족제비가 꼬리를 살랑이며 뛰어가는 중이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헨이 그곳에 있었다. 아까의 격양된 감정은 온데간데 없이, 복도에 앉아 책을 넘기면서. 쥘은 과하지 않을 정도의 인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복도의 벽면에 등을 붙이고 천천히 쪼그려 앉는 동안 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쪽은 쥘이었다.

“어떤 기분이었어요?”

“기분이라면, 글쎄. 황홀했어……. 역겨워.”

“황홀, 했다고요……. 타인에게 조종당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이 황홀할 수도 있군요.”

소년의 금빛 시선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천장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소리내어 뱉는 말은 타인보다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것처럼 들렸다.

“헨은 늘 생각이 많고, 그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니까. 애쓰지 않는 감각은 안락하고, 평온하고……. 황홀할 수도 있었겠죠.”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가장 피상적인 종류의 혁명인 정치 혁명을 달성했다. 바뵈프Babeuff*****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경제적인 혁명을 시도했다. 이제 쥘 린드버그는 궁극적이고 인간적이며 참된, 혁명적인 혁명을 시도할 차례였다. 바로 안정의 성취였다. 허나 외적인 세계를 통한 안정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그는 단편적인 위안을 도구로 삼았다. 무해하고, 다정하고,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는 말들. 아주 중요해 보이지만 실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는 뇌까림을.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그런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임페리우스를 당했던 그날 밤, 그 중요한 밤에.

“그러면 제가 조종당하고 힐데가르트가 남아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아무 생각도, 선택도 할 필요 없이... ...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변치 않는다면, 말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마! ……소리 질러서 미안해. 하지만……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쥘…….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 않았잖아. 지금도 그래. 넌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다정한, 다정한 힐데.

쥘은 조용히 미소하며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렇다면 여기 있을게요. 잘못 생각했나 봐요. 제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전 그거로 충분해요.”

물론 헨이, 힐데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알고 있었고, 기분이 좋은 날엔 인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론을 정해두었으므로 이유를 필요로 했다. 루드비크가 열성적으로 논했듯 전쟁에 군인은 필요하고, 희생도 필요했으며, 필요하다면 사람들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부추겨서라도 전쟁에 내보내야 했다. 오천만 명이 죽는 것보다 오백만 명이 죽는 게 낫지 않느냐고 짚어내는 루드비크를 바라보며 쥘은 그 논리를 머리 한 켠에 새겨 두었다. 설령 마음 깊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언젠간 저런 논리가 필요하게 될 테니까. 바보같은 어른들의 작동 원리에선 쥘 린드버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어리석은 악이 완성되었다.

‘선동가’ 위글 딜루티는 분란을 조장했고, ‘인기 작가’ 쥘 린드버그는 평화와 용서를 이야기했다. 둘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 투사가 아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끝없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얄팍하고 희망적인 줄글을 사려 들었다. 웬디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겠으나 네버랜드가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이 괴로운 덕이니까. 가장 어둡고 비참한 시대여야만 희망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상품이 된다…….

열네 살의 요나스 미슈스티나는 동의하지 않았다는 게 이 주장에 있어서 약간의 흠이었다.

“희망은 상품 같은 게 아니야! 평생 가닿을 수 없는 이데아 같은 거야. 닿기 정말 힘들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찬란히 빛나고 내일의 아침이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를 일으키게 만드는 원동력이야. 쥘,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어깨를 채근하듯 꽉 붙잡던 손. 격양된 목소리와 또렷하게 타오르는 눈동자. 하여간 심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진작에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삶의 무게 앞에서 버티고, 또 버티고. 요나스를 바라보는 쥘의 눈에 희미한 연민이 담겼다. 소년은 제 어깨를 붙잡는 손을 뿌리치거나 떼어내는 대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올려놓았다.

“하지만, 나타샤. 떠오르지도 않는 태양 따위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겠어요? 태양이 허상이 아니고 달빛이 그 증거라 해도 상관없어요. 사람들은 당장 곁에 있어줄 위안을 필요로 해요…….”

그래, 위안.

다치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선 영웅이어선 안 돼요. 모두가 영웅일 수 없어요. 내 손 안의 모든 것, 나의 혈통, 나의 언어, 공감이라는 나의 눈부신 재능을 활용해 세상을 움직일 거예요. 레이먼드가 가르쳐준 꼭대기에서의 풍경을 잊을 수 없어.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고 어디로 가든 말라죽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나에게 맞춰 살 필요도 없지만, 나는 벽난로 앞의 온기가 제일 편안하니까. 세실 브라이언트는 부서지고 깨지게 둬요. 그의 정의는 내 것이 아니에요. 정의란 어디까지나 목적이 아닌 수단이어야 합니다. 나의 손아귀 안에서 찰흙처럼 주물러서 정교하게 빚어낸 도구여야 하고요. 그러니, 네, 그때 세실이 했던 질문에 답하자면, 저는 완전히 만족해요.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아버지께서 그토록 실망하고 분노하셨냐는 거죠.

쥘 딜루티 린드버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걸어나오다 말고 위를 흘긋 올려다보았다. 불 켜진 이층이 여전히 소란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절박하게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순간 죄책감이 들 뻔 했으나 금세 떨쳐낸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껏 성공하고 돌아왔더니 왜 난리법석이래. 학생들 몇 명 죽음을 먹는 자로 키워낸 게 뭐 대수라고. 난 내가 떠들어댄 말들을 믿지도 않는데 말이야. 의절이라느니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느니, 내가 널 잘못 키웠다느니,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지르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모습에 나라고 당황하지 않은 줄 알아? 하여간 아버지는 너무 감정적이시라니까.

“손주라도 데려오면 기뻐하시겠죠, 뭐.” 쥘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늘색 1960 닷지 파이오니어 차량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야간 집담회는 순간이동 불가 지역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면 출발할까요, 미스터 린드버그?” 운전기사는 졸린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플라스크에 담긴 각성 약물을 들이켰다. 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지팡이의 불을 끄는 걸 깜빡했네요.”

그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짤막한 주문을 읊었다. 그가 열한 살 적에도 어렵잖게 성공시킬 수 있었던, 그래서 멜로디에게 ‘위험한 상황에선 가급적 눈에 띄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가르쳐 주었던 주문이었다.

녹스. 갑시다.”

그렇게 차량은 출발했다. 쥘 린드버그의 멋진 신세계를 향하여.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고위 공무원의 이름이다.

**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통제관의 이름이다.

***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에서 동지를 추방하고 다른 동물들에게 독재 정치를 펼친 지도자 돼지의 이름이다.

****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1758~1794. 자코뱅파의 지도자로 왕정을 폐지하고, 1793년 6월 독재 체제를 수립하여 공포 정치를 행했으나, 1794년 데르미도르의 쿠테타로 타도되어 처형되었다.

***** 프랑스 혁명 당시 공산주의적 이론을 내세웠던 선동가이자 언론인이었던 프랑수아 에밀 바뵈프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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