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한 순간에 대한 송사

쥘 린드버그가 프러드 허니컷에게, 4학년

제가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아는 게 있어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오래 천진하고 무결할 수 있고, 그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가 아니라 환경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그러니 타인을 향하여 너는 왜 무결하지 않고 초라한 앙심을 품고 마느냐고 탓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죠. 물론 언어라는 게 반드시 자격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건 아니지만은.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머글이 쓴 소설을 아시나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죠.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있는 건 아니란다.” 멋진 말이네요. 열네 살의 제가 그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뻔했어요.

하지만 제가 머글 소설에 푹 빠지기까진 아직 1년이 남아 있었고, 변명하자면 그때 저는…….

…….

아뇨, 화가 났던 건 아니에요. 처음엔 당혹스럽고, 그 다음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고, 마지막엔 내가 뭐라도 된 기분이었죠. 솔직하게 말해볼까요? 저는 그때 취해 있었어요. 진실이란 이름의 보석을 손가락 사이로 틀어쥘 수 있다는 고양감에.

문제의 본질을 깨우치더라도 소리내서 입 밖에 내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네, 저는 프러드 허니컷을 상처입히고 싶었어요.

(태엽 감는 소리. 다시 충돌의 순간으로 돌아가자.)

쥘 린드버그는 프러드 허니컷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은 약간 창백하지만 시선만은 또렷하다. 기차에서 만난 순간부터 그의 친구였던 소년. 어깨를 뒤로 쫙 펴고 있어서 곧아 보이는 자세, 자기 충만과 완벽한 자부심으로 빛나는 눈동자. 좌절이나 질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허나 저 가면은 부단히 노력한 결과물로, 그 저변에는 의무나 권리, 우월과 열등, 특권과 한계로 점철된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상당 부분 진실인 것과 별개로,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오롯이 다정하거나 상냥할 순 없는 것이다! …

누구나 지키고 싶은 선이라는 게 있어, 쥘 린드버그. 거기다 대고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상대를 싫어하게 되는 거야말로 당연한 반응 아니야? 과대 해석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 이것은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거짓. 래번클로는 순 거짓말쟁이들 뿐이냐는 농담이 오랜 우정에 힘입어 올라오려다 도로 가라앉는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는 당신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자신의 해석을 의심하지 않기로 한다. (세계와 세계의 충돌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마음이란 건 참 편해요. 네가 본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당신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을 전에도 만나본 적 있거든요. 그거 아세요, 프러드? 제가 보기엔 당신도 하늘에 닿을 수 있어요. 당신의 능력이라면.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요…….”

보이는 쪽이 아니라 보는 쪽이 될 수 있고, 꼬투리라도 잡힐까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평론할 수 있었다고요. 세상을 바꾸려는 방향에 대한 고민과 생각, 그 모든 게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자신을 한정지으며 가장 찬란한 순간을 낭비할 셈이군요.”

쥘 린드버그는 속삭인다. 기어코 가면 너머를 헤집어 놓을 심산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 우정의 마지막 순간이라 하여도. 그런 점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월계수 지팡이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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