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거위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쥘 린드버그가 레아 윈필드에게, 4학년
소재주의 - 남아선호사상 및 가정 내 편애의 언급
말 잘 듣는,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괜찮은 식물. 잘 보이는 곳에 앉혀두기 좋은 인형. 다만 차이가 있다면 누군가 이 꼬마의 황금색 잎사귀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잘 닦아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는 것이다.
“윈필드 씨께선 좋으신 분이야.”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아직 호그와트를 입학하지 않았을 시절의 이야기. 쥘은 까치발로 일어선다. 책장의 대부분은 아이의 키높이에 맞추어지지 않았다. 손이 꼭대기 선반에 닿을 리 없음에도 그는 부탁하는 대신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오른다. 원하는 책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휘적거리는 손. 실패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포스틴 린드버그는 그의 필요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꺼내주는 행위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루어진다.
모든 어른은 한때 어린아이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이들을 마냥 순진한 존재로 이해한다. 말을 잘 듣고,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괜찮은 식물. 잘 보이는 곳에 앉혀두기 좋은 인형. 혹은 말이 통하지 않아 귀찮은 짐덩이. 실제로 아이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알게 된다면 놀랄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많지 않아도 피부로 느끼는 것은 많다. 예컨대, 사랑의 크기라거나.
작은누나 메이블이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엄마, 책 좀 꺼내 주세요.” 라고 소리내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막내이자 아들인 쥘은 다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시야의 가장자리에 쥘을 넣어둔다. 그가 조금의 필요라도 몸짓으로 내비치면 곧바로 다가와 응한다.
그걸 모를 리가. 쥘은 어머니가 건넨 동화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마신다. 어머니는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레아랑도 잘 지내렴.”
여기서는 대답해야 한다. 쥘은 고개를 들고, 인형다운 미소를 지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매끄럽게 이행한다.
“네,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
(레아는 수수께끼 놀이를 좋아한다고 했다. 쥘은 흥얼거리며 수첩 위로 깃펜을 끄적거린다.)
레아 세네카 윈필드, 그 이름에선 겨울 바람이 붑니다. 들판 위로 불어오는 겨울의 냄새. 오렌지 마멀레이드의 맛은 조금도 나지 않지요. 제가 다치면 병동까지 데려다주기도 하고. 책상 앞에 앉을 때도 자세가 곧습니다. 교복은 몸에 딱 맞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죠, 그토록 모범생인데.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요청할 상대로 레아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은 없어요. 줄리아만 해도 그렇죠. 혼자 있을 때 레아가 나타나면 경계하는 것 같더라고요. 왜일까요?
저는 그게 머리카락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1학년 때와 꼭 같은 길이로 유지하고 있거든요. 해가 지나고 또 지나도 늘 같은 표정, 같은 눈빛. 변함없이 단정한 차림새에 같은 머리 기장.
너무 노력하는 것 같잖아요.
언젠가 한 번은 요나스가 제게 솔직하지 못하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깨달았죠. 나를 키운 나의 가족과 내 친구가 되어준 아이들은 제게서 전혀 다른 모습을 바란다는 거를요. 한쪽은 인형을 원하고, 다른 쪽은 사람을 원하죠. 기복 없이 웃는 낯은 양육자 입장에선 편할지 몰라도 친구들 입장에선 의심스럽거든요. 그래서 피노키오가 되기로 했어요. 사람의 눈을 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인형.
그런데 레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머니.
저 애가 밉지는 않아요. 어머니가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면 체할 것처럼 껄끄럽긴 하죠. 단둘이 남아서 이야기하면 눈치를 보게 되고요. 하여간 다른 아이들처럼 편하거나 예측 가능한 상대는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저를 왜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애매하게 닮아서 그런 걸까. 하지만 선인장에 손이 찔렸다 해서 미워할 순 없잖아요. 경계하게 된다면 몰라도. 저는 그냥, 타인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본인을 읽으려는 시도는 거부하는…… 제가 인형 주제에 사람의 눈으로 마주보려 하면 기분 나쁘단 기색을 하는 저 아이가, 조금은…….
안쓰러워요.
“쥘은 순수해요. 다정하고. 이해심이 많죠. 글을 좋아하고. 부드러워서. 좋은 친구예요.”
꿀과 향신료와 온갖 근사한 것들로 빚어진 소년이 살짝 고개를 들어올린다. 레아를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에 흐릿한 미소가 걸린다. “고마워요.” 거위는 주인을 바라보고, 당신이 원하는 모습은 과연 무엇일지 가늠해 본다. 이런 점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떼를 이루는 동물이다. 레아를 위해 적었던 수첩 속 수수께끼는 발화되지 않은 채로 그들 사이에 머무른다.
“레아도 좋은 친구예요. 오래 참고, 세심하고. 그러니 약속할게요. 계속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로. 그리고 저의 식사 자리에는 항상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 둘 거예요.”
나를 빚어낸 사람만이 나의 가치를 알아요.
돈으로 사려 하면 내 빛은 시들지만,
나를 또다른 나로 교환할 수는 있죠.
가난한 사람도 왕만큼이나 쉽게 나를 만들어요.
내가 부서진 자리엔 슬픔이 남죠. 나는 무엇일까요?
“저는 늘 약속을 지키는 편이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