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살 연하도 연하다
남편이 마탑주였다 / 안단테
나이를 세어 본 지가 오래 되었다. 소설 속에서 몇까지 세다 잊었다는 구절을 볼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는 알았다. 그만큼 센 것도 제법 끈기가 있는 행동이다. 의미 없다는 걸 자각한 이후가 아니라, 그 전부터도 사실 에이는 가끔 자신의 나이를 잊었다. 지금처럼 아예 잊은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에이. 집 앞마당에 애들이 뛰어 놀고 있던데.”
“아. 내가 그러라고 했어.”
“……그래?”
“놀고 싶다길래. 어두워지기 전에 보낼 거야.”
그건 에이가 어린아이에게 제법 관대한 이유이기도 했다. 단테는 당초 어리든 말든 남의 나이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에이가 관대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잠시 외출했다 들어오던 단테는, 시끄러운 바깥을 흘긋 일별했다가 툭 물었다.
“어린애를 좋아해?”
책을 골라내던 에이가 눈을 깜박였다.
“딱히?”
“의외네.”
“그냥 어른이 아이한테 해야 하는 만큼을 하는 거야.”
그거 말곤 별로 없다면서 에이가 아무렇지 않게 책을 빼 갔다. 단테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가끔 오래 산 사람처럼 말해.”
에이는 짧게 웃었다. 본인마저 자각하지 못한 것처럼 가늘고 희미한 미소였다.
“너보단 많이 살았을걸.”
퍽 어려 보이는 얼굴답지 않은 건조한 어투였다. 본래도 단조로운 말투이긴 했지만 이번은 특히나 그렇다. 혹 불편했나 싶어서 단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생각 같은 걸 했지만, 금세 떨쳐버렸다. 아주 의미 없고 이상한 생각이었다.
정체를 숨긴 마탑의 주인이 제 마음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어느 날의 일이었다.
*
“누나.”
그 호칭은 청자에게 경악을 안겨 주는 것과는 반대로 제법 달콤하고 다정하게 들렸다. 물론 단테가 에이를 부르는 호칭에 부정 못 할 애정이 담긴 지는 오래 되었고, 제 마음을 들킨 이후부터는 특히 숨기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 호칭이 에이를 향했다는 점이었다.
“……뭐?”
물을 마시다 말고 에이는 컵을 놓칠 뻔했다. 물론 놓쳤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에이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유능한 마법사는 컵 하나쯤은 뚝딱 원래의 상태로 복구해 줬을 것이고, 본인이 그렇게 만든 건 생각도 못 한 채 고쳐 줬으니 뺨을 건드려 봐도 괜찮으냐 어이없는 요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에이는 컵을 놓치지 않았고, 단테는 뻔뻔한 얼굴로 반문할 만한 시간을 얻었다.
“왜?”
“아니, 너 방금 뭐라고…….”
“누나.”
“…….”
에이의 낯이 미묘해졌다. 눈에 띌 만큼, 에이치곤 급격한 변화였다. 입술을 두어 번 뻐끔거린 에이가 단숨에 지친 얼굴로 물컵을 내려놓았다.
물론 에이는 단테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마 꽤 많을 것이다. 꽤……. 그러니까 아주 많이.
누나라는 호칭보다 다른 게 더 어울릴 만큼이라는 게 문제였다.
“……갑자기 왜 그래?”
미쳤냐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혹시 이런 걸 좋아할까 해서.”
에이의 낯을 면밀히 살피다가, 눈가를 접어 의식적으로 웃어 보이며 단테는 대답했다. 에이는 대놓고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처음에 너무 당황해해서 혹시 괜찮은 건가 싶었는데, 딱히 좋은 효과는 못 본 것 같다. 단테는 언젠가 허락 받았던 대로 에이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자그맣게 말을 붙였다.
“별로야?”
“그냥 이름으로 불러.”
별로라는 뜻이다. 웃음이 멎고 시무룩해진 단테의 얼굴을 보고 에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름으로만 부를 때는 나이 차이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글쎄, 누나는 좀. 어린아이들이 부를 때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과는 느낌이 좀 달랐다.
……생각해 보니 왜 다르지? 어딘가 낯선 기분이 들었지만, 무의식적인 이성이 제동을 걸었다.
“단테.”
“응.”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시장이나 가자.”
“……응.”
정말 이건 아닌가 보다. 얌전히 호칭을 봉인한 단테가 입을 다물고 옷을 챙겼다. 에이는 휙 몸을 돌렸다. 햇살이 기울어져 갈색 머리칼을 조금 더 밝게 만들었다.
구애하기 딱 좋은, 평화로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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