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준수] As we always
종이책 편집으론 이거저거 효과를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 까먹어서 적용x
전영중은 반쪽짜리 시간 여행자다.
미래와 과거를 오가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능히 시간 여행자라 불릴 만했으나, 초능력이 픽션으로만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세계에서 별다른 능력 제어법을 학습하지 못해 도통 제 능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반쪽짜리라고 일컬었다.
전영중은 그가 순리대로 존재해야 할 순간보다 미래로 갈 수는 있어도 과거로 갈 수는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냥 안 된다고 했다. 미래로 가는 능력도 오롯이 본인의 의지로 발동하는 게 아닌 데다가 ―추측하기에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면 제멋대로 능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졌다 돌아오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고 한들 성준수에게 초능력이란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겪어볼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능력이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비밀을 공유한 유일한 친구로서 성준수는 때로 전영중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소년을 기다렸으며 때로는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위해 그럴듯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하나 부지불식간에 사라진 친구를 위해 애쓰면서도 미래로 간 전영중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 어릴 때는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로는 전영중이 말을 아꼈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 공부하느라 잡다하게 본 만화나 책의 내용을 전부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굵진 않았지만, 종종 보이던 심각한 분위기는 알았기에 성준수도 깊게 캐묻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는 그저 사라진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데 익숙해졌다.
전영중의 능력이 더 특출했다면 단순히 기다림이 당연해지는 것을 떠나 두 사람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아이의 능력은 마치 순수한 어린 시절에만 반짝이던 마법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사라졌다. 아주 어릴 적에는 정말 돌아서면 사라지곤 했던 것 같은데 열 살이 넘고부터는 그 주기가 눈에 띄게 줄더니, 중학생 때는 성준수가 거짓말을 할 필요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세 번이었나? 지상 고등학교로 전학 간 후로는 문자도 점점 뜸해져서 확신할 순 없지만 그가 알기로는 그랬다. 어쨌든 언급이 없으니 그도 소꿉친구의 초능력에 관해서는 거의 잊고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준수가 전영중의 초능력에 관해 실감한 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그때 그 시절, 눈앞에서 사라진 친구가 오늘날 그의 눈앞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조도 없이, 맥락도 없이.
‘준수야, 너 어디야?’
그건 쌍용기전 이후로 다시 연락하나 싶더니, 대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또 사적인 연락이 끊긴 소꿉친구의 난데없는 전화와 똑 닮아 있었다.
훈련을 마친 귀갓길. 전화를 받으며 골목을 돌았더니 소꿉친구의 어릴 적 모습과 똑 닮은 아이와 마주쳤다… 자그마한 아이가 심지어 흠뻑 젖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태에 맞닥뜨린 성준수는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에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야, 있다 다시 전화할게.’
준수……! 초조하게 외치는 목소리를 단호하게 등지고 성준수는 황급히 우는 친구를 어르고 달랬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때 그렇게 사라진 전영중이 어떤 일을 겪었을지.
스물둘의 전영중이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는 이미 성준수의 품에 안겨 울다 잠든 대여섯 살의 전영중이 원래 시대로 돌아간 후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소꿉친구와 술잔이나 기울여 보니 그는 능력과 함께 능력에 관한 기억도 잃어버렸다고 했다. 기억이 송두리째 뽑힌 건 아니지만 굳이 초능력과 관련한 일을 떠올리거나 생각하지 않게 되는 둥,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다가 어린 시절의 자신이 미래로 향한 그 순간에 퍼뜩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거짓말은 아닌지 그 후로도 전영중은 몇 번이나 성준수를 향해 허겁지겁 뛰어왔다. 훌쩍 큰 친구가 낯설어서 머뭇머뭇 존댓말을 쓰는 주제에 껌딱지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도 없는데 뭐가 그렇게 민망한지 귀와 목까지 벌겋게 물들이고서. 타이밍이 맞지 않아 어린 시절의 자신과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주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하는 주제에, 늘 그랬다.
매번 뭘 그렇게 달려오냐고 타박하면서도 성준수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통제할 수 없는 능력이란 정말로 상황을 고려해 주지 않아서 어린 전영중은 성준수가 샤워 중일 때든, 두 사람이 냉전 중일 때든, 전영중이 이별을 고하고 떠난 직후든 가리지 않고 그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수 아저씨?”
바로 지금처럼.
“아저씨…?”
눈물범벅인 얼굴, 불안이 송골송골 맺힌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어린아이에게 다가가 천천히 몸을 낮추며 성준수는 문득 아침에 센 숫자를 떠올렸다.
89.
오늘은 전영중과 헤어진 지 89일째 되는 날이었다.
D+89
“오랜만이네.”
가벼운 인사에 여섯 살쯤 됐나 싶은 아이의 낯빛이 환해진다. 냉큼 다가와서 손을 잡는 행동에 스스럼이 없었다. 성준수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서 아이에게 체육복 저지를 둘러 준 다음, 오른손으로 아이의 손을 단단히 쥐고 왼손으로 타올을 꺼내 축축한 뺨과 눈을 닦아주며 물었다.
“안아줄까?”
전영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결혼하고 애를 낳은 동료가 적잖았기에 능숙하게 전영중을 안아 올리던 성준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첫 만남 때도 나를 바로 알아봤지.
자신이 지닌 초능력에 관해 깨닫기 전, 난데없이 스물두 살의 성준수가 사는 집 근처에 떨어진 전영중은 엉엉 울다가 성준수를 발견하기 무섭게 울음을 그쳤다. 성준수야 그 순간에 어렸을 적 일을 떠올리고 상황을 파악했다고 해도 다섯 살의 전영중은 스물둘의 성준수를 어떻게 알아보고 다가왔단 말인가? 경계심 많던 아이가 스스럼없이 그를 믿었더랬다. 다섯 살이 한 손에 꼽게 본 아저씨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나이인가?
이게 이제야 궁금해지는 걸 보면 17년 전의 그도 많이 당황하긴 한 모양이었다.
영중아, 부르려던 입술이 벌어지다 만다. 품에 안기 무섭게 전영중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탓이다. 잠옷 차림에 맨발, 심지어 체온도 낮다. 잠을 자던 중에 미래로 와버린 모양이었다. 성준수는 입고 있는 코트로 전영중을 감싸 꼭 안아주었다. 가물가물하던 눈이 완전히 감긴다. 웅얼대는 입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나 참, 악몽 꿨다고 나한테 오다니. 뒤숭숭한 꿈자리를 핑계로 아침부터 엉겨 붙던 전영중이 떠올랐다. 성준수는 아이를 토닥이다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잘 자라, 전영중.
D+90
“아저씨!”
성준수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 현관문을 여는 순간 사라졌던 전영중이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어…….”
오래간만에 한잔해서 어젯밤에 제정신이 아니었나 싶었다. 성준수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XX, 두통 때문에 정신이 안 차려지는 걸 보아하니 그랬을지도 모른다. 암만 그래도 애를 마음대로 없애다니. 제대로 재운 건 맞나?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도 허전한 품을 더듬으며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것밖에 기억이 안 났다.
“이거 이써요.”
“어. 고맙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며 인사하고 나니 물이었다. 술주정까지 부린 건 아니겠지. 성준수는 일단 물을 마셨다. 물 마시는 모습이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눈을 빛내며 보던 전영중은 주섬주섬 침대 위로 올라와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아저씨가 나 지켜줬어요?”
물병을 내리고 보니 전영중의 옷이 어젯밤과 달랐다. 반팔과 반바지. 양말까지 단정하게 신었다.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볼이 올라갈 정도로 환하게 웃는다.
“밤에 형이 저랑 준수 지켜줬어요. 그래서 잘 잤는데 일어나니까 형이 없었어요.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싶어서 왔어요. 저 이제 시간 다니는 거 잘해요!”
전영중이 떠드는 내내 볼살이 말랑말랑할 거 같다고 생각하던 성준수는 마지막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한테 감사 인사하려고 왔어?”
“네. 영중이랑 준수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배꼽 위에 깍지를 끼고 꾸벅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스물두 살 때 대여섯 살의 소꿉친구를 보는 것도 충분히 이상한 감회를 줬는데, 이 나이가 되니 또 느낌이 달랐다. 성준수는 기특하다는 듯 전영중의 인사성을 칭찬한 후에 물었다.
“영중이 너 능력 몇 번 못 쓴다면서 아저씨한테 인사하러 와도 돼?”
“선생님이 고마운 일이 있을 때 인사는 꼭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 영중이 말이 맞네. 그래도 아저씨한테 직접 오지 않아도 돼. 준수한테 대신해줘.”
“준수요?”
“어. 같이 농구하면 돼.”
완전히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전영중은 성준수가 ‘약속. 아저씨 찾아오지 말고 아저씨한테 고마울 때마다 준수랑 농구하기’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순순히 손가락을 걸었다. 아주 짧고 작은 손가락이 새끼손가락을 감싸더니 성준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도장 찍기에 복사까지 야무지게 한다.
이 나이면 어디까지 이해하는 거지? 성준수는 새삼스러운 의문을 느꼈다. 과거를 돌이켜보지만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기도 하고, 애초에 어렸을 때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전영중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과 우두커니 친구를 기다리던 일뿐이라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이나 영상을 보긴 했어도 그때의 자신이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갖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지하긴 했었는데 말이지.
애를 낳은 동료가 많다고 해도 어쨌든 남의 애고……, 어린 전영중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도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꾸준히 자주 나타났으면 애 다루는 법이라도 공부했을 건데, 잊을 만하면 툭 튀어나오니 공부도 하다 말았다. 성준수는 새삼 어린아이가 자신과 꽤 먼 존재였음을 실감했다.
그렇게 자각하니 전영중이 어려워졌다.
“영중아.”
스물두 살의 성준수를 여섯 살의 전영중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스물두 살 때 처음 만난 전영중도 여름옷을 입고 있었으니 아이에게는 고작 며칠 전의 일일 수도 있었다. 놀라지도 않고 자연스레 붙어오는 걸 보니 일단 덩치가 커진 성준수를 만나는 일에 익숙한 후인 건 확실한데……. 잠깐만, 여름옷을 입고 등장한 게 늘 이 나이대 전영중은 아니었잖아? 아홉 살, 열한 살도 있었으니 그때 일도 빼고…….
젠장, 숙취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망설이는 동안 전영중은 눈을 깜빡이며 성준수만 바라봤는데, 문득 어린아이 앞에서 아침부터 술 냄새나 풀풀 풍기는 모양새가 신경 쓰인 성준수는 생각을 끊고 대충 묻기로 했다.
“나는 어떻게 바로 알아봤어?”
“……?”
“그러니까 아저씨가…, 영중이가 아는 준수랑 많이 다르잖아. 키도 많이 크고 목소리도 달라졌는데 바로 알아보는 게 신기해서.”
“저 아저씨 보는 거 처음 아니에요! 아저씨 많이 봤어요.”
“아니, 우리 제일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기억나? 영중이 다섯 살 때 낮잠 자다가…”
전영중이 사라졌다.
향할 곳을 잃은 목소리가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성준수는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아이를 좇아 침대를 더듬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XX, 서른아홉의 전영중이 보고 싶었다.
D+93
서른아홉 살 전영중의 멱살을 짤짤 흔드는 꿈을 꿨더니 열아홉 살 전영중이 나타났다.
“오, 준수. 딱 맞춰서 왔네?”
“…….”
준수야, 왔어?
성준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심상한 표정으로 앞치마 차림의 전영중을 빠르게 훑고는 따뜻한 분위기가 몽글몽글한 집 안으로 발을 딛는다.
거실에는 그럴듯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서른 초반에 일찍 은퇴하여 금방 부엌일에 재미를 붙여 으리으리하게 밥상을 차릴 줄 알게 된 전영중과는 다르게 서너 가지의 반찬뿐이지만. 하긴, 그 전영중도 처음에는 이랬다. 선수 트레이너 겸 주부로 전향한 주제에 두어 가지 밖에 못 내놓은 게 신경 쓰였던지 나머지는 돈으로 해결했는데, 돈으로 보조하지 않았으면 식탁 모양이 딱 이랬을 거다. 성준수는 짧게 웃고는 곧장 손을 씻고 나왔다.
“여기 오느라 정신도 없을 건데 용케 저녁상을 차렸네. 고맙다. 잘 먹을게.”
“장은 네 돈으로 봤으니 쌤쌤이지.”
그러고 보니, 냉장고가 텅 비어 요리할 게 없었더랬다. 입에 음식이 있어 눈으로 돈을 어떻게 찾았는지 물었더니 전영중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 온 게 몇 번째인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겪은 일이 나한테는 미래일 수도 있는데.”
“준수는 그 나이 먹고도 바보야? 행간이란 게 있잖아, 행간이란 게.”
그 후로 이어진 투닥거림에 영양가는 없었다. 열아홉 전영중이 능숙하게 카드를 찾아 장을 보고 올 정도로 숱하게, 앞으로도 어린 전영중이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어린 전영중이 찾아오면 뽀르르 자신에게 달려오던 놈이니 서른아홉의 전영중도 한 번은 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성준수는 음식과 함께 조용히 삼켰다.
“미래에 관한 얘기, 나한테 해도 되냐?”
맞은편에서 밥을 먹던 전영중이 수저를 물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어느 정도는? 옛날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어차피 능력이랑 같이 기억도 사라져서 이젠 별다른 문제가 안 될 거 같더라고. 내가 떠들어봤자 너도 내가 다시 여행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한 말을 의식도 못 하잖아.”
“진짜 시간 여행이네.”
과거로 갈 수 없고, 미래를 엿볼지언정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성준수의 간단한 평가에 전영중은 싱겁지? 하고 되물었다. 딱히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성준수는 가타부타 길게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계란말이가 꽤 그리운 맛이었기 때문이다.
“……너 원래 요리 잘했냐?”
“준수는 아직도 요리 못 하지?”
정곡이었다.
슈터면서 손맛이 그렇게 없냐, 예민한 손 감각은 다 어디 갔냐는 구박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성준수가 반사적으로 입을 닫는 모습을 전영중이 유심히 살핀다.
“진짜 가사는 주로 내 담당이었나 보네. 나 몇 살에 은퇴해서 전업주부로 전향하는 거야?”
“그걸 알려주면 재미없지. 야, 여기까지 여행 왔는데 보고 싶은 건 없냐?”
전영중은 눈을 깜빡였다. 조금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한 시선이 가만히 성준수를 바라보다가 깨달음으로 바뀐다. 그래, 눈앞의 성준수는 내가 잘 아는 성준수가 아니지. 얼굴에 그런 글자가 써지는 게 훤했다.
“보고 싶은 건 실컷 봤어. 근데 우리 동거한 지 오래됐나 봐?”
“올해가 결혼 10주년이야.”
“결혼 10주년 기념 냉전 중?”
“…….”
“왜 싸웠는데? 아, 이것도 알려 주면 재미없나?”
“아니, 그냥…….”
성준수가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사소한 다툼이라.”
사춘기 시절에 잠깐 멀어지긴 했지만, 소꿉친구로 자라 17살까지 같은 학교 같은 운동부 소속이었다. 성인이 되어 프로 농구 선수로 전향한 것도 똑같아서 서로가 익숙했으며 주변 환경도 비슷했다. 둘의 연애를 조심스러운 눈길로 보던 지상고 후배들의 걱정과는 달리 큰 다툼 없이 순탄한 연애를 했단 뜻이다.
좁디좁은 한국 농구의 세계,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곳에서 주변이 부담을 느낄 일도 없이 그들만의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던 성준수와 전영중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가끔 대차게 싸울 때가 있었는데 93일 전이 그랬다. 뭐 때문에 싸웠는지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그냥 오래된 연인 사이에서 간혹 나올 법한 싸움이었다. 권태기의 조짐, 평소라면 무던히 넘어갔을 텐데 그날따라 까칠했던 감정, 욱해서 지껄인 말이 과거를 들쑤시면 상대방도 기다렸다는 듯 과거 얘기를 꺼내고, 둘이 함께한 시간만큼 여기저기 사소하게 콕콕 찍혀 있던 돌가루가 그날따라 바위처럼 굴러 나오고……. 말꼬리 잡힌 것도 많지만 무엇보다 열아홉 살 소꿉친구에게 말하기엔 좀 추하고 구질구질했다. 성준수는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전영중은 깊게 묻지 않았고 남자의 시선이 그런 소년을 향한다.
“의외네.”
“응? 뭐가?”
“이것저것 다. 날 대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안 묻는 것도.”
“기억이랑 능력이 함께 한다고 했잖아. 너 기다리는 동안 내가 했던 여행이 떠올라서 그래.”
뉘앙스가 미묘했다. 성준수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간다.
“지금보다 훨씬 더 미래도 가봤어? 언제?”
열아홉의 전영중은 어깨만 으쓱였다. 서른아홉의 전영중보다 훨씬 어리바리하고 귀여운 인상이라 생각했는데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비슷하게 능청맞다. 하기는, 전영중이 전영중이지. 그래도 말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어딘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인상에 가까웠으므로 성준수는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깊게 따져 묻지 않았다.
묻고 싶은 건 정말로 많았지만.
“근데 준수야. 너 아무리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내가 가출했다지만 너무 대충 사는 거 아냐? 전문 가사 도우미라도 들여. 아니면 시켜 먹든가. 배달 도시락도 잘 되어 있을 거 아냐. 집이 지저분한 건 둘째 치고 그 몸으로 마흔 가까이 농구한다고 몸을 혹사해놓고 밥도 제대로 안 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농구로 더 올라갈 곳도 없으니까 됐다, 뭐 그런 거야?”
스무 살이나 어린, 연인 관계도 아닌 시절의 전영중에게 듣는 잔소리라. 성준수는 손을 휘저어 잔소리에 답하면서도 기분이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말 잘 듣는 어린 전영중만 봐서 그런가,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전혀 없지만 제 곁에 있어야 할 원래 나이보다 어린 전영중과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상황 자체가 낯설었다.
“그리고 준수야.”
전영중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곧게 세우고 가볍게 집안을 훑어본다. 서른아홉의 전영중과 성준수가 함께 사는 집. 그들이 함께 한 시간이 자연스레 녹아 있으며 은퇴 경기의 사진이나 팬들에게 받은 선물, 트로피가 가득한 집. 그리고 서른아홉씩이나 먹은 전영중이 연인과 싸웠다고 가출한 집.
큼큼, 목을 가다듬은 전영중이 고개를 들어 성준수를 내려다본다. 시선은 조금 어슷하다.
“여행 자체는 내 마음대로 시작할 수 없는 게 맞는데, 내 여행의 목적지는 항상 날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의 곁이야. 얼른 화해해. 좀 져주고, 그만 싸우고.”
성준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뭐? 야, 전영중! 직감적으로 손을 뻗지만 소년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허공을 움켜잡은 손을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기며 성준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전영중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던 모든 순간에 관해서. 전영중이 사라지면 삽시에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그럼에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
…….
…….
서서히 성준수의 몸이 동그랗게 말린다. 상체를 숙이며 큰 덩치를 구부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서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는다. 성인이 되며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전영중은 과거의 자신이 현재로 시간 여행을 온 때에만 능력과 관련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였는데, 어쨌든 기억을 떠올리긴 한단 소리다. 그렇다면 그의 곁에 있던 연인도, 열아홉의 전영중이 아는 사실이니, 아마도, 확실하게,
손으로 가리지 못한 귀 끝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방금 사라진 열아홉 살 전영중의 귀가 그러했듯이.
D+94
오늘은 다섯 살의 전영중이었다.
옆에서 곤히 자는 다섯 살의 전영중으로 아침을 맞이했을 때 성준수는 아주 오래간만에 학창 시절의 입버릇을 읊조렸다.
X바 거…….
눈 뜨자마자 아주 거대한 자기반성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게 다 어제 만난 전영중 탓이다. 빙빙 돌아가는 걸 좋아하는 놈이, 제 마음이 무서워서 연락 끊고 사라졌던 놈이, 시간 여행이 아니었으면 몇 년은 더 자신을 피해 다녔을 놈이 뭔 바람이 들어서 그런 폭탄을 투하하고 간단 말인가?
전영중이 어렵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시간 여행을 하는 전영중은 확실히 낯선 구석이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응시하던 성준수는 곧 몸을 돌려 애매하게 겨드랑이 아래에 머리를 대고 자는 전영중을 품에 안았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손으로 배를 토닥인다. 토닥거림을 받는 건 아이일진데 규칙적인 숨소리와 이불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이쪽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화해하기 전까지 계속 어린 전영중이 찾아올 거라 이 말이지.
통통한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성준수는 곧 결론 내렸다. 육아 서적을 사야겠다고.
D+97
다섯 살 조카와 노는 법, 여섯 살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놀이, 그런 걸 열심히 공부했더니 오늘은 조금 큰 전영중이었다.
은퇴한 지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아이의 체력을 쫓아가기 벅차다는 사실에 다시 현역 시절처럼 운동하고 막 샤워실을 나온 성준수는 물기 어린 몸으로 전영중과 맞닥뜨렸다. 어제도 그제도 만나긴 했지만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어린 여행자를 발견하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아직도 열아홉의 전영중이 던진 폭탄 발언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몇 살이냐?”
“열한 살이요.”
열한 살의 전영중은 그간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전영중과는 달리 수능을 치르느라 근 3년 만에 만난 친척 형과 친밀도가 리셋된 사촌 동생처럼 서먹하게 굴었다. 중학생 전영중도 어색하게 굴긴 했는데 그땐 성준수의 나이도 스물하나여서 지금만큼 숨 막히는 어색함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전영중은 어색함을 잘 숨길 줄 아는 나이였고. 성준수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미묘한 분위기에 새삼 자신이 나이를 먹었음을 실감했다. 애는…, 어떻게 대하는 거지 진짜.
다행히 전영중은 성준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책가방을 풀고 주섬주섬 책을 꺼냈다.
“저 여기서 숙제해도 돼요?”
“어. 여기서 해.”
성준수는 곧바로 책상 앞으로 안내해 줬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었더니 전영중이 고개를 흔들어서, 그는 샤워실로 돌아가 몸의 물기를 말끔하게 닦아내고 옷을 입은 뒤 옆에 앉았다. 애 앞에서 육아 서적을 읽기도 뭣해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 들고 왔더니 프로 선수 시절의 열정으로 쓰인 노트였다. 군데군데 전영중의 참견도 있어서, 이 노트를 손에서 놓은 지 반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시선이 느껴진 건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농구공을 쥐고 있는 선수들의 사진도 붙여놨으니 자연히 눈에 띄었으리라. 성준수는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면서 물었다.
“숙제 급하냐?”
“내일까지 내야 해요.”
“그래? 그럼 빨리하고 농구하러 갈까.”
전영중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아저씨는, 하고 오물거리는 입술은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벌어지지 않았지만 열한 살의 소년이 저런 표정으로 물으려는 질문이야 뻔했다. 아저씨는 프로 선수죠? 저 프로한테 농구 배우는 거예요? 뭐 그런 거겠지. 성준수는 입꼬리를 당기며 진짜니까 빨리해, 하고 재촉하려다가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영중아, 왜 아무것도 안 물어? 나랑 네가 프로가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직 궁금해하면 안 돼요.”
“왜?”
“제가 미래를 이상하게 바꿀 수도 있으니까…….”
열아홉의 전영중은 자기 능력을 별것 아닌 것처럼 취급했는데 열하나의 전영중은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흔이 되도록 전영중이 딱히 말조심하라고 경고하지 않았던 걸 보면 열아홉 살 전영중의 판단이 맞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데다가, 어떠한 사명감을 보이는 일에 서투르게 참견하고 싶지 않아 성준수는 소년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럼 언제부터 궁금해해도 되는데?”
“고등학생이 되면 그때부턴 궁금해해도 된다고…….”
“된다고?”
“생각해요.”
“아닌 것 같은데.”
“…….”
성준수는 팔짱을 꼈다. 오른 검지가 왼 팔뚝을 톡톡 두드린다. 느릿한 손짓에도 긴장하는 걸 보니 역시 거짓말이 맞았다. 어제같이 스스럼없이 반말하는 전영중이면 이만치 조심스럽지 않을 텐데, 바짝 긴장한 어린아이의 낯을 보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성준수는 검지로 팔뚝을 톡톡 두드리는 행동을 그만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영중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전영중의 얼굴에 드리운 긴장의 빛이 누그러진다.
“초능력 가르쳐 주는 사람에 대한 건 비밀이야?”
“네…….”
있기는 있단 소리였다.
치솟는 배신감이란!
반드시 둘만의 비밀이어야 한다기에 부모님을 곁눈질한 게 대체 몇 번인데. 성준수 생에, 팔자에도 없는 거짓말의 대부분은 그의 시간 여행과 관련된 것이었거늘 스승에 관해서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느낀 배신감은 어린 날의 추억 속 전영중을 향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성준수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했다.
“알겠어.”
사실 달리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가 시간 여행에 대해 알긴 뭘 알겠는가? 어련히 믿을 만한 사람이고 이유가 있으니 전영중도 여태 침묵했겠지. 어쩐지 능력도 통제하지 못하는 놈이 능력에 관해 얘기할 때 묘하게 확신이 있더라니, 능력 각성과 함께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물려 준 스승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스물이 넘도록 시간에 관한 책을 뒤적였던 걸 보면 스승의 지식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고…….
……, 선생인지 뭔지에 관해 기억하지 못한 건 아니겠지?
설마 싶으면서도 기억이란 게 그렇게 편리하게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혹시나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당사자가 없으니 뭘 물어볼 수도 없고. 성준수는 머리가 지끈대는 기색이 드러나지 않게끔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영중아, 말을 바꿔서 미안한데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요?”
“네 초능력 선생님. 믿을만해?”
“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끄덕이는 얼굴에 강한 확신이 있었다.
“모르는 것도 많지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전영중 아니랄까 봐, 솔직하고 신랄한 평가였다.
“그럼 됐어.”
성준수는 대답하며 쓰게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어쨌든 믿을만하다는 거지.
단호한 대답에 가슴이 조금, 달그락거렸다.
D+99
원온원 한 번 해줬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전영중은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왔다. 심지어 어제와 오늘은 숙제를 다 하고 왔다며 냅다 손에 쥔 농구공부터 들이밀어서 성준수는 열아홉 전영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진위여부를 의심했다. 농구공을 내밀며 눈을 빛내지만 않았어도, 그러는 전영중이 이만치 어리지만 않았어도 말이라도 꺼내봤을 텐데 어린아이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나마 농구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농구 한 번으로 부쩍 친근해졌다. 어린 자신을 대할 때처럼 직접적인 스킨십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목소리에서 약간의 애정이 묻어났다. 0이었던 친밀감을 조금은 올린 모양이었다.
성준수는 전영중이 팔을 힘껏 뻗지 않아도 되게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주먹이 손바닥 위에 올라왔다가 더 조그마한 물건을 남기고 사라진다. 티맥 2 올스타 신발 미니어처로 만든 키링이다.
힐끗 바라보자 전영중은 조금 수줍은 기색이었다. 하긴, 이맘때 전영중은 초등학교에 파란을 일으키면서도 낯선 어른한테는 낯을 많이 가렸다. 나이 든 전영중은 그걸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성준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선물이에요. 아저씨가 제가 아는 준수라면 여전히 좋아할 것 같아서…….”
“이거 나한테 줘도 되겠어?”
“네. 아저씨는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준수는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아저씨한테 먼저 주려고요. 어차피 신발 모형만 사면 금방 만들어요.”
“고맙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성격 탓도 있지만 여동생의 존재 덕에 성준수는 슛과 승리라는 흥분 상황에서도 좀체 남의 머리에 손을 올리지 않았는데, 전영중은 예외였다. 이래서 습관이란 무서운 거였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머리는 정말 작고 동그랗다. 성준수는 어린 소꿉친구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은근슬쩍 성준수의 손을 잡고 인사한 전영중은 잽싸게 코트로 뛰어갔다. 먼저 자리 잡고 재촉하듯 돌아보는 소년을 보며 성준수는 웃었다. 핸드폰에 열쇠고리를 단 후 가방에 넣은 성준수가 성큼성큼 코트 안으로 들어선다.
그날 전영중은 저녁까지 먹고 돌아갔다. 은퇴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나이가 나이라 그런 건지 자기가 아는 전영중보다 작은 체구가 신경 쓰여 심력 소모가 심했던 건지 3일 치 피로가 밀려들어 성준수는 샤워를 한 뒤 나른한 몸을 간신히 침대로 옮겼다.
벌써 눈이 가물가물했다.
아, 내일은…
몽롱한 정신이 농구공만 뚫어져라 응시하던 얼굴을 떠올린다.
내일은 바쁘다고 했으니까 안 오겠지.
…오면 안 되는데.
그게 성준수가 그날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그 뒤로는, 암전.
D+100
아침 뉴스를 듣는 건 성준수의 오래된 버릇이다. 현역일 때는 뉴스를 들으며 운동했다면, 이젠 6시 뉴스가 막 시작할 시간에 어슬렁어슬렁 나와 TV를 튼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옆에서 호들갑을 떨 동거인도 없어 성준수는 물끄러미 화면만 바라보았다.
……대지진이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익숙한 아나운서가 익숙한 숫자를 뱉는다.
OO 정부는 이번 대지진으로 인한 공식적인 사망자와 실종자는 2만 명이라고 밝혔습니다. OO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다양한 국가와 기관들이 힘을 보태고 있지만 상처는 여전하고 일상으로의 복귀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성준수는 더는 연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뉴스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100일이 지난 현장을 특파원이 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전영중이 행방불명 된 지 100일이 되는 날이다.
D+101
어제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성준수는 어린 전영중의 여행을 걱정하면서도 그간 아이 때문에 숨겨둔 술을 꺼냈다. 눈치를 보며 한 잔, 한 잔 느리게 기울이던 술잔에 술을 들이붓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가, 걸렸던가.
그래도 술 냄새를 풍기지 않겠답시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홀짝이다가 두어 번 정도는 가글도 하고 몸을 씻기도 했던 것 같은데, 오후를 지나 해가 기울기 시작한 후로는 정말 기억이 없었다.
날아가 버린 하루 대신 그에게 남은 건 깨질 듯한 두통과 숙취였다.
“영중…, 영중아.”
그래도 혹시 모를 노릇이니 성준수는 입술을 달싹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잔뜩 구겨진 얼굴을 연거푸 마른세수하고서야 간신히 눈을 뜬 성준수는 느리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전영중. 다른 방까지 들리도록 목청을 드높이지만 사위는 고요하다.
그제야 그는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내가 보고 싶어 하면 온다더니, 순 거짓말쟁이였다. 물론 전영중은 성준수가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여행의 시작은 될 수 없다 했지만…, 어쨌든. 술주정뱅이에게 정확한 말의 의미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주정뱅이가 기억하는 것과 원하는 것이 중요했지.
“…….”
조용한 집 위로 전영중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여섯 살의, 열아홉 살의, 다섯 살의, 열한 살의, 서른아홉 살의 전영중이.
성준수는 팔로 눈가를 덮었다. 암막 커튼을 치지 않은 탓에 살포시 내려앉던 햇살이 마침내 가려지고 캄캄한 어둠이 그를 감싼다. 야, 영중아. 성준수는 무심코 왼팔로 옆자리를 더듬다가 생각했다.
네가 없는 집이, 아직도 낯설다.
D-101
박수칠 때 떠나겠다며 일찌감치 은퇴한 전영중은 농구 선수에서 성준수의 트레이너로 전향했다. 단 한 번도 먼저 은퇴를 입에 담지 않았으나 성준수의 은퇴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접한 그는 성준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열렬히 박수 쳐 준 최고의 지지자기도 했다.
은퇴 기념 여행을 계획한 것도 전영중이었다.
가장 멋진 마지막 경기를 위한 컨디션 조절은 물론, 부상 방지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몰래 일정을 짜고 비행기와 호텔 예약까지 끝내놓았더랬다. 그래도 그간 신세 진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할 시간은 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은퇴식을 치르고 막 돌아온 성준수는 보름 안에 모든 인사를 끝내고 출국해야 한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고 말았다.
항시 부상을 조심하며 살았어야 했기에 모든 걸 내려놓은 여행은 처음이었다. 평생을 함께한 습관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은퇴 후 전영중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는 사실이 성준수의 마음을 소란스럽게 했다. 실컷 여행을 준비한 주제에 막상 평생을 응원하던 성준수가 진짜 은퇴하자 기분이 이상했는지 전영중이 묘하게 까칠하고 예민해지긴 했지만 둘의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코치가 된 후로 사라졌던 시비조 말투의 부활에 성준수는 묘한 향수를 느꼈으며 먼저 선수 생활을 관뒀다는 이유로 수년간 자신의 성질을 받아줬던 전영중이니 기꺼이 그의 히스테리를 받아주었다.
더 솔직해지자면, 전영중이 차라리 짜증을 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모를 전영중을 지켜보다 문득 ‘우리 권태기인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보다는 훨씬.
그리고, …….
…….
…….
준수야, 우리 그냥 돌아갈까?
뭐?
나와보니까 알겠다. 집만 한 곳이 없다는 거.
야, 우리 출국한 지 사흘밖에 안 됐거든?
…….
…….
준수야, 내 부탁 하나 들어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이유가 꼭 필요해? 가끔은 그냥 내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들어줄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 상황이 이상하니까 그냥 물어본 거잖아.
그러니까 항상 그렇게 상식과 이유를 찾아야 하는 거냐고. 그냥 덮어놓고 들어 준 다음에, 나중에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어?
야, 전영중.
네가 항상 그렇게 캐물으니까 매번 네 마음에 들만한 이유를 생각해야 하잖아. 그냥 그럴 때가 있는 건데도, 매번, 내 기분에 네가 납득할 변명을 만들어야 하는 게 얼마나 지치는 일인 줄 알아?
…….
…….
나도 지친다, 영중아.
…….
…….
나도 지친다고.
…….
…….
뭐야.
준수야, 방금 흔들…
…….
…….
숙여! 이걸로 머리 감싸고!
…….
…….
……끝났나?
…….
…….
일단 나가보자. 여기 곧 무너질 것 같아. 일단 저기 공터로,
뭣,
전영,
――중――!
…….
글쎄, 사고가 난 날의 기억은 거의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라고 하는데, 성준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괴로우니까 그대로 셔터를 내려버리는 답답한 구석은 그의 성질머리와 맞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가 사고의 기억을 수면 너머로 밀어 넣은 것도, 무겁게 가라앉은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도 모두 현실이었다.
그래서 성준수는 자신의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감각. 강하게 몸을 밀어내는 힘과 부서진 골조물이 피부와 근육을 찢어발기던 고통마저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 순간 본 것 같았던 전영중의 미소를 사실이라 확신할 수 있겠는가. 옆에서 밀쳐져서 그대로 쓰러지느라 얼굴을 볼 시간 따위 분명 없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 미소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대지진의 기억이 그 미소뿐일 정도로.
미친놈. 능력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웃기는 웃어.
숱하게 욕지거리를 내뱉다가도 결국 그 모든 말의 종착점은 하나다.
그렇게 싸우는 게 아니었는데.
계속 참고 받아준 거, 하루만 더 그럴걸. 걔랑 그렇게 살아온 게 하루 이틀도 아니면서 왜 새삼스럽게 짜증을 냈을까.
그랬더라면 이 지난한 기다림이 덜 고통스러웠을까? 건물이 주저앉은 터로 아득바득 기어가서 피도 살점도 보이지 않는 바닥을 보며 전영중이 무사히 미래의 어딘가로 도착했으리라 희망하고, 여행에서 돌아올 연인을 충혈된 눈으로 기다리고, 이도 저도 할 수가 없어 귀환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던 시간이 아주 조금쯤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거대한 불운은 언제나 전조 없이 평범한 일상을 휩쓸고, 성준수는 이미 불행에 일상이 송두리째 박살 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므로.
단지 성준수는, 매일매일 전영중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단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보고 싶다.
D+105
12시가 되는 순간부터 핸드폰이 요란스레 울어댔다. 성준수는 잠깐 고민하다가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에 바로바로 답해주었다. 전영중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사이비에까지 발을 담근 성준수가 슬슬 정신을 잡고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 같다, 농구 코트도 빌린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고 있음을 진재유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농구 선수가 난데없이 타임 패러독스와 관련된 잡다한 이야기를 싹싹 긁다 못해 양자역학이니 뭔지 하는 걸 뒤적이고 있으니 그런 소문이 돌 법도 했다. 어린 전영중과 놀아주느라 몇 번 농구 코트가 있는 체육관을 빌렸더니 ‘연인을 잃은 충격에 나간 정신을 붙든 건 결국 농구구나’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 같지만 뭐…, 자신이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것 같다며 주변이 안심한다면야.
어지간해서는 모두 답장해 주고 눈을 붙일 셈이었는데,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에게는 바로 전화가 왔으며 성준수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문이 도는 모양인지 한 명과 대화하는 동안에 무서운 기세로 새로운 연락이 쌓였다. 그래도 성가셔하지 않고 정성 들여 글을 쓰던 성준수는 문득 밀려오는 피로감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바닥 아래 깔린 핸드폰에서 윙윙대는 떨림이 느껴졌다.
진동 소리를 제외하고는 사위가 고요한 크리스마스이브다.
문득 그것이 낯설어 성준수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걸치고 바깥을 나서자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럽고 반짝거린다. 생일이 크리스마스이브여서 다행이었다. 홀로 걸어도 외롭지가,
않, 으,
니,
미친!
눈을 깜빡이던 성준수가 땅을 박차고 달린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눈이 얼어 미끄러운 바닥을 힘껏 밀어내어 팔을 뻗었다.
하늘에 나타난 전영중이 그의 품 안으로 빨려들 듯 떨어졌다.
이십 대의 성준수는 몇 번 경험한 일이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등장하여 다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성준수가 그랬듯, 마흔을 앞둔 성준수도 쿵쾅거리는 심장에 전영중의 얼굴이 닿도록 꽉 끌어안았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놀라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X바 거.
하여간에 X 같은 능력이었다. 이딴 능력이 없었으면 전영중도 기다렸다는 듯 그 상황에서 자신을 밀어내는 짓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사라진 전영중의 멱살을 잡을 수도, 새파랗게 어린 전영중을 추궁할 수도 없었으나 성준수는 제멋대로 답을 내린 문제에 시퍼렇게 이를 갈았다.
그래도 우선은 아이를 확인하는 게 먼저다. 유치원 가방을 멘 전영중은 동그란 눈으로 성준수를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어린 성준수에게는 익숙한 미소지만, 어른이 된 성준수에게는 아직 낯선 미소다. 그의 기억 속 이 나이대 전영중은 울보에 겁쟁이었으므로. 물론 어린 전영중에게 익숙한 사람이 없는 곳이니 자신만 보면 방긋방긋 웃기만 하고 울지 않아 다행이기는 한데. 아, 이런 것도 시간 여행의 보정 그런 건가?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성준수는 아이가 계속 웃을 수 있도록 입꼬리를 당겼다.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전영중은 좋아하며 성준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탕탕 쳤다. 목청껏 내지르는 소리가 귀에 바로 꽂힌다.
“아저씨다!!”
흥분한 전영중은 한참이나 성준수를 붙잡고 몸을 흔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다. 성준수는 적당히 받아주며 아이를 떨어트리지 않도록 팔에 단단히 힘을 줘야 했다.
“안 울고 열 밤 코 잤어요.”
전영중과 손가락 걸어가며 약속한 기억은 없지만, 어린 전영중이 시간대를 구분하지 못하고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일이야 익숙했다. 성준수는 그저 착한 아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컷 칭찬받은 전영중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아이의 호기심은 곧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맘때 아이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 경험한 바 있기에 품에 안고 있음에도 어디로 튈지 불안했다. 절대 놓칠 일 없게 단단히 고쳐 안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영중의 등에서 가방을 벗기던 성준수는 익숙한 키링을 발견했다.
며칠 전, 열한 살의 전영중이 준 것과 같은 종류다. 성준수의 핸드폰에 달린 것과 달리 손때가 타고 여기저기 생활 기스가 보이긴 하지만 분명 티맥 2 올스타 농구화 미니어처가 달린 열쇠고리가 맞다.
“영중아.”
그러니까,
“네?”
어린 전영중은,
“영중이가, 몇 살이지?”
결코 가질 수 없어야 할 열쇠고리.
전영중이 손바닥을 내민다. 오른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쫙 펼쳐서 다섯 살! 외치는 목소리가 낭랑하다.
티맥 2 올스타 농구화가 출시된 건 그들이 아홉 살일 적의 일이다.
불현듯,
―하.
웃음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하하.
절박하게 긁어모은 정보, 신경질적으로 이어 나간 망상, 한껏 품에 끌어안았던 무수한 감정과 품에서 넘쳐흘러 조각조각 흩어졌던 이야기가 웃음소리와 함께 재조립된다. 가슴을 새카맣게 매웠던 글자는 이윽고 세 가지의 문장만을 남겨두었다.
첫째. 서른아홉의 전영중은 그가 지나온 과거에 살고 있다.
하하하하!
둘째. 성준수도 전영중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하하하, 하하,
셋째.
……하…….
성준수는 한참을 웃고서야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성준수가 웃자 따라 웃던 전영중의 얼굴에는 여전히 방긋방긋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더 망설이지 않았고,
“영중아, 아저씨가 준 선물 안 잃어버리고 잘 갖고 있었네?”
“네!”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하지만 성준수는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이거 주면서 했던 말도 기억해?”
심장이, 뛰었다.
“네에. 엄마, 아빠가 안 보이면 티맥이를 잡고 자리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아저씨 생각을 하면 아저씨가 보인댔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맞아. 똑똑하다, 우리 영중이. 절대 까먹으면 안 돼. 영중이는 멋지고 똑똑하고 착하니까 잘할 수 있지?”
칭찬에 한껏 들뜬 얼굴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수는 아이가 계속 희미하게 섞인 떨림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가다듬으면서 숫자를 마저 셌다. 105일간 세어 온 숫자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한 숫자를.
셋째.
“아저씨 옆에 있던 다른 아저씨도 기억해?”
그리하여 우리는,
“아저씨랑 손 꼭 잡고 있던 아저씨요?”
다시 만날 것이다.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세레머니 하듯이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이 슬쩍 들어 올려졌다.
“그래. 그 아저씨 말 잘 들어야 해.”
“그럼 영중이랑 맨날 놀아줘요?”
자정이 넘도록 꺼지지 않고 환한 불, 소란스러운 거리, 흥겨운 캐럴, 눈길을 사로잡는 장식물. 다섯 살이면 호기심이 이리저리 튈 법도 한데 전영중의 시선은 오로지 성준수에게 못 박혀 있었다. 자기 능력을 인지하지 못한 아이가 순식간에 낯선 공간에 내팽개쳐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서 달래주고 놀아주고 부모님께 데려다준 아이의 영웅이 눈앞에 있었으므로.
전영중의 시선을 느낀 성준수가 아이의 이마와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댔다. 영중이가 원한다면. 애정 어린 시선, 애정 어린 입맞춤, 애정 어린 목소리.
그러나 아이가 보는 감정보다 더 큰 환호가 그의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X바. 전영중.
거기 있는 거지?
감정을 꾹 억누른 성준수가 걸음을 옮긴다.
기억하지 못해서 말을 못 한 것이든, 말할 수 없는 게 능력의 제약이든, 미래를 바꿔 버릴까 봐 겁이 나서 침묵한 것이든, 아무래도 좋다. 이유는 반드시 들어야겠지만 지금 가장 우선해야 할 사항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해야 하는 사항을 떠올린 발이 힘껏 땅을 박찬다.
성준수는 전영중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을, 기내 초등학교를 주름잡는 초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곧잘 울음을 터트리곤 했던 연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하여간 너는 이 나이 먹도록 변한 게 없다.
전영중을 안고 있음에도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흘러나오는 캐럴의 박자에 맞추어, 혹은 그보다 더 빨리.
찬 바람에 발갛게 상기된 뺨을 하고서 성준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달리듯이 빠르게 걸음걸음 내디딜 때마다 세 가지 문장을 구성하고 있던 까만 글자들이 툭툭 떨어졌다. 뚜렷했던 문장이 흐려지고 까만 단어와 문장이 바닥에 어지러이 뒹군다.
첫째. 서른아홉의 전영중은 그가 지나온 과거에 살고 있다.
서른아홉의 전영중이 어린 전영중의 스승이 되었기에 그 낯가리는 놈이 순순히 낯선 사람을 받아들였고, 그 생각 많은 놈이 순순히 스승의 지식을 수용했을 거다.
둘째. 성준수도 전영중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뒤늦게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성준수는 전영중을 찾기 위해 과거를 연거푸 거슬러 올라가며 다섯 살 전영중을 만났고,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열쇠고리를 주며 마법을 걸어줬을 거다.
어린 전영중이 이십 대의, 삼십 대의 성준수를 보고도 스스럼없이 다가온 건 이미 훌쩍 큰 성준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십 대의 성준수가 과거로 돌아간 적은 없지만, 성준수는 대학생 때나 지금이나 얼굴이 똑같아 늙지 않기로 유명한 농구 선수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 얼굴이 폭삭 늙기 전에는 능력을 깨우칠 수 있을 거다.
셋째.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아!
폭죽이 터지듯 환호성이 흘렀다. 소리를 내지르고 싶어서 성준수는 전영중을 끌어안고 겨울밤 거리를 내달렸다.
그렇게 하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처럼, 이 길의 끝에 전영중이 있는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헐떡이는 폐로 빨려들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거기 딱 기다리고 있어라, 전영중.
성준수는 홀로 선포한다.
곧 갈 테니까.
네가 울고 있을 때면, 늘 그랬듯이.
FIN.
재회라는 키워드를 들었을 때 ‘나이차 나는 빵준이 만나는 걸 재회라고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원래는 영중이와 헤어진 40대의 준수가 어린 전영중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길게 쓰고, 이게 재회라는 걸 강조한 다음에 제일 마지막에 ‘준수의 세계에는 전영중이 없다’는 걸로 짧게 쓰면서 끝내려고 했어요. ‘어쨌든 다른 시간대의 연인과 재회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는 연인이 만날 수 없는 과거에나마 살고 있다는 증거와도 만났으니 된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지인분께서 ‘전 꽉 닫힌 해피엔딩이 좋으니 준수가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시간여행능력이 있어 아주 어린 전영중이 과거로 가버렸을 때 도와줬으며 마침내 시간을 헤매는 전영중과도 재회하는 걸로 해주시죠’라고 하셔서 그런 여지를 줘 보았습니다.
지면상 넣지는 못했습니다만, 과거로 가면 원래 시간대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아는 전영중이 이왕 과거로 가버린 것..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가며 자신이 기억하는 성준수의 위기를 해결한다는 설정도 있었습니다.
직업 정신으로 어린 영중이의 말투를 자연스럽게 고쳐준 지인분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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