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상] 죽음을 잊은 내가,
나누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캄비온 준수 & 뱀파이어 상호
※리퀘스트 - 맞관삽질 준상
사람은 죽음의 위기에서 옛 기억이 촤르륵 떠오른다고 한다.
그런데 기상호는 옛 기억은커녕 딱 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늦은 밤 그는 쫓기고 있었고, 쥐들도 지레 겁먹고 도망칠 듯한 험악한 고성이 그의 귀를 찔렀다. 가까스로 몸을 숨기고 제 손목을 콱 깨물어 자신의 소리를 삼켰다.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그는 그의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간 탄환을 빼낼 수 있었다.
“이제 여기서 정말로 못 살겠네….”
잠깐이지만, 그는 이 성스러운 탄환이 그의 심장을 완전히 꿰뚫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탄환은 그러지 못했고, 그는 살아남았다.
“미친 척 키스라도 한 번 해 볼걸.”
기상호의 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살아온 세월은 고작 관冠을 쓸까 말까 한 나이였으나, ‘인간이 아닌 것’으로서 살아온 세월은 산 하나가 자연스럽게 깎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가 본래 나기를 인간으로 났으니 생生에 인人 자를 붙여도 이상하지는 않을 터지만 그는 자신이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 중 지금에 이르러서야 다시 돌아온 ‘아쉬움’이라는 감정.
“기상호!”
그 아쉬움의 이유가 목소리의 형태로 기상호에게 가까워져 왔다.
“준수햄?”
“기상호, 이게 무슨!”
“보시다시피.”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성준수는 기상호의 몰골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지금 기상호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수술실에서 인간의 삶을 바느질하는 자들도 까무러칠 모습이었다. 그야, 칼은커녕 실도 대지 않았는데 살이 알아서 엉겨붙는 모습은 어지간히 발견에 미친 학자가 아니고서야 끔찍한 꼴이 아니겠는가. 기상호가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현상이기도 했다.
세간에서는 기상호와 같은 부류를 이렇게 불렀다.
흡혈귀, 양놈들 말로 뱀파이어.
“저 인간 아이에요.”
기상호는 코앞에 있는 상대가 진실을 외면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금 울고 싶어졌다. 언젠가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했지만 이런 추한 이별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성준수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그의 인생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성준수는 기상호를 조금 생각하다가 ― 그리워할지는 모르겠지만 ― 점차 잊어버릴 것이고, 먼 미래에는 언젠가의 꿈이었다고 회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내 기상호가 제 정체 서너 글자를 밝히고자 입을 열자, 낯선 감촉이 두 입술을 휘감았다.
말랑말랑하면서, 차가운 감촉.
“나도 인간 아니야.”
“… 엑?”
살짝 떨어진 성준수의 입술에서 나온 전혀 뜻밖의 언어에, 기상호는 잠시 이지理智를 잃었다. 그 기상호의 몸을 커다란 날개가 감쌌다.
“악… 마?”
“캄비온이라고, 들어 봤냐?”
그 날개는 성준수의 뒤쪽―정확히는 등에서 뻗쳐 있었다.
캄비온, 몽마와 인간의 자식.
“우리 괜히 숨기고 지냈다. 안 그러냐.”
입맞춤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지 않은 성준수는 허탈한 듯 실소를 흘렸다. 어느새 기상호의 가슴께의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갔고, 기상호도 성준수에게 가볍게 웃어줌으로써 긍정했다. 그들의 몸은 밤공기의 묵직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차가웠지만, 다시 한 번 부딪힌 한 쌍분의 입술은 인간과 다르지 않은 따뜻한 감정을 나눴다.
[준상] 죽음을 잊은 내가,
나누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기상호가 뱀파이어가 된 것은 조선 시대의 일이었다. 흔한 선비의 차남은 몸이 약해서 문반으로든 무반으로든 출세 못 할 팔자였고, 자식을 아끼는 부모는 막내가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맸다. 그러다 신통하다는 의원을 만났으니, 그 의원은 기상호의 목이 문제라면서 잘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그때 기상호는 침상에 누운 채 앓고 있었다.
“자질이 있네.”
“먼 자질이요…?”
“나와 같은 자질.”
그 의원놈이 저 비단길을 건너온 흡혈귀일 줄 누가 알았으랴. 열여섯 기상호는 목을 찌르는 통증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는 보름달의 환한 빛 아래 피바다가 된 집을 보고 말았다. 기상호는 자신이 저 멀리 한양으로 일하러 간 형님에게도 동래로 시집 간 누님에게도 못 갈 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사람들의 시신을 선산에 고이 묻고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의원놈을 보면 찢어죽이겠노라 다짐하면서.
이 땅에는 나무도 많고 바위도 많으니 그늘도 많아 기상호의 작은 몸뚱이 하나는 충분히 햇볕으로부터 가릴 수 있었다. 배고픔인지 목마름인지 모를 공허함은 오직 혈액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으나 동물들의 피로 버텼다. 여러 번 하다 보니 적당히 먹고 살려서 보내는 법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사람의 피를 빨겠다고 다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찾았다, 개자식.”
그리고 마침내 기상호는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원흉을 찾아냈다. 그놈은 뻔뻔하게도 의원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불법 의료인. 놈에게 달려들어 자신의 부모를 속인 간사한 혀를 뽑았으나 금세 재생하는 것이 보였다. 이미 예상했던 바이기에 다진 마늘을 손에 치덕치덕 발랐다. 마늘이 뱀파이어에게 효과적인 만큼 기상호에게도 고통을 줬으나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고 끓어오르는 심장통에 비할 바는 못 됐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거든. 자질이 있는 놈이 있고 없는 놈이 있어.”
“닥치라.”
“나를 죽이면 너도 외로워질 텐데.”
“닥치라고!!”
기상호는 주절거리는 뱀파이어의 목을 치고 흉측한 단면에 다진 마늘을 치덕치덕 발랐다. 그 뱀파이어는 살건 죽건 별 미련이 없어 보였기에 더 화가 났다. 자신은 부모와 하인들 등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는데, 마늘을 까면서 손이 타들어갔고 방금 전까지도 마늘을 직접 바른 손바닥이 욱신거리는데, 정말 죽어서도 엿만 주고 간 X끼였다.
그런데 시간이란 참 무서워서, 머지않아 그는 원수 자식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외로워졌다.
어느새 그의 육체는 햇볕 아래에서도 죽지 않게 되어 버렸다. 놈을 죽이고 아침 햇볕을 맞았을 때, 몸이 불타지 않고 힘이 빠졌던 순간만큼 절망스러운 기억은 없었다. 그는 안면몰수하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체를 감출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는 자신이 뱀파이어인 한 절대 인간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다른 뱀파이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꽁꽁 숨어 있을 테니, 새로운 뱀파이어를 만들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외로워질 팔자였다.
그조차 포용해주었던 산과 숲에서 영원히 살겠다 다짐했건만, 그곳마저 뱀파이어보다 사악한 인간들에 의해 밀리기 시작해, 결국 그는 인세로 쫓겨나왔다.
시간이 흘러 2000년대.
기상호는 질기게도 살아남았다. 산과 숲이 없어지니 야생동물들도 줄어들어 결국 인간의 피에 손을 댔지만 확인된 범죄자만 골랐으며 동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과도한 섭취는 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은밀히 양성한 뱀파이어 헌터들을 마주친 적도 있었으나 신실한 자들이 아닌지 그들의 무기는 무용했다. 정중하게 왔으면 목을 내 줄 의향도 있었는데 ― 보통 사람들은 죽으라는 권유를 거절할지라도 ― 다짜고짜 공격해서 튀었다.
현재 그는 부산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뱀파이어가 된 순간―열여섯 살에 멈춰버렸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전전하며 지내는 것이 편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침상에서 앓았던 시절에도 몸은 희한하게 잘 자라 신장이 6척을 넘겼기에 작정하고 속이면 동안의 성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준수햄.”
“어서 와라.”
그가 이번 고등학교에서 관심을 가진 것은 선도부장 성준수.
기상호의 덩치를 본 선생님이 그를 선도부에 스카우트했고, 부장인 성준수와는 마주치게 되었다. 성준수는 기상호가 수백 년 동안 본 사람들 중에서도 손꼽히게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만큼 마음씨도 아름다웠으면 좋았을 텐데 입담이 거칠어서 속으로만 감점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장군감이었음이 분명한 성준수의 기세에 대들 수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아서 왕 전설』에 대해 비평해 볼 거다.”
우연인지 성준수는 기상호와 동아리도 같았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고전 문학 동아리로, 금요일 5~6교시에 하는 동아리 활동이 아니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꾸린 동아리 중 하나였다. 기상호는 그 본인이 고전 문학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흥미롭다고 생각해 가입했고, 그곳에서 성준수를 마주치고 감탄을 삼켰다.
성준수는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판타지 문학을 주로 골라 왔다. 정작 지망하는 곳은 의학대학이라고 했다.
“『아서 왕 전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멀린’의 역사를 짚어 봤는데…”
멀린.
몽마와 수녀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로 아서 왕의 조언자.
“기상호.”
“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멀린은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받아들였는데, 그 행동에 대해서.”
멀린은 최후에 그가 마법을 가르쳤던 호수의 여인에 의해 가두어진다. 호수의 여인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전해지지만, 성준수의 비평에서 중요한 부분은 멀린이 그 미래를 알고 있었으나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는 점이었다. 기상호는 서양 정통 판타지 문학보다는 사이언스 픽션 문학 쪽이 더 취향이어서 큰 감흥 없이 듣다가 성준수가 그를 콕 집어 부르는 말에 깜짝 놀랐다.
“음…, 담담한 예언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판타지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예언자, 신비로운 마법사. 초월적 존재.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성준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면 미래를 바꾸려고 했을 거다. 도망치든 설득하든.”
정말 운명론에 입각한 고전 마법보다는 무신론적 현대 의료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형광등 아래에서 성준수의 새하얀 피부보다도 까만 눈동자가 돋보였다. 기상호는 속으로 성준수에 대한 호감을 조금 더 적립했다. 성준수의 말이 꼭, 기상호가 뱀파이어로서 인간과 분리되어야 하는 운명을 부정해주겠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멀린이 마음에 안 든다던 성준수가 어설픈 기상호를 끼고 다닌 것 말이다.
점심 선도하러 나가는 날이 아니면 기상호에게 찾아와 그를 데리고 서고로 향했다. 서고에서 책 한 권을 빌리고, 복도 끝에 위치한 휴게 공간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낄낄거리면 ― 독서하는 것이 어째서 우스운 일인지 기상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 무시무시하게 째려보았다. 애초에 학교 최장신 둘을 보고 낄낄거리는 것부터 만용이었다.
기상호가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아웃사이더인 그가 축구나 족구 따위를 하러 갈 일도 없었을 뿐더러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것은 심신을 꽤 편안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서고에서 책을 고르다 성준수와 손이 닿았을 때 소름이 쭉 돋은 것이 하필 두 손이 『카르밀라』 위에서 겹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성준수의 손이 그 얼굴만큼 차가웠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 점심 안 먹고 다녀?”
“네?”
“급식실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어느 날 성준수의 예리한 지적은 기상호를 절로 뜨끔하게 만들었다. 그날 그들은 급식실 뒷편의 그늘진 학교 숲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가 여러 알레르기가 있어가지고… 따로 챙겨 먹어요.”
물론 기상호는 이런 지적을 한두 번 들어보지 않았다. 기상호가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어느 학교에 다니든 한 명씩은 있었다. 그럴 때면 알레르기라는 필살기를 썼다. 그것을 무시하는 꼰대들도 있기는 했지만 ― 기상호는 그들보다 더한 꼰대에 가까운 인물일 텐데도 ― 성준수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초콜릿도 못 먹냐?”
“그쵸?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 그냥.”
성준수는 초코우유를 까 마셨다. 기상호가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우유 급식 제도 때문인지 급식이나 매점에 우유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즉 저 우유는 우유 급식으로 나온 것일 텐데, 여태까지 안 마시고 있었다니 조금 의아했다. 육백 년 조금 안 되는 삶에서 드물게 본 6척 이상의 사내로서 빛나는 성준수는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먹고 간식도 야무지게 챙겨 먹을 것 같았다.
“먹을 수 있는 음식 있어?”
“어, 복불복이던데요. 몸 상태에 따라 다르다고 할까.”
“생긴 건 발발 뛰는 강아지 같아서는…”
“네?”
알레르기는 없고 피만 먹는 것이 들통나지 않게 둘러댄 말인데 강아지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기상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 성준수가 기상호의 양 볼을 팍 잡았다.
“주슈해므?”
속눈썹마저 단정한 얼굴, 기상호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어라, 거리가 좀 가까워지는 것 같은―
“… 미안.”
“네?”
성준수는 기상호의 얼굴을 탁 놓았다. 기상호의 대답을 듣기도 전 그는 평소의 차분한 걸음걸이도 잃고 서둘러 가 버렸다.
“설마.”
아무리 성준수라도, 학교 건물 안이 아니어도, 자신 같은 사람에게―
최근 독실한 목사가 나타나 뱀파이어 헌터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상호가 그 소문을 접한 것은 인터넷에서였지만 소문의 출처는 명확했다. 현대에 살아가는 뱀파이어들의 은밀한 커뮤니티. 기상호는 몸이 약했을 뿐 머리는 좋았기에 컴퓨터와 관련된 지식을 바로 습득해 그 커뮤니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커뮤니티의 다른 멤버들과 현실에서 만난 적은 없고 그저 정보만 수집했다.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든 놈을 제외하면 뱀파이어에게 원한은 없었지만 조금 껄끄러웠다.
이번 고등학교는 좀 오래 즐기고 싶었는데.
“… 아니, 그 정도가 아닌데.”
기상호는 자신의 마음속에 성준수가 생각보다 깊게 들어왔음을 것을 느꼈다. 계속 인간들 틈새에 섞여 살면서 남들을 적당히 가까이하고 멀리했고, 가까이한 사람에게도 큰 정을 주지 않았었다. 더이상 속일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떠나갈 때에는 슬펐지만 그 슬픔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은 죽고, 자신은 헌터들에게 크게 당하지 않는 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떠나가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준수에게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께가 시렸다. 건강검진 따위를 간 적이 없으니 그의 신체 내부에 뼈가 있는 것이 맞기는 한지 ― 과거 원수의 목을 쳤을 때는 마늘을 마구 발라 잊어버렸다 ― 뇌와 심장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지만 ‘슬픔’의 감정은 확실히 느껴졌다.
성준수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성준수가 대학교에 가면, 자신도 그 대학교로 따라가서 고백을 하고 싶었다. 사랑하며 시간을 보내다 성준수의 나이가 차면 떠나고 싶었다. 그즈음이면 충분히 즐겼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준수햄.”
그래서 모든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굣길과 야간자율학습 전용 건물로 갈라지는 때, 성준수를 불렀다.
“저, 전학 가요.”
“뭐?”
“그래서… 앞으로 연락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우선 성준수에게 이별을 예고했다.
입시의 마지막 전선인 고등학교에서의 전학이 흔한 일은 아닌 만큼 성준수는 당황스러워했다.
“왜 전학 가는데?”
“사정이 있어요.”
“알려줄 수 없는 거야?”
기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수는 한숨을 쉬고는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어서 고백을 해야 하는데, 기상호의 목이 멨다. 성준수는 기상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후배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태연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 듯한 고요한 눈. 다른 사람이었다면 편안하게 느꼈을 그 눈이 기상호에게는 수렁처럼 느껴졌다. 속절없이 빨려들어 언어를 잃고 마음을 잊어버리는 눈.
“그냥, 감사했다고요.”
기상호는 그때, 성준수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다.
아니,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밝히고 싶었다. 죽음을 잊었던 내가, 기나긴 삶의 잠깐을 니와 나누고 싶다, 아주 잠깐, 한 번만이라도 니를 안고 싶다―
“뱀파이어를 찾았다!”
그 탓일까, 밤이 깊도록 성준수가 공부하고 있을 학교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뱀파이어 헌터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기상호!”
그리고, 성준수가 그를 찾았다.
“그런데 저 어쩌다 쫓아오셨어요?”
“갑자기 전학 간다니까, 걱정돼서.”
“그거 하나 때문에요?”
“문제가 되냐?”
성준수와 기상호는 성준수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사이 기상호의 상처는 다 아물었고 성준수는 자신의 마법으로 둘의 흔적을 지웠다. 기상호는 핏자국을 감쪽같이 없애는 성준수의 마법에 감탄했다.
“저, 준수햄은 선천적으로, 그―”
“나는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진짜요?”
“교회에 들어가면 약해지긴 하는데, 글쎄, 요즘 교회가 제대로였나?”
이어서 성준수는 자신의 과거를 짧게 들려주었다.
그는 조선으로 흘러온 인큐버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모조차 아들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 몽마 중에는 은밀한 놈들도 있다고 하니 ― 여동생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보며 자신은 여동생, 보통 인간과 다른 종족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의 몸에는 원래 마력이라고 불렸어야 할 특별한 힘이 흘렀다. 몽마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을 힘.
그의 관심은 정체성이 아닌 그 마법에만 있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났으면 굵직한 일 한 번 해야 한다는 야심가였다.
“양아버님하고 어머님 호상 치르고, 여동생 시집 가는 것도 보고…, 혼자가 됐지.”
“…….”
“외로웠을지언정 떳떳하게 살았다. 인간답게 살았다고.”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마법으로 의로운 사람들을 돕고 살면서, 성준수는 이름을 남길 수는 없어도 인간답게 살 수는 있음을 알았다. 의학대학을 졸업하고 진짜 의사로 살아본 적도 있었다. 그의 적성은 멀린처럼 사람을 지도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고 확신했다.
“저 계속 고민했거든요. 인간들과 계속 어울려도 되는지.”
“안 될 거 있냐? 뭐 인간을 죽이기라도 했냐.”
“어… 상해죄라면 조금 지어서요.”
기상호는 자신에게 피가 빨린 인간들이 있다는 의미로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범죄자만 골라서 마셨고 그들은 피를 빨아먹혔다는 사실도 까먹었겠지만, 기상호가 인간이었다면 DNA 따위가 남아 상해죄로 잡혔을지도 몰랐다. 성준수는 기상호가 왼손 약지를 접기 전 그것을 잡아 쪽 빨았다.
“코피 터져서 죽은 놈은 봤어도 흡혈귀에게 피 빨려 죽은 녀석은 못 봤는데.”
성준수가 그렇게 행동하며 굳이 코피 터져 죽은 인간을 거론한 이유를 알아차린 기상호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성준수는 피식 웃고 그 얼굴 빨개지는 것이 살아도 되는 이유라고 했다. 세상에 인간만도 못한 놈들이 사는데, 인간 세상에서 인간과 살기 위해 노력한 자신들이 살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전학 안 갈 거지?”
“전학이요? 아아, 참…”
기상호는 아직 전학 수속을 밟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대답했다.
“삶은 참 길 거야.”
“맞아요.”
“어쩌면 인간들이 다 죽은 다음에도.”
캄비온과 뱀파이어가 이 세상에 성준수와 기상호 단 두 명은 아니겠지만 인간 세상에서 다른 이들에게 먼저 밝힐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함께였으면 해서―”
이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마음.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있냐?”
“글쎄요, 준수햄하고 같이 여행 갈까요.”
“바다에 갈 수 있겠어?”
“저 햇볕에도 안 죽잖아요.”
죽음을 잊었고, 앞으로도 떠올릴 일 없겠지만 앞으로 주어질 시간에서 나란히 살아갈 두 존재는 침상을 펴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새벽의 하늘이 그날따라 푸르렀다.
(소장용 결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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