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夢)

다채색의 마음

6421자 / ⚠효월 6.0 이후의 이야기 ⚠창천~효월 멘퀘+용기사 잡퀘+날조드림서사의 감동짬뽕스토리

봄은 길다 by 바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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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이 한 문장으로 완전히 결론지을 수는 없겠지만, 공식적으로 ‘새벽의 혈맹’이 해산된 지금 엘린은 다시 평범한 모험가로서 여기 라자한에 여행을 왔다. 다만 여행이라곤 해도 평소 의뢰를 받던 모험 사이사이의 휴식 시간이 조금 늘었을 뿐. 급한 임무가 생긴다면, 또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걱정 없이 훌쩍 떠나서, 다시 돌아온다. (다행히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엘린은 처음 이 섬에 왔을 때보다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엘린은 이 섬에 왔을 때 샀던 반소매 셔츠와 장치마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입고 바닷바람을 맞고 있다. 기억을 찾아다녔던 나날. 과거를 좇아 걸어간 길에는 사베네어 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은 와본 적 없는, 아버지의 고향. 눈을 감으면, 달빛이 바람을 타고 저에게로 다가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인간을 사랑한 인간신이 위성을 빚으며 담아둔 따듯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냐.”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 사색하던 엘린에게 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익숙하지만,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엘린은 두 눈을 번쩍 뜨고 곧바로 일어나 치마에 묻은 모래를 닦은 뒤 물었다.

“찾고 있었나요? 불러주시면 바로 갔을 텐데⋯.”

무슨 일일까 걱정하며 묻는 엘린에게 남자는 무뚝뚝하게 손사래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기왕 이렇게 같은 땅에 있는데 따로 행동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아,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챙겨준다, 라⋯. 한동안 이어진 대화에 엘린의 청량한 웃음소리와 동시에 쏴아아- 하고 퍼지는 파도소리가 마침표를 찍었다.

“산책이나 해보려고.”

그리고 마음 먹은 자는 새로운 문장을 써낸다.



“모래 위를 맨발로 걸어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 말대로 엘린은 지금 샌들을 벗어 한 손에 들고 파도의 끝자락을 걷는 중이다.

“조개에 긁히면 어쩌려고.”

“치료받으면 되죠.”

“허….”

치유마법도 안 해본 애가 말은 잘 해. 에스티니앙은 하이델린의 존속을 지켜낸 영웅의 발에 생채기라도 남을까 잔소리를 하는 이 상황이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말해봤자 웃긴 거 나도 아는데,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챙겨둬. 그땐 진짜 아수라장 나는 줄 알았다. 애들 우는 것도 다 봤잖아.”

“그럼요⋯.”

엘린은 잠시 그날의 결전, 일방통행과도 같았던 전투광과의 관계 정리. 나아가 라자한에 떨어지던 종말의 재앙을 곰곰이 떠올렸다. 그 때문에 입가의 엷은 미소가 수심에 잠기는 것을 보고 에스티니앙은 괜히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져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잡아.”

넘어져서 옷이라도 젖으면 곤란하잖냐. 엘린은 우뚝 선 채 눈을 크게 떠 끔뻑이며 ‘괜찮아요’로 시작하는 몇 마디의 대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왠지 지금이란 시간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더해서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는 제 고집을 받아준 그를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이곳의 밤은 낮과는 다르게 선선해서 고온다습한 기후에 낯선 엘린에게 친절했고, 그 말인 즉슨 에스티니앙의 투박하고 큼지막한 손에 한 손이 붙잡혀도 불편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옆에서 발맞춰 걷고 있는 에스티니앙은 엘린과 손을 잡은 자신(아마 ‘붙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지만)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 싶은,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서 느긋하게 걸었다. 누군가와 단순히 산책을 해본 것은 언제였던가, 풀어진 긴장에 생각이 많아진 결과 자신이 평소 걷는 속도를 3분의 2 정도는 늦춰야 지금의 엘린과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편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금 되새겼다. 뭐⋯ 대초원에서도 잠깐 둘이서 용을 찾으러 다녔지만. 에스티니앙은 그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다.)

처음 이 섬에 왔을 때는 내리쬐는 태양광이 그들을 반겼다. 이곳 사베네어 섬 파견단은 에스티니앙을 제외하고 신형 에테라이트의 부작용도 겪었지. 가공할 위력의 에테르 멀미에 비틀거리고 주저앉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저에게 다가오던 파트너의 모습은 퍽 우스웠고⋯ 가능하다면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말간 얼굴이 연분홍빛 머리만큼 벌개져 있던 것도 놓치지 않았다. 머리를 묶는 것으로 끝나는 저보다 훨씬 짧은 머리이면서 손부채를 팔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빤히 보면서, 파트너의 고향이 이슈가르드와는 또 다른 환경인 대산맥이란 것이 새삼 실감 났다. 그걸 신경 써서 “부채도 하나 사둘까.” 라는 말을 건네자 습기와 멀미에 시달려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계산은 제가 할게요⋯⋯.” 하는 말을 엘레젠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보다 귀가 두세 배는 더 길쭉한 엘린은 이따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만 속닥이는 버릇이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새삼 자신이 청각이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생각⋯ 중이신가요?”

…아차, 정작 바로 옆에 있는 당사자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뭐 그런 셈이지.”

왜, 할 말 있었어? 에스티니앙은 엘린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아닌데⋯ 걸음이 약간 느려지셔서요. 아 괜찮아요. 제가 맞추면 되니까요.”

그 말에 순간 반신반의한 채로 발밑을 내려다보니 맞잡은 두 손 아래, 정말로 자신이 엘린의 반걸음 정도 뒤에 서 있었다. 자신이 신경 써서 걸음을 늦췄는데, 그것보다 더 느리게 걸을 수 있다니. 에스티니앙은 속으로 감탄하며 “아아 미안.” 하며 사과의 말을 내뱉곤 단숨에 그와 나란히 섰다. 그러나 저를 신경 써서 덧붙인 말에 괜히 속 어딘가가 찜찜해졌다.

“⋯너 말야. 가끔은 단호하게 말하는 연습도 해보는 건 어때. ‘괜찮다’는 말은 안 붙여도 돼.”

많이 나아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무르기 짝이 없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원인이면서 엘린을 타박하는 제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엘린은 귀를 쫑긋 세운 채 크게 눈을 끔뻑이다가 그가 진지하게 혼내는 것이 아님을 알자 “새겨들을게요.” 하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에스티니앙은 ‘이젠 별도 구했겠다, 초보 모험가 티는 완전히 벗었다 이거지.’ 같은 생각을 품은 채 미간을 얕게 찌푸려 물었다.

“음⋯. 그때 다같이 구름바다를 다녔을 때가 생각나서요. 마침 저에게 똑같은 말을 하셨을 때 이젤은 당신을 혼냈고, 알피노는 식은땀이 눈에 보일 것처럼 허둥댔었죠.”

아하, 그 날 말인가. 에스티니앙은 동조와는 다르게 그보다 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나라에 쫓기는 신세였을 적 커르다스에서 처음 마주한 모험가에게 가졌던 첫인상은 ‘무르고 여린 풋내기’였다. 그 허세를 비웃듯 창술로 당당히 저를 쓰러트리고는 걱정스레 살펴보던 얼굴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지.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그 나이 먹도록 여유가 없었네. ⋯미안했다.”

하지만 엘린은 고개를 젓고, 그저 특유의 높다란 웃음소리만 냈다.

“괜찮아요.”

그리고 엘린은 바다 너머로 고개를 돌려 한동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 틈에 비집고 들어온 고요함을 일정한 파도 소리가 도로 잠재웠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상쾌하게 불어왔다. 에스티니앙은 지금 엘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져 다음 말을 해주려나 싶은 생각으로 한쪽 눈썹만 올린 뒤 잠자코 서 있었다. 마침내 엘린이 답을 말했을 때는, 머리 꼭대기 위에서 달빛이 둘을 비추고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전 그 단어의 뜻을 몰랐었어요.”

“뭐?”

에스티니앙은 순간 자신이 뭘 들었나 싶었다. “잠깐, 잠시만.” 하며 고저 없이 내뱉은 말에는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공용어’를 몰랐다는 건가?”

엘린이 눈을 도르륵 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 워낙 이곳저곳 여행을 잘 다니셔서 언어에 무척 능통하시거든요. 해서 제가 어렸을 때 부족에서 전해 내려오는 노래랑 발성은 기본적으로 가르쳐주시면서, 틈틈히 에오르제아 공용어나 다른 언어들도 이것저것 함께 알려주셨어요.”

이 소중한 기억을 떠올려서 참 다행이죠. 엘린은 눈썹을 내려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앞에서 에스티니앙은 엘린이 얼마나 가족을 찾고 싶어 했는지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 아직 저가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제 뺨에 식은땀이 배지 않았는지 바람을 통해 몰래 확인하고 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래. 그럼⋯, 공용어로 ‘물러터졌다’는 말을 들을 일이 없었다는 거네.”

“네. 그랬네요. 아, 그래도 나중에 어쩌다 우연히 배우게 됐어요. 에스티니앙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저를 보았는지 알 수 있었고요.”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진짜로 괜찮아요. 지식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에스티니앙은 되려 기쁘게 웃는 엘린의 얼굴에 괜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만큼 귀하게 자랐다는 건가? 에스티니앙은 스카테이 대산맥에 뿌리 내린 부족의 베일에 싸인 육아 환경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 대신 새로운 의문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산에서 꽤 오래 살다 온 거 아니었어? 독립하고 혼자 살았다면서.”

에스티니앙은 비에라족의 나이를 묻는 것에 거침없었다. ‘매너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별을 지켜낸 영광을 거머쥔 영웅을 비롯한 자신에게 그 정도 알 권리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방금 스스로 타협했다.

“후후, 저 스스로를 ‘어리다’고 표현하기엔 쑥스럽지만⋯, 확실히 많은 편은 아니에요.”

엘린은 에오르제아 생활이 몸에 배어 그의 질문에 기분 나빠할 것 없이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쾌한 기분이 들 만큼 나이가 차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에스티니앙은 머릿속이 시답잖은 생각으로 가득 차기 직전 “그러냐.”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비에라에게 나이가 많지 않다는 기준은 무엇인지, 하면 몇 살쯤 되어야 ‘다 컸다’고 인정해 주는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보다 나이가 얼마나 많을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허나 에스티니앙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으니….

“그때는 아마, 음⋯ 스무살이었네요.”

칠대천룡에게도 알을 깨고 나오는 시절이 있었다는 것.

장수종도 저들과 다름없이 갓 태어나 걸음을 떼는 시기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

에스티니앙은 이토록 당연한 상식이 ‘그런 간단한 것도 잊고 있었냐’며 제 뒤통수를 있는 힘껏 때리는 착각을 느꼈다.


⋯⋯.

그가 타이밍 좋게 입을 떼지 못해서 생긴 정적이 꽤나 벌어졌다. 엘린은 이런 상황에서 구태여 입을 열어 화제를 돌리는 사람이 아니기에 굳건히 그를 믿고, 조금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 배려는 에스티니앙의 생각 회로를 악화시켰다.

비에라족의 수명에 관해서는 이 땅에 널리 퍼져있고, 그만큼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슈가르드에 쭉 살아온 에스티니앙도 성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흘러오는 소문으로 알게 되었으니, 말 다했다. (애초에 구국의 영웅이 ‘바로 그 비에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하얀 궁전을 향하던 엘린은 그 당시의 인원 중 알피노를 빼고는 제일 앳되게 느껴졌었다. 그 당시 스스로 만들어낸 복수심에 마음을 재촉당하던 에스티니앙은 무심하게 그저 모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험가라서 그런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정말로 ‘어리기’ 때문에 풍겼던 분위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장수종(자신이 생각해도 제법 거친 어휘였다)이 사실은 자신보다 알피노와 나이 차이가 더 적다는 소리가 된다. 에스티니앙은 간만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심장을 휩쓸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어⋯. ‘여기’ 기준이라는 거지.”

한참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머리만 팽팽 굴리던 에스티니앙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 부족끼리 달력이 다르다거나⋯ 특별한 나이 셈법이 있는 게 아니고⋯.”

자신이 물어봐 놓고 계속 서 있는 것도 파트너에게 예의가 아니다 싶었던 에스티니앙은 갈피를 잃은 말을 어떻게든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여기’라고 해봤자 현인류는 대부분 같은 달력과 셈법을 쓰기에 엘린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따로 없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음⋯, 혹시나 다른 부족이나 숲에 사는 라나 종족이라면 또 달라지겠지만요.”

정말 그렇다면 비에라에 관한 세상의 지식이 한층 깊어지겠네요. 엘린은 제 파트너의 속도 모르고 흐뭇하게 웃어보였다. 마치 새벽의 현인에게 그대로 옮은 듯한 천진한 태도에 에스티니앙은 머리라도 싸매쥐고 싶어졌다.

“⋯난 그때 서른둘이었어.”

“네.”

“어, 그래.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문제 있나요? 애초에 새벽의 혈맹도 나이를 따져서 만나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제 나이도 안 물어봤던 거 아닌가요? 엘린은 동그란 눈을 큼직하게 감았다 뜨며 그를 응시했다. 에스티니앙은 끄응, 앓는 소릴 내며 하얀 문양이 오목조목 새겨진 그 콧잔등을 톡 건드려주고 싶은 것을 용케 참았다. 당연하지만 대답은 진작에 만들어져 얌전히 포장을 기다리고 있다.

‘왜, 이제 와서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져서 그런다.’

그런데 가볍게 묻고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던 파트너의 나이가 저와 열두 살이나 벌어져 있다니⋯.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도둑놈이 되기 직전인 전례 없는 이 상황에 괜히 초조해져 엘린을 붙잡고 있는 제 손이 땀에 젖어있나 걱정해야 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바다는 평화로이 달빛을 반사하며 물결을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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