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아스] 희망은 진흙탕 속에 005
하나보단 셋이 낫지
# 2세 AU
우주선에서 탈출한 후 셋은 한 자리에 모였다. 마인드 플레이어가 올챙이를 심었다. 올챙이를 없애지 않으면 마인드 플레이어로 변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만은 안 됐다.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고작 올챙이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다니. 정보를 모으기 위해선 제일 큰 도시인 발더스 게이트로 가는 게 빨랐다. 그러나 발더스 게이트는 루핀과 아스타리온에게 있어 최악의 여행지였다. 거기로 갔다간 카사도어의 눈을 피할 수 없었고, 그렇게 되면 이때까지 가했던 고문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올챙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발더스 게이트로 향하기로 했다. 혹시 몰라 루핀은 타브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일단 오늘 밤은 여기서 묵기로 했다.
"마침 가방에 식량이 좀 남았어. 이걸로 배를 채우면 될 거야."
"아, 어머니와 나는 괜찮아."
"응? 배고프면 힘이 안 나."
"우린 됐어."
"흠...그래, 알았어."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한 타브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주머니에 있는 식량을 조금 나누어 나뭇가지에 꽂고 모닥불에 구웠다. 그동안 루핀은 텐트를 세웠다. 안에 아스타리온을 데리고 가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 햇빛 괜찮아요?"
아스타리온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응. 루핀은 괜찮았니?"
"아무래도 무언가가 이변을 일으킨 것 같아요."
"그래...이상하네..."
아스타리온이 자연스럽게 루핀을 자신의 목덜미로 이끌었다. 루핀이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배는? 밤까지 기다려보세요. 타브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루핀이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다. 루핀을 먹이려고 하는 아스타리온의 제안을 끝끝내 사양하며 아스타리온에게 흡혈을 권했다. 마지못해 아스타리온이 멧돼지에 송곳니를 박았다. 오랜만에 먹는 숙성된 피였다. 쥐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정신 없이 먹는 아스타리온을, 루핀이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날 본격적으로 셋은 발더스게이트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고블린과 대치하는 티플링과 드루이드를 만나고, 그들의 고민을 들었다. 타브는 티플링의 편을 들어 위협이 되는 고블린을 퇴치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나치게 착하다 싶은 행동에 루핀은 혀를 내둘렀다. 여정을 진행하며 루핀은 아스타리온의 숨겨진 전투 실력에 놀랐다. 며칠동안 잘 먹어서 그런지 아스타리온의 신체는 옛날보다 건강해졌고, 적의 목을 따는 데 능숙한 손놀림을 보였다. 숙련된 솜씨에 타브가 아스타리온을 칭찬했다.
"와, 대단한데.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
"옛날에, 조금..."
"이렇게 뛰어난 로그였다니. 다시 봤어."
저렇게 즐겁게 얘기하는 아스타리온을 본 적 있었는가. 카사도어의 저택에서 한 번도 웃은 적 없는 아스타리온의 미소가, 저리 환히 빛나고 눈부실 줄이야. 아스타리온의 새로운 면모를 보면서 루핀은 착잡한 심정을 속으로 억눌렀다. 어쩔 수 없이 발더스 게이트에 간다지만, 지옥 구덩이에 자진해서 들어가는 꼴이었다. 그럴수록 내가 더 잘해야 해. 다행히 지금은 동료가 생겼다. 아스타리온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든 모두 쓸 생각이었다. 어떤 더러운 수라도 모두 쓰리라.
고블린을 처리한 밤, 아스타리온이 타브를 불렀다. 타브는 마시던 술잔을 든 채 아스타리온에게 갔다.
"사실, 말 안 한 게 있어서."
초조해하던 아스타리온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나, 뱀파이어야..."
속여서 미안해. 떠나라고 하면 떠날게. 대신 내 아들만큼은 데려가 줘. 모험하는 동안 야영지에 이변이 있었다. 야영지 근처에 놓여 있는 피가 모조리 빨린 채 굳은 동물 시신들을 보고 타브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스타리온과 루핀이 자신의 목덜미를 노린 적이 없기에, 타브는 둘의 정체가 뱀파이어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동물론 충분했어?"
아스타리온이 양손을 마주 잡고 꼼지락거렸다.
"...주인님이 지성체 피는 못 먹게 하셔서..."
"주인님?"
"스폰한텐 뱀파이어 주인님이 꼭 계시는데...내가, 스폰이거든."
"그랬구나."
잠시 말이 없던 타브가 아스타리온의 손을 잡았다.
"내 피라도 먹을래?"
아스타리온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주인님이..."
"여기엔 없잖아. 잘난 주인이란 놈이."
정적이 흘렀다. 확실히 우주선에서 벗어난 뒤로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던 카사도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백 년 만에 상쾌한 머리로 다닐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알...았어. 그렇지만 여기선 좀 그래."
타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리온이 루핀에게 잠깐 타브와 어디 좀 다녀오겠으니 그동안 몸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타브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으므로 루핀은 순순히 아스타리온을 보내줬다. 그리고 티플링들과의 시간을 즐겼다.
둘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티플링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들어간 숲은, 아름다운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아스타리온이 잠시 넋 놓고 달빛을 만끽했다. 새로운 문물을 접한 듯한 초롱초롱한 눈에 타브가 참지 못하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가끔 그렇게 넋 놓고 있더라."
아스타리온은 가끔 처음 보는 물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처음 장비를 주웠을 때, 티플링을 봤을 때, 고블린을 봤을 때, 심지어 걷다가 햇빛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아스타리온이 달을 가리켰다. 신기하잖아. 바깥엔, 정말 예쁜 것들이 많아. 바깥이라니? 주인님의 저택을 벗어나본 적이 없어. 나한텐 바깥 세상은 사치야. 타브가 아스타리온을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멍하게 달을 바라보던 아스타리온이 뒤를 돌았다.
"그, 내가 사람 피를 먹는 건 처음이라..."
아스타리온이 어색하게 타브의 어깨를 잡았다. 어디에다 송곳니를 박을지 머뭇거리다가 적당한 위치를 찾아서 송곳니를 박았다. 흡혈은 아릿하고 서늘한 감각이었다. 피가 몰려 아스타리온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갔고, 생명줄인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은 위험을 알리는 뇌의 신호를 완벽히 무시했다. 어느 정도 흡혈한 뒤 아스타리온이 입을 뗐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타브가 손으로 닦았다.
"어때?"
초점이 없던 눈에 생기가 미약하게 돌아왔다.
"조, 좋아.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앞으로 배고플 때 말해. 내 피를 나눠줄게."
"그건 염치가 없는데..."
"우린 동료잖아."
동료. 아스타리온이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다시 한 번, 타브가 아스타리온의 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창백한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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