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어 익히리라
(1)
한없이 나를 짓누르던 서울의 공기가 사라지고, 색다른 공기가 나를 감쌌다.
“부벽정을 올라와 시흥을 못 견디고 읊으니……’
우――, 우――, 우――,
강물이 기괴하게 울었다. 공포에 질린 채 급하게 감았던 눈을 뜨니, 어두운 나무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스슥!
빠르게 날아가는 검은 형체가 수풀을 요란하게 스쳤다. 한순간, 새가 하늘에 뜬 커다란 달까지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흡,
하고 숨을 죽이자 괴상한 소리가 여러 개 났다. 잘 들어보면 여자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비 내릴 때 들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아냐, 그게 아냐. 그래, 이건 그 어둡고 끝없이 몰아치는 동작 대교 밑의 물살 같았다.
“오직 강물만이 옛날 그대로 울며 울며 도도히 흘러서 바다로 향하누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갑자기 변한 풍경에 정신을 도무지 차릴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여자가 위협적으로 나를 추격했던, 정말로 조금 전에. 진짜로 정말로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직후, 몸이 생각에 지배당해 버린 것처럼 갑자기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거짓말, 이런 건 거짓말이야……고르지 않은 숨을 최대한 빠르게 가다듬으려 했다. 그러려고 했지만……오랫동안 침대 위에서만 뒹굴고 핸드폰만 보는 삶이었기에 몸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더니, 미친 듯이 요동치는 호흡을 잡지 못하니 머리가 미쳐 돌아갈 것 같았다.
결국, 유아퇴행한 것처럼 나는 밑바닥의 흙먼지 쥔 손을 꿈지럭 꿈지럭 펴고 접기를 반복하며 훌쩍였다. 아니, 이건 자연스러웠다. 조금 기분 나쁜 걸로 침대 위에서 훌쩍거리면 엄마가 와서 다 해결해주었으니까.
“집으로 보내줘……엄마아……흐어엉…….”
“모든 건 천년을 떠안아 옛 모습 그대로지만, 강산이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성곽은 허물어졌구나.”
그제야 사람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그래, 뜻은 이해할 수 없지만 명확하게 한국어로 말하는 저 목소리!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 위협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차분하며 지적으로 보이는 저 목소리! 일 갔다 오며 나를 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난 곧장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그 끝에는 달빛이 밝게 비추는 오래된 누각이 보였고, 그 위에는 사람 하나가 허공을 향해 시를 외우는 중이었다. 아, 살았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만 같은 그 구세주에게 곧장 뛰어가기 위해 땅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선비가
벌떡!
일어나더니 흥바람을 못 참고 온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며 춤추었다. 나무판자가 어긋나 삐걱거리는 소리, 더욱이 차가워진 주변 온도, 언젠가 본 일본 괴담 프로그램의 귀신 같은 저 움직임……여기까지 생각하자 온몸의 피가 싸악 식었다.
거기에 ‘그 여인’도 보이자, 머리까지 제대로 새하얗게 돼버렸다.
“달도 밝고 바람도 맑아서 시흥이 시들지 않는구나.”
나를 죽이려고 쫓아오지만 않았더라면, 대낮의 서울에서 보았더라면 흘끔거렸을 오밀조밀한 얼굴인데. 그러나 그 아름다운 일본식 미모에 한탄할 겨를이 나에겐 없었다. 공포에 삼켜진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분명 서울에 놓고 왔을 터인데? 아니, 아니, 그러면 이 여자, 나와 함께 공간을 넘은 거야? 이 구세주란 작자는 도움을 주고 싶었다면 나만 도와주었어야지 어째서 저런 여자를 끌어들여서……!’
내가 유난 떤다고 느껴질 정도로 여인은 태연했다. 그러나 본인도 당황은 했는지, 그 눈동자를 재빠르게 움직여 주변을 보는 듯하였다. 그러다,
꼬르르륵!
밥 달라는 엄청 큰 소리가 들렸다.
……진심인가? 이런 상황에서 배가 고파?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긴장했었는데, 그게 확 깨져버렸다. 쉬지 않고 들리는 소리에 배를 찬 눈으로 바라보곤, 그 거죽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뭐야, 내가 배고픈 거 맞나? 주변에서 계속 배가 밥 달라고 우는 소리는 들리는데 내 배는 요동치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떨리는 눈이 소리의 근원지를 조심히 쫓았다.
아, 이거 최악이다. 배를 주려 쥐며 창백한 얼굴을 찡그린 여인이, 누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도 그럴 게, 바람 없이 머리카락이 저 정도로 흔들릴 수는 없었으니까……. 입을 꾹 다문 채 상황을 보려 했는데, 저게 뭐야. 자아를 지닌 것처럼 공중에 떠다니던 머리카락이 저 스스로 뒤통수를 파헤쳤다. 그리고 여인의 뒤통수에서……두툼한 입술을 지닌 입 하나가 튀어나왔다.
“……와…….”
이 여성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명백히 깨닫자마자 다리의 힘이 풍선 바람 빠지듯 터져버렸다. 뿌요뿌요 터지는 것처럼 연이어 벌어지는 일에 머리가 생각하는 걸 멈췄다. 간신히 건진 목숨이니 빨리 도망가라? 배도 부른 소리다, 기절하기 일보 직전인데.
그렇지만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 악물고 잘 버텼다. ‘도망가지 못하면 신음이라도 참아야 살 수 있다.’ 방구석에서 섭렵한 온갖 판타지 매체로 배운 밑바닥 본능 덕이었다. 마무리로 쭉정이 같은 다리로 기어서 수풀에 몸까지 숨기니, 판타지 세계의 지나가는 엑스트라1이 된 것만 같았다.
“이 밤에 귀인이 모시는 손님이 이 나라는 것도 어떠한 운명인가 보오.”
[……]
“근처 절의 스님이 나의 소리를 의아하게 여겨 찾아왔다고 생각했더니 전혀 아니었구려.”
울고 웃고, 미친 사람 같이 처량하게 울었던 선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들어도 그가 엄청난 슬픔……유식하게 말하자면 한(恨), 그래, 그런 거를 꾹꾹 억누른 채 말한다는 것 즈음은 알 수 있었다.
쪼르르,
맑게 물을 따르는 소리에 나는 수풀 위로 고개를 빼고, 누각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폈다.
“고구려가 흥망성쇠를 다했던 부벽루까지 올라온 건 별 뜻이 없었소. 그저 한 서린 울적한 마음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을 뿐이지.”
[……]
“……”
[……]
“……혹여 지금 나의 말이 낭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면 용서해 주구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이다지도 가까이에서 여인과 면을 마주한 적이 거의 없다오.”
[내가 입을 다물었음은 나의 나라에서는 금언, 금식이 여자의 미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달빛 아래에서 을씨년스럽게 서 있던 누각은, 누군가가 오랜 세월을 들여 부지런하게 닦고 광낸 것처럼 번쩍거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눈이 멀어버리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먼 수풀에서 누각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니 대들보도 처마도 그리고, 그으……하여간에 알 수 없는 다른 많은 것들도 모두 새 물건처럼 반딱거렸다.
[불편해하지 말고 나의 앞에 앉으시지요. 옆 나라에 사는 고귀한 이여.]
“오늘은 내가 정말 귀신에게 홀렸나 보군.”
[우리나라 말로는 ‘가미가구시(神隱し)’라고 합니다. 한 많은 요괴가 사람을 홀려 데려가는 걸 말하죠.]
“그렇다면 왜에서 온 낭자가 이곳으로 나를 초대한 이유는 가미가구시를 하기 위해서란 말이오? 내가 있는 곳이 정녕 부벽루가 아닌 다른 곳인가?”
[그저 그 시의 뜻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미력한 몸의 일필(一筆)이라도 허락하신다면 기꺼이 답가를 써드리고 싶습니다.]
“허허……”
[아이야, 선비께 술을 한 잔 따라드려라. 넘치지 않도록, 취흥만 즐길 수 있도록.]
그래, 저거 진짜 귀신 맞다니까. 우리는 귀신에 홀린 거라고. 왜냐하면, 귀신만 저런 모습을 하니까. 나는 초조함에 툴툴거리며 선비를 곁눈질했다. 내 예상과 달리 선비는 곧바로 여인의 뒤통수에 먹혀 죽지 않았지만, 뒤통수에 입 달린 여자를 앞에 둔 이상 그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선비 움직이는 꼴이 귀신 닮아서 꺼림칙했었는데, 멀쩡하게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그는 이 상황에서 믿을 만한 사람 같았다. 그런 그가 곧바로 정신을 차려 수풀 뒤에 숨은 나를 발견하고 함께 미지의 세계에서 특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고 갈등을 겪다가도 화해하고 결국 서로 사랑하고 2세를 만들고……엥, 나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아무튼. 음흠. 아직도 눈앞에 앉은 사람을 홀린 듯이 바라보는 선비에게 눈치 주는 나는 불안함에 다리를 달달달 떨며 상황을 조용히 살폈다.
누각 위에 올라간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은 하나 같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어린아이로부터 술을 건네받은 선비는 피붓빛이 희고 깔끔하게 생겨, 가까이 다가가면 은은한 향기를 풍길 것만 같았다. 눈매는 또 어떻게 그렇게 생길 수 있는 건지, 곧으면서도 얄상하게 뻗은 선에 촘촘히 붙은 속눈썹이 중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 심장이 뛰, 신비로웠다. 선비는 이제 그만 봐야겠다. 그 사람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선비에게 술을 권하는 어린아이들은 제 나잇대처럼 빵실빵실한 볼에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혀짧은 소리로 에떼떼거렸지만, 모시는 분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듯이 애써 근엄을 지켰다.
음, 여기까지는 좋아. 마지막……시동 둘이 모시는 높은 분이 문제지. 조금 전, 뒤통수에 달린 입을 화안히 젖히고 다가간 여자. 그 사람이 누가 보아도 높은 분이 되어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젠장, 뭐 저딴 게 저런 취급을 받는 거야……’
“송구하오나, 당신의 성씨와 족보를 듣고 싶소.”
[요괴의 이름은 어떤 연유로 듣고 싶으신지요. 끊임없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나로서 사람과 부대껴 오랜 세월 살았으나, 나를 본연적으로 지칭하는 말은 하나였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난 저 여자가 멀쩡하게 앉아 평범하게 말하는 풍경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남을 홀리는 면상이라고 할지라도 느껴지는 아우라는 공포 그 자체에 느낌도 기괴해서 전혀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저 멀리 도망가버리고 말지.
더 생각해 보니 선비도 이상했다. 허우대 멀쩡한 데다 본인이 홀린 건지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이면서 왜 저런 사람을 앞에 두고도 도망치려 하지 않는 거지? 나의 역겨움, 혐오를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그게 당연하지만――오히려 귀신과 함께 술과 음식을 나누어 마시며 본인이 외웠던 시 뜻을 열심히 풀이하기 바빴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라도 알려주시오……!”
돌연, 점잔 빼기 바빴던 선비가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여인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손을 붙잡힌 그는 당황한 얼굴로 선비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걸 제지하는 건 요괴를 보필하던 시동 두 명이었다.
쯧쯧쯔,
월하노인도 혀 차면서 돌아서겠다. 그들 느끼기에는 달아오르던 여남의 만남이 식은 게 내 눈에도 보였다. 큼큼큼, 어흠, 큼, 그렇게 되도 않는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하며 어색해하는 선비 꼴이 참……없던 정도 다 털리는 기분이었다.
[……나의 정체를 밝혔는데도 도망가지 않는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사려 하였더만, 그런 이유였습니까.]
“……”
[선비님을 위해 나를 잊는 게 좋습니다. 나는 요괴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여인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이 나는 걷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을.]
……뭐야, 저 얼굴. 내가 숨 한 번 마시고 뱉는 사이에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얼굴 잔뜩 붉히던 선비가 저렇게 슬픈 눈으로 상대를 바라볼 리 없었다. 단순히 연민하는 게 아닌, 남의 아픔을 자기 고통처럼 여기고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쏜 마법에 걸린 것처럼 선비만 힘들어하고 선비만 슬퍼하였다. 여인의 양옆에서 시중을 들 뿐인 시동과 나는 멀쩡하였다. 저런 거에 울 게 뭐람……그런데 우는 얼굴이……
잘생겼다. 미치도록 잘생겼다. 없던 정도 돌아와 쌓일 정도로 저 신비로운 느낌이 잘생겨서 미칠 것 같다.
[……후. 그러나 나를 그다지도 흠모한다면……허무함을 담았던 그 시에 나의 이야기가 답가로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이야, 먹을 가져오너라, 먹을 갈거라, 붓을 건네다오……시동 두 명이 누각 위를 바쁘게 쏘다녔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둘이 누각을 떠나는 걸 본 적이 없는데도 여인 옆에 주문한 물건이 착착 쌓여갔다. 믿을 수 없는 이 풍경에, 나는 눈을 비볐다. 아무리 보아도 그곳에 있는 건 사람을 해치려는 요괴가 전혀 아니었다. 날 해치려고 했다면 진즉 해쳤을 거고, 저쪽에서 울상 지어서 눈가가 빨개진 탓에 아름다운 선비도 마찬가지로 해쳤을 거니까. 저기에 앉아 붓을 쥐고 있는 건……그러니까, 그, 뭐시기. 그저 자신을 사랑하여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을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알지 못할 절절한 사정이 있으니까 그가 자신에 대한 감정을 버리길 답가를 건네고, 작별할 수 있기를 바라는……아아, 그래, 이제야 좋은 말이 떠올랐어. 저건 ‘선녀’였다.
[그대의 시에 감명하여 길에서 얻어들은 것들을 적었습니다. 부디 날 잊을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랍니다.]
선비의 앞에 답가를 밀어주고 고개를 든 여인은 인상이 확 달라져 있었다. 언제부터 저랬던 거지? 내가 눈 깜빡한 사이에 여인을 밀어내고 저 자리에 앉았나. 옷이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바닥을 받치고 일어난 여인의 몸이 돌연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필하던 시동 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공기로 변하는 것처럼 점점 옅어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변 풍경이 내 눈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먼 하늘에 해일이 덮쳐 오는 것처럼 주황빛 구름과 검은 하늘이 뒤섞여 풍경이 오묘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말이 딱히 안 떠오르는데……아, 맞다. 또, 그리고 밤 내내 한 번도 안 울던 까치가 새벽을 알리는 것처럼 바삐 까악깍깍 울어댔다. 나는 무거운 눈을 깜빡이며 숨을 들이켰다. 분명 졸려야 하는데 졸리지 않아서 한 번 해봤다. 분명 새벽인 게 맞는데……이 새까맣던 산속에 찾아오는 새벽이란 게 어색한지 아직도 졸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주변 환경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분명 살기 가득 차서 닥치는 대로 씹어먹을 것 같던 한 많은 귀신이 갑자기 멀쩡히 말하고, 시도 적어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게 행동하잖아. 죽을 뻔했는데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으니 용서하라고? 난 아직도 온몸이 쑤시고 다리는 상처투성이인데? 그러나 내가 그 선녀를 황망히 다시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가지, 마시오.”
[미안합니다. 때가 되었으니……나를 놓아주세요.]
“가지 마시오! 가지 말아주오!”
새벽 먼동과 함께 선녀의 퇴장에 정신 놓은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앞에 놓인 답가는 읽지도 못한 선비는 사라지는 여인을 애처롭게 외쳤다. 그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고 싶은 듯, 그는 손을 뻗어 그 발끝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시동이 건넨 술기운이 그제야 돌았는지 기절하는 사람처럼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아, 잘생긴 사람이 저러는 건 정말로 보기 좋구……
‘잠깐, 당신이 쓰러지면……안 돼! 날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줘!’
와장창,
선비가 쓰러지며 시동이 가져왔던 술병을 건드렸다. 그냥 쏟아지기만 했으면 수습하기 쉬웠을 텐데, 병 자체가 깨져 술이 파편과 함께 누각 위에 흘렀다. 저 술병에 든 게 저렇게 많았나? 아무리 보아도……. 내 이런 의심은 관계없다는 듯 술은 계속 흘러 땅바닥을 적셨다. 새벽빛을 받아 반짝거리니 신기하게 여긴 까마귀가 누각 위를 팽팽히 돌다가 내려와 쪼아 마셨다.
“잠깐, 저 좀,”
이 기묘한 광경이 끝없이 펼쳐지는데도, 난 수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밤이 아니라 아침이 온다고 해도 이곳은 정말로 무서웠다. 나를 죽이려고 하던 귀신이 사라졌다고 해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내 목을 조이는 느낌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구명 튜브라도 붙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내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사람은 저 선비 하나뿐이었다. 정말 저 선비가 날 서울로 다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아냐, 일단 ‘선’해 보이니까 어떻게든 붙잡아야 해. 일이 잘못되면, 그래, 나중에 다시, 다시 생각하자…….
“정신, 차리, 세요.”
내 모습이 안 보이나, 팔을 휘적거리며 선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선비는 내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듯 볼을 짓무른 채 쓰러져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무서운 생각이 덜컥 들었다.
“전 도움이 필요……해요. 절 도와주……아니, 살려주세요!”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대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말할 때마다 까마귀가 소리 지르는 바람에 내 목소리가 매번 묻혔다. 잘못하다가, 진짜 큰일 난다.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다시 하얘졌다.
“살, 살려주세요, 제발! 집으로 컥, 돌려 보내주……세요! 비록 이룬 것……도 없고, 엄마에, 게 매번 폐 끼……치는 방, 구석 폐인……, 헉, 큭, 폐인, 이지만 그래도 살려, 주세요!”
쉼 없이 나의 불쌍한 사정을 말했다. 급하게 말한 탓에 목이 메어 한 번 더 말해야만 했지만, 선비는 일어……나지 않았다. 돌겠다, 아니, 이미 돌아버렸다. 손을 휘적거리며 말한다면서 중얼거리는 내 꼴이 귀신 같았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선비가 엎드린 누각이 검은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았다.
“……엄마아…….”
나의 응답에 신이 반응한 듯, 갑자기 내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젠장. 이럴 거면 내 응답 따위 들어주지 마세요. 누각에 엎드려 내가 깨우려 했던 선비가 초라한 방안에서 시름시름 앓는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수려한 얼굴이 보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망가졌다. 그의 옆에는 내용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쭈글쭈글하게 말려 들어간 종잇장이 열 내리는 물수건처럼 놓여 있었다. 저것은 분명……누각에서 선녀가 건넨 종이였다.
누구 꼴이 더 한심한지 배틀이라도 펼쳐진 건가. 내 말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하소연하기, 벌서스, 고운 얼굴 다 망가뜨리고 사랑에 죽어버리기. 내 꼴도 한심하고 저 꼴도 한심해, 나는 그 방 안 모퉁이에서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쥐고 서 있었다. 무릎은 흙과 핏덩이로 더러웠고,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지친 다리는 아직도 후들거렸다.
“……거기 누구 있소……?”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어깨를 떨었다. 말하는 거 들어보면 나의 인기척을 느낀 것 같은데, 알아채려면 좀 더 일찍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저 기시감에 그런 거겠지. 그렇게 안심하는 순간, 목을 돌린 그의 멍한 눈동자가 나를, 정확하게 보았다. ……그냥 기절해버리고 싶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 꺼지기 직전 불꽃이 가장 화려히 타오른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요괴와 사랑에 빠져서 죽어버리는 주제에 여전히 그 정신만은 날카로운 것 같았다. 난 그저 서 있었는데 어딘가, 가슴 깊은 곳이 그 시선으로 후벼지는 것 같았다.
직후, 선비의 모습이 다시 검은 배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젠장, 젠장……! 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오!”
나는 그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아무것도, 모르겠어. 계속 터질 듯이 심장이 울렸다. 가슴을 찢고 심장이 나올 것 같은 고통에 몸을 웅크렸다.
‘집에, 가고 싶어. 가고 싶은 건 맞는데……’
……이상해. 이거, 이상해. 발끝부터 열이 차오르더니, 갑작스레 이마로 치솟아 올랐다. 덕에 미칠 것 같았다. 전신이 뜨거워서, 울 것 같이 눈이 뜨거워서 숨을 몰아쉬었다. 아, 젠장, 젠장, 이게 뭐야, 이런 건 싫어. 아픈 거 싫어, 그치만…….
눈꺼풀이 한 번 덮였다 뜨이는 그 사이, 아까 본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왜 나라 귀신은 성불과는 거리가 먼, 원념으로 가득 찬 무언가라오. 결이 다른 ‘기괴’ 천지인 이곳에서 ‘요괴’가 힘쓰는 것도 결코 좋은 볼거리는 아니지…….”
“그,”
“마침 우리나라는 기괴의 맥이 한 번 끊긴 터라 그에 대한 기록이 절실하고, 성불이 힘든 왜 나라 요괴가 기괴의 나라에 필연적으로 상륙해야 한다면……난 그것을 기록 속에 가두어 쓰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이 이상한 공간에서 점차 가까워지던 그 소리는, 내 등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수어 번 숨을 고른 나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수풀에 숨어서 무엇을 보았소?”
“……여인의 답, 답가?”
“그게 내가 행하는 ‘성불’이라오.”
본 건 딱 턱선까지였다. 딱 턱선까지만 봤는데 대뜸 질문이 날아왔다. 그리고 멍청하게 답했다. 그 사람은 큭큭 거리며 가볍게 웃더니 옆구리에 낀 무언가를
촤르르,
펼쳐 보여주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한테 먼저 물어놓고, 비웃지 마.
페이지가 닳아버릴 정도로 오래된 책, 굳이 냄새를 맡으려 하지 않아도 지독한 내음이 느껴졌다. 으, 이런 걸 도대체 왜 보여주는 거야. 이게 아까 말한 성불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데. 알지 못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어……눈을 얇게 뜨려 했는데, 놀라서 커졌다. 거기에 새겨진 그림에는 더럽고 추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 여인이 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새벽에 하늘로 떠오를 때 보았던 선녀인 채였다. 이 위에는 한자 여섯 자가 제목처럼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드문드문 그걸 읽었다.
“취유……부, 벽……무슨, 기…….”
“<취유부벽정기>, 혹시 들어본 적 있소?”
고개를 저었다. 제목이 한자로 적힌 걸 읽어본 건 중국 소설밖에 없는데. 지금 취유부벽뭐시기 읽을 수 있던 것도 그 덕이고.
“부벽루라는 누각에서 만난 선비와 선녀의 하룻밤 이야기라오. 선녀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서 곧 하늘로 돌아가야만 했지만, 선비는 그 모습을 사랑하여 앓다 죽지.”
“그럼 내……가 아까 본, 건……”
“귀신을 그 선녀에 대입시켜 하늘로 돌아가게 하는, ‘성불’을 본 것이오.”
책 속에만 기록되었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가슴이 덜컥거리며 한 번 더 숨이 막혔다. 이거야, 이거구나. 왜 갑자기 이렇게 아픈지 알아차렸어.
“내 태극을 쪼개어 오십 기록은 모았다만, 남은 열네 가지가 다루기 어려워 그런데 좀 도와주지 않겠소?”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위로 꺾었다. 아까, 내 앞에서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죽어가던 선비였다. 왠지 모르게 상투 틀었던 긴 머리카락이……묶여있고, 짙은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은 채였지만……. 사람 그렇게 많은 서울에서도 돋보일 미모……아냐, 미치겠군. 중요한 건 그 지점이 아니었다.
‘누군가가……나에게 도움을 청했어.’
꿈인지, 생시인지. 가슴이 더 쿵쿵 뛰었다.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청했어, 도와달라고 부탁했어! 난생처음인 일이다. 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선비의 모습을 보았다. 무리해서 고개를 위로 꺾었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내가 흥분하여 말 못 하는 그때에도, 선비는 나에게 보여주었던 책을 품에 고이 접어 넣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곤……그 미성으로 웃었다.
“어차피 나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면 이제는 다른 것은 생각도 못 할 것이네만.”
아, 정신 놓을 뻔했다. 얼굴에 홀려서 무턱대고 네네, 님 말이 다 맞습니다, 님 말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굽신거릴 뻔했어, 젠장. 팔뚝에 오소소 돋은 닭살을 쓸어냈다. 쓸모없는 나의 쓸모를 찾았다는 데에 마냥 기뻐서……. 그렇지만 가슴은 여전히 뛰었다. 큼흠,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난 그의 눈동자를 노려보듯이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눈을 부라리면 저쪽에서도 내가 마냥 당하기만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겠지. 그리고, 보수 없는 봉사는 질색이야.
“그러면 당신과 함께……하면, 전, 무, 료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 나요?”
‘무료하다.’라는 단어 뜻을 곱씹듯이 선비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나 설마 너무 어려운 말 썼어?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피곤함에 쩔어 바닥에 눌어붙은 발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여러 귀……신, 아니, 요, 괴! 요괴를 접, 하면서……내가, 제가 성불, 시, 킬 수 있는……거죠? 그런 거죠!”
선비의 고개가 한 번 더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단번에 이해했구나.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나에게 무언갈 말하는 것도, 어떤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를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덜컥, 무서워졌다. 가슴이……너무 오래 뛰어서 죽을 것 같아. 나를 내려다보는 저 눈도, 무서워. 나는 천천히 기어가 그 발목을 붙잡았다. 이러지 않으면 그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할게요. 전, 그, 걸 원해요. 저에게, 저에게……그 경험, 을 주세요……제발.”
선비는 답하지 않았다. 침묵이었다. 답하지 않았다. 더는 그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차차 식어 심장 쑤셨다. 아파 죽겠다. 왜 엄마 말고 다른 사람은 모두 나에게 이런 식으로 구는 건지……. 이를 악물곤 구차하게 다시 ‘제발.’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평생 붓만 잡은 것 같은 곱고도 앙상한 손바닥이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좋소. 보여드리리다.”
그 말 한마디에, 온몸을 무겁게 휘감았던 사슬이 녹아 사라졌다. 몸이 가벼워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이상한 기분. 그래서 있는 힘껏, 할 수 있는 한 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보랏빛, 물빛, 어둑한 밤하늘 어딘가를 닮은 듯한, 예쁜 눈동자야. 그 눈으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새까만 채였다.
선비가 그의 손을 나에게 갖다 댄 건지, 내가 그의 손을 잡은 건지. 벅차오르는 감정에 상황 분간도 잘되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약속, 한 거예요. 어른이니까……어른이라면, 약속, 지켜야 해요.”
“허허허, 웃는 걸 보니 즐거운 모양이구려.”
난,
팔괘를 엮은 기록물의 ‘왕’이 되는 그 손을,
있는 힘껏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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