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nature take its course

天衣無縫 천의무봉 (2)

HitMan by Jack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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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man 연구원 실험체 au
*본 내용은 허구이며, 사실 고증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자살, 살인, 가스라이팅, 고문, 폭행, 잔인한 묘사, 유혈 등 트리거 요소가 있으니 감상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中-


2. 狂聞炅

이곳에는 '간단한 검사'라는 명목으로 진행되는 일이 아주 많았다. 공식적인 투약 일정은 실험으로 분류되어 조금 더 무거운 취급을 해 주었지만, 연구원 개개인이 추가적으로 진행하는 실험은 그렇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차트에 기입을 하기는 했지만 그뿐. 서로 개입이 금지되어 있는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문경은 모든 종류의 실험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제 왼쪽 눈과 관련된 것들을 가장 싫어했다. 결핍이 있는 곳에 '그것들'이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나. 성공한 개체도 없는 주제에 말은 참 쉽게도 했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주 방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괜히 연구원들의 눈에 띄여 어떠한 탐구욕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종종 지혁이 그를 끌어냈고, 우현이 그를 어르었으나 문경은 제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철새마냥 다시금 제 방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어썼다. 누워서 몇 번이고 제가 했던 선택을 후회하면서,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리화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새로운 사람이 온 지 벌써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지났다. 트로이라고 했었지. 저처럼 실험 내용 같은 걸 전혀 모르고 왔는지 프록시마의 본체를 보고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예상 외로 일이 크자 원래 존댓말을 쓰던 설지혁, 스지, 샬롯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본래 성격을 드러냈다. 문경 역시 호되게 데인 터라 첫날 느꼈던 동정심이 싹 가셨다. 그는 속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순수한 호의를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거니와 악의를 삭히려는 노력조차 없다. 그는 어느 날엔가 저도 그런 것에 물들어버릴까 두려웠다.

문경은 순서로만 따지면 샬롯 다음으로 이곳에 왔으니 터줏대감 축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아직까지도 익숙한 것이 없었다. 주사를 놓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왔고, 간단한 MRI를 찍는다 하더라도 몸이 구속되는 것이 싫었다. SiN사는 점잖은 폭력을 휘둘렀다. 인권을 짓밟는 그 사소한 행위들을 남들은 그저 그렇게 넘겼을지 몰라도 문경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 의지로 어찌할 수 없다는 점에- 그는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꾹 참았다. 채혈을 하기 위해 왼팔의 소매를 어깨 끝까지 걷어올린 상태였다. 우현이 그의 팔을 얇은 고무 튜브로 세게 묶었다.

"문경 님, 무슨 일 있어요? 또 눈가가 붉은데. 이번 주사는 진짜 안 아파요~ 알잖아요, 채혈 주사가 제일 덜 아픈 거."

"그,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에요."

"울적한 일이 있으면 저한테라도 말하는 게 좋아요. 속에 그런 거 쌓아두면 병 된다잖아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기분 나쁜 따끔함이 몸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붉은 액체가 투명한 관을 타고 몸 밖으로 새어나갔다. 문경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현은 이곳에서 몇 안 되는 선한 이였으니 이 정도의 불안함은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 우현 씨-"

혈관을 한 번에 찾았다며 좋아하던 그가 문경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하던 것을 멈췄다.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의 미소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가슴팍 한 가운데에 달랑거리는 키카드가 보였다. 실험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황금 열쇠. 이 건물의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해주는 매직 티켓. 그것이 저와 그의 처지를 뼈저리게 일러 주고 있었다. 그가 지금 뱉는 말 역시 '간단한 심리 검사'의 일종으로 분류되어 차트에 곧이곧대로 쓰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왈칵 두려움이 문경을 덮쳤다. 설사 우현이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제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그를 의심하게 될 터. 각문경은 외로운 인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군가를 불신하고 싶지 않았다. 

"…시, 실험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진행되고 있나요? 그, 그래도 나도 여기 들어온 지 좀 됐고 하니까 구, 궁금해져서. 어,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 싶은 마음도 있고요."

말을 더듬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하려던 말을 갑작스럽게 바꾼 탓인지 입술이 더 뻣뻣하게 움직여 이상한 부분에서 발음을 절었다. 그는 우현이 아무런 이상함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랐다.

"아, 그거요. 안 그래도 조금은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이 바빠서 잊었네요. 그럭저럭 성과를 보이고 있어요. 다 문경 님이랑 다른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그, 그렇지만 괴물들 빼고는 딱히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문경 니임."

우현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연구소의 모두는 기이할 정도로 '그것들'을 괴물이라 부르길 꺼렸다. 그래서 그 대체어를 찾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괴물에게 '양'이라는 호칭을 붙였고 문경은 어렴풋이 그 이름이 성경에서 나왔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태고에 세상이 낳고 품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것들이라는 얘기였다. 문경은 그것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 혼자만은 그들이 끔찍한 괴물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단 한 번도 '양'이라 칭해본 적 없었다. 연구원들 앞에서는 일부러 그런 생각을 티 내지 않았지만 우현은 예외였다.

"어디가서 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알죠?"

"아, 알아요, 나도 그쯤은."

"이건 비밀인데, 요즘 제이 님 쪽에서 괜찮은 이야기가 들리고 있대요."

몸을 한껏 기울인 우현이 주변을 살폈다. 진짜 알려주면 안 되는 것인가 보다. 문경은 그의 모습을 보며 아까의 제 행동이 떠올랐다. 양심이 목구멍에 턱 걸려 넘어가질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이 뱃속에 울렁거렸다. 퍼덕거리는 나비를 잔뜩 집어삼킨 듯 내장이 크게 꿀렁거렸다. 금방에라도 토할 것 같았다. 샬롯이 하는 것처럼 손을 집어넣어 그것들을 꺼내고 싶었다. 메슥거림을 간신히 참아냈다.

"…만약에 제이 씨가 성공한다면 나는 어떻게 돼요?"

"그럼 문경 님도 성과가 있겠죠. 걱정 마세요.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그건 그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만약 내게 성과가 없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도 내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때는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그게 아니라면, 쓸모가 없는 나는 어떤 처분을 받게 되는 거냐고. 죽일 거냐고. 그러나 그것을 전부 우현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게 되리라. 문경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눈물이 한 방울 더 그의 허벅지 위로 떨어져 자국을 남겼다.

시답잖은 대화를 더 나누다가 관찰실로 돌아갔다. 평소 같았으면 드문드문 자리잡고 있었을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옆방에는 아름송뿐이었다.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바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분들은 전부 개별적으로 신체능력 검사를 하러 가셨어요. 샬롯 씨는 사라지셨고 프록시마 씨는 방에 계세요. 문경 씨도 나중에 따로 부르지 않을까요?"

일반적인 경우에는 고맙다고 한 마디라도 했겠지만 문경은 역시 그들이 껄끄러웠다. 고개만 한 번 까딱이고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무언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소파의 뒷편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제이였다. 다들 검사를 하러 갔다더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필이면 지금. 껄끄러운데, 말을 걸어야 하나. 그러다 문득 그에게 있었을 '괜찮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제이 씨?"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앞머리로 가리고 있는 오른 눈 위에 그 큰 손을 덮고 희게 질려 있었다. 땀을 흘리기라도 했는지 머리카락이 이마에 마구잡이로 붙어 있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많은 걸 봐버렸다. 문경은 조심스레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깨를 톡톡, 닿았는지도 모를 만큼 약하게 쳤다. 제이는 고작 그 접촉에도 소스라치듯 놀라며 문경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남은 한 쪽 눈에 가득 서려있는 것은 공포였다. 꼭 쥐고 있는 주먹에 울룩불룩한 힘줄이 올라와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기라도 했는지 핏자국 비슷한 것이 보였다.

"제, 제이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씨발."

작게 욕을 읊조렸다. 눈동자가 도르륵, 왼쪽으로 한 번 굴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왔다. 제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하는 건가? 그의 상태가 영 별로였다.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연구원들을 부르기로 마음 먹었다. 관찰실 벽 여러 군데에 있는 붉은 버튼 중 하나를 누르려 하는 그때, 강한 힘이 문경을 뒤로 자빠뜨렸다. 순간적인 충격에 꼬리뼈가 저려왔다.

"그 사람들을 부르면 당신을 죽여버릴 거예여."

"나, 나는 도와주려고 한 것 뿐인데 왜, 왜 그렇게 폭력적으로 굴어요? 마, 말로 해요. 나도 그, 그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제이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으로 문경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그 덕에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잔뜩 눈에 핏발이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으니 찔리거나, 뭐 그런 짓을 당했을 거라고. 그런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순간 지나간 그 색은 아주, 아주 새까만 검은색이었다. 절대로 동공이 위치할 수 없는 자리에 짙은 장막이 덮여 있었다. 문경의 시선을 느낀 건지 제이가 그를 퍽 밀어냈다. 뭐라 한 마디 할 새도 없이 그의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실험이라는 게 저런 거였어? 저런 걸 두고 성공했다고 하는 거야? 

"…그냥 괴, 괴물이잖아."

그 작은 소리가 들렸는지 제이의 방문에서 쾅! 하고 세게 치는 소리가 났다. 문경은 작게 움찔했다. 서, 성질만 더러워서는 엄한 데 화풀이나 하고.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정보보다 확실한 직감이었다. 하루하루 규격에 맞춰진 비일상의 연속이었다. 그의 주위의 모든 게 엇나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유도탄처럼 확실하게, 파멸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또 어느 날엔가는 샬롯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요 며칠간 한참 보이지도 않더니 입가에 무언갈 묻힌 채였다. 문경은 그녀에게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이 추호에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일러주었다. 이, 입 옆에 뭐 묻었어요. 거기 말고 좀 더 왼쪽. 입을 닦아 청결을 유지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냐며 질문하던 샬롯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금방 또 어딘가로 걸어가겠지. 저 작은 발걸음으로. 그러나 그녀는 제자리에서 제이의 방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셰피-는 어디 갔어?"

"네, 네? 아, 제이 씨요?"

문경은 지난 제이의 행적을 빠르게 되짚었다.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샬롯이 없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그저 그가 못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 나도 잘…."

"잘,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끝까지 해줘. 나는 인간과 달리 어조나 분위기-의 변화로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

"자, 잘 모르겠어요. 방에 아무도 없으면 밖에 나간 게 아닐까요?"

"방에 아무도 없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방을 소유하고 있는 건 셰피니까 만약 저게 침입자나, 그와 유사한 무언가라면 저지하는 게 좋겠어."

"…방에 뭐가 이, 있다고요?"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각방은 주인과 연구원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었으니까. 괴물인가? 아니,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그들 중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샬롯이 다였다. 힐끗 옆방을 훔쳐보니 프록시마가 대자로 팔다리를 펼치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연구원에게 허가를 받은 것도 아닐 테고. 누구지? 누가 저기에 있는 거야?

"크기는 183cm 정도이고, 생후 288개월 정도 된 것으로 보여. 현재 상태는 많이 불안정해. 체온이 38.7도 정도야.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저, 저기 그거 제이 씨 신상정보랑 또, 똑같은 것 같은데요."

"아니-저건 셰피가 아니야. 질문했던 것에 대답해 주면 좋겠어. 도움을 줄까?"

"내, 내가 연구원들을 불러 올게요. 어차피 문도 못 열고."

호출벨을 누르고 상황을 설명하자 예화가 왔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 문을 거칠게 열었다.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태도였다. 체온계로 열을 잴 것까지도 없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누군가의 이마에 손을 얹은 그녀는 크게 욕을 한 번 외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 그녀를 따라 들어온 쿠루기와 우현이 들것에 태워 데리고 나간 그것은, 제이 셰퍼드였다. 샬롯은 벌써 옆 관찰실로 넘어간 후였다.

문경은 어쩌면, 제 왼쪽 흰자위에 스며야 했던 무언가가 제이에게 넘어간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그 일련의 과정에 그의 책임은 단 하나도 없었으나 운명의 삐뚜름한 심술에 치가 떨렸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가 멀쩡하게 전처럼 온갖 이상하고 우스운 짓을 하면서 돌아다니기를 바랐다. 샬롯은 그를 보고 셰피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 저것은 변해버린 제이일까, 아니면 제이의 허물을 뒤집어쓴 다른 괴물일까. 늑대의 허물을 뒤집어쓴 양을 그렸다. 그것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속으로는 그쪽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여?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이 왼쪽 가슴께를 뚫었다. 심장 위에 지독한 죄책감의 글자를 새겼다.

며칠이 지난 후에, 느닷없이 눈이 일찍 떠지는 바람에 곤욕을 겪었다. 기상시간이 아닌데 밖으로 나갔다가는 연구원들에게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양치를 하며 30분 뒤에 울릴 알람을 기다리는데 식탁 위에 뭔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의 손과 붉은 잉크를 쏟아부은 듯 새빨간 종이였다. 문경의 목젖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경, 저번에 입에 묻은 것을 일러주어 고마웠어. 대가를 주는 것이 호의라고 들었는데 마음에 들어?

샬롯이 두고 간 것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앞에 있는 것을 치워버리고 싶었으나 제 손으로 만질 용기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사람의 손이다. 저것의 주인은 살아 있을까? 문경은 지난번 저와 대화하던 것이 무슨 존재였는지를 다시 곱씹었다. 인간과 닮았다고, 소통을 할 수 있다고 전부가 아닌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무르게 대했던 건지. 자신 역시 이렇게 될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었다. 기한 없는 시한부가 된 심정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문경은 절단된 신체 일부를 최대한 무시하고 종이를 집어 올렸다. 혈액이 묻어 있었기에 축축한 감촉을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버석버석한 질감이었다. 이미 굳은 지 오래된 피였다. 글을 읽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비릿한 쇠냄새가 코끝에 스쳤을 때는 헛구역질을 해야 했으나 그는 떠듬떠듬 글자를 따라 내려갔다. 종이의 하단 오른쪽에 8.이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보아 여러 장의 보고서 중 한 장인 모양이었다. 그 내용은 실험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연구원들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밖의, 그러니까 이 연구소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한 장만 가지고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줄이 유독 눈에 거슬렸다.

곧 러시아와 중국이 연합하여 미국을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 발표. 전쟁에 대한 대비 요함.

전쟁이라니. 문경은 새삼 저가 이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대해 너무 무지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 근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 내용을 다시 되짚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를 왜 이곳에 요청한 걸까. 그가 알기로 이곳은 미국의 영지이지만 다른 나라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말 그대로 무인도였다. 그런 이곳이 참전할 일이 뭐가 있을까. 허울만 군사기지고 실상은 괴물 연구소인 이곳이. 

그 순간 문경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 모든 아귀가 딱 들어맞기 시작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제게 이 정보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한 마디로-

전쟁에 양을 풀어놓겠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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