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nature take its course

天衣無縫 천의무봉 (1)

HitMan by Jack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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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man 연구원 실험체 au
*본 내용은 허구이며, 사실 고증에 있어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밝힙니다.
*자살, 살인, 가스라이팅, 고문, 폭행, 잔인한 묘사, 유혈 등 트리거 요소가 있으니 감상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태초에 이 세상에 자리하고 있던 것은 인간이 아니었으메-

우리는 단 한 번도 이 세계의 주인인 적 없음을 잊지 말기를.

존재함에 숭고한 것들을 제 손아귀에 넣고 휘두르려 함은 지나친 오만이요, 탐욕일지니

변덕에 스러질 미물이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


1. Troy

밖이 소란스럽다. 안대를 씌워 앞도 못 보게 하더니 결국 어디엔가 도착은 한 모양이었다. 팔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저항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는데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니 오히려 반항심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러나 트로이는 이번 일을 망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정보는 없었으나 의뢰인이 미국의 다섯 손가락, 아니 어쩌면 그보다 안에 드는 인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지원을 해 줄 수 있을 리가. 그녀는 호위라는 명목 하의 감시 속에서 푸석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바람을 타고 뺨을 스치는 모래가 따끔거렸다. 

"이번이 상태가 더 좋은 게 맞습니까? 겉보기로는 그런 느낌이 아닌데."

"믿으시라니까, 참. 그분이 그럼 일을 망치려고 일부러 안 좋은 물건을 보냈겠습니까?"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이쪽에서도 민감하게 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확실합니다."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물건이라 칭하다니. 이쪽 세계에 몸을 둔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징글징글했다. 뜨거운 태양볕에 두피가 익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양쪽 팔이 붙잡혔다. 그들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물어도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니 체력을 아끼는 중이었다. 새까만 안대 위에 그늘이 졌다. 그와 동시에 공기도 시원해졌기에 트로이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온몸의 열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이리 걸음이 가벼울 수 있나. 시스템 에어컨이 없던 옛날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온 것일지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건물로 들어온 지 대략 15분. 길을 외우지 못하게 하려고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무렵 드디어 정지 사인이 들렸다. 문고리 돌리는 소리, 문 닫히는 소리, 잠깐의 말소리. 이곳의 총책임자가 이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보고라도 올리고 있는 것이겠지. 택배기사가 택배를 문앞에 두고 사진을 찍어 문자를 보내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그 택배가 트로이 본인이라는 것만 빼면 좀 더 유쾌한 상황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경첩이 삐걱거리고, 누군가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가 손목의 수갑을 풀었다. 한 자세로 오래 고정되어 있던 탓에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은 금방 제지당하고 말았다.

"잠시만, 아직 안대는 벗지 마세요. 손을 풀어드리긴 했지만 제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다시 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하셨으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재갈도 풀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말투가 퍽 사무적이었다. 입에 물려있던 것을 빼내고 입가를 슥 문질러 닦았다.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어딜 붙잡고 데려가야 하나 고민 중인 것 같았다. 트로이는 손을 내밀까 하다가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저 사람에게 제가 아래에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 앞에서 그냥 천천히 걸어가세요. 발소리를 크게 하시고. 보폭만 일정하다면 제가 뒤에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유능하시네요. 차라리 저희 팀원으로 들어오셨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감사하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는 제게 하실 필요 없어요."

"하하, 진심인데 몰라주시니 섭섭합니다."

가식을 떨어도 어쩜 저렇게 사람 속을 긁는지. 트로이는 예쁘장한 미소를 띄우고 별 말 않았다. 저 태도 역시도 권력에서 오는 여유이리라. 제 이름은 설지혁입니다. 트로이에요. 간단히 이름만 주고받고 자신을 지혁이라 말한 남자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여긴 코너입니다. 좌측으로 꺾으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니 잠시 대기하겠습니다. 앞에 턱이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트로이는 그 친절하고 정중한 네비게이션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어졌다. 성질 더러운 이의 흔한 화풀이였다.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일은 없었으나. 도착했다는 말과 함께 설지혁이 목에 걸린 키카드를 잘그락거렸다. 곧 띠-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들어가시면 안에 갈아입을 옷이 있을 겁니다. 문을 닫는 소리가 나면 안대를 풀고 환복하세요. 안에 추가적인 설명을 써둔 안내문이 있을테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띠릭- …아마 이게 닫히는 소리였겠지? 트로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머리를 더듬었다. 트럭을 타고 올 때부터 안대를 써서 그런가 오랜만에 맨눈으로 마주하는 빛이 유독 밝았다.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점점 시야가 돌아왔다. 옷장에서 특유의 하얗고 하얀 천을 꺼내 입었다. 있는 무늬라고는 어깨 부근의 H라고 쓰인 글자 하나. 앞섶의 단추를 다 채우고 나서야 종이가 눈에 띄였다.

안내문

안녕하십니까. SiN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생활하시기에 앞서, 알아두셔야 할 사항들과 지켜주셔야 할 것들이 있으니 아래 항목들을 확인하시어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모든 개인 소지품은 반입 금지입니다. 현재 가지고 계신 물품이 있으시다면 앞의 하얀 바구니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잘 보관하고 있다가 추후 돌려드립니다.
2. 건물 내의 개인활동은 허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인실에서만 생활하게 됩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외출하거나 이동하게 될 때에는 직원을 불러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최소 2명 이상씩 활동합니다.
3. 담당 직원들의 말은 절대적이며, 이를 필수적으로 따라 주셔야만 안전한 생활이 가능합니다. 만약 거부할 시 이에 따른 조치가 있을 수 있으며 그 책임은 저희가 지지 않습니다.
4. 연구와 관련된 목적으로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회사 내에서만 사용되며 밖으로 유출되지 않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5. 기상시간과 취침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또한 식사시간도 고정되어 있으며 이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 사항이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 무슨 이유에서라도 식사나 취침을 거를 수 없습니다.
6. 실험 중 대상자의 부주의로 인해 발생한 사고에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이로 인해 일어난 피해에 대해서 회사 측에서 배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7.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불가능하며 만약 이를 어긴 것이 적발될 시, 그 즉시 회사 측에서 조치를 취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수기로 작성하는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만 그 내용은 검열이 들어갑니다.
8. 건강과 관련된 사항은 모두 회사 측에서 책임지며 대상자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전문 의원들을 통해 치료합니다. 작은 문제라도 발생할 시 즉시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9. 연구 특성상 자율 시간에는 다른 대상자들과 생활하게 됩니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미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는 필수적인 사항이며 대상자의 의지만으로 거절될 수 없습니다.
10. 본 회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상현상은 직원들과 무관하며 최대한 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말이 이상한 부분이 많은 안내문이었다. 그러나 트로이는 이곳에 들어온 이상 의뢰인이 불러주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음을 알았기에 괜히 토 달지 않기로 했다. 소지품은 없었다. 애초에 여기 오기 전에 한 차례 탈탈 털렸었다. 그들이 이에 꽂아넣은 작은 녹음기만 뺴면 가진 거라고는 제 목숨 하나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무언가 잊을까 싶어 종이를 두 번 접었다. 젠장. 옷에 주머니가 없네. 고이 접은 그대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것으로 그녀는 안내문을 포기했다.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그 역시 카드키가 필요했다. 얼빠진 얼굴로 불투명한 유리문을 두드렸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밖에서 문을 열어준 설지혁은 트로이를 위아래로 한 번 훑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나름대로 확인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묘한 불쾌함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안내하겠습니다. 이리로 따라 오십시오. 첫날에는 하루 내내 개인실을 쓰는 것이 원칙이라 방을 알려드릴 겁니다. 다른 분들과는 내일 만나게 될 텐데 모쪼록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혹시 번호로 부른다든지, 그런 건 없나요?"

"네? 아하하, 그런 걸 기대하셨나요?"

"기대는 아니지만…. 이전에 임상시험에 참여한 적 있었는데 그때는 그랬었던 기억이 나서요."

"여긴 그 정도로 정 없는 곳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 실험 대상자와 연구원 간의 애착이 중요한 일이라서요. 안전상으로도 그렇고."

"그렇군요."

안전과 정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저 수긍했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피로에 얼른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설지혁을 따라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자, 유리 통창으로 된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얼핏 보기에는 실내정원이라는 착각을 할 정도로 내부 조경을 잘 꾸며둔 곳이었다. 그리고 통창을 제외한 안쪽 벽들에 추가적으로 문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모든 게 거대한 페트리 접시를 닮아 있었다. 트로이는 속으로 본인의 신세를 배양되는 미생물로 고쳤다. 택배가 들어가기에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물론 인공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가장 왼쪽의 자동문 위에는 제 이름이 영문으로 크게 박혀 있었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유리입니다. 아마 큰 거울처럼 보일 겁니다.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종종 저희가 거울 스크린을 내려드리기도 할 거니까요."

"괜찮아요. 애초에 관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인데 당연한 일인걸요."

살풋, 눈을 한 번 휘어 주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지혁 씨도요. 옆으로 미끄럽게 열린 자동문은 닫힐 때에도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았다. 짐이랄 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손을 한 번 내려다본 트로이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취침시간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럼 아직 자면 안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눈을 감고 저도 모르는 새에 깊은 잠에 빠졌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단잠을 방해했다. 핸드폰을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자는 트로이는 눈을 반쯤 뜬 채 베개를 더듬거리다가 문득 이곳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 근처에 있는 햇님 모양 버튼을 눌렀다. 알람이 뚝 꺼졌다. 아마 기상한 이들이 바로 씻고 준비할 수 있도록 설계한 루틴 같았다. 씻고 나와 또 같은 디자인의 새로운 의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바닥에 깔린 매트는 인공잔디와 비슷한 감촉이었는데, 아침 이슬 같은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녀는 새벽같이 일어난 연구원들이 이곳 곳곳에 분무기를 뿌리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멀리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잘 지내라더니, 싸움이라도 난 거 아니야? 말려보기라도 할 생각으로 그녀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다리를 움직였다. 

"그거 내가 어제 간신히 꿍쳐둔 거라고여!! 여기 밥이 부족해서 조금씩 나눠 먹으려고 한 내 초코바!"

"애초에-이곳은 음식물 반입이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어. 어째서 화를 내? 나는 당신의 것을 빼앗으려 한 것이 아니라, 보관하고 있는 거야. 원한다면-다시 꺼내줄 수 있어. 그러나 먼저 직원들의 허락을 받는 것이 옳은 절차라고 생각해."

"먹은 걸 뱉어서 주기라도 하게여? 더러워여!! 그리고 연구원들한테 물어보면 당연히 안 된다고 하겠져. 그러니까 제가 빼돌린 거잖아여?"

딱 봐도 180은 넘어보이는 남자가 어린 여자애를 괴롭히고 있었다. 트로이는 잠시 고민했다. 이곳에서 제 성질을 있는대로 부려도 되는지, 아니면 역시 고분고분한 실험체를 연기해야 하는지 판단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근처에서 떨어져 둘을 보고 있으니 통-하는 소리가 났다. 플라스틱으로 두꺼운 유리를 치는 소리였다.

"샤알롯, 그러지 말고 그냥 제이도 삼켜버려. 초코바보다는 열량이 높을 걸."

투명한 유리에 몸을 기댄 한 여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헬멧으로 그것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트로이가 있는 공간 옆에는 또다른 관찰실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저가 있는 장소보다 세 배는 더 넓음직한 장소였다. 이름 써진 방들을 살펴보니 수용인원은 기껏해야 세 명 정도인 것 같은데. 왜 저렇게 크지? 

"그것 역시 직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어. 셰피-도 그들에게 속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나저나, 당신은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이야."

창백하고 차갑게 느껴질 정도의 푸른 눈. 로봇 같을 정도의 부자연스러운, 그러나 격식 있는 말투. 반면에 방금의 저 남자와 벽 너머의 여자는 조금 더 생각을 거치지 않는 느낌. 트로이는 머릿속으로 그들의 이미지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 온 트로이라고 해요. 다들 반가워요."

"그, 그쪽도 이 정신나간 곳에 자발적으로 온 거예요?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왔으니 가, 가능하면 나는 이제 나가고 싶은데…."

등 뒤에서 울음 섞인 축축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그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이가 많이 어린가? 여기에서 생활하면서 언젠가는 누군가 우는 모습을 보게 될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일찍일 줄이야. 울보일 만큼 심약한 녀석이 이런 곳에 있을 리는 없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뭐가 그리 서럽다고 벌써 눈꼬리에 눈물을 한 방울 매달고 있었다. 트로이는 습관적으로 목끝까지 올라온 한숨을 삼켜냈다. 저쪽에서도 질문에 대한 답을 바라는 눈치는 아니었기에 그녀는 드문드문 놓여 있는 쿠션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자기소개는 나만 하는 건지. 다들 이름도 무엇도 얘기해 주지 않기에 지루했다. 구석에 있는 트로이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다들 제 할 일을 했다. 무언가 같이 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소란스러웠다.

제이라고 불린 남자는 여전히 샬롯이라 불린 여자애의 입을 살피고 있었다. 더 크게, 크게 벌리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입에 손을 집어넣을 기세였다. 그러다 여자아이의 반응이 이상하자 진짜 절 삼키려고 하는 건 아니져? 하고는 총총거리며 멀어졌다. 이곳에 온 동기를 물었던 울보는 괜히 저것 좀 자극하지 말라며 제이를 타박했고 그는 전혀 듣지 않는 듯 무시했다. 헬멧을 쓴 여자는 지루해, 지루해. 하고 중얼거렸다. 유리벽은 방음이 안 되는지 그것 역시 하나의 소음이 되었다. 트로이는 그나마 제일 말이 통할 것 같은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있지, 여기선 보통 뭘 하나요? 딱히 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시간은 너무 많아서요."

"곧 있으면 직원들이 와서 확인-을 해. 심심해? 그렇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

"어떻게요?"

여자아이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추더니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아까 뺏어갔다는 초코바인가. 그때 밖에서 급하게 카드키 찍는 소리가 나더니 작은 체구의 여자가 다리를 절며 뛰어 들어왔다. 

"샤, 샬롯 양! 내, 내가 저번에 그건 자, 자제하라고 말했, 말했잖아. 게다가 저, 저 사람은 오늘 처, 처음으로 여기 와서 적응 중, 이란 말이야. 괜히 노, 놀래키면 아, 안 돼…."

"스지. 납득이-"

"또, 또 납득되지 않는다고 하, 할 셈이지? 그래,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 안 돼. 어…. 아직은 네 존재, 존재가 두렵게 다가올 수, 있단 마, 말이야…."

"저, 안녕하세요?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 안녕. 트, 트로이 양이지? 얘기는 이미 드, 들었어. 나는 스지라고 부르, 부르면 돼. 그리고 또, 음… 궁금한 거라도 있으, 있을까?"

"반가워요, 스지 씨. 혹시 제가 다른 분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아직 소개를 못 들었는데 직접 여쭤보기는 영, 어색하네요."

"아, 그, 그렇지. 저, 저쪽 검은 머리에 탁한 파, 파랑색 눈이 제이, 제이 셰펴드야. 바, 방금 이 애는 샬로, 롯. 얼굴에 흉터, 가 있고 조, 조금 소심한 친구가 각문경이고… 벽 너, 너머에 있는 헬멧은 프록시, 프록시마 센타우리. 저쪽, 에는 한 명 더 있는데…. 잘 안 보이네. 호, 혼자 어디 있을 거야. 사납, 사납거나 말썽을 부리는 애는 아, 아니니까…. 키, 키가 가장 큰 친군데 이, 이름은 반아름송. 다들 소, 송이라고 불러. 트, 트로이 양이 모두와 친하, 친하게 지내면 좋겠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렇게 할게요."

말을 많이 더듬네. 손도 계속 떨리고. 이렇게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도 연구원을 해도 되는 거야? 주삿바늘을 제대로 된 위치에 꽂을 수나 있나. 얼굴에 한심하다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며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한참 떨리는 제 손을 붙잡고 망설이던 스지는 결국 트로이의 손을 잡고 두어 번 흔들더니 뿌리치듯 놓았다. 

"고, 곧 있으면 검사를 위한 인원들이 들어, 들어올 거야. 그, 그전에 아침식사 시간이 있,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스지는 관찰실을 나갔다. 트로이는 제 혀로 어금니 안쪽을 더듬어 그녀와 대화하기 전 미리 눌러두었던 녹음기를 껐다. 이름을 다 들었으니 추후에 신상을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 그 전에 자신이 회사에서 모아두었다는 이들의 개인정보를 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침을 먹고-제이가 각문경의 아침밥에 고기가 더 많다며 식판을 바꿔달라고 소란을 피웠지만-얌전히 있으니 곧이어 마스크에 장갑을 낀 연구원 몇 명이 들어왔다. 우중충한 남자 하나에 눈에 안광이 아직 살아있는 남자 하나, 그리고 어제 보았던 설지혁과 스지였다. 설지혁이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원래는 여자 직원 둘이 더 있다고 설명했다. 트로이는 농땡이를 부리는 부하직원들을 둔 그에게 잠시 연민이 들었다. 우중충한 남자가 트로이에게 다가와 쿠루기라는 이름을 소개하고는 앞으로 그녀의 담당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확신이 없어보이는 말투에 이유가 있냐고 묻자 그는, 이번에는 좀 더 성실하게 연구를 해 보고 싶어서요…. 투약도 안 빼먹고. 여기에 또 새로운 실험체가 올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하고 중얼거렸다. 얼마나 일을 날림으로 했으면 그런 얘기를 6번째인 나에게 하는 걸까. 트로이는 천장을 한 번 쳐다봤다. 답답한 일이 있을 때 하는 그녀만의 습관이었다. 쿠루기는 그녀 옆에서 주섬주섬 기계들을 꺼냈다.

"아침에는 간단한 검사가 다예요. 혈압 잴 거니까 팔 앞으로 쭉 뻗고 주먹 쥐세요. 아, 맞다. 트로이 씨는 좀 있다가 따로 건강검진을 한 번 더 할 거예요. 그것도 거창한 건 아니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잠시 침묵. 이제는 정말 태도를 정할 때였다. 믿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쪽이 나을까? 아니, 그건 설지혁과 스지에게 했던 것면 충분하리라. 그리고 트로이에게도 쓸만한 패가 어느 정도 필요했다. 몇 명 정도는 휘두를 수 있도록 조금 잡아놓는 게 좋을지도. 그래, 눈앞의 이 남자는 어느 정도 만만한 상대였다. 여린 속내를 보기에 썩 괜찮은 겉모습으로 숨긴 게 보였다. 연기는 제 분야니까.

"…저기요?"

"쿠루기라고 했나?"

"네? 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여기서 사람이 살아 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지?"

"……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팔꿈치 부근을 바삐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혈압 측정기의 벨크로를 꽉 채우지 못하고 엉성하게 붙여 놓았다. 트로이는 그것을 제 손으로 직접 떼어내어 다시 붙였다. 자, 이제 됐어. 여전히 쿠루기는 정지 상태였다.

"아, 음. 뭐, 100%죠. 연구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어요."

"실험체 인원이 이게 전부였나 보네."

"그것과 관련해서는 더 말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꽤 냉정하네. 그래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의미겠지. 조금 더 깊은 지배를 심어두기 위해 날카로운 혀를 굴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눈앞이 시꺼먼 것으로 가득찼다. 거울로 제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 옆 방을 향해 앉아 있었던 트로이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유리벽 너머에 검은색 연기, 아니 어쩌면 잔뜩 헤진 실타래에 가까운 것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부유하고 있었다. 설지혁이 백발의 젊은 남자에게 뭐라 지시하자 그가 직접 안으로 가요? 아, 밖에서요? 같은 멍청한 질문을 던지더니 키카드를 찍고 관찰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 시선으로 그를 쫓았지만 결국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보다 더 멍청한 얼굴의 트로이 스스로일 뿐. …저게 대체 뭐야?

"또, 또 시작이야? 나, 난 저런 거 무섭고 싫단 말이에요. 쟤네한테도 조, 좀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안 돼요? 적당히 하든지. 저, 저게 어딜 봐서 아까 대화하던 그 사람이야."

"프록은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네여. 부러워여."

"우, 우현 군이 갔으니까 그, 금방 해결될 거야. 다들 신, 신경 쓰지 마…."

스지가 트로이의 존재를 잠시 잊은 듯 일상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프록, 프록이라면-

-벽 너, 너머에 있는 헬멧은 프록시, 프록시마 센타우리.

'아침에 봤던 그 여자가 저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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