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가

고공가

현재 by 반야

 

 경주 마학 서당 이대 박사, 옥황상제를 뵈러 왔습니다. 형호의 말에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한기가 일었다. ...이제 봄이지 않나? 괜히 춥네…. 민규가 중얼거렸다.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고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형호는 그를 듣지 않은 건지, 별 반응이 없었다. 이번에는 우림이 나섰다.

“화신花神이요, 한솔이 모친이랍니다.”

목적한 바와 연관이 있으니 이제야 눈길을 돌렸다.

“한솔이가 누고.”

“제가 데리고 온 한양학도요.”

“...관심 없다.”

“아, 아. 호시랑 같은 침소였대요.”

“......그러냐.”

가장 아끼는 형호의 이대 석사 아이를 언급하니 표정이 풀리는 듯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감사할 정도였다. 그사이 벌써 네 개의 문을 지나 정전正殿 앞에 도착하니 상제가 그들을 반겼다. 상제의 뒤를 따라 절을 올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신이 앉아 있었다. 모든 꽃을 거느리는 화신.

당신께서는 죄가 없단 것을 잘 알지만 우리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리에 앉은 형호가 다짜고짜 말하기 시작했다. 민규가 당황하여 형호를 말리려 했으나 물꼬를 튼 이상 물러날 수는 없다. 형호의 말을 듣던 화신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선 폐화대전에서도 그러했으나.”

“…….”

“인간이 저지른 일은 우리가 나서서 해결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형호가 이를 바득 갈았다.

“인간은 오만하고도 이기적인데.”

화신이 움찔거렸다. 분명, 제가 폐화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나빌레라를 걷으며 작성했던 성명문의 글귀였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여뻤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해결할 이유가 없다?”

또 한기가 서렸다. 저 사형은 분명 화력火力을 수련했는데 왜 자꾸 시린 겨울을 불러오는가…! 민규가 제발 진정하라며, 화를 가라앉히라며 형호의 팔을 잡으려 했으나 그가 닿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화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마주 봤다. 감히 인간 세상의 모든 꽃을 관장하는 이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두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웠다.

견고한 바닥에 마찰이 이는 소리가 났다. 슬그머니 눈을 뜨니, 형호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고운 바닥에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진노의 날, 슬픔의 날…. 신이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더는 허공에 흩어지는 꽃잎을 마주하고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습니다.”

권위를 놓아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서당을 위해서, 생원들을 위해서. 소매로 눈가를 박박 짓누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들이 만든 무자비한 마법으로 온갖 사람이 죽은 지 고작 십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재발한 것이 진실로 인간만의 탐욕이 잘못이라 하실 겁니까.”

한참 정적이 일었다. 끝내 상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궁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자리에서 엎드린 형호가 흐느꼈다. ...일어나시게. 더는, 내가 줄 답이 없음을 알지 않았는가. 세상을 짊어진 신으로서 사과하네. 허나 다시 한번 말하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어. 화신이 낮게 읊조렸다. 큰 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훌쩍임이 가득 찼다.

 

 

 
고高
공空
가歌

 

 

 

빛나리. 이찬을 필두로 한 비밀 결사대가 꾸려졌다. 인원은 오직 다섯뿐임에도 고르고 고른 덕에 균형이 잘 갖춰졌다. 가장 먼저 이를 들은 것은 당연하게도 순영이었다. 명단이나 한번 흘겨보고는 열심히 하란 말을 전하는 순영이 낯설었다. 혹 관심이 있을까 싶어 같이 하시렵니까 물어보니 돌아오는 말은,

“학업에 정진하기 바쁘다. 그리고, 석사가 뭔데 학사들 노는데 끼냐?”

였다.

물론, 끼고 싶었다. 미친 듯이 끼어서 이 좆 같은 전쟁을 일으킨 새끼들 머리통을 다 쳐내고 전쟁을 끝맺어 평화를 다시 불러오고 싶었다. 일반인들은 무슨 죄며, 가만히 꽃을 가꾸던 마반인은 무슨 낭패란 말인가? 그런데도 경주에 귀속된 석사라는 지위를 무시할 수가 없어 애써 웃으며 거절을 건네야 했다.

어디서든 잘하겠지만, 찬이 걱정되긴 했다. 아직도 순영의 눈에 찬은 새파란 도포를 입은 1년 생원에서 멈춰있다. 칼을 쥐면 손이라도 다칠까 싶어 나뭇가지를 쥐여주고 무도를 가르친 것이 벌써 5년 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비를 날려볼까 싶다가도 무슨 준비를 어디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데다가 막상 보내려고 해도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 쉽사리 글이 쓰이지 않았다. 결국 순영은 닭이 울기도 전인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중앙에서 서낭당 나무를 마주 봤다. 빙 둘러보니 사람 사는 냄새조차 사라진 새벽녘이 좋았다. 음, 옛날 대감집 얹혀살 때 느낌 나는구만. 홀로 중얼거린 순영이 발로 지익 직 선을 긋기 시작했다. 서낭당을 중심으로 대략 열 발자국 정도의 반지름으로 된 원을 만들었다. 동그라미 안에 일반인이라면 알 수 없는 문양들을 다 그리고는 마구를 꺼냈다. 가벼이 문양을 하늘에 띄우니 반원 형태로 방어막이 만들어졌다. 일단, 호시로서 서당에 해줄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다. 이걸로 만족해야지. 괜히 오랜만에 전신을 쓰는 마법 좀 부렸더니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다. 팔을 하늘을 향해 쭉 펼치며 산책이나 하기 위해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다가….

찬과 마주쳤다. 너는 동재 사람인데 왜 남재에서 만나지. 물음표도 올라가는 음도 없는 순영의 말에도 용케 요지를 잡아낸 찬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찬영이라고, 남재에 기숙하게 된 애가 있는데 혹여나 여기서 길을 잃을까 싶어서요.”

“...애도 아니고….”

“열여섯, 1년 생원이에요.”

“애 맞네….”

저와 몇 살 차이 나는지 헤아려보다 그만뒀다. 응, 왔네. 쭈뼛대며 찬의 옆으로 오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확실히 앳된 얼굴이었다. 덩치는 애가 아니긴 한데…. 길 잃는 데 덩치는 필요 없으니까. 준휘와 비슷한 듯했다. 눈치껏 찬과 순영에게 인사하는 찬영이 꽤 마음에 들었다.

“꽃밭에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순영이 고민했다. 찬은 다 안다는 듯 웃어 보이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오고싶죠?”

“...월도 들고 갈게. 먼저 가 있어.”

 순영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스며들었다. 흥분되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둘을 꽃밭으로 보내고 무작정 침소로 향했다. 서당을 졸업하고 나서는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대됐다. 석사답지 않게 왜 이리 뛰어와? 하며 묻는 지수에게는 오랜만에 꽃밭에서 찬이랑 놀 것이라는 말만 덜렁 남기고 다시 후다닥 뛰쳐나왔다.

 

순영이 신을 고쳐 신으며 아이들의 신원 파악을 마쳤다. ...빛나리 인물 났네. 그들을 흘긋 보며 발을 바닥에 팍팍 굴려보고는 허리를 쭉 폈다. 오랜만에 비무를 보려니 기대가 됐다가도, 이 비무로 꽃을 단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한단 생각에 암담하기도 했다. 그래, 내가 할 일은 이거지. 이들이 반역자에게서 죽지 않고 살아오게 하는 것.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순영이 하늘을 한 번 쳐다봤다.

‘사형 내려오시기 전까지 사고 좀 치겠습니다.’

형호에게 짧은 문자를 남긴 순영이 다시 빛나리 아이들을 바라봤다.

“저 근데, 괜찮습니까?”

“뭐가.”

백호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시온이었나. 난초를 품었던 걸로 아는데. 조금 전에 이름과 꽃을 들었는데도 긴가민가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라 치자. 애써 홀로 위안을 삼으며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쇼타로 사형 말고는 다 꽃이 있어요.”

아마 밖으로 나갔을 때 표적이 되는 것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헌데 순영에게 그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관없어. 죽일 테면 죽이라지.”

순영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비녀를 꺼내 손에 쥐었다. 어차피 저는 월도를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마음의 안정(?)일 뿐. 찬을 제외한 빛나리들이 멀뚱멀뚱 서서는 순영의 행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순영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지금부터.”

?

“서로를 죽여라.”

?????

뒷짐을 지고 순영의 말을 듣던 찬이 입을 떡 벌리고 자세를 풀었다. 저 사형이 지금 뭐라는 거야.

농담하지 말라는 찬의 말에 순영은 정색했다. 진심인데. 뭐해? 안 하고. 순영의 날 선 눈빛에 시온과 원빈이 걸어 나왔다. 자. 시작~. 성의 없는 말투로 비무가 시작됐다. 목검을 쥐고 서로 마주 본 채로.

힘껏 내려쳐 공격하고 방어하는 둘을 본 찬은 만족스러웠다. 어때요, 사형. 바로 실전에 가도 될 것…. 찬이 말을 흐렸다. 순영은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굳은 표정이 그렇게 말했다. 벌떡 일어나 비무를 하는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원빈의 검을 한 손으로 잡아버리곤 혀를 찼다.

“죽이라니까 싸우고 있네.”

“…….”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빳빳하고 새하얀 무예복을 입고 있는 시온의 검을 순순히 건네받았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라고. 나가서도 그렇게 싸울 거야? 날이 선 질문이 원빈에게 꽂혔다.

“너희 꽃도 있다며. 그럼 더 쉽게 먹힐 텐데. 그렇게 봐주면 어쩌자는 건지….”

“…….”

“이렇게, 하라고.”

어리다는 건 지금 짚을 게 아니다. 전쟁터에 어린놈만 봐주는 게 어딨어. 더 죽이기 쉬울 텐데. 찬은 친절하여 이럴 수 없단 것을 알기에 제가 나서야 했다. 목검을 반대로 잡고 원빈의 어깨를 툭 쳤다. 비무를 시작하자는 의미였다. 원빈도 어디 가서 사형에게 기죽는 편은 아니어서. 제 칼을 다시금 거머쥐고 자세를 잡았다.

“……!”

죽일 듯이 순영이 달려들었다. 아니, 석사라매 미친…! 원빈이 도망치듯 발을 놀리며 순영의 공격을 막아내기 바빴다. 이건, 정말 이건, 날 죽이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매서운 눈과 마주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겨우 몸을 다잡고 순영의 빈틈을 찾아내려 했는데…….

없다. 하나도 없다. 쇼타로와 다른 느낌으로 없다. 천 년은 족히 넘겼을 커다란 나무를 상대하는 듯했던 쇼타로와 달리 순영은 휘몰아치는 폭풍 같다. 정신을 쏙 빼놓고 그 틈으로 제 몸에 군데군데 흔적을 처박기 바빴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결국 계속해서 도망을 택했다. 코가 맞닿을 거리까지 달려든 순영과 눈이 마주쳤다.

“뭐해.”

“……?”

“죽이라니까? 간 보지 말고.”

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순영은, 제가 공격하기까지 기다리고 있다. 원빈이 그제야 칼을 순영에게로 겨눴다. 여즉껏 제 상체만을 방어했으니까…. 약점은 하체겠구나. 순식간에 뇌를 핑핑 회전시킨 원빈이 칼을 쥔 손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꽈악 붙잡았다. 칼로 바닥을 짚고 몸을 붕 띄웠다가, 혼란을 주고는 바닥을 기어 다리에 공격을 가하려 했다. 일반인이었던 것 같아 꽃은 쓰지 않되…….

“꽃, 써!!!!!!!”

순영이 포효했다. 순영은 답답할 노릇이었다. 슬금슬금 봐주는 척하니까 진짜 감사한 줄 모르고 저들도 봐주려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전쟁터 나가려고 꾸렸다며. 근데 꽃도 안 쓰면 어떡해. 꽃은 꽃으로 죽이는 게 가장 확실한 걸 모르나? 그제야 원빈이 포획을 써 순영의 다리부터 전신을 감쌌다. 답지 않게 순영이 당황했다. 웬만한 꽃은 다 힘으로 풀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꼼짝없이 몸을 촘촘히 감싸는 물망초에 당하게 생겼다. 물망초 향을 훅 끼치며 원빈이 순영의 허리를 껴안고 뒤로 넘어갔다. 철퍽 소리와 함께 순영을 깔고 올라탄 원빈이 거친 숨을 내쉬며 순영의 목에 칼을 겨눴다.

“...사형을 어, 어찌 죽입니까.”

“죽였는데? 잘했어.”

겨우 이목구비만 제외하고 들러붙은 물망초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 좀 풀어봐. 그의 명에 원빈이 후다닥 꽃을 지웠다. 꽃내음을 추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영이 원빈의 머리를 박박 헤집었다. 응, 이렇게 하라고. 서로. 알겠지.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았으나 아무렴 어떤가. 어찌 됐든 원빈은 이제 제가 무엇을 얼마나 해야 할 지 알아차렸을 테지. 이걸 지켜본 다른 빛나리들도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똑똑한 놈들이니까.

“됐고. ...모여봐. 공격이랑 방어 좀 알려줄게.”

순영의 말에 다섯 빛나리들이 옹기종기 꽃밭에 모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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