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가
彛
전쟁이 점차 거칠어졌다. 경주 생원들이 각자 한양과 제주로 오는 동안의 위협도 끊임없었다. 경주의 마법석사들이 기꺼이 나서 이들을 보호하며 한양에 올라와야 했으며, 부상자가 생긴다 하더라도 사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누어 경주 생원들을 보호하던 나비들이 한양에 도착했을 때, 준휘의 활은 반토막이 나 있었고 승철의 망원경과 지훈의 나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원우의 하나뿐인 꽃무릇 통은 파편만이 겨우 보존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행히도, 경주 생원은 다치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그것만에 감사하며 서당의 문을 닫았다.
오랜만에 한솔과 함께 밤을 보낸 순영은 예상보다 거칠다는 전쟁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곧장 승관과 한솔의 졸업을 준비해야 했다. 고 박사에게 전달받은 졸업장을 들고 누각에 가니, 오랜만에 한양에 올라와 적응을 한다는 핑계로 누워있던 정한과 석민만이 그를 맞이했다. 고개를 저으며 승관과 찬이 있을 청룡 침소로 향했다.
방문 앞이 또 시끌벅적했다. 어젯밤에도 저의 존재 때문에 방문 앞에 생원들이 드글거렸음을 알기에, 작일보다 유한 표정을 지으며 인파를 헤치고 나와 문 앞에 섰다.
웃음기가 서려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활짝 피어난 그 꽃 한 송이에
대체 어떠한 힘이 있기에
강산이 바뀌어도 유지되는가?
이는 필히 멸할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화무십일홍을 외친다.
피보다 붉은 글씨로 거칠게 적힌 글귀와 그 아래 말라비틀어진 채 겨우 붙어있는 수선화 한 송이. 이 때문에 다들 모여있었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당에 쥐새끼가 있네…. 홀로 중얼거린 순영이 침소 문에 붙은 벽보를 잡아 뜯고 문을 열었다.
승관과 한솔은 오전 일찍부터 시작되는 경주 생원들의 침소 배정을 돕는 것을 마지막으로 졸업하기로 했다. 순영의 졸업장을 건네받는 순간부터 졸업 및 석사 귀속이다. 한사코 거절한 이유는 온통 혼잡스러운 서당 중앙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존 한양 생원들에게 분잡스러울 것을 대비하여 각 침소에 머물 것을 권장하였으나, 신진들의 침소 배정은 언제나 즐거운 요깃거리였기에 하나둘 빠져나와 중앙에 모여든 탓도 있었다. 그들을 다시 침소로 집어넣을 자신도 없어서 결국 모두가 보는 와중에 침소 배정을 시작해야 했다.
서낭당 나무를 타고 내려온 오방신 영수들은 한양 생원을 점지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침소 배치를 해야 했다. 원우와 지훈으로부터 며칠 전보다 몇 배는 더 되는 인원수를 점지해야 한단 소식을 듣고는 귀찮아 죽으려 하기에, 오방신을 겨우겨우 달랬다.
찬은 누각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떨어지는 종이를 보고 명단에 기록하는 것을 맡았다. 본래 같았으면 홀로 누각을 지키며 일했을 테지만, 정한이 과거 제가 서당에 있었을 때와 지금의 변화를 비교하면서 세상 참 좋아졌다고 쫑알대는 덕분에 외롭지는 않았다. 경치를 구경하는 정한을 째려보곤 제 앞 창문을 제외하고 전부 닫아버렸다. 발칙해진 막내 청룡의 행동에 정한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턱을 괴고 찬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신信 중에는 일본인도 있어.”
“...이제 황룡이 되겠네요.”
“응. 너보다 한 해 어린앤데, 무도武道를 꽤 하더라고.”
“으응. 그래요?”
그렇담 여태 제주와 경주를 오가며 비무를 할 때나 한 번쯤은 봤겠는데. 영혼 없는 답변을 하며 경주 생원들의 이름 옆에 색을 새기기 바빴다. 이찬영, 주작. 정성찬, 청룡…. 하나하나 확인하며 휘갈기던 붓이 순간 멈추었다. 정한이 말하던 이가 침소를 점지받으러 나무 아래로 걸어 들어온 것 같아서.
“그 사람, 이름이 뭔데요?”
명적에 시선을 꽂은 채로 찬이 물었다. 쇼타로. 오사키 쇼타로. 맞았다. 한두 번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올망졸망하게 생긴 것에 비해 힘이 엄청났던 걸로 기억한다. 저보다도 어린 이를 어찌 아나 싶었는데, 약초학도였다. 쇼타로, 현무. 그의 이름 옆에 현玄을 새겼다. 명호 사형같네. 마반인들 사이에 유일한 수련생이었는데, 이젠 두 번째 사제가 생겼다. 산속에 수련하고 있을 그를 떠올리며 다음 장을 재빠르게 넘겼다. 박원빈, 오시온…. 잠시 딴생각을 했더니 떨어지는 종이를 시선으로 좇으며 필기하기에 바빴다.
사라락 사라락 종이 넘기는 소리와 먹을 가는 소리만이 누각을 채웠다. 240명의 침소 배정을 끝낸 찬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뒷목이 뻐근했다. 작게 원을 그리며 몸을 움직이며 정한을 봤다. 그새 빼꼼 창문을 열어 서낭당 아래 생원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석사 생활은 어때요?”
“할만해.”
“흐음….”
구라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쳐다보는 찬과 눈이 마주쳤다. 정한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스르륵 옮기며 말끝을 흐렸다.
“심화 마법사 시험이 어렵지…….”
“표준 마법사는 쉬웠다?”
“아무래도…….”
남들은 최소 재시를 염두에 두고 친다는 표준 마법사 시험마저도 나비들은 죄다 초시에 합격했다. 졸업과 동시에 표준 마법사를 따는 것은 꽤 드문 일이라 경주에서도 이들을 발 벗고 나서서 받아들였다는 소문도 있다. 특히 정한과 순영은 각자 약초학과 마법학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런 그마저도 어렵다고 하는 심화 마법사는 대체 어떤 수준인가 싶었다.
“연구하고 있는 심화 과목은요? 박사 잘못 만나면 끝장이라던데.”
“배 박사님? 좋은데? 사령四靈을 다루는데도 성격이 좋으셔.”
“오호…….”
정한은 학부 때부터 쭉 이어서 환상동물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령. 《예기》 예운 편에서 거론되는 린봉귀용을 가리키는 사령. 얼마 전 수업에서 들은 것 같기도…. 기억을 더듬다 포기한 찬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과 사신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둘 다 상서로운 동물로 분류되는 만큼 다루기가 까탈스러운 걸로 소문이 나 있다. 어지간한 성격으로는 이들을 다루기는커녕 제대로 견디는 것도 어려울 텐데. 과연 선진이구나 싶었다.
“너도 이리로 올 것 아니야.”
“그렇긴 하죠.”
찬도 마찬가지로 지금 환상동물학을 듣고 있다. 승관과 함께 수강하던 과목이었는데. 당장 내일부터는 혼자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살짝 막막해졌다. 앞으로 돌고 돌아 다시 경칩이 올 때까지, 홀로 버텨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고.
“...한참 멀었네요.”
“에이, 한 해 금방이지.”
지수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보이질 않아 당황을 하니, 정한은 고개를 저으며 누각 구석에 제 마구를 던졌다. 콕, 하고 허공에 찍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는 마구가 멈추며 지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참, 여전하네요. 사형들…. 말갛게 웃는 지수를 보며 찬이 허허 웃었다.
“오랜만이야! 어제 순영이가 난리 피웠다며?”
“큰 소란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조금 전까지 밑에서 마법학사인 척 있어봤어. 재밌더라.”
지수가 찬에게로 걸어갔다. 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곤 찬과 얼굴을 가까이했다. 당황한 찬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한참 후에야 싱긋 웃으며 물러났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이제는 황룡이 된 신들을 모아야 했다. 신의 대다수는 여생원이어서 누각에 모인 신들은 고작 일곱뿐이었다. 드문 중고 신진 아니냐며, 구경하겠다는 정한과 지수를 겨우겨우 쫓아냈다. 누각을 나서며 안으로 들어가는 일곱 명의 경주 생원들을 본 정한이 제 어릴 적 모습 같지 않냐며 속삭였다. 한참 독기 가득할 시기긴 하지. 지수가 웃으며 답했다.
“이제 나비들 중 학부생은 찬이 뿐이네.”
“그러게. 슬슬 순영이가 졸업장 줬겠다. ...뭐, 찬이는 어디서든 잘 하니까.”
“...큰 일도 잘 치를 거 같고.”
“큰 일?”
뭐 아는 거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기에, 정한이 되물었다. 지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었다. 정한의 귀에 속삭여주니, 그의 동공이 커졌다. …진짜? 응, 진짜.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굳게 닫힌 누각 문을 한 번 보고, 싱긋 웃고는 익숙하게 꽃밭으로 향했다.
고高
공空
가歌
“저는 이찬입니다. 황룡장의이며 무예 수장까지 맡고 있어요.”
얌전하게 들어와 조용히 찬의 앞 의자에 앉았다. 다들 긴장을 한 것인지 찬의 말에도 별 반응이 없다가, 뒤늦게 쭈뼛대며 한둘씩 인사를 하기에 찬은 그 마음을 알아서 그저 받아주었다. 찬이 공책 하나를 가져와 다시 앉고는 일곱 명의 얼굴을 훑었다.
“전쟁 중에 올라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선…. 어느 학부인지부터 말해주실래요? 공강 때 황룡 업무를 분담해야 해서 시간을 맞춰야 하거든요.”
찬의 말에 가장 왼쪽에 앉은 이부터 하나둘 이름과 학부를 말했다. 가장 오른쪽에 앉은 이만 남았을 무렵, 그가 입을 달싹이다 작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주작 이찬영입니다. 1년 생원이라…. 아직 학부가 정해지지 않았어요.”
“오.”
“…….”
“...오.”
“…….”
“1년 생원도 신이 되는군요….”
특히 경주는 다양한 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 전통을 중시하는 한양이나 제주와는 다르단 것을 이제야 실감했다. 찬이 고개를 뚝딱거리며 필기했다. 1년 생원에 황룡이 생긴 건 처음이라며 미소를 지으니, 찬영도 그에 답하듯 작게 웃어 보였다.
“무예를 하시는 분도 있죠? 지금 보니까 꽤 익숙한 얼굴이 몇 있네요.”
찬의 말에 웃은 사람은 쇼타로를 포함해 단 셋이었다. 시온과 원빈. 따로 적어둘게요. 이곳에서도 무예 할 거죠? 찬의 질문에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신진은 환영이었다.
이런저런 준비를 다 끝낸 찬이 말끝을 흐렸다. 두리번거리며 창문이 전부 닫힌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의자를 좀 더 바투 끌어당겨 앉고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무예 수장으로서 조금만 더 말해도 될까요? 믿을만한 경주 생원은 아직 여러분들밖에 없는데.”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장의의 기준을 통과한 이들이라면 무조건 믿을 만했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유대감이 쌓일 정도니까 말 다했지. 그새 분위기에 풀어진 이들이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고도 입술을 말았다 풀길 반복하던 찬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리 서당의 이념은 아시다시피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에요. 이념을 갈아치우자는 게 아니라,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로 하는 말인데….”
“…….”
“이 전쟁의 시발점을 찾아 뿌리 뽑을 사람을 찾고 있어요.”
화무십일홍을 외치던 자들은 특정 가문만이 권세를 누리는 것을 염려한다는 이유로 이름난 가문의 자손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여왔다. 와중에 무적 마법인 나빌레라를 남발하였고 그 결과 난亂으로 시작된 것이 전쟁을 거쳐 그 속에서 낙화열병으로까지 변질되었다. 수천 명이 고작 다섯 글자로 시작된 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마법을 공부하고 서당의 장의가 된 지금, 비단 남의 일이 아닌 지금. 결단을 내야 한다. 나 홀로 600명, 그 이상의 생원과 박사를 지키라 한다면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는 그만한 권한이 있고 힘이 있는 인물이니까. 헌데 이들을 보호만 하고 살기에는 짊어진 무게가 막막했다. 한솔을 데리고 청룡 침소를 나가던 어젯밤 호시의 등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도, 나도 사형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결사대를 만들까 하는데, 어때요?
가장 깨끗하고 현명한 마법을 공부하는 우리는 감히 그래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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