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가

고공가

현재 by 반야

서당은 5년간 수없이 바뀌었다. 가장 큰 것을 뽑아보라 한다면, 서낭당을 기둥으로 한 큰 누각이 새로 생긴 게 되겠다. 북재에서 도서고를 지나 서낭당을 돌아 누각까지 가야 하는 귀찮음을 알아차린 어느 검은 오방신이 황룡의 편의를 위해 기존 누각과 도서고를 없애고 새 누각 아래에 도서고를 설치해 주었다. 커다란 서낭당 나무 그늘 위에 세워진 새로운 누각이 생긴 지도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게다가 이제 다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여파로 줄어들었던 입재생들은 찬의 입학을 기점으로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오방신들은 더 많은 생원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그를 수용한 옥황상제는 한양의 생원들에게 각각 기숙사를 한 층씩 더 선물했다. 그러나 아직 인원을 더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구삼승의 전갈 덕분에 생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현 서당의 황룡들은 이 점을 매우 감사히 생각했다.

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단단해진 서당의 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찬은 이를 참 좋아했다. 무겁고 웅장한 소리를 내는 목문木門 덕분에 새벽에 탈출 했다가 돌아오는 이도 줄어들었고, 요괴나 잡괴는 당연히 통과하지 못했다. 게다가 황룡들의 촘촘한 결계 덕분에 그 어떤 도적도 들어올 수가 없었다.

헌데…….

잔뜩 성이 난 백호가 그저 무력만으로 서당의 문을 열어제꼈다. 찬이 서당 생원들에게 전쟁통임을 잊을 만큼 안전한 서당이 되겠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게 하겠다, 라는 굳은 약속을 한 지 겨우 두 시진이 지난 늦은 밤이었다. 가장 가까이서 소리를 듣고 백호의 모습을 본 남재의 어린 주작들은 단번에 그가 말로만 듣던 ‘호시’임을 알아차렸다. 날카롭게 찢어진 금안과 허연 머리칼, 능소화 명패가 달린 월도까지. 기어이 잠그고 잠가 둔 결계가 호랑이 앞발에 깨지고 만 것이다.

모두가 수군거릴 때 뒤늦게 누각에서 소식을 접한 찬이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순영의 번쩍이던 금안이 차츰 이성을 되찾는 듯 서서히 식어갔다. 부승관 어딨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찬의 귓가에 꽂혔다. 화무십일홍을 내세우는 인물이 아직 죽지 않고 기세를 떨쳤다니. 고작 열둘의 나이에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을 노란 꽃 한 송이가 걱정됐다. 또, 어디선가 눈물을 삼키고 있을 그가 애처로웠다.

그 ‘호시’라는 자가 서당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새끼 청룡들을 통해 승관이 침소까지 타고 들어왔다. 사형, 사형! 호시께서 오셨답니다. 하고 친히 승관의 방문을 두드리는 생원도 몇 있었다. 순영의 생각대로 홀로 겁에 질려 눈물을 닦아 올리던 승관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부랴부랴 채비하고 밖으로 나갔다.

 

인파 속에서 승관을 발견하자마자 순영이 망설임 없이 걸어가 그의 팔목을 잡았다. 그저 붓만 잡아 온 승관의 얇은 팔목이 휘어잡히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가도 오랜만에 본 사형의 표정이 온통 걱정뿐이라, 미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괜찮아?”

모두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로, 입 모양조차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물었다. 승관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재차 확인했을 때도 승관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하하, 내가 뭐, 이런 걸로…….”

“무섭네. 그치.”

순영이 승관의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감히 독심술이 있는 백호에게 제 마음을 숨기려 했던 청룡이다. 승관이 고개를 숙였다.

맞다. 사실 무서웠다. 죽을 만큼 두려웠다. 일상에서 또 누군가가 꽃을 토해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쓸렸다. 이찬도, 최한솔도 쉽게 죽을 놈이 아닌 것을 안다. 경주로 떠난 사형들도 마찬가지였다. 날 두고 어찌 죽어.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기억 깊숙한 곳에 처박힌 충격은 때가 되면 항상 튀어나왔다. 제 눈앞에서 폭죽처럼 터지던 꽃을, 수없이 밟은 제주의 꽃길을 어찌 잊겠는가. 설령 나는 죽어도 좋아. 근데 나비들이 내 주변을 떠나면 어떡하지. 이 수선화 홀로 남게 되면 어쩌지. 죽음의 꼬리가 꼬리를 물었다. 결국, 검은 태사혜에 물기가 맺혔다.

점점 갈수록 보는 눈이 많아졌다. 보란듯이 우는 승관을 데리고 가벼이 날아 청룡 침소로 들어간 순영은 축축해진 승관의 얼굴부터 살폈다. 괜찮다며 애써 웃는 모습에 심장이 아렸다. 너….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생원들을 각 침소에 돌려보내고 온 한솔과 찬이 청룡 침소로 들어왔다.

 

 

 

고高
공空
가歌

 

 

 

졸업해. 제 앞에 앉은 세 황룡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겨우 진정하고 한솔의 황룡 도포로 눈물을 닦던 승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응? 지금?”

“박사 중에 승철 사형이랑 동갑인 제주 사람이 있어. 경주에서 낙화대전을 겪고 가족을 잃었거든.”

“…….”

“너희 처지를 듣더니 이렇게 써 주더라.”

순영이 도포 자락 속에서 두루마리 두 개를 꺼내 들었다. 하나를 슬쩍 열어보곤 한솔에게 건네주었다. 한솔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수선화 부가 승관, 금낭화 최가 한솔의 조기졸업을 허가하며….”

이후 각자 환상동물학과 저승연구학의 석사로 귀속시킨 뒤 경주에서 보호할 것을 명한다.

“...그럼 얜 어떡해.”

곧바로 승관이 이찬을 콕 집으며 말했다. ...황룡 장의가 어딜 떠나. 순영과 찬이 동시에 말했다. 답을 들은 승관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저뿐만 아니라 한솔까지 이 서당을 졸업하고 떠난다면 황청룡과 황룡백호의 자리가 공석이 된다. 6년 생원이라 크게 황룡으로서의 일이 적은 편인 데다가, 공석인 자리는 언제든 다른 인재로 메꿀 수 있단 걸 알면서도 위치가 위치인지라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게다가 홀로 찬을 두고 떠나기엔 쌓아온 정이 너무나도 두터웠다.

“...미안한데, 하나 더 있어.”

“…….”

“이건, 경주 대사성의 명이야. 한양과 제주 대사성 간의 토의에서 나온 것인데….”

먹이 마르기도 전에 집어 들고 날아온 덕에 두루마리가 예술이었다. 이리저리 번진 먹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럼에도, 내용을 눈으로 훑은 탓에 웃는 자는 없었다.

원활한 서당의 관리를 위해 경주의 남생원은 한양으로, 여생원은 제주로 향할 것. 경주의 서당을 비울 것을 명한다. 찬의 목소리가 떨렸다. 황룡장의로 있으면서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구였다. 이 말을 소문으로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쳤을 테다.

생원을 한곳에 모은다고? 경주에는 여남 각 40명의 생원들이 입재한다. 침소가 두 배가 된 덕분에 모자라진 않겠으나 그 외에 모든 일들이 꼬이게 된다. 당장 새로이 입재할 이들의 침소 배분은 어찌하며, 세시풍속은 어떻게 챙길 것인지, 이 전쟁이 시작된 이상 가장 만만한 이는 꽃을 품은 생원일 텐데 경주에서 오는 이들의 안위는 어찌할 것인지. 머리가 온통 어지러웠다.

“침소 배분은 생원들이 전부 들어온 다음 날 할 거야. 세시풍속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류. 올해는 아마 안 열리겠지. 경주 생원들은 최대한 안전하게 올 거고.”

“으응…….”

무의식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생각을 읽은 순영이 술술 불었고, 그 생각의 주인인 승관이 흐릿하게 답했다.

“내일이면 사형들이랑 지비가 도착할 거야. 일단 마법석사 마법학사 상관없이 전부 기숙사 쓸 거니까 그렇게 알리고.”

“…!”

순간 찬의 눈이 반짝였다.

“석사 학사는 같이 못 쓰니까 걱정 말라고도 전하고.”

“…….”

“실망했네.”

다시금 예전처럼 복작이던 열세 명의 침소를 꿈꾸던 찬의 생각이 와장창 깨졌다. 그를 읽은 순영이 웃으며 두루마리들을 정리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한솔이랑 자겠네. ...슬슬 준비해. 졸업은 침소 배정이 끝난 뒤에 바로 이뤄질 테니까.”

졸업식. 다시 희비가 교차했다. 조기졸업 후 경주 귀속되는 것. 서당을 벗어나진 않지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았다. 둘이 경주 소속 마법석사가 되면, 엄격한 규율 아래서 마법학사들로부터 신원을 보호받을 수 있으나 한양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일절 참관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전쟁에서 한 걸음 더 떨어져 보호받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지만, 그만큼 석사라는 틀에 맞추어 생활해야 하므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만 관전할 수밖에 없다. 일부러 안전한 족쇄를 채우려는 듯했다. 모양새가…. 그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안그래도 이 드넓은 서당에 막내 나비 셋만 덩그러니 남겨두었으니 얼마나 걱정되었을까. 와중에 밖에서는 전쟁이 터졌으니 가장 여린 승관을 가만두지 못해 안달이 났을 테지. 당장 나비들에게 이 결정은 축제였을 지도 모른다. 찬은 생각했다. ...그럼, 홀로 600명의 생원과 그 외에 석사와 박사들까지, 나는 이들을 어찌 보호해야 할까. 슬슬 일어나는 순영의 하얀 뒷모습을 보며 찬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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