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치 더 록

[보키타] 음과 별을 이어서

sn by 송로
17
0
0

"좋아해."

갑자기 떨어진 한마디가 가라앉은 공기에 물결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턱에 주름이 지도록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히토리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기울어진 햇살이 부시게 눈을 찌른다. 잔잔한 연못 위에 조약돌이 빠진 듯이 히토리의 감정에도 일렁임이 일었다. 소리 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정돈되지 않은 숨이 터져 나왔다.

아, 그러니까, 키타씨가 뭐라고?

히토리는 전해온 한마디를 받아들이는 것이 한 박자 늦었다. 단어의 의미는 이해했지만, 그 뜻이 지금, 이 순간에 쓰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기타 연습을 위해 찾은 창고 안에는 키타와 히토리, 단둘뿐. 상대에게 들을 리도, 말할 리도 없어서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던 한 마디가 히토리를 얼어붙게 했다. 히토리가 차마 얼버무리지도 못하고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때 키타가 말을 이었다.

”―를 고토 씨라면 어떻게 표현할 거야?“

키타가 문장을 다 끝맺은 뒤에야 히토리는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창문으로 홍조와 같은 빛무리가 넘어오고, 오로지 둘만이 서로를 마주하는 시간.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착각을 해버렸다고 히토리는 반성했다. 염치도 없이 키타 씨가 저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줄로 착각해서 죄송합니다. 애초에 여자끼리인데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내면의 반성을 삼키며 히토리는 키타의 질문에 답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좋아해 라니, 이제껏 인연도 없었고 앞으로도 계속 없을 것 같은 말이다. 아니, 웬만하면 미래에는 있었으면 하지만. 지금의 히토리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말이었다. 밴드를 해나가는 것도 힘든데 연애라니. 히토리에게는 벅찬 과제였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히토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그것이 히토리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키타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이상한 걸 물어봤지? 연습이나 다시 할까?“

멋쩍게 웃은 키타가 다시 현을 만졌다. 튕기지 않고 되짚듯 왼손만을 움직여 프렛 위를 더듬는 손에 망설임이 느껴졌다.

역시 중요한 일이었을까. 키타씨가 누군가한테 좋아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면, 그리고 그 말이 고백이었다면, 키타씨에게는 중요한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심장에 돌덩이가 얹힌 듯이 속이 답답해졌다.

아, 이런 때에도 청춘 콤플렉스 같은 걸 느끼는 건 싫은데. 소중한 밴드 멤버인 키타씨에게 그런 감정을 품는 자신에게 싫증이 난다. 무거운 기분을 누그러뜨리려 히토리가 기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시동을 걸듯 현을 튕겼다.

기타의 소리가 창고 안에 넘친다. 오랫동안 손에 익어 매끄러운 음이 특유의 버릇을 싣고 공기를 울린다. 특별한 신호 없이 시작한 연주에도 한 박자 늦게 투박한,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는 히토리의 음을 떠받치는 키타의 연주가 성실하게 뒤따랐다. 드럼도, 베이스도 없는 어딘가 결여된 멜로디. 하지만 불완전한 두 사람의 연주만으로도 미지의 열기가 띠었다.

히토리는 기타를 본다. 들리지 않는 고개로 리듬을 탄다. 그 모습을 키타가 곁눈질했다. 아직 키타에게는 히토리의 연주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벅찼다. 그럼에도, 집중이 끊어질 것만 같은 와중에도, 키타는 앞에서 끊이지 않고 움직이는 손을 본다. 그리고 손이 멈추어버릴 것 같은 순간을 넘어 양렬의 가락이 된다. 두 줄의 주파수를 잇는 음악 속에서 키타는 떠올리게 된다. 역시 나는 좋아하는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히토리의 손이 높이 솟는다. 손가락이 떠난 자리에 잔음이 울리다 곧 멎었다. 연주가 끝나도 식지 않은 열기가 손가락에 남는다. 키타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아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그 작은 움직임을 히토리는 놓치지 않았다.

"아, 키타 씨, 괜찮으세요?"

히토리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아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같은 경험을 전부 지나서야 능숙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공감을 몸짓으로 표현하듯이 히토리가 답싹 키타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잡힌 손이 움찔거렸다. 그런 떨림을 모른 채 히토리는 열중해서 키타의 손을 주물렀다. 만져보면 말랑하고 따뜻한 손에 굳은살이 박였다.

생전 잡아볼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람의 손에 자신과 똑같은 흔적이 남았다. 그리고 키타가 계속 밴드를 해나간다면, 그 흔적은 앞으로도 늘어갈 것이다. 그 사실에 히토리의 감정에 묘한 울렁임이 스쳤다.

이,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을 굳히며 히토리가 키타의 손을 마사지했다.

"이렇게 하면…. 좀 나을 거예요."

"있잖아, 고토 씨."

키타의 부름에 히토리가 움찔 튀어 올랐다. 이상한 생각한 거 들켰나? 키타가 독심술을 쓸 수 있을 리도 없는데 히토리는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어쩌지, 사과해야 하나? 히토리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키타가 웃었다.

"고토 씨는 역시 기타를 잘 치네."

아, 아니었구나. 혼자 불안해하던 히토리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키타가 정말로 이상한 생각을 하기 전에 히토리가 손사래를 쳤다.

"그냥 오래 연습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뿐이에요."

"요령 같은 건 없어? 있으면 가르쳐 줄래?"

"요령…, 요령이라고 한다면…."

히토리가 난처한 듯이 눈을 굴렸다. 어쩌지, 그냥 오래 쳐서 익숙해진 것뿐이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치진 않는데…. 키타는 이미 반짝거리는 눈으로 히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시선을 어떻게 배신하랴. 하지만 정답은 떠오르지 않고, 눈을 뱅글뱅글 돌리며 창고에서 운동장으로 가는 최단 직선거리, 즉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를 상상하던 히토리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음과 음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음과 음을 잇는다?"

"그러니까…. 처음엔 코드 하나를 치기도 어렵지만…. 곡은 코드가 이어져야 하잖아요…. 처음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코드와 코드가 이어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연주하면…. 좀 더 자연스러운 연주가 되지 않을까요…?"

"코드와 코드…. 음과 음…. 이어진다…."

기타가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별로 와닿지 않았나 보다.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은 기분에 히토리가 움츠러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답했는데. 괜히 아는 척했나? 역시 나는 완숙망고 상자 안에나 틀어박혀 있었어야 했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하던 히토리를 건져 올린 것은 키타의 환한 미소였다.

"그렇구나! 응, 고토 씨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 부분을 의식해서 연주해 볼게!"

흉내도 낼 수 없을 것 같은 맑은 목소리, 보는 이마저 웃게 만들 것 같은 예쁜 웃음. 지난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조금도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없는 밝음이 히토리를 눈부시게 해서, 히토리는 눈을 깜박 감았다 떴다.

역시 이 사람과 나는 달라.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부정적인 생각보다, 그래도 이 사람 곁에 서고 싶다는 다짐이 먼저 올라온다. 이 사람과 함께 계속 밴드를 해나가고 싶다. 한 쌍의 멋진 연주를 스테이지에서 선보이고 싶다. 그런 마음을 담아 히토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날의 마지막 연주가 이어졌다.


학교에서의 연습을 정리하고 키타와 히토리는 같은 하굣길을 걷고 있었다. 히토리의 집은 키타보다 멀어서 중간에 헤어져야 했지만, 키타는 히토리가 전철을 타는 역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런 배려에 히토리는 매번 황송해했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기고 내려앉은 어둠이 가로등의 그늘을 길게 끄는 저녁. 평소라면 붙임성 좋게 말을 걸어왔을 키타도 조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편안한 침묵이었다.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인다. 까만 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 도시의 불빛에 밀려나 드물게 띄는 별들이지만 인조의 빛보다 순수하게 아름답다. 문득 히토리는 창고에서 걸어왔던 키타의 질문을 떠올렸다.

"저기, 키타 씨."

"응?"

키타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돌아보았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자체만으로 빛나고 눈부신. 그런 얼굴을 히토리는 본다. 히토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떠올린, 앞으로 하게 될 말이 부끄러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말해야만 했다.

"아까 창고에서, 키타 씨가 물어봤던 좋아함에 대한 질문 말인데요." 

"응."

"좋아한다는 건…. 누군가가 별처럼 빛나 보이는 게 아닐까요…?"

히토리의 손가락을 따라 키타가 별을 바라본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별들이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있었다. 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토 씨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네…. 그래서,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별과 자신이…. 이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게 아닐까요…. 마치 별자리처럼…."

음과 음을 이어 곡을 만들듯이, 단어와 단어를 이어 가사를 만들듯이, 그렇게.

히토리는 밤하늘의 별을 계속 바라보았다. 별이 아름다워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상한 말을 한다고 키타가 실망하거나 비웃어버린다면, 도저히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자신감을 가질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돌아보지 않는 히토리의 옆얼굴을 키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이 떠올리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별은 찬란하게 빛난다. 하늘에서는 가까워 보여도, 서로는 수억 광년, 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사람은 별자리를 그린다.

키타가 자신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히토리는 보지 못했다. 그저 별만을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히토리의 푸른 눈이 별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난다. 그 안에 지금 들어있는 것은 별들뿐, 키타는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그런 히토리의 시선을 잡아끌듯이 키타가 히토리의 정면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럼 나는 고토 씨와 별자리가 되고 싶어!"

갑작스러운 선언이 떨어지고 나서야 히토리가 키타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뜨인 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려줬다. 또 나를 먼 존재처럼 생각했구나. 섭섭함을 숨기며 키타는 있는 힘껏 반짝였다.

"고토 씨가 같이 밴드를 하자고 말해줬으니까, 고토 씨가 기타를 알려줬으니까."

키타가 히토리의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스테리의 계단에서 히토리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때를 떠올리며.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어!"

히토리가 멍청한 얼굴로 키타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키타가 손짓했다. 함께 빛나자고, 별자리가 되자고.

망설이던 히토리도 굳게 다짐한 듯이 손을 내밀어 키타의 손을 잡았다. 환한 웃음이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그렇게 손과 손을 잇고, 둘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하굣길을 걸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G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