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니지] 잊게 두지 않을거야
료는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 보고 있는 나까지 마음이 가라앉아서 우울해지는 그런 하늘이었다.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싸늘하게 뺨을 식히고, 가슴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듯이 허전함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나는 그 속에서 물끄러미 공기의 흐름에 흔들리는 새파란 머리카락을 보았다.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료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린다. 두 번, 툭툭 치고, 돌아보는 료의 볼에 콕 손가락을 찌른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멍한 무표정에 대고 나는 말한다.
있지, 한가하면 베이스 해줄래?
료가 말한다. 왜?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 료의 건조한 목소리. 거기에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야 난, 료의 베이스를 좋아하니까.
심벌의 소리가 공기 중을 울리다가 점점 잦아든다. 잔음이 사라진 자리에도 들뜬 열기가 남았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구슬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벅찬 호흡의 소리가 작은 전율을 일으켰다. 곧이어 스튜디오의 연습실 안에 작은 환희가 퍼진다.
"이번에는 완벽하게 맞았어요!"
키타 쨩의 목소리가 밝게 울려 퍼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타 쨩을 바라보던 히토리 쨩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넷…! 이 정도라면 다음 라이브도…!"
히토리 쨩의 맞장구를 시작으로 키타 쨩과 히토리 쨩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환하게 웃었다. 나까지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지는 광경이었다.
확실히 조금 전 연주는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 밴드의 소리가 하나로 엮어지며 완성된 퍼포먼스라고 해도 될만한 형태를 갖추었다. 점점 밴드로서 제대로 된 연주를 해나갈 수 있게 되어가는 듯해서 나의 마음에도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래도 그렇지, 어느새 둘만의 세계로 빠진 히토리 쨩과 키타 쨩을 향해 박수를 두 번, 짝짝 쳤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내일도 이런 느낌으로 맞춰보자. 오늘 다들 수고했어."
"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선배님들!"
"응, 수고~."
나른하게 손을 들어 올리는 료를 한번 돌아보고―하여간 늘 맥없는 반응이라니까―, 나도 손에 들었던 드럼 스틱을 내려놓았다. 하나둘, 악기를 벗고 각자의 짐을 챙긴다. 분주한 히토리 쨩과 키타 쨩과 달리, 나는 멀리 갈 것 없이 이 라이브 하우스의 위층이 집이라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간소한 뒷정리를 마치고 기지개를 켜고 뭉친 어깨를 두드렸다. 통통, 찌뿌둥하게 뭉쳤던 근육이 풀리는 시원한 감각에 잠깐 눈을 감았다 떠보면, 키타 쨩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키타 쨩? 무슨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키타 쨩은 료를 힐끔거린다. 료가 돈이라도 달라고 했나? 료를 향해 시선을 옮기니, 히토리 쨩을 향해 손을 흔드는 료가 보인다.
"그,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응, 잘 가, 봇치."
이미 몸이 반쯤 연습실을 나가 있는 히토리 쨩과는 다르게 짐도 챙기지 않고 계속 서 있는 료에게 물었다.
"너는 안 가?"
"음, 좀 더 이 여운을 즐기고 싶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쿠요, 이제 가야지."
"이봐요, 당신이나 가고 말하세요."
"아, 앗, 네! 그만 가볼게요!"
결국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이 이쪽을 봤던 키타 쨩은 황급히 짐을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키타 쨩을 거의 떠밀듯이 내쫓은 료를 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선배가 되어서는 후배를 내쫓아서야 되나. 키타 쨩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결국 못 들었잖아.
료는 노려보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실 벽에 기대어 털썩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벽에 정수리를 기대어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드는 모습이 마치 영감이라도 받은 예술가처럼 보인다. 얼굴만큼은 천재 음악가라니까. 한숨을 내쉬고 료의 옆에 새 물병을 놓았다.
"땡큐."
"고마우면 후배들한테도 신경 좀 써줘. 제멋대로 굴지 말고."
"나는 언제나 진심으로 대하고 있어."
"그 진심이라는 게 문제거든요?"
료는 내 핀잔을 신경도 쓰지 않고 물병을 따서 입에 대고 마셨다. 정말 뻔뻔하다니까. 혀를 차면서도 그런 료를 더 나무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료에게도 료의 페이스가 있으니까. 료도 료 나름의 배려와 선배다움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더 참견하지 않아도 료가 알아서 잘해주겠지. 뭐, 평소에는 돈이나 빌리는 나쁜 선배이긴 한데.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는 료의 옆에 나도 편하게 앉았다. 다시 벽에 기대어 눈을 감는 료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묻는다.
"연습, 어땠어?"
"이번 거?"
"응, 이제 제법 밴드다워졌지?"
"…그럴지도."
생각에 잠긴 듯한 무표정으로 바닥을 보는 료의 옆얼굴을 본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료는 예전보다 표정이 가벼워진 듯했다. 그때, 옥상에서 납빛 하늘을 올려다볼 때보다는. 료도 지금 밴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전 밴드에 비해서,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료의 중요한 무언가를 건드리는 거니까.
료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 료가 멋대로 생각에 잠기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고 갈 거야?"
"그럼 매우 고맙겠소이다."
"그게 무슨 말투야."
파란 정수리를 통 손날로 내리쳤다.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린 료가 양손으로 쓱쓱 머리를 문지른다. 한 편의 촌극 같은 흐름에 작게 웃고, 나도 연습실 문을 나섰다.
"키타 쨩!"
"니지카 선배?"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나를 키타 쨩이 돌아본다. 당황한 듯하지만 조금 반가워하는 얼굴이라 나는 불러세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어제 연습에서 나한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학교까지 일부러 찾아왔는데, 쓸데없는 참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에게 한달음에 뛰어온 키타 쨩이 내 팔을 잡고 나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마침 잘됐어요. 같이 가요, 선배."
"뭐야, 비밀 얘기야?"
"네,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키타 쨩은 초조한 표정으로 아무도 없는 학교 구석으로 나를 데려왔다. 무슨 비밀 얘기를 하려고 그러나.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키타 쨩이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한번 크게 심호흡하고 나에게 물었다.
"니지카 선배는… 혹시 료 선배와 사귀시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애 상담일 줄은 몰랐는데. 그건가, 키타 쨩은 료를 좋아하니까 혹시 내가 라이벌은 아닐지 물어본 걸까. 그러면 다행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걱정마, 걱정마.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니까! 물론 사이는 아주 좋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럴 일 없어!"
하지만 뜻밖에도 키타 쨩은 내 대답에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가…! 그럼 니지카 선배도, 료 선배도, 남친이 있는 건가요?! 그런, 그런 거 용서할 수 없어…!"
"잠깐, 키타 쨩, 멋대로 폭주하지 말아 줄래?! 우리는 남친도 없고 여친도 없으니까!"
"그, 그럼, 다행이지만요. 정말 료 선배와 니지카 선배는 사귀는 사이가 아닌가요?"
"음, 뭘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예전부터 아는 사이이긴 했어도 둘 사이에 그런 일은 전혀 없었는걸."
나에게 부정의 답을 듣고 멍해져 있던 키타 쨩이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처하게 웃으며 키타 쨩을 바라본다. 설마 료랑 사귀고 있는 편이 키타 쨩한테 도움이 될 지는 몰랐는데. 아직 제대로 된 고민은 말해주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키타 쨩에게 다시 물었다.
"그거 말고 물어볼 건 없어? 다른 고민이 있었던 거 아냐?"
"아, 네. 그런데…, 지금은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나중에 생각이 정리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렇구나. 말할 수 있게 되면 꼭 말해줘. 밴드 멤버의 고민이라면 언제든지 상담해 줄 수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니지카 선배에게라면 언젠가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색하지만 키타 쨩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양심이 쿡쿡 찔려온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먼저 말 못 한다고 한걸요."
씁쓸한 표정을 짓는 키타 쨩을 보니 가슴이 아파온다.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네. 그런데도 나는 끝내 개인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랑 료가 사귄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야?"
"네? 그야, 료 선배와 니지카 선배는 같이 있으면, 뭐랄까 둘만이 공유하는 분위기 같은 게 있어서요."
멋쩍게 대답하던 키타 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니지카 선배는 느끼지 못했나요?"
거기에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료가 베이스를 친다. 손을 튕길 때마다 베이스의 저음이 울려 퍼진다. 거기에 맞춰 료는 노래를 부른다. 매력적인 저음이 어우러진다. 저녁의 거리를 물들이는 노상 라이브다.
그 모습을 제일 앞자리에서 내가 담는다. 카메라의 렌즈 속에 료의 음색을, 모습을 담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마음속에 담는다. 그리고 변하지 않을 사실을 마음속에 새긴다.
나는 료의 베이스를 좋아하니까.
"언니, 나 왔어!"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스테리로 내려가 라이브 하우스를 보고 있는 언니에게 인사한다. 거기에 답해 언니가 손을 흔들어준다.
"위층에 야마다 와 있다."
"그래? 오늘은 연습 없는데."
"그 녀석은 자주 우리 집에 오니까. 네 방에 가 있으라고 했어."
"응, 고마워. 올라가 볼게."
다시 언니에게 손을 흔들고 위층의 우리 집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내 침대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료가 보인다. 어디서 꺼냈는지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인사도 없이 가방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료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를 향해 눈길을 조금도 주지 않는 료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여기가 네 방인 줄 알아?"
"거의 그렇잖아."
"물론 네 물건이 많지만!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여긴 내 방이라고."
"저항은 소용없어."
"큭, 진짜 얄미워!"
료가 브이를 했다. 아주 약 올리려고 작정했지. 한숨을 내쉬며 아예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이미 침대 한가운데를 료가 차지해서 끄트머리에 겨우 누웠을 뿐이지만. 료의 머리 옆에 발을 두고, 료와 엇갈리게 누운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미동도 없는 료의 다리를 바라본다. 거기에 대고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키타 쨩이,"
"응."
"우리가 사귀지 않냐고 묻더라."
"풉."
"그치, 웃기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쿠요, 재밌는 구석이 있어."
내용과 다르게 료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기복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편안한 저음이었다. 나는 시선으로 료의 매끄러운 다리를 훑었다. 굴곡이 느껴지지 않는 곧은 다리. 이렇게 마른 다리로 서는구나. 새삼 느꼈다.
밴드를 그만두고 종종 혼자서 노상 라이브를 하던 료를 떠올린다. 결속 밴드를 결성하고 나서는 솔로로 노상 라이브를 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대신 라이브 하우스를 빌려 밴드라는 형태로 함께 곡을 연주한다. 우리들만의 노래를.
결속 밴드도 이제 제법 밴드다워졌다. 내가 느끼기엔 그래. 그렇다면, 료는 결속 밴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전의 밴드보다 어때? 우리들의 밴드는. 나는 지금껏 그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건 너무 잔혹하잖아. 하지만, 가끔 그런 질문이 목에 걸린다. 어때, 지금은 좀 나아졌어? 우리가 너의 마음을 채워주고 있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만화책을 내려놓은 료가 몸을 일으켰다. 누워서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료가 내게로 몸을 기울여, 내 머리 옆을 손으로 짚고 눈을 맞춰왔다. 파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료의 얼굴에 그늘이 진다. 그림자가 진 료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니지카는 어때?"
"응?"
"우리가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어둑한 료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동요가 없는 저음, 깔끔한 무표정. 그 너머를 바라보려는 듯이 나는 료를 응시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아니?"
계속 나를 내려다보는 료에게 나는 말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손을 뻗어 료의 뺨을 어루만졌다. 료의 뺨은 서늘했다. 희미한 고동을 느껴보려는 듯이 나는 료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운명이나 기적 같은 건 나에게 과분하니까. 그냥 매일매일, 평소처럼 한 발 내딛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료의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하지만 거기에 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무엇도 비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료는 이윽고 짚었던 손을 떼고 몸을 세웠다.
"그래?"
"응."
나는 료가 사라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천장에 빛나는 형광등이 햇살처럼 눈 부셨다.
"그럼 됐어."
료는 다시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료의 머리카락이 내 발목을 간지럽힌다. 파란 머리카락. 푸른 봄보다는 파란 멍을 닮은 깊은 청색을 떠올린다. 망막에 들러붙은 것 같은 파란색을 떨치려 나는 눈을 감았다.
분명 죽어서도 잊히지 않을 푸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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