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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절망 앞에서 그들은 행동하나니 2

After CCA · 섬광의 하사웨이

某日 by 銘

그 이후의 일은 사실상 기억에 없다. 드문드문 생각나는 장면은 있지만 마치 간밤의 꿈을 회상하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오직 확실한 것은, 빈 지하실을 뒤로 하고 1층으로 돌아온 후 먼동이 틀 때까지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샤아 아즈나블의 영민한 머리는 아무로가 향했을 만한 장소와 도움을 청했을 만한 사람과 앞으로 취할 만한 행동의 목록을 쉴새없이 뽑아내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은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고 그저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기만 했다. 아무로, 자네는 대체 어쩌려는 것인가. 샤아는 결국 며칠 전의 아무로처럼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길게 탄식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거실 한쪽 벽에 달린 구식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귀를 시끄럽게 때리는 벨 소리에 샤아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캄캄하고 어두웠던 집안이 어느새 환히 밝아져 있었다. 얼핏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전화 벨이 울리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긴 했으나 이 집에 전화를 걸 사람이라곤 고작해야 근처에 있는 몇몇 농가의 주민들 뿐이니 아무래도 그들 중 하나이려니 싶었다. 어쩌면 며칠 전 아무로가 발전기 수리를 도와주기로 했다던 이웃집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무로가 없는 이유를 적당히 둘러대야겠군. 샤아는 주먹을 한 번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스입니다.”

목소리를 내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잠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이쪽이 전화를 받자마자 알은체를 하며 나루하게 용건을 이어가던 이 지역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다음 말이 곧장 들려오지 않자 상대방이 이웃의 주민이 아니라 외부의 사람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샤아는 곧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누구지. 그의 푸른 안광이 더욱 날카롭게 짙어졌다. 액시즈 사건 이후 가짜 신분을 만들어 잠적하면서 그들은 과거의 지인들에게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로 레이와 샤아 아즈나블이 사실상 죽은 상태로 남는 것이 주변인들에게도 훨씬 나은 일이었고, 굳이 미련 담은 연결고리를 남겨봤자 감시망에 걸려 이용당하기만 쉽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는 싸움과 전쟁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그들의 의견이 처음으로 맞아 들어간 때였다. 그렇기에 이 주변에서 새롭게 관계를 맺은 이들 외에는 알지 못할 번호로 외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든 유출이 되었거나,

……그 목소리는 샤아 아즈나블이로군. 아무로가 받을 줄 알았는데.」

“카이 시덴 군인가.”

이쪽의 사람이 먼저 저쪽에 연락처를 남겼다는 의미였다.

전화를 받은 게 샤아라는 게 확실해지자 카이는 대놓고 싫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로가 십몇 년 만에 연락해서 생존신고를 했을 때부터 짐작이야 했지만 정말로 둘이 같이 살고 있었을 줄이야. 하여간에 너희들이란, 대체 언제 그렇게 오붓한 신혼 살림을 꾸릴 만큼 사이가 좋아진 거냐? 그가 쓰는 저널 만큼이나 신랄한 말투가 가히 일품이었다. 격식 없게 툭툭 내뱉어지는 어조에 샤아는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벽에 몸을 기댔다. 카이 시덴이 지온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극렬하게 싫어한다는 것이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제 친우를 위험에 휘말리게 하면서까지 샤아 아즈나블이 이곳에 살아있음을 연방에 신고하려고 전화를 하진 않았을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로가 아니어서 자네에겐 미안하게 되었군. 샤아가 대답하자 카이가 코웃음을 쳤다. 알긴 아네. 뭐, 그건 됐고. 아무로는? 카이의 물음에 샤아는 조금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다카르에서처럼 넥타이를 하거나 지온 소속일 때처럼 목끝까지 잠기는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닌데 목 안쪽이 꽉 죄이는 기분이었다. 한 번 침을 삼켜 성대를 겨우 가다듬은 후 샤아는 아무렇지 않게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꾸며내어 대답했다.

“그는 지금 일이 있어 잠시 부재중이네. 아무로에게 용건이 있다면 내가……”

「젠장!」

갑작스레 튀어나온 카이의 욕설에 샤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수화기 저편의 카이가 분한 듯 잠시 씨근덕대더니 「샤아.」 화가 난 목소리로 이쪽을 불렀다.

「똑바로 말해. 아무로가 그냥 부재중인 게 아니지?」

수화기를 막 들었을 때의 샤아와 마찬가지로 잔뜩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네 거짓말쯤은 전부 간파하고 있다며 대놓고 정곡을 찌르는 상대의 말에 샤아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카이 시덴은 아무로가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군. 전화는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 이건가. 하지만 카이가 아무로의 행방을 이미 알고 있는 채로 남겨진 이쪽을 떠보기 위해 전화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로가 확실하게 부재중이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의 숨소리가 초조함과 답답함에 흐트러지던 것을 포착했기 때문이었다. 샤아의 침묵이 긍정의 의미라 판단했는지 카이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사흘 전에 갑자기 내게 전화를 걸었어. 그 위대하신 사이코프레임의 기적이 벌어지고 나서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 지 알아? 자그마치 12년이다. 그 12년 동안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소문조차 없어서 사실상 완전히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던 녀석이 이제 와서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쪽에 연락을 취했단 말이야. 그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일인데 아무로는 나에게 안부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이런 질문부터 던졌어. ‘요즘도 연방군의 비리를 조사하고 있어?’, ‘최근 연방군에 폭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얼마나 되지?’, ‘연방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곳은 딱히 없나?’ 내가 아무리 그쪽 일을 하고 있다지만 이게 12년 만에 전화를 걸자마자 곧바로 내뱉을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석은 마지막에는 이걸 물었다고. ‘카이. 혹시 마프티를 조사해 본 적도 있어?’

샤아는 순간 숨을 멈췄다. 마프티. 11일 전 처형 당한 하사웨이 노아의 조직이었다. 현재까지도 저널리스트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카이 시덴에게 아무로가 대놓고 그 존재를 물었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카이와 샤아 모두가 알고 있는 정답이었다. 제기랄, 아무로. 샤아는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깊게 한숨을 내쉰 카이가 아까와는 다르게 진지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방군도 정부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녀석들은 온갖 사건들을 수없이 겪고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갈수록 더 썩어들어가고만 있지. 아, 뭐, 그래서 솔직히 나도 사견으로는 저 썩어버린 지구연방의 수뇌부를 싹 다 물갈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해.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더 강하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로가 마프티와 비슷한 노선을 걷겠다고 한다면…….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거다. 아무로는 녀석들과 전쟁을 할 거야. 본인이 가장 잘 아는… 화이트베이스 시절부터 배워 온 방식대로 말이야.」

……그걸 위험하다고 표현한다는 건. 자네는 아무로를 막으려는 생각인가?”

그러나 카이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말 많고 글 많은 카이 시덴의 침묵이 답지 않게 길게 이어졌다. 카이 시덴은 눈치가 빠르고 계산이 빠른 남자였다. 군인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자본에도 권력에도 속하지 않은 일개 프리랜서 언론인이 펜 한 자루를 가지고 연방의 전쟁 영웅인 아무로 레이를 막을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카이 시덴이 아무로 레이의 오랜 친우이자 과거의 전우이더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이 분명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아무로가 얼마나 고집불통에 집념파인지는 그와 가까운 사이였던 이들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샤아는 지하 계단이 있는 복도 쪽으로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돕겠네.”

「네가?」

카이가 어이없어 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는 오히려 아무로가 샤아 아즈나블을 12년 동안 보고 배워서 저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드는데 말이지? 비딱하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샤아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밤을 새워 생각한 것들을 차근히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혼란스러워했던 것이 거짓말 같게도 ‘아무로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자마자 머릿속이 순식간에 깨끗이 정리된 덕이었다.

“아무로는 대중을 장악하거나 정치력을 발휘하는 인물은 못 된다. 그런 그가 전쟁을 하려 한다면 그건 본인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 MS파일럿으로서일 테지. 그리프스 전역 당시 아무로는 7년의 공백을 가지고도 훌륭하게 싸웠으니 12년을 극복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을 테고. 구식 모빌슈트가 한 대만 있어도 놀라운 활약을 보이는 것이 바로 연방의 하얀 유성이니까. 그러니 아무로는 곧바로 기체를 수배하려 할 거다. 다바오 공습 당시의 보도를 되새겨 보면 마프티 쪽에도 기체가 몇 대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지만 아무로가 진지하게 전쟁을 고려한다면 그런 양산형 모빌슈트만으로는 전력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 테니 새롭게 발주를 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마도 애너하임 일렉트로닉스…… 연줄이 있었으니 그쪽에 연락할 가능성이 가장 높을 테고. 애너하임이 이 몇 년 연방의 견제와 홀대를 받아 다소 위축되기는 했지만 신형 모빌슈트 제작 경험은 그쪽을 따라갈 곳이 없네. 심지어 애너하임에는 아무로의 전용기를 개발했던 데이터까지 있고. 만약 이번 발주에 그 데이터까지 결합된다면, 그런 아무로 레이를 세상 어느 누가 막을 수 있겠나?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연방군에 아무로와 비등하게 겨룰 만한 파일럿이 있을 거라곤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군.”

……열받게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네. 네 통찰이 맞아. 나도 아무로가 기체부터 얻으려 할 거라고 생각했고, 연방군 놈들이 군기 빠진 것이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 아무로가 전면에 나서면 연방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거야.」

“그래서 내가 돕겠다는 것이네. 나도 아직은 모빌슈트를 몰 수 있으니까. 나이는 다소 먹었지만.”

「지온 시절 아무로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네가 모빌슈트에 타서 아무로를 막겠다고? 연방군 자식들과 똑같은 꼴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게?」

“부정하진 않겠다. 나는 아무로를 이기려 부단히 애썼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 지구와 온 우주를 통틀어 나만큼 아무로 레이와 맞부딪혀 본 사람이 있던가? 나는 아무로의 전투 방식을 잘 안다. 그건 곧 아무로에게 대적하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잘 안다는 뜻이고. 카이 군, 자네가 다시 건탱크에 올라탈 생각은 없으리라고 짐작하네. 그렇다면, 자네가 정말로 아무로를 막고 싶다면, 이 일은 내 도움을 받는 게 맞아.”

나도 충분히 각오하고 하는 말이네. 샤아가 덧붙인 말까지 전부 듣고 난 카이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하아……. 몇 분간 이어진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살다 살다 샤아 아즈나블과 손을 다 잡게 될 줄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만! 자조와 체념 섞인 저널리스트의 중얼거림이 협력 관계의 성립을 선언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샤아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집안을 정리하려면 해야할 일이 많았다. 아무리 가짜로 신분을 만들었다 한들 몇십 년 동안 자신을 구성해 온 과거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인간에게는 과거의 삶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을 옆에 두고 싶어하는 감성적인 면이 있으니까. 그것은 최상위권의 뉴타입임에도 올드타입의 감성을 강하게 지닌 아무로도 마찬가지였고, 샤아 아즈나블도 조금은 그랬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며 혹시나 아무로와 저의 정체가 유추될지도 모를 만한 물건을 전부 그러모은 샤아는 가을에 낙엽을 태우는 용도로 쓰던 드럼통에 그것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석유를 붓고 성냥을 당겨 넣자 불길이 확 일었다. 불꽃은 모든 걸 재로 만들 때까지 그들의 마당에서 몇 시간이나 맹렬히 타올랐다. 대기권에서 작열하던 하얀 기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누가 와서 뒤적여도 아무 문제될 것 없는 평범한 생활 살림만 남겨둔 샤아는 그 다음으로 여행 가방을 쌌다. 이 지역에 정착한 후로는 한 번도 창고에서 꺼낸 적 없었던 커다란 가방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짐을 다 싼 후에는 노트를 한 장 뜯어 혹시 모를 방문자에게 남기는 쪽지를 쓰고 현관 앞에 붙였다. 친척에게 급한 일이 생겨 둘이 함께 멀리 다녀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차피 외진 지역에서도 더 외진 곳이니 우체부를 제외하고는 올 사람도 없기야 했지만, 아무로에게 기계 수리를 부탁하러 찾아오는 이들이 간간이 있기 때문에 만일을 위해 남기는 보험이었다.

돌아올 수 있을까. 모든 신변 정리를 마치고 현관의 열쇠를 돌리며 샤아는 생각했다. 일이 최악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 두 사람일 수가 있느냐가 문제였다. 샤아는 굳은 얼굴로 단단히 잠긴 현관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집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지붕 하나, 벽 하나, 담벼락을 따라 손질된 관목과 둘이 함께 담요를 두르고 앉아 커피를 마시던 초록색 벤치까지, 작은 것 하나하나에마저 아무로와 제 손길이 함께 닿아 있는 이 집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단출한 여행 가방을 실은 샤아 아즈나블이 하나 남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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