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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절망 앞에서 그들은 행동하나니 7

After CCA · 섬광의 하사웨이

某日 by 銘

복귀한 구스타프 칼의 모습을 본 카이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일 정도군. 진네만이 옆에서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격추당하진 않았지만 거의 격추당한 것이나 다름 없게 걸레짝이 된 기체를 보고 정비반 인원들은 울상이 되었다. 예비기도 부품도 충분하지 않고 우주 만큼 보급이 원활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엉망인 기체를 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 그들은 곧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작업을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소리를 뒤로 하고 콕피트에서 내려온 샤아에게 카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새삼 네놈 명줄이 질기다는 건 알겠다. 이 꼴을 하고도 일년전쟁 때처럼 용케도 빠져나왔네.”

샤아는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돌아가라더군. 자신의 싸움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허. 카이가 혀를 찼다. 인상을 쓴 중년의 저널리스트가 격앙된 목소리로 드물게 화를 냈다. 말이 되는 소리야?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데 어떻게 그걸 가만둬? 격납고를 나와 저택으로 돌아가며 샤아가 담담히 말했다. 이번은 돌려보내지만 다음번엔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네. 카이가 침묵했다.

……진심이구만, 그 녀석.”

“그래.”

더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가겠다는 카이와 떨어져 방으로 돌아온 샤아는 파일럿 슈트를 반쯤 벗고 그대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건담을 떠나보낸 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로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 눈앞에 닥친 것은 뭐냐!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아이가 죽었단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따뜻함을 믿은 대가이냐?! 나는 더 이상 후대가 죽어나가는 걸 볼 수 없어! 샤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로의 분노와 절망이 가까웠던 이를 억울하게 잃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자비 가에게 아버지를 잃고 망가진 유년 시절을 보내며 복수를 다짐했던 캐스발 렘 다이쿤처럼, 아무로 레이가 집을 떠나 연방과의 전쟁을 결심한 이유도 그와 같은 감정이었으리라 짐작했다. 하사웨이 노아의 죽음과 연방의 처사는 지구권의 언론조차도 앞다투어 규탄할 정도로 부당함의 극치였으니, 아무로가 연방을 이끄는 현재의 인류에게 절망하고 분노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샤아가 아무로를 ‘이해한다’고 외쳤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로의 행동은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었다. 조금 전 그가 내뱉은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아무로가 절망한 이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크와트로 바지나에게 카미유 비단이 그랬던 것처럼, 하사웨이 노아는 아무로 레이의 미래였던 것이다. 일년전쟁의 종전 이후 태어난 아이, 전쟁과 죽음의 세대인 그들과는 다르게 평화와 이해를 꿈꿀 수 있는 세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상냥한 희망. 12년 전의 아무로 레이는 그것을 지키고 싶어 샤아와 싸웠을 것이다. 아직 절망하기엔 이르다고, 이 따뜻한 빛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지 조금 더 지켜보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아무로가 기대했던 미래는 연방의 손에 산산이 부서졌다. 기득권을 쥔 선대의 이기심이 창창한 후대의 희망과 미래를 덮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아닐세, 아무로…….”

그는 이미 한 번 극단적인 방식으로 미래를 만들려고 했었다. 당시에는 옳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안다. 인류 전체를 불신하며 ‘나의’ 미래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오만에 불과했다. 그래서 샤아는 아무로가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린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것은 사실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진 연방군은 일년전쟁 이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자기들끼리 내전을 벌였고 스페이스노이드와 어스노이드의 갈등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까마득한 우주의 흐름에서 보자면 분명히 인류는 발전해 왔다. 더 합리적인 상식, 더 인간적인 가치관, 점진적이지만 인류는 폭력과 살육에서 멀어져 왔다. 샤아는 아무로도 그것을 다시금 깨닫기를, 이전의 아무로 레이처럼 타인을 이해하는 상냥함이 새로운 시대의 힘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샤아는 아무로가 시킨 대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12년 전의 아무로 레이가 그러했듯, 이번에는 샤아 아즈나블이 그를 막아야만 했다.


건담의 복귀를 알리는 소리가 갑판 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통신실에서 대기하는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활주로 근처로 몰려들었다. 마프티에 합류한 이래 아무로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능한 파일럿으로 여겨지며 거의 스타처럼 대접받고 있었다. 그가 합류한 것만으로도 하사웨이의 죽음 이후 잔뜩 위축되어 있던 마프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게다가 매 출격마다 놀라운 전공을 가져오기까지 했으니, 이번 기습 작전에서도 분명 그랬을 것이라 믿고 아무로를 환영하러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로의 이번 복귀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선임 메카닉인 줄리아가 착륙하는 건담의 모습을 보고 놀란 소리로 크게 외쳤다. 건담에 흠집이 났어?! 모여 있는 인원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었다. 누가 아무로 씨의 건담에 저 정도의 피해를 입혔지? 그 레인인지 뭔지 하는 녀석 아니야? 연방의 신형기를 몰았다던 파일럿!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콕피트에서 내려오는 아무로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평소였다면 아무로에게 고생했다며 붙임성 좋게 인사를 건넸을 사람들도 심상찮은 분위기에 슬슬 눈치를 보며 지나갈 길을 비켜줄 뿐이었다. 뒷줄에 섞여 있던 케네스를 본 아무로가 짧게 보고했다. 작전은 잘 끝났어. 다바오 공항의 복구에는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당신 예상 대로 제대로 대처를 못하더라고. 당연하지, 누가 그런 속도전을 예상 하겠어. 수고했다, 대위. 케네스가 대답하자 아무로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저건.”

슬슬 자리를 뜨려는 아무로를 저지하며 케네스가 건담 쪽을 턱짓했다. 하얀 기체를 안쪽으로 옮겨 놓으며 수리에 사용할 예비 부품을 꺼내 오느라 여념이 없는 정비반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레인인가? 아무로는 고개를 저었다. 페넬로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바오에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야. 흠. 케네스가 낮은 소리를 냈다.

“레인도 실전 경험이 없어서 부족한 점이 많은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우수하고 똑똑한 파일럿이었어.”

“당신이 몰랐던 새로운 파일럿이 있었던 모양이지. 브라이트가 누굴 두고 갔을 수도 있고.”

“정예 중의 정예인 론도 벨의 인원을 지구라는 후방에? 노아 대령이 그런 판단을 할 인물이 아닌 건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

“그렇게 물어도 나는 파일럿이 누군지 몰라.”

“격추는 했나?”

…그래.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아무로가 대답했다. 케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인가? 케네스가 떠보듯 한 번 더 물었지만 아무로는 아까와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래, 격추했다. 이번에는 즉답이었다. 좋은 파일럿이 또 하나 아깝게 갔겠군. 케네스가 묘하게 빈정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아무로는 등을 돌렸다.

“오랜만에 집중했더니 피곤해서 그런데 이만 들어가도 되겠나? 음속을 넘는 속도로 가속을 했더니 몸에도 부담이 많이 갔어. 조금 쉬고 싶다.”

“그래. 뭐, 구체적인 피해 상황은 미노프스키 입자가 걷힌 후 도청을 하면 상세히 알 수 있겠지.”

케네스가 손을 휘휘 젓자 건담 쪽에 잠깐 시선을 준 아무로가 이내 발을 떼었다. 멀어지는 전쟁 영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케네스가 조금 큰 소리로 외쳤다. 정에 휘둘리지 마, 대위! 아무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선실 쪽으로 사라졌다. 케네스는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건담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넓게 펼쳐진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냉혹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다가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노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승마용 채찍을 쥐고 있는 것 마냥 팔을 위아래로 휙휙 휘두르며 케네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골치 아프게 됐군.”

선실로 돌아온 아무로는 파일럿 수트를 반쯤 벗은 채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자 긴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샤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영원한 숙적의 이름을 속삭였다. 아무로는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제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아무로는 샤아가 자신의 행동을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다. 한 번 절망해 본 이는 타인의 절망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괴로웠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작은 반응만으로도 금세 제 것처럼 알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로는 샤아가 자신에게 공감해 줄 것이라고, 안락하던 둥지를 떠나야만 하는 심정을 이해하고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조금 전처럼 샤아 아즈나블이 아무로 레이를 막으러 나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냐, 샤아. 나를 이해한다고 했으면서, 내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왜. 아무로의 눈이 짙은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잘못된 방법이라는 건 안다. 12년 전, 너를 죽여서라도 멈춰주겠다고 결심했던 내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것도 알아. 하사웨이의 ‘암살’을 정당화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 외에 달리 무엇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이냐. 인류는 분명 기적을 보았다. 그러나 기적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어. 그들에게는 상냥함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아듣지조차 못해. 그렇다면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억지로라도 각인시키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들이 가르치고 우리가 체화해야만 했던, 전쟁, 공포, 공황, 두려움, 폭력, 그리고 탄환의 언어로서.

아무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슬펐다. 답답하고 허전하고 괴로우며 실망스러웠다. 그때의 너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약간의 미안함도 느꼈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일 뿐이었다. 샤아가 자신을 막겠다고 나선 이상 아무로는 그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순순히 말을 들을 인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후원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방 제식의 군용기까지 타고 나타난 이상 샤아 역시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로 레이는 샤아 아즈나블의 영리함과 집요함을 잘 알았다. 실망스러운 남자이지만 동시에 어디에서나 사랑받고 신뢰받을 수 있는 남자인 것도 잘 알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무로는 샤아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경애했다. 단지 스스로의 연약한 내면이 문제가 될 뿐, 샤아 아즈나블은 언제든지 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뛰어나고 연약한 남자가 지금,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안락한 껍질을 깨고 12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망설임 없이 능력을 발휘하는 샤아의 존재는 앞으로의 일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격추할 수밖에 없겠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크게 울렁였다. 역시 정이란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로는 길게 숨을 내뱉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어 떠오르는 얼굴을 사정없이 지워 버렸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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