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DM

거대한 절망 앞에서 그들은 행동하나니 1

After CCA · 섬광의 하사웨이

某日 by 銘

평소와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고 샤아 아즈나블은 추후 회상했다. 식사를 마친 뒤, 정해진 순번에 따라 그 주의 당번이었던 사람이 식탁을 치우고 그릇을 씻었다. 남은 사람은 그 옆에서 후식으로 마실 커피를 내리며 일상의 화제를 입에 올렸다. 동네 주민 누구네 집이 어떻다더라, 날이 흐려지기 전에 어디를 보수해야겠더라, 뭐가 떨어졌으니 다음 주말에는 시장에 가야겠더라 하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저께와도 어제와도 다를 바 없었던, 언제까지고 이어질 줄 알았던 평온하고 잔잔한 풍경이었다.

아마도 그때 아무로가 어떤 농담을 던졌던 것 같았다. 커피잔을 들고 혼자 즐겁게 웃으며 먼저 거실로 나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샤아가 커피 찌꺼기를 정리하는 사이 아무로는 팔걸이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집어 TV를 틀었다. 오후 7시면 시작하는 공영 방송국 저녁 뉴스의 오프닝 곡이 벌써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첫 뉴스입니다. 제2차 네오지온 항쟁으로부터 12년. 그것은 겨우 자리잡은 두 사람의 평화가 또 다시 산산조각나는 것을 알리는 소리였다.

다수의 연방 고관 살해, 다바오 공습, 애들레이드 사태 등 과격한 폭력 행위로 지구권 거주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테러리스트 '마프티 나비유 에린'의 총살형이 오늘 오전 5시 집행되었습니다. 마프티의 정체는 독립부대 론도 벨의 사령관 브라이트 노아 대령의 아들인 하사웨이 노아로 밝혀졌으며, 이 사실을 안 브라이트 노아 대령이 직접 처형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참모 본부에 의하면 이는 노아 대령이 강력히 희망한 것으로, 마프티를 직접 처형함으로서 연방 정부가 입은 막대한 피해를 조금이나마 보상하고 연방과 지구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함을 알리겠다는 영웅적인 의지였다고 합니다. 한편 하사웨이 노아는 처형 직전 부친의 충고를 받아들여 마프티의 행위가 비인도적인 테러리즘임을 반성하고 겸허하게 뉘우쳤으며……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에 놀라 고개를 내민 샤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TV 앞에 우뚝 선 채 그대로 굳어버린 아무로의 모습이었다. 젊은 여성 아나운서는 샤아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마프티 나비유 에린의 정체와 처형에 대한 원고를 사무적이고 건조한 어조로 읽어내리고 있었다. 허공에 뜬 손을 덜덜 떨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무로의 발치에서 산산조각 난 도자기 컵의 파편이 나뒹굴었다. 그 옆에 잠시 서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바라보던 샤아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휘청이는 아무로를 재빨리 부축했다. 깨진 조각에 발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소파에 앉히자 아무로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천천히 눈앞의 남자에게로 향했다.

"샤아, 저 뉴스가……."

"알아. 나도 들었네."

"어떻게…… 어떻게 하사웨이가……."

아무로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움츠러든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아무로가 진정할 수 있도록 등을 가만히 쓸어주던 샤아는 이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나뒹구는 컵 조각을 주워 들었다. 거실 바닥 위 점점이 흩어진 하얀 부스러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깨진 컵에서 흘러나온 커피 향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향긋했다. 물걸레로 몇 번 닦아 내야겠군. 충격적인 뉴스를 들은 직후였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사고하며 샤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샤아도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무로만큼은 아니었지만 샤아도 뉴스를 들으며 적잖이 놀랐고 충격에 휩싸였다. 다만 그가 놀란 것은 브라이트가 제 손으로 아들을 처형했다는 소식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아나운서가 읽어내리는 저 뉴스가 절대 진짜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최소한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 하사웨이 노아였고 그가 붙잡히자마자 처형되었다는 것 하나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전부 연방 정부가 선전용이자 협박용으로 꾸며낸 거짓 사실임이 분명했다. 브라이트 노아가 아무리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하더라도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일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 뿐더러, 이런 식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인간을 농락하는 건 지구연방의 오랜 특기였으므로.

샤아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브라이트의 아들이 마프티 나비유 에린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0년이 더 넘었지만 샤아는 아직도 그날 아무로의 옆에서 멀어지는 기체를 올려다보던 소년의 허망한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나중에 아무로가 들려준 말에 의하면 그는 눈앞에서 첫사랑을 빼앗긴 소년이었다. 게다가 그 첫사랑은 샤아 아즈나블 때문에 도구로서 끌려나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년전쟁 때의 라라아와 마찬가지였다. 하사웨이 노아는 샤아를 증오해도 모자랄 사람이었다. 오히려 격렬한 반발심으로 네오지온을 뿌리 뽑겠다며 아버지의 뒤를 따라 연방군이 되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샤아에게 영향을 받았고, 샤아와 비슷한 주장을 펼쳤고, 샤아와 비슷한 행동을 했다. 샤아로서는 신기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행보였다. 이런 소식으로 지금의 자네를 알게 되어 유감이군, 노아 군. 샤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너무도 일찍이 스러진 청년의 명복을 빌었다.

"샤아……. TV를 꺼줘."

머리 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아는 순순히 팔걸이 위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집어들어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지며 거실이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아무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 주변이 붉게 물들어서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아무로가 비틀대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릇이 깨질 듯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와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 부엌에서 나온 아무로는 한 손에는 얼음이 담긴 유리잔을, 다른 손에는 산 지 얼마 안 된 위스키 병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남기고 아무로는 제 작업실이 있는 지하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거실에 남겨져 있던 샤아는 지하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 이내 심란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바로 걸레를 적셔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늘은' 기다리지 말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아무로는 일주일이 넘도록 지하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잠잘 때는 물론이고 식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굳게 걸어 잠근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고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가져다 둔 식사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밤중에도 바깥으로 나온 기미는 없었다. 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에 스스로를 가두고 죽어버리려는 사람 같았다.

그동안 샤아는 아무로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가만히 그를 내버려두었다. 브라이트는 화이트베이스의 승조원 중에서 아무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역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까워지고도 남을 일인데 다시 우주에 올라온 후로는 아예 브라이트와 함께 신규 부대를 창설해 활동하기까지 했으니, 노아 가족들과 그의 친분은 자연스럽게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더해 하사웨이는 단순히 친조카처럼 아낀 것뿐만 아니라 아무로 레이가 직접 목숨을 구했던 아이 아니었던가. 그런 인연이 있으니 샤아는 아무로가 하사웨이의 죽음에 이렇게나 깊이 슬퍼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로가 감정을 해소하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울고 괴로워하고 슬퍼할 시간을 충분히 줄 생각이었다. 달력의 빨간 요일 표시가 한 바퀴를 도는 내내 침대 옆 자리가 차갑게 비어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긴 했지만, 액시즈 쇼크 이후 아무로가 가르쳐준 것을 샤아는 이번 기회에 충실히 실천하고 있었다.

 

아무로가 작업실에 틀어박힌 지 열흘 째가 되던 날이었다. 앞선 날들과 마찬가지로 한 명은 거의 먹지도 않을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샤아는 문득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잔뜩 수척하고 초췌해진 아무로가 부엌 문가에서 빈 술병과 유리잔을 들고 서 있었다. 눈가가 퀭하고 수염도 듬성듬성 난 것이 누가 봐도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무로. 샤아의 부름에 아무로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미안. 정리를 좀 부탁한다."

샤아에게 병과 잔을 맡긴 아무로는 비척대며 거실로 발을 옮겼다. 짙은 알코올 냄새가 풍기는 병과 잔을 내려다보다가 아일랜드 테이블 너머로 슬쩍 시선을 옮기니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은 아무로가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군. 샤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로가 건네 준 병과 잔을 잘 닦아 각각 재활용 쓰레기통과 개수대 위에 얹어두었다.

두 시간 뒤,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함께 둘러앉은 식탁은 여전히 무겁고 힘겨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열흘 간 술과 물 외에는 거의 뭘 먹지 않았을 그를 위해 샤아가 나름 고심해서 차린 음식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아무로는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며 식기를 달그락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덩달아 제 식사에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아무로만 바라보고 있던 샤아가 결국 물컵을 내려놓으며 가만히 물었다.

"입맛이 없나?"

아무로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샤아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무로는 다시 시선을 내리깔고 귀퉁이만 겨우 사라진 오믈렛을 포크로 쿡 찔렀다. 아무로의 힘없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깊은 우울과 슬픔이 짙게 배어나왔다. 내가 뭘 먹어도 되는 지를 모르겠다. 한참 만에 아무로가 툭 말을 뱉었다. 죄책감이 겹겹이 쌓인 무력한 대답이었다. 아무로. 샤아가 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사웨이의 비극은 자네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를 탓할 건 없네.”

아무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음식은 먹을 생각도 않은 채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는 아무로를 보고 샤아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아무로가 괜찮아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괜찮으면 조금 있다가 우유를 조금 데워줄 테니 그건 마시게. 열흘이나 뭘 제대로 먹지도 않았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식사를 소홀히 한다면 위장이 상하고 말 거야.”

이건 랩을 씌워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둘 테니 혹시라도 배가 고프면 언제라도 먹고. 샤아가 덧붙이는 말에도 아무로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치워지는 식탁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샤아. 식탁이 거의 다 치워졌을 때, 아무로가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싱크대 앞에 있던 샤아가 고개를 돌리자 아무로가 공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나는……. 왠지 그때의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쿵. 샤아의 귀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떨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샤아는 분명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건 샤아의 심장이 크게 동요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아무로 레이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피프스 루나의 낙하 때에도, 액시즈 사건 때에도 아무로는 집요하게 샤아를 비난했고 그의 방법이 잘못되었음을 설파했다. 아무리 인간들이 각성하지 못한 채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더라도 그들이 타인에게 베푸는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고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랬던 아무로 레이가 샤아 아즈나블의 절망을 자신의 것처럼 입에 올렸다.

할 말을 잃은 샤아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아무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처럼 올라온 것이 무색하게 다시 지하실 쪽으로 향하던 아무로가 무언가 느낀 것처럼 잠시 발을 멈추고 샤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짧게 덧붙였다.

"걱정 마. 문은 잠그지 않는다."

갈색 곱슬머리가 벽 아래로 사라지며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샤아는 한동안 아무로가 사라진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큰 불안감과 초조함이 온몸을 감쌌다. 첫 실전 투입 직전에도 느껴본 적 없는 긴장감이었다.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 샤아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굳이 뉴타입적인 무언가를 활용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지하실의 문을 열고 아무로에게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느냐고 묻기에는 샤아에게도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샤아는 입을 굳게 다물고 등을 돌려 싱크대의 물을 틀었다. 아무로 레이도 진심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인연이 깊었던 아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마음이 잠시 약해진 와중에 내뱉게 된 말일 것이다. 샤아 아즈나블은 아무로 레이를 믿었다. 그가 보여주었던 희망을 믿었고 기적을 믿었으며, 그와 12년간 함께하며 지켜봤던 이웃 주민들의 따스함을 믿었다. 그래서 샤아 아즈나블은 자신의 걱정이 단지 기우일 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으려 했다.

“아무로, 들어가겠네.”

뒷정리를 마치고 아무로가 마실 우유를 달큰하게 데워 내려갈 때까지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열린 지하의 문 뒤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공구도, 작업대 위의 만들다 만 기계들도, 정리정돈에 소홀한 주인의 성정 덕에 바닥에 그냥 널브러져 있는 부품들도 열흘 전과 같았는데 그 방에 있어야 할 사람만이 어디에도 없었다. 샤아는 믿기지가 않는다는 눈으로 멍하니 문가에 서 있었다.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아무로 레이가 사라졌다. 하사웨이 노아의 죽음에, 마프티 나비유 에린의 처형에 분노하고 절망하며 12년의 정적을 깨고 다시 세상으로 나선 것이었다.

빌어먹을.

샤아 아즈나블은 이 날의 자기 자신을 남은 평생 원망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그 외
커플링
#샤아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