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란

8재해 AU

어둠뿐인 세상 속에서 하늘 위를 높이 나는 꿈

春雪 by 현명

01

새벽이 모두 전사한 이후로도 빛의 전사는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투는 변방의 조그마한 마을을 구하려다가 발생했습니다.

검은 장미라 불리는 살육 병기를 앞에 두고 란은 갈등했습니다. 여기서 도망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지만, 마을 주민들은 채 피신하지 못한 채 모두 죽게 될 것이었습니다. 짧은 생각을 마치고 란은 적진의 장수에게 제안했습니다. 어차피 이 병기를 쓰면 너도 나도 죽게 될 테니 마을 사람들을 도망치게 해 달라고, 대신 너도 네 부하들을 도망치게끔 하라고.

그리하여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소규모 전투에서 사망한 이는 란과 적진의 장수뿐이었습니다.

02

에테르를 정지하게끔 하는 검은 장미는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갔습니다. 옮기기 어려운 몸을 끌다시피하여 란은 이슈가르드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루시안의 앞에 섰을 때에는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에테르가 엉망이 된 채였습니다. 절망하는 루시안에게 란은 마지막으로 웃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 너…… 지금 그딴 말이 나와?

- 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마지막으로.

루시안이 힘겹게 웃음을 지으니 란은 퍽 만족스러운 듯했습니다. 그의 품에 안겨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란은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 그래, 너에게도 슬픈 얼굴은 어울리지 않는구나…….

03

란은 오르슈팡의 묘 옆, 이슈가르드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묻혔습니다. 루시안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던 중, 군중 사이에서 돌연 소란이 일었습니다. 루시안이 어렵사리 뒤를 돌아보니 거구의 남자가 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 저 자는 분명 갈레말드의……!

루시안은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란의 벗이라고 우겨 대던, 갈레말드의 황태자였죠. 모두가 혼란스러워하고 우려했으나 루시안은 그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습니다. 그의 눈 안에서 자신과 같은 기색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황태자는 순순히 국화 하나를 내려놓은 채 자리를 떴습니다. 모두가 안도하면서도 수군거렸습니다. 저 자가 빛의 전사님과 그렇게나 가까운 존재였던가요?

그리고 며칠 후 급보가 전해졌습니다. 제국의 황태자가 황제를 무참하게 죽인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시안은 그 소식을 몇 시간만에 잊어버렸습니다. 그다지 중요한 소식이 아니었던 탓입니다.

- 가주님. 그리고 이건 빛의 전사님이 남기신 유품입니다…….

받아들고 보면 란의 총검과 대검, 그리고 두 개의 소울 크리스탈이었습니다. 루시안은 무심코 그 조그만 돌조각들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러자 란의 기억들이 물밀듯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만남과 헤어짐, 영웅으로서 짊어진 괴로움과 비탄, 울고 웃었던 순간들, 그리고 가슴이 저리도록 사랑했던 란의 기억 속 자신이 있었습니다.

장례식 내내 울지 않았던 루시안은 그 기억을 들여다보자마자 쓰러져 울었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을 적에는 총검을 쥐었습니다. 이렇게 묵직한 걸 어떻게 매일같이 들고 다녔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날부로 루시안은 총검을 늘 메고 다녔습니다, 그걸로 사람 몇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은 결코 다룰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란의 소울 크리스탈을 쥐면 총검은 날개가 달린 듯 가벼워졌어요. 그렇지만 별다른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루시안은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과 폐허가 된 에오르제아를 응시하며 생각했습니다. 고작 이런 사람들을, 이런 세상을 지키고 싶어서 죽어야 했어? 란…….

04

르페브 가문은 재산의 대부분을 엉망이 된 이슈가르드를 복구하는 데에 내놓은 채 사라졌습니다. 루시안은 자신의 곁을 지키기로 한, 최소한의 사용인들과 함께 곳곳을 떠돌며 의료 봉사를 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음이 맞는 학자들과 함께 술식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에테르가 정체되어 황폐화된 대지를 되살리는 술식이었습니다. 해당 술식은 연구 단계에서만 몇십 명의 마도사가 희생될 만큼, 평범한 사람은 시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으며 대량의 마나를 필요로 했습니다. 루시안은 밤낮 없이 술식 연구에 몰두했으며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갔습니다. 간단한 치유술조차 구사할 수 없을 만큼 지치는 날이 오면 루시안은 펜을 쥐었습니다. 다른 손으로는 란의 소울 크리스탈을 손에 쥐고, 그의 모험담을 써내려갔습니다. 닥치는 대로 써내려간 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든 그들은 그 종이 뭉텅이에서 위안을 얻곤 했습니다. 그 사실은 루시안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 빛의 전사님은 이제 안 계시지만…… 저도 그분만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기, 여기에 적힌 대로요!

- 쉽지 않을 겁니다. 빛의 전사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멋지거든요.

05

몇 년이 흐르고 술식을 완성한 날 밤, 루시안은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란의 묘지를 지키던 그의 곁에 익숙한 사람이 털퍽 주저앉았습니다.

- 그 술식을 시전하면 너는 분명 죽게 될걸. 그러지 말고 너도 미드가르드오름 할배의 영역으로 가. 거기서라면 더 살아갈 수 있으니까.

- 한 번도 꿈에 나와 주는 법이 없더니,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그거야?

그 말에 꿈속의 란은 입을 비죽거렸습니다. 나와도 뭐라 하네, 귀염성 없기는……. 루시안은 란을 가만 들여다 보았습니다. 만나면 분명 울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조금은 화가 났습니다. 그에게 건브레이커 소울 크리스탈을 홱 집어던지니 란은 가볍게 받았습니다.

- …… 너는 고작 그런 마을 하나를 구하겠다고 죽었어? 남겨진 나는 어떻게 살라고?

- 미안하다. 너라면 내가 없이도 잘 살 줄 알았어.

- 잘 사는 것 같아? 네가 없으니 모든 게 엉망이야. 나는 그 술식을 시전하고 죽을 거야. 다 필요 없어졌으니까.

- 고마워. 이제 와서 하기엔 좀 낯간지러운 소리지만, 나는 이곳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 같아. 그렇지만 큰일이네, 네가 있는 세상이라서 더 사랑했던 건데 말야…….

꿈에서 깰 시간이 가까워 왔습니다. 루시안은 란을 힘껏 끌어안았습니다. 조그만 몸이 사라져 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루시안은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 필요 없어졌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이곳을 네가 기억하는 세상으로 돌려 놓겠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06

대규모 술식이 에오르제아 전역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마도사 수십의 에테르가 바쳐지고 또 그만한 목숨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정체되었던 에테르가 해방되고 대지에는 다시금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루시안은 술식을 종결해야 했습니다. 이미 마나는 바닥을 드러냈으며 루시안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술식을 마무리해야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는데, 힘이 모자랄 것 같았습니다. 루시안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품에 넣어 두었던 란의 크리스탈을 손에 쥐었습니다.

- 란…….

그때 란의 환영이 루시안의 손을 잡아 왔습니다. 걱정 마, 너의 노력은 결코 수포로 돌아가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루시안은 란과 함께 마지막 마나를 짜내어 술식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에오르제아에는 다시 싹이 움트고 꽃이 피었습니다. 루시안과 란은 나란히 묻혔으며 그 위로 눈꽃이 만발했습니다. 위대한 영웅과 마도사,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잊어진 시간선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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