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필

이능력 시리어스 성격 대필 (1,563 자)

단간론파 기반

CM by SRP

키워드: 맹한, 순수한, 가벼운


○○○,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었어. 그러니까…….

…….

…미안, 무슨 얘기였지?

애가 정신을 좀, 어디 빼놓고 다니는 것 같아. 그와 대화해 본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렇게 말하고는 한다. 했던 말을 반복하게 하질 않나, 뒤늦게 엉뚱한 결론을 내놓질 않나, 잠깐 한눈판 사이에 꾸벅꾸벅 졸고 있지를 않나……. 어느 모로 봐도 청자로서의 예의는 말아먹은 듯한 태도 일색이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또 그를 두고 대뜸 무례하다는 이유로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못 들어서 물어본 것이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진짜 무시할 생각이었다면, 또 으레 그렇게 하는 사람 같았으면 자신이 놓친 담화를 구태여 다시 들쑤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렇듯 집중력 안 좋은 사람들은 투명한 속내를 보여야만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재질문’이라는 다소 확실한 방법으로 타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 번 얘기한 말을 다시 말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그만큼 다시 듣는 것도 제법 지루한 일이다. 그 심심한 일을 꽤 잘하는 편일 뿐만 아니라 악의 없이, 성심성의껏 들어주려고 노력하기까지 한다는 점은 분명한 그의 장점이다. 생각한 만큼 행동은 별로 따라 주지 않는 것 같지만, 뭐.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가 있듯이, 그도 쉽게 악의를 갖지 않는 순수함을 가진 대신 타인에 비해 떨어지는 집중력을 가진 것뿐이다. 거기에 더해서 수면 부족까지. 집중력 부족으로 인해 잠이 많아진 건지 잠이 많다 보니 집중력도 덩달아 떨어진 건지, 그 선후 관계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맹─함이 두 단점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 법한 사실이다.

남이 하는 말도 가볍게 넘겨 버리는 사람이 자기 얘기라고 해서 가벼이 넘기지 않을 리 없다, 는 통념이 공식이라면 그는 그 공식에 정확히 부합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와의 대화는 대개 단순한 흐름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단순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고, 그래서 무게가 경하니 종종 핵심을 스치는 구석이 있다. 다만, 워낙 깃털처럼 얕게 스치고 지나치다 보니 그런 점을 잘 눈치채기 어렵다. 맥락 없는 솔직함은 그와 타인 사이의 거리감을 줄이기에 충분하고, 그러므로 그가 주는 특징적인 인상은 다름 아닌 ‘대하기 편함’이 된다. 물론 아무리 대하기 쉬운 사람이라 해도 건드리면 꿈틀하는 법이라, 남에게 드러내지 않을 적의를 그에게 표출하는 건 좋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복잡함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가진 감정적 밑천을 솔직하게 터놓을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좀 창피해지겠지. 선택은 자유이다.

뒤끝 없이 부드럽게 넘길 줄 아는 성정, 은연중에 나타나는 다소 초탈한 모습.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보여 주는 무상함은 연륜이라기보단 무구한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의 때 묻지 않은 사고방식을 접하고 나면 더 이상 그가 타인에게 악의를 품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갈등이 발생할 경우 그의 지고지순한 생각은 이내 자기희생으로 가닿는다. 제가 다칠지언정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마냥 좋다고 할 순 없으나, 적어도 그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더없이 온당한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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