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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자] 너희의 소원은 이루어지리라

2024.03.17 작업 완료

0.

[승화(承花)] 너희의 소원은 이루어지리라

W. 별비

본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 ‘별비’에게 있으며, 2차 가공과 상업적 이용을 금합니다.

2024.03.17 작업 완료

1.

 

“하루라도 얌전히 넘어가는 날이 없군.”

 

씻고 나온 죠타로가 투덜거리며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카쿄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집트가 코앞이니까요. 그들도 그만큼 필사적이겠지. 이 늦은 시간에 그럴듯한 숙소를 얻은 것만으로도 다행인걸.”

 

씻으려 자리에서 일어나던 카쿄인의 시선이 문득 벽시계에 닿았다.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멈춘 카쿄인이 돌연 작게 웃었다.

 

“해피 뉴이어예요, 죠타로.”

 

그러더니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 죠타로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카쿄인이 벽시계를 가리켰다. 시침과 분침의 화살표는 이제야 막 12시를 넘어있었다.

 

“1월 1일이거든요, 오늘.”

“…그런가. 몰랐군.”

 

새해, 하면 으레 떠올리는 흩날리는 하얀 눈도, 따뜻한 코타츠도, 텔레비전 화면 너머로 장엄하게 울리는 제야의 종소리도 그들에겐 없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카쿄인.”

“응. 너도요, 죠타로.”

 

형식적인 인사. 그들에게 새해의 설렘 따위,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날이 밝으면 다시 생사를 건 전투를 해야 할 것이었다. 창밖으로 모래바람이 거셌다. 어둠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이 꼭 그들의 여행과 닮아있었다. 새해. 앞으로 남은 시간은 2주 남짓이었다.

 

2.

 

거리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어제까지는 연말이라서, 오늘은 또 새해라서 그렇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온 길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은 질색해 마지않던 죠타로였으나 오늘만큼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카쿄인과 보내는, 제대로 된 첫 새해였다. 싫을 리가 없었다. 죠타로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열었다. 수첩은 죠타로의 손에 비해 너무 작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랑거리며 열린 페이지에는 여러 메모들이 빼곡했다. 오늘 카쿄인과 무얼 하며 보내면 좋을지 정리해둔 것들이었다.

 

3.

 

DIO와의 전투, 여행의 끝. 죠타로와 그의 일행은 승리했으나 개개인이 입은 부상은 심각했다. 특히 카쿄인이 그랬다. 조금만 늦었어도 손을 쓸 수 없을 뻔했다고 했다. 여러 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만큼 병상에도 오래 누워있어야 했다. 이런저런 장치를 주렁주렁 달고 몇 날 며칠 초췌하고 창백한 낯으로 누워있는 카쿄인은 솔직히 시체와도 같아 보여서, 심장박동에 맞춰 울리고 있는 심전도 기계의 소리가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아서 얼마나 두려웠는지. 겨울이 물러가려는 초봄, 차가운 땅에 움트려는 새싹처럼 그의 의식이 돌아왔고, 소식을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죠타로는 그제야 눈꺼풀 아래에 감춰져 있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제야 실감했고, 안도했다. 아, 네가 살아있구나. 마침내, 네가.

의식이 돌아왔다고 해서 바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큰 고비만 넘겼을 뿐이었다. 카쿄인은 여전히 절대안정을 취해야 했고, 덕분에 그는 한여름에도 침대에 가만 누워있어야 했다. 사소한 환경 변화도 지금의 그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어서…였다. 온몸에 땀띠가 나겠다며 우스갯소리-냉난방 및 욕창 관리는 완벽했다-도 할 정도였지만…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뭐든 죽은 것보다 낫다. 온몸이 크게 상한 탓에 물을 마시는 것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괜찮았다.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카쿄인은 먹지를 못하니 먹고 싶은 것만 잔뜩 생각난다며 웃었다. 퇴원하면 천천히 먹으러 가자며 죠타로는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이 되어서야 카쿄인은 재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일반식은 무리였지만 이유식은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나이에 이유식이라니 기분이 이상하다며 카쿄인은 민망해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죠타로는 다 좋았다. 식사가 불가하여 링거에 의존해야 했던 때보다야 훨씬 낫지. 암, 그렇고말고. 소화 기능 외에도,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지느라 약해진 근육도 재활을 시작했다. 걷는 연습, 날계란이 깨지지 않을 만큼 손에 쥐는 연습 등…. 휠체어에 오래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했으니, 예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겠지. 그러나 죠타로는 그가 이겨낼 것임을 알았다. 카쿄인은 강하니까. 그는 이제, 저러다 무리를 해서 몸이 상하는 건 아닌지, 새로운 걱정을 해야 했다….

뼈를 깎는 고통 속, 재활에 온 힘을 쏟아부은 덕에 카쿄인은 예상보다 이르게 퇴원했다. 늦가을이었다. 완벽히 회복된 것도 아니거니와 아직 유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통원 치료로 전환하고 싶다는 카쿄인의 강한 의사와, 이제는 그리 해도 될 것 같다는 의사의 판단이 있었다. 그리하여 카쿄인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구나. 내가, 내 아들이 살아있구나.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이나 울었다고 했다. 거짓말이 아닌지 다음날 카쿄인의 눈은 퉁퉁 부어있어서, 죠타로가 붓기를 빼준다고 꽤 오래도록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우느라 체력이 떨어져서 반쯤 탈진 상태였던 것은 덤이다.

카쿄인은 꽤 많은 것을 조심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체온 유지였다. 곧 겨울인 일본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카쿄인은 기어코 해냈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어디서 알고 나타난 건지, 죠타로가 동행해서 목도리며 패딩이며 온갖 것들을 꼼꼼히도 둘러준 덕이다. 카쿄인은 옷 때문에 곧 굴러다니겠다며 그를 타박했지만 그가 또 쓰러져서 실려가는 것보다야 나았다. 죠스타에서 난방비 지원까지 해주고 유난이다 싶을 정도였지만, 나름의 보상이자 사죄였다. 죠타로와 죠스타가 부담스럽고 원망스러워 다소 날카로웠던 카쿄인의 부모님도 점점 부드러워졌다. 카쿄인의 부상에 대해서는 아직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먹는 것은… 일반식이 가능하긴 했다. 부드럽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 위주로, 자극적인 음식은 절대 금지. 실상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도 일반식이 가능하다는 게 무척이나 기쁜 일이긴 해서, 카쿄인에게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은 다양한 것들을 먹으러 다녔다. 대부분 카쿄인이 입원 중일 때 먹고 싶다고 했던 것들이었다. 라멘, 스키야끼, 스시…. 물론 카쿄인은 걸친 옷들의 두께 때문에 굴러다녀도 될 법한 상태였지만. 외출이 어려울 때는 대체 어디서 공수해 왔는지도 모를, 5성 호텔급 음식들을 카쿄인의 부모님 몫까지 가져와 함께 먹었다. 죠타로와 부모님이 함께 있는 식탁을 볼 때마다 카쿄인은 죠스타의 재력이면 뭐든 되는구나… 했단다. 모두와 하는 식사가 좋았던 건 부정하지 않았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카쿄인은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정기검진에서의 이런저런 검사 결과가 그를 증명했다. 병원에서는 카쿄인의 상태가 많이 안정되었다고 했다. 아직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지만, 이제는 일거수일투족 지켜보며 살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굉장히 좋은 소식이었으나 죠타로의 카쿄인 과보호 행동은 변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참고 있던 카쿄인도 결국 나는 그렇게 약하지 않다며 화를 내고 말았다. 그제야 죠타로의 행동이 조금 잦아들었다. 여전히 불안해하는 눈빛이었지만, 카쿄인은 무시했다. 죠타로가 과할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야 당연히 잘 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의 비호 아래서만 살 수는 없잖은가. 무엇보다도, 보호받기만 하는 건 성정에 맞지 않았다.

연말이라면 놓칠 수 없는, 대망의 크리스마스. 이번 크리스마스는 둘이 같이 맞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엄연히 말하면 여행 중에도 있었지만 그건 배제하자. 그때는 홀리를 구하는 게 급선무였고 여유를 부릴 수도 없어서 지나고 나서야 크리스마스였음을 알았으니까. 솔직히 다음 기회는 없을 줄 알았다. 카쿄인이 살아 돌아온 이후에는, 있더라도 한참 후일 거라 생각했다. 그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카쿄인의 몸도 이제 많이 안정되었으니 이 이상은 보호자라는 명분으로 동행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다른 명분을 만들면 되지. 보호자가 아닌, 전혀 새로운 관계로. 마음속에 그려둔 것은 이미 있었고, 언젠가는 전할 예정이긴 했다. 숨길 생각도 없었다. 숨겨질 거란 기대는 더욱 안 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늦으면 관계가 애매해질 거고, 그러면 분명 타이밍을 잡기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이 적기였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4.

 

“죠타로. 음, 이번 크리스마스에… 그… 일정, 있어요?”

“아니. 원래대로면 미국에… 영감의 집에서 온 가족이 새해까지 보내고 오는데, 이번에는 안 갔어.”

“어, 어? 왜?”

“내가 남고 싶다고 했다. 아픈 널 혼자 두기가 불안하더군. 다들 이해해 주던데.”

“내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예요?”

“내 눈에는 그리 보인다.”

“시력 검사 한 번 해봐야겠는데.”

“웃기는 소리.”

“그럼 홀리 씨도 일본에 계시는 거야?”

“아니. 아줌마는 갔어. 나만 남았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 병원에서도 한시름 덜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홀리 씨한테 아줌마가 뭐야?”

“시끄러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지만… 홀리 씨가 건강해진 이후로 처음 아냐? 가족 모임.”

“그 여편네의 건강에 네가 한몫한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너나 죠스타 씨에게 받고 있는 게 너무 많잖아요.”

“죄송스럽다고 할 거면 그냥 말을 하지 마라.”

“왜?!”

“죄송하다 소리를 해야 할 건 오히려 이쪽이야. 죠스타의 일에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사경을 헤매게 했으니. 그리고 혹시 몰라 첨언하는데, 먼저 말 꺼낸 사람은 엄마다. 내가 아니라.”

“…홀리 씨가요? 아무리 그래도 말렸어야죠, 죠타로!”

“영감까지 합세해서는 너는 남아야 하지 않겠냐며 난리를 피우는데 내가 뭘 어떻게 말리냐? 미친 영감탱이 나이를 헛으로 먹었나, 사람을 들들 볶는 솜씨가 가히 예술적이던데.”

“아, 아, 아아…. 나 지금 엄청나게 머리가 아파졌어.”

“아프지 마라.”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얘기예요?!”

“어쨌든 진정해라.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남은 거니까. 지금이 아니면 영 안 될 것 같더군.”

“…엄청 중요한 건가 보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그저 있어주기만 하면 돼. 네게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을 뿐이라.”

“그, 그래? 그, 우연이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

“…나한테?.”

“그래서 아까 크리스마스에 일정 있는지 물어본 거…였는데.”

“…그런가.”

“…응.”

“….”

“….”

 

5.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6.

 

아무도, 아무도! 차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했다. 참으로 놀랍게도 말이다! 아니, 정정하자. 놀랍지도 않았다. 놀랄 일이 없어서 그런 일에 놀라나.

언제부터였는지는, 글쎄? 죠셉도 모를 것-모르는 게 당연하지만-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인력, 사람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그중 스탠드사끼리 작용하는 인력은 더욱 강하다지. 그렇게 둘은 만났다. 서로를 죽이려 들 정도로 굉장히 독특했던 첫 만남이었지만 어쨌든.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겨서 그런 건지, 위험한 여행길에 유일한 또래여서인지, 혹은 다른 운명적인 무언가가 있던 건지….

사실,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하기도 어려웠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세상일이, 사람 마음이 그렇게 딱딱 나누어떨어질 수만은 없으니까. 애초에 서로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여행이었다. 필연적으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내내 살을 부대끼며 지냈다. 필요에 의해서든,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든, 과정이 어쨌든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인에 가까운 형태의 애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DIO를 쓰러트렸을 당시에만 해도 몰랐다. 그때는 다른 게 더 급해서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돌아볼 틈도 없었다. 오늘 살아남았음에 감사하고, 내일도 살아남기를 기도하고. 하루하루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나날. 본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기 시작한 건 여행이 끝난 이후였다.

죠타로는 카쿄인이 굉장히 걱정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같이 카쿄인의 면회를 갔으니 알 만했다. 그래봤자 유리창 너머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수 있게 전부였지만, 그것도 아쉬워서 매번 면회 가능 시간을 꽉꽉 채우다 떠났다. 처음에는 친구인 줄 알았다. 친구니까 이만큼 걱정이 되고 마음이 쓰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위험한 여행에 함께 해준 게 고마웠고 생사의 기로에 있을 만큼 큰 부상을 입게 된 것이 미안했으니까 더더욱.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친구가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만… 매일 상태를 보러 가고, 눈을 떠줬으면 좋겠고, 오랜 병상 생활로 가늘어진 손을 만지고 싶고, 그러다 그가 눈을 뜨면…. …그래서 죠타로는 이 마음이 단순한 친구의 마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어쩔 줄 몰라 애태우고 숨기는 일은 죠타로와 거리가 먼 일이었다. 하지만 기다릴 필요는 있었다. 카쿄인의 의식이 돌아오더라도 건강을 회복하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 그때까지는 죠타로도 카쿄인의 회복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카쿄인은 처음에는 그저 좋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난 것도 좋았고, 죠타로가 자신을 계속 보러 와주는 것도 좋았다. 솔직히 죠타로가 이 정도로 제게 정성을 쏟는 것이 과분하다 느끼긴 했지만 어쨌든 좋긴 좋았다. 그러다 죠타로가 항상 면회를 오던 시간에 오지 않은 적이 있다. 면회를 거른 것은 아니고, 어쩌다 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을 뿐이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면회 시간을 꽉꽉 채웠지만, 죠타로가 오지 않는 그 짧은 시간, 카쿄인은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더랬다. 매일 봤는데도 또 보고 싶고, 이젠 오지 않는 건가 싶어서 슬프고, 멋대로 기대한 것 같아서 민망하고…. 지금까지 친구가 없었던 그였지만, 그 정도의 사리분별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깨달은 순간 더 강해진 마음이 튀어나갈 것 같았지만 꾸역꾸역 심장을 삼켜내며 참아냈다. 건강을 회복하고, 그의 옆에 당당히 서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카쿄인의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는 이미 늦가을이었다. 곧 겨울이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고백은 크리스마스가 좋겠어. 그날이 아니면 안 돼. …둘이 똑같이 생각한 탓에 결국 겹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7.

 

크리스마스 당일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났다. 고백하려고 분위기 잡느라 엄청 긴장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는 마음이 탁 풀려버린 탓인지 머릿속에서 다 휘발되어 버렸다. 슬쩍 손도 잡았던 것 같은데…. …아니, 뭐야. 손을 잡았어? 남사스럽잖아! 망측하기 짝이 없군! 소소소소손, 손을 잡았다고?!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이성이 끊어져 눈이 멀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벌써 소소소소손을 잡아? 사귀게 된 지 얼마나 됐…, …사사사삿사사사사귄다고? 우우우우우우우우리가?

…라는 이유로 둘 다 반쯤 넋이 나가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툭하면 표정이 이상해졌다. 입꼬리는 주체할 수 없게 올라가는데 얼굴은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던 탓이다. 남이 보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을 거다. 설마 DIO도 쓰러트렸는데 고작 표정관리가 어려웠겠나? 맞다. 어려웠다. 설마가 사람도 잡으니 조심하도록 해라.

아무튼, 좋은 의미로의 현실 부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죠타로가 연말연초를 혼자 보내게 된 것처럼, 카쿄인 역시 그랬다. 카쿄인의 부모님이 연초 새해를 맞아 본가에 다녀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카쿄인만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일정을 취소하려고 했는데, 카쿄인이 설득했다. 못난 아들 걱정하시느라 지금껏 다녀온 적이 없지 않으시냐고. 자긴 이제 어느 정도 괜찮고, 혹시라도 큰일 생기면 바로 도와줄 사람도 있으니 염려 놓고 다녀오시라고. 아직 고백하기 전이었는데, 어쨌든 여차하면 죠타로가 도와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래서 내심, 죠타로가 미국에 가지 않기로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모의 부재 소식에 고백해야 했는데 마침 잘 됐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무시하자.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그래서… 나도 당분간은 혼자 지내게 됐어.”

“음.”

 

죠타로는 짤막하게 대답했을 뿐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스타 플라티나가 나온 것도 모자라서 허공에 오라오라를 날렸다고 하니, 숨기기는 대차게 실패한 모양이다. 심지어 스탠드가 튀어나왔다는 것조차도 나중에 카쿄인이 말해줘서야 알았다. 아주 온사방-라고 해봤자 카쿄인 뿐이다-에 티를 내버렸다.

물론 둘 다 혼자라고 해서 카쿄인에게 음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있는 게 오히려 쓰레기 아닌가. 카쿄인은 이제야 몸 상태가 안정되어가고 있는데. 그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데이트-또 갑자기 스타 플라티나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카쿄인이 깜짝 놀랐다-하다가도 그의 몸이 나빠지면 바로 중단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바깥에서 만났을 때의 이야기지, 이번엔 중단할 생각이 없었다. 카쿄인을 혼자 두면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가 늦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카쿄인의 집이 비는 그 며칠 동안 신세를 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카쿄인은 당혹스러운 듯했으나 진심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심 좋아하는 듯했다. 간병을 핑계로 둘은 같은 방에서 지냈다. 여행할 때도 같은 방을 썼지만 지금은 또 느낌이 달랐다. 괜히 간질간질했다. 그래봐야 손도 겨우 잡았다. 손이 닿는 순간 죠타로가 움찔했고, 그가 도망갈세라 카쿄인이 더 세게 잡았다. 그렇게 손만 한참 잡았다.

 

8.

 

그렇게 크리스마스부터 연초까지 쭉 붙어있게 된 그들이었으나, 그건 그거고 데이트는 데이트다. 둘은 완전 다른 거다. 무엇보다도 죠타로에게는 그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카쿄인의 컨디션을 고려해서 동선은 이렇게 조정하고, 식사는 이곳에서. 자리가 없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이곳, 아니면 이곳에서. 식사 후에는 비교적 사람이 적은 길을 여유롭게 걸으며 사람 구경, 거리 구경도 하다가… 카쿄인이 괜찮다면, 근처 신사에도 가서 새해 소원을 빌자.

마침 날씨도 그들을 축복해주기라도 하는 듯 포근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카쿄인은 아직 추위에 약하니까. 한 가지 걱정이라면 사람이 예상보다 많다는 점인데…. 사람에 치여 피로도가 쌓이면 큰일이다. 계획은 아무래도 좋으니, 카쿄인의 상태를 보고 결정하자. 죠타로는 수첩을 닫았다. 계획을 아무리 복기해봤자 중요한 건 실전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카쿄인이었다.

 

9.

 

“맛있었어, 죠타로. 어디서 이런 식당을 찾았대?”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지.”

“응.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다행이군. 식당 선정에 꽤 공을 들였거든. 내부 공간이 넓고 테이블 간의 거리가 충분하고, 간이 세지 않아 부담이 적고, 위생과 청결 관리가 철저하고, 인테리어가….”

“그만, 그만! 줄줄 외우다가 날 새겠어요. 네 기준이 까다로운 건 알았지만 정말 대단한걸.”

“나보다는 너에게 맞추기 위해서 더 고심했다.”

“…나?”

“당연한 거 아닌가.”

 

죠타로는 당당했고 카쿄인은 고맙고 미안해서 부끄러웠다. 그래서 말대꾸하는 대신에 냅다 손을 잡았다. 그러자 죠타로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훌쩍 큰 덩치를 가지고서 겨우 이런 스킨십에 놀라는 모습은 보고 또 봐도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할 뿐,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맞잡은 죠타로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아마 그 안에서 꼼질거리고 있을 제 손도 따뜻할 것이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카쿄인, 춥지 않나?”

“전혀. 날이 따뜻해서 괜찮아요. 더 놀고 싶은걸. 요즘 계속 실내에서만 살았더니, 안 그래도 바깥을 좀 걷고 싶었거든요.”

“컨디션은?”

“멀쩡해요. 이 정도의 체력은 회복한 것 같아요. 열심히 재활한 보람이 있어서 좀 뿌듯하네.”

“점심시간이 지난 후라 시간이 약간 애매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사람이 그나마 덜할 것 같다. 괜찮다면 근처 신사에 가지 않겠나?”

“좋아요. 신년이라면 역시 길흉을 점쳐봐야죠. 소원도 빌래요. 작년엔 이집트에 있느라고 못 했잖아.”

“그때는 뭐…. …어쨌든 정해졌군. 중간에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말해라. 그나저나 무슨 소원을 빌 건데?”

“비밀이야. 말하고 다니면 효력이 없다는 말 몰라요?”

“유감이군. 나는 네 건강 회복에 대한 소원을 빌 거다.”

“네 소원인데 좀 더 너를 위한 것에 빌어봐요.”

“너를 위한 게 나를 위한 거야.”

“…너 진짜 낯간지러운 소리 잘 한다니까.”

“낯간지러웠나?”

“몰라, 조용히 해요.”

 

죠타로는 뽀뽀해주면 입을 다물겠다고 하려다가, 스스로가 경악스러워서 그만 뒀다. 매우, 매우, 매우……………… 파렴치한 같았다.

 

10.

 

점괘를 뽑을 때는 분위기가 꽤나 험악했다. 점괘를 뽑는 카쿄인 뒤에 있는 죠타로의 표정이 어마어마해서, 점괘 담당자가 잔뜩 겁을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종의 미신일 뿐인데 왜 이리 과몰입을 하는지 싶겠지만, 죠타로 본인의 점괘에 대흉(大凶)이 뜨든 말든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카쿄인에게 흉(凶)이라도 떴다가는…. 절대 안 되지. 스타 플라티나 더 월드를 이런 데에 써도 되는 걸까? 하지만 스탠드사가 자기 스탠드를 그렇게 쓰겠다는데 뭐. 죠타로는 카쿄인이 막대를 잡은 순간 시간을 멈췄고, 기어코 대길(大吉)을 찾아서 바꿔치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카쿄인은 점괘가 좋다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벅차오르는 이 감정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아, 시간을 멈추길 잘했다. 참고로 죠타로는 말길(末吉)이 나왔다. 길하지도 흉하지도 않은, 딱 제로(0)의 점괘-카쿄인은 아쉬워했다-라는 뜻이다. 점괘 담당자는 그들이 소원을 빌자며 사라지고 나서야 별 사고 없이 지나갔다며 안도할 수 있었다.

카쿄인의 소원, 죠타로의 소원. 각자 바라는 게 많긴 했다. 건강도, 재물도, 학업도, 그 모든 것에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둘의 소원은 사실 똑같았다. 앞으로도 내내 너의 곁에 있게 해달라는. 같은 코타츠 안에 들어가 손장난 발장난을 쳤으니, 봄에는 내리는 꽃비 사이를 걷고, 여름에는 같은 우산을 쓰며 어깨도 젖어봐야지. 가을이 되면 높은 하늘 아래 알록달록 가로수를 보고… 다시 돌아오는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어도 좋을 거야. 그 모든 계절을 언제까지고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두 손을 맞대고 눈을 감고서 간절히 빌었다.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자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엇을 빌었는지 입 밖으로 내더라도, 그 소원이 이뤄지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막연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설령 소원의 효과가 사라지더라도 어떠한가. 운명은 개척하는 것인데. 고작 힘을 잃은 신년 소원이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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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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