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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자] 플레베크의 죄악감

21.06.22 작업 완료

0.

[플레베크 자매] 플레베크의 죄악감

W. 별비

본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 ‘별비’에게 있으며, 2차 가공과 상업적 이용을 금합니다.

2021.06.22 작업 완료 

 

1.

 

체렌 플레베크, 레노아 플레베크. 플레베크 자매는 이능력자 자매였다. 직업도 같았다. 크리처와 전투하는 군인으로서 포탈 너머에서 활동했다. 둘은 각각 방어계 이능력과 서포트계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팀원으로 함께 행동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여기서 둘의 능력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체렌 플레베크, 이명은 베일 오브 미드나잇. 이능력은 녹스의 총애로, 대상에게 일정량의 피해를 흡수하는 보호막을 부여하는 능력이다. 레노아 플레베크의 이명은 미로를 설계하는 환각의 지배자. 이능력은 모르페우스의 숨결로, 감각능력과 인지능력을 떨어트려 환각을 겪게 하는 안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여러 요소만 잘 맞물리면, 환각에 걸린 크리처들이 저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정작 본인들은 체렌의 능력으로 보호받으면서!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첫째, 레노아는 크리처의 환각과 환각에 걸린 크리처들을 세세하게 통제할 수 없다. 안개 속에 있는 크리처가 어떤 환각에 걸릴지 알 수 없고 혼란에 걸린 크리처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둘째, 체렌은 보호막을 한 번 부여하면 몸에 부하가 걸려 3시간은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부하를 무시할 경우 각혈이 시작된다. 셋째, 체렌의 보호막은 만능이 아니다. 여러 대상에게 동시에 부여할 경우 보호막의 강도는 약해진다. 넷째, 레노아의 안개는 아군의 시야까지 방해해버린다. 때문에 적외선 감지기 같은 게 없다면 사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다섯째, 본인을 중심으로 퍼지는 안개의 특성상 그들은 크리처들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

감당해야 하는 위험부담이 큰 편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광역공격이 가능한 이능력자와 함께 다니곤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모든 가능성을 상쇄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군의 시야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렌은 부하가 걸려 보호막을 생성할 수 없는데 미리 걸어둔 것은 진작 사라져있고, 혼란에 걸린 크리처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레노아!”

 

뿌옇게 깔린 안개 속에서 저를 부르는 체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어디에 있어, 그 쪽이야? 몸을 돌린 순간 레노아는 강한 힘에 의해 밀려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넘어져서 아파할 틈도 없이 바로 눈앞에서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날아든 것은 거대한 창과 같은 크리처의 팔. 그 공격에 당한 것은…

 

3.

 

그날따라 상대해야 하는 크리처의 수가 많았다. 게다가 그들이 상대해야 크리처들은 난폭하고 공격적이기까지 해서 특히 더 주의를 요하는 종들이었다. 그러나 경험이 많고 노련한 그들에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힘든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평소처럼 행동했다. 먼저 체렌의 보호막을 부여받고, 포위되는 척하면서 적진 한가운데로 파고든다. 어느 정도 끌어 모았다고 판단되면 레노아가 안개를 만들어낸다. 안개의 효과로 인해 크리처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하면 공격을 맡은 팀원들이 혼란에 걸린 크리처들을 공격한다. 가끔씩 그들 쪽으로 날아오는 공격은 별로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체렌의 능력 없이도 자신의 몸을 방어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레노아의 안개,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안개가 퍼지면서 크리처들이 사방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무슨 환각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아내고 통제하는 것은 레노아의 능력 범위 밖이다. 때문에 그들은 크리처를 제압하기는커녕 일단 방어하는 것에 집중해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적외선 탐지기도 말썽이었다. 안개를 걷어낼 수도 없었다. 적진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걷어내는 순간 더 위험해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미처 쳐내지 못한 공격들 때문에 체렌이 부여해준 보호막은 깨진지 오래였다.

오늘 임무는 평소답지 않게 참 힘드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체렌은 기척을 느꼈다.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살기를. 체렌은 곧 다가올 공격에 대비해 온몸을 긴장시켰으나…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방향이 달랐다. 공격이 향하는 곳은 제 동생이 있는 쪽이었다. 위험해. 그렇게 생각한 다음 순간, 체렌은 제 동생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를 밀쳐내기까지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레노아는 체렌의 손에 밀려 넘어졌고, 안심할 듬도 없이 엄청난 격통이 그를 강타했다. 하지만 체렌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레노아는? 레노아는 괜찮은가? 고통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 시야에서 유난히 또렷하게 들어온 것은 오로지 레노아의 상태였다. 레노아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있었으나… 그 전의 전투로 인한 찰과상들 외의 부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암전되는 시야. 그 틈으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파고들었던 것 같다.

 

4.

 

한참 후에 시야가 밝아졌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링거였다.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이 그렇게 끊겨있으니, 아무래도 병원이겠지. 후욱, 후욱.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코와 입에 씌워진 산소마스크가 거슬렸다. 잔잔하게 깔린 심전도 기계의 삐- 삐- 소리는 마치 배경음악 같았다.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그는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깨어났음을 알려야 할 것 같은데. 간호사 호출 버튼을 눌러야 하나, 그 버튼은 또 어디에 있나, 내가 그걸 누를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마침 병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금색 눈과 갈색 눈이 마주쳤고, 교차된 것은 놀람과 당황스러움이었다. 레노아는 곧바로 의료진에게 환자가 깨어났음을 알리기 위해 달려갔고, 뒤이어 들어온 의료진들은 그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했다. 그와 동시에 이런저런 의료기기들도 정리되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링거뿐이었다. 이제는 안심하셔도 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의료진들은 병실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 남은 사람은 플레베크 자매 둘뿐이었다. 레노아가 간이 의자를 꺼내 침대 옆에 털썩 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짓눌렀다.

 

“레-”

“복부 관통상. 급소도 피해갔고 천만다행으로 엉망으로 꿰뚫린 건 아니었지만… 부상 부위가 커서 중상. 치유 이능력자들이 여럿 달라붙은 덕에 출혈은 멈췄지만 의식불명. 언니, 4일은 넘게 누워있었어.”

“…”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너는 다친 데 없고?”

“…지금 그게 중요해?”

“네가 안 다쳤으면 된 거야.”

“그게 중요해? 누가 봐도 언니가 더 다쳤는데, 자기 몸에 바람구멍이 났는데!”

“중요해.”

“…언니, 제발 이러지 마. 나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보다는 자신을 우선했으면 좋겠어. 나는 이런 걸 바라지 않아.”

 

레노아는 체렌의 답을 기다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답하지 않겠다는 듯, 체렌은 고개를 돌렸다. 서로를 마주하던 눈동자의 방향이 틀어졌다. 알겠다고,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해주면 안 돼? 체렌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잠깐의 정적이 어찌 이리도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던지. 레노아의 짧은 한숨. 앉아있던 몸이 벌떡 일어났다. 더 있어봐야 나아지는 게 없다는 것 마냥.

 

“…뮐레가 쾌차 바란다고 안부 전해달랬어.”

 

레노아는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드르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 말만큼은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병실을 나가려던 레노아가 멈췄다.

 

“몸조리 잘하고. 무리하지 말고.”

 

앞으로도. 여전히 체렌을 등진 채였다. 뒤이어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병실에 혼자 남은 체렌은 레노아의 말을 곱씹었다. 나 자신을 우선하라고. 네가 아닌 나를… 체렌은 하, 탄식에 가까운 짧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5.

 

“오늘도 엄마아빠 늦을 거야. 때 되면 레노아 밥 먹이고, 약도 먹이고. 열나면 엄마한테 전화하고.”

“할 수 있지? 체렌 다 컸잖아. 우리 딸 착하지.”

“네. 다녀오세요.”

 

다 컸다던 체렌은 고작 8살이었다. 체렌은 일찍부터 어른이 되어야 했다. 부모는 야근이 잦아 집안을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가벼운 감기라도 걸려본 적이 없는 체렌과는 달리, 그의 동생은 몸이 약했다. 항상 이런저런 잔병을 달고 다녔고, 때문에 꾸준한 보살핌을 받아야했다. 그래서 체렌은 당연하게 동생을 살폈다. 내가 언니니까. 언니가 동생을 챙기는 건 의무니까. 부모는 체렌이 아주 의젓하다고, 언니답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체렌에게 레노아를 맡기는 것은 점점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2살 된 동생에게 밥을 먹이고, 시간이 되면 약을 먹이고. 동생을 씻기고, 닦아주고. 동생의 옷을 갈아입혀주고. 가끔씩 동생이 칭얼거리면 달래주러 가고. 동생에게 열이 나면 부모에게 알리고, 동생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주고.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일이었을 텐데, 체렌은 단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도, 그렇다고 티를 낸 적도 없었다. 그래야 한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는 언니였으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체렌은 이능력 발현증상을 겪게 된다. 체렌의 평생-이라고 해도 고작 8~9년이었지만- 그렇게 아파본 적은 없었다. 레노아는 항상 이렇게 아픈 건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가 엄청난 고열로 사경을 헤매자 부모는 한숨을 쉬었다.

 

“레노아한테 옮은 건가? 지금까지 건강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너까지 아프면 어떡하니, 안 그래도 레노아만으로도 벅찬데.”

 

거짓말. 체렌은 생각했다. 레노아는 내가 다 돌봤는걸. 엄마아빠가 힘들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체렌은 열에 들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정신도, 기억할 체력도 없었다. 그대로 잠들 듯 눈을 감아버렸다. 체렌의 증상이 이능력 발현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가 곧 이능력자로 각성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된 부모는 이제 다른 걱정을 했다.

 

“체렌은 아무래도 아카데미에 보내야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데 레노아는 어떡하지?”

“그러게. 체렌이 없으니까… 어린이집에라도 보내야 하나?”

“어린이집에서 받아주긴 한대? 받아주더라도 적응도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우리가 일을 그만둘 수는 없잖아.”

“그러게 내가 둘째 낳지 말자고 했었잖아.”

“체렌이 이능력자가 될 게 뭐람.”

 

불행히도 체렌은 그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맞아, 아카데미… 그런 곳이 있었지. 그럼 나는 거기에 들어가게 되는 건가? 그러면 레노아는 내가 돌보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레노아는 원래 낳을 생각이 없었던 건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마침내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냥 낳지 말지,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그럼 나는 이제 좀 편해지는 건가? 그리고 체렌은 곧 경악한다. …내가 무슨 생각을?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아닌데,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언니니까, 레노아를 챙겨줘야 하는데.

동생이 생긴 어린 아이들이 동생을 질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그가 한 생각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본인은 괜찮다고 생각했겠지만 동생을 돌보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고, 그게 아픈 틈을 타 표출되었을 뿐이다. 아무리 일찍 철이 들었대도 어렸고, 그가 하던 일들은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들이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업무에 찌든 직장인이 회사에 불을 지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체렌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 너무나도 충격이었고, 자신은 아주 못되고 나쁜 언니라고 사방에서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에게 트라우마처럼 다가왔고, 그래서 그는 이 낙인을 씻으려면 언니의 본분에 더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에게 아카데미에 가지 않겠노라 말하기까지 했다-물론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내가 아카데미에 있느라고 챙겨주지 못할 시간만큼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어. 방학 때 집에 돌아가게 되면 그때만큼이라도 열심히. 레노아의 이능력 발현 증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도 그였다. 레노아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는구나. 그러면 내가 적응을 도와줘야지. 입학식, 쉬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자기 전… 꾸준히 찾아가서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수업은 괜찮았냐고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역시 제대로 뒷바라지를 하려면 안정적인 직장을 빨리 얻는 게 좋겠어. 같은 팀원이라니,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지켜줘야겠다. 몸을 던져서라도.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줘. 너도 이미 알고 있듯, 나는 언제나 너만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하니까. …이런 걸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조금은 봐줄래? 그것만이 내 죄를 사할 길이고 내 삶의 이유야. 좋은 언니, 그것은 어느새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되어있었다.

 

6.

 

“레노아!”

 

이런저런 부상으로 온몸이 욱신거린다. 고개를 돌린 순간 밀쳐져 넘어진다. 넘어지면서 쓸린 팔이 따끔거린다. 눈앞에서 익숙한 이의 몸이 무너진다. 힘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갈색 눈에 그 광경이 담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곧 비명이 들린다.

레노아는 알고 있다. 어릴 적 열이 나던 제 이마에 얹어지던 물수건의 온도를, 그 너머의 체온을. 자신이 받고 있는 거대한 사랑의 무게를. 레노아는 또한 알고 있다. 먼저 먹으라며 건네받은 아이스크림의 맛을, 언니니까 양보하는 게 옳다며 얻게 된 곰 인형의 감촉을. 체렌이 자신을 위해서 일찍이 희생한 것의 무게를.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레노아가 처음으로 한 말도 어니(언니)였다. 울면서 제일 먼저 찾던 사람도 언니였다. 레노아가 체렌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어할 때마다, 미안해하며 울 때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레노아는 괜찮지 않았다. 매번 받기만 하는 자신이 싫었다. 때문에 레노아 역시 일찍 어른이 되어야 했다.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기, 갖고 싶다고 떼쓰지 않기, 먹고 싶다고 징징대지 않기, 자장가 불러달라고 칭얼대지 않기, 책 읽어달라고 억지 부리지 않기, 쓴 약도 잘 먹기, 아파도 아픈 티 내지 않기, 물수건 정도는 혼자 챙기기, 언니 힘들게 하지 않기… 얼른 자라서, 빨리 건강해져서 언니가 봐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되면 나도 언니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줄 수 있겠지?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자신이 이능력자라는 걸 제일 먼저 알아챈 것도, 그렇게 입학하게 된 아카데미에서의 적응을 도와준 것도 체렌이었다. 그가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취직한 이유도 모르지 않았다. 레노아의 어깨에 얹어진 사랑과 희생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그래서 레노아는 어떻게든 자신의 쓸모와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안달이었고, 더 이상 그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했다. 체렌의 우선순위가 레노아였던 것처럼, 레노아의 우선순위도 체렌이었다. 레노아의 모든 언행과 사고방식의 중심에는 체렌이 있었다. 언니가 자신의 건강 때문에 걱정할 일 없도록 운동도 꾸준히 했고, 성적 때문에 속상할 일 없도록 공부도 열심히 했고, 취업 때문에 지원할 일 없도록 취직도 서둘러 했다. 언니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바라지 않아. 적어도 나 한 몸 건사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만큼. 그만큼이라도…

그러다 마침내 그와 동등한 팀원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을 때, 레노아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자신의 첫 기억이 존재할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 같았기 때문에. 나 이제 정말 괜찮다고, 지금부터는 내가 언니를 도와줄 거라고. 그렇게 언니에게 보여준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아니었다. 또 언니에게 받아버렸어. 레노아는 체렌이 치유 이능력자들에게 치유를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내내 울었다. 의료진들이 탈진을 걱정할 만큼 울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 이제 괜찮은데. 더 이상 언니가 나를 봐주지 않아도 되는데. 왜. 레노아는 체렌이 늘 하던 말을 떠올린다. 내가 언니잖아. 나는 언니니까. 언니가 언니라서 그래? 내가 있어서, 동생이 있으니까 언니인 거잖아. 그럼 언니가 언니가 아니게 되면 돼? 나는 언니를 위해서 사라지는 게 좋아? 내가 받은 것들을 갚을 수 있게 해줘, 받기만 해줘.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아무 것도 하지 말아줘. 내가 더 이상 언니에게 죄를 짓게 하지 말아줘… 그가 받았던 사랑과 희생은 어느새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어깨를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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