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자] 세상의 끝에서 망자는 꿈을 꾼다
18.06.24 작업 완료
0.
[노엘 단독글] 세상의 끝에서 망자는 꿈을 꾼다
W. 별비
본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 ‘별비’에게 있으며, 2차 가공과 상업적 이용을 금지합니다.
2018.06.24 작업 완료
1.
왜 데스이터가 되었냐고? …뭐, 별 거 없어. 내가 원하는 걸 그쪽이 가지고 있었거든. 그리고 그쪽이 데스이터였을 뿐이지. 그게 다야. 끝.
2.
몇 년 만이지. 졸업한 지 얼마나 지났더라. 그래도 호그와트는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변한 건 우리지. 우리가 함께 배우고 함께 지내던 학교에서 전투를 한다니, 웃기지도 않아. 잔인하기까지 해. 올려다 본 하늘은 당장에라도 비가 올 것 마냥 흐렸다. 불어오는 바람은 묘하게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코에 닿는 호수의 물 냄새는 비릿하기까지 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숲을 뒤덮었다.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자박자박 돌길을 걷는 소리가 좋다. 찰박찰박 물이 올라오는 소리에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우와, 내 얼굴 좀 봐. 퀭한 다크서클에, 흐린 눈에, 왁스로 넘겨도 부스스한 머리에, 멍든 입술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거 같잖아? 그러면 안 되지, 노엘 에피알테스. 쓰러지려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 웃자, 스마일. 뒤에서 다가오는 누군지 모를 놈한테도 웃어줘야지. 안 그래?
“노엘.”
품에서 지팡이를 꺼내려다 멈칫.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 가장 듣고 싶었던, 그렇지만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3.
나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어.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일원으로서 행동을 같이 하고, 생각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어. 그냥 그 안에서 인정받고 존재하고 싶다, 그거 하나였을 뿐인데. 그거 하나였을 뿐인데, 어머니는 나를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셨어. 나는 어머니의 아들인데도, 나는 없는 존재였어.
그래서 데스이터가 되고서 제일 먼저 죽여 버렸지. 사실은 죽이려던 것까진 아니었어. 고문만 하려던 거였는데… 처음엔 물론 괴로웠지. 하지만 시작이 어렵다고 하잖아?
4.
“노엘, 내 아들아. 너도 에피알티스이지 않니. 이쪽으로 오렴. 우리는, 에피알티스는 너를 인정할 수 있단다. 가족이잖아? 우리는 너를 환영해.”
어머니께 무시를 당하고 갖은 폭언을 들은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런 날이었지만, 몇 배로 더 지치고 힘들었던,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조용히 속삭이시던 아버지. 아버지의 말씀은 정말 달콤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저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나는 그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그래서 나는 얼마만큼의 보상을 받았는가. 방금까지의 나는 과연 보상을 받았는가? 그래서 내가 오늘 들은 말은? 그런다고 누가 너를 받아주겠니? 그냥 죽지 그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요, 어머니. 저들은 저를 받아줄 거예요. 어머니랑은 다르게요. 갈게요, 그쪽으로 갈게요. 저를 받아주세요.
“네가 여기에 들어올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보여주는 건 어떠니. 누굴 죽인다든가. 음… 네 엄마가 좋겠네. 가족이기까지 하니,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 같은데.”
그래서 어머니를 시작으로, 죽이고 죽였다. 살인에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순혈이 아닌 혼혈이기까지 한 내가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없으니까.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내가 죽인 어린 아이가 꿈에 나타나 울부짖고, 어머니가 나타나 폭언을 퍼부었지만 괜찮았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졌다. 언제나 괜찮았다.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5.
“노엘.”
지팡이를 꺼내려던 몸은 그렇게 어정쩡하게 굳어버렸다. 뻣뻣하게 뒤를 돌아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는 무엇인지도 모를 감정이 들었다. 기쁨, 반가움, 설렘, 절망, 슬픔, 좌절감… 목소리, 갈색 머리, 녹색 눈동자, 주근깨, 큰 체격… 내 기억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렇지만 입 밖으로 나와야 할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만 했다.
“…우리가 이름으로 부를 정도의 사이였어? 지금도?”
안 그래, 캐슬린? 하, 하고 비웃듯 짧게 웃어보였다. 너는 역시 불사조 기사단이구나. 애써 모른 척했어, 너와는 싸우게 될 거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왜 나와 마주친 게 너야, 컴버던트. 우리는 대화를 꽤 길게 했지만, 정작 나는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너는 여전히 내게 다정했고, 나는 그저 울음을 삼키며 힘들어했을 뿐이다. 나를 죽이든가, 나를 포기하고 가라고, 그렇게 속으로 울부짖었다.
“…너는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야. 한 번 들어온 사람은 못 내보내줘.”
정신이 확 들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해가 되고선 화가 났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 다음에는 부정했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혼란만이 가득했다.
6.
훌륭하구나, 노엘. 앞으로도 더 잘해줄 수 있겠지? 설마 힘든 거냐? 겨우 이 정도로 힘들어한다면 이 에피알티스에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아니야, 힘들지 않아요. 더 죽일 수 있어요, 더 할 수 있어요. 저는 에피알티스예요. 그 이상으로 제게 중요한 건 없어요. 더 열심히 할게요. 내치지 말아주세요.
7.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들의 산을 밟고 일어서서, 내 세계를 만들었어. 나는 이것만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어. 그렇게 완성된 나의 세계는 흐르는 듯하면서 고여있고, 잔잔한 듯하면서 휘몰아치고, 다채로운 듯하면서 회색만이 가득하지. 이 세계는 나만을 위한 것이고, 이 세계가 있어서 내가 있어. 이 세계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말도 안 된다고? 위험천만하다고? 위선이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그럼 네가 나를 받아줄 거야? 여기가 내 안식처인 걸 어떡해? 나는 이런 놈이야. 설득하려 하지도, 다정하게 대하려고도 하지 마. 소용없을 테니까.
8.
“안녕, 에피알티스. 요즘도 붐바르다로 팝콘 튀겨먹고 그러니?”
온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 차갑게 나를 바라보는 녹빛의 눈동자. 말은 필요 없다는 듯 나에게 겨눈 지팡이. 움직이는 것은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 뿐. 그래, 바로 이거지. 나에게 어울리는 대우는 이거지.
“설마. 어린 시절의 호기심이었을 뿐이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예의상에 가까운 무감정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차가운 기류가 흘렀다. 무거운 정적이 찾아오는 듯하더니, 시선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문을 쏘았다. 지팡이 끝에서 쏘아진 불꽃들이 부딪혔다. 흩어지는 불꽃들처럼 내 머릿속도 복잡했다.
9.
“너는 내 울타리 안의 사람이야. 한 번 들어온 사람은 못 내보내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거짓말이라고 말해. 농담하는 거지?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그럼 그동안 발버둥친 나는? 내가 했던 건 다 틀렸어? 내가 무슨 심정으로 거기서 버텼는데, 내가 어떻게 그 세계를 지켰는데?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야,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싫어, 인정하기 싫어. 나갈래. 내보내줘. 살인자도 그 안에 있을 수 있어? 죽으면 나갈 수 있어? 그러면 죽을래, 죽어버릴래.
10.
눈앞이 흐리다. 아른거리는 붉은 것이 실비에의 붉은 머리카락인지, 실비에가 만들어낸 불길인지, 내가 흘린 피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얼굴이 뜨겁다. 불길 때문인지, 열이 나는 건지, 혹은 그 외의 것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동안의 상처들과 피로가 더해져 이제는 숨쉬기조차도 힘들다.
“제대로 해, 에피알테스. 전투하면서 딴 생각을 하니?”
“와… 정말 가차 없구나, 실비에. 좀 봐주지 그래.”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에 놀러온 것이 아니거든.”
“대단하네. 네가 우리 쪽에 왔다면 엄청난 전력이 됐을 거야.”
“칭찬으로 들을게?”
실비에는 여전히 굳건했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손길은 여전히 정확했고, 눈빛은 여전히 단단했다. 흔들리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헉헉대는 숨소리가 시끄럽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이 원망스럽다.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삐걱댄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들을 떠올린다. 사실은 힘들어, 그만하고 싶어, 잘못했어, 죽이기 싫어, 무서워, 미안해, 죽여줘…
…그래,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내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내가 없애버릴 거야.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있겠지. 일찍 알았다면 달라졌을 지도?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지나온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걸. 나는 이런 놈이야. 그래, 여기가 내 끝이야. 자, 데려가줘, 실비에. 내게 어울리는 종말로.
지팡이를 쥔 손을 내렸다. 몸에 힘을 풀었다. 방어를 포기했다. 눈을 감았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미소를 지었다. 어둠이 덮쳐왔다. 그것이 끝이었다. 전하지 못할 미련들만 허공에 맴돌다 이내 사라졌다. 안녕, 컴버던트. 안녕.
11.
꿈을 꾸었다. 회색뿐이던 풍경이 온갖 색으로 화려해지는 꿈을. 고여 있던 강이 흐르고, 휘몰아치던 바람이 잠잠해지는 꿈을. 그리고 그 안에 네가 있는 꿈을. 행복한 꿈을.
12.
잊어버리는 건 쉽지만
다시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그게 시정잡배의 사랑이다.
마지막으로 십팔번 딱 한 번만 부르고 죽자.
_허연, 시정잡배의 사랑
13.
있잖아, 컴버던트.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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