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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자] 해피엔딩

17.03.11 작업 완료

0.

 

[조커리즈] 해피엔딩

W. 별비

본 글의 저작권은 별비에게 있으며, 2차가공과 상업적 이용을 금합니다.

드림 요소가 있습니다.

2017.03.11 작업 완료

 

1.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이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당신에게 소리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2.

 

한여름 밤의 공기는 습하고 텁텁했으며 후덥지근했다. 서늘하면서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끈적끈적하다. 훅 끼쳐오는 습기가 짜증을 돋웠고 익숙한 화약 냄새가 코를 살살 간지럽혔다. 아무래도 이 버려진 폐건물은 폭탄창고로 쓰이고 있는 모양이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커다란 상자들이, 폭탄들이, 화약들이 한 가득이다. 천장에 크게 뚫린 구멍으로 환한 달빛들이 쏟아져 우리를 비춘다. 달빛에 비치는 당신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당신이 내게 겨누고 있는 그 총구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가 있는 곳은 고요하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당신이 이죽이죽 웃고 있는 게 보인다.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내 일그러진 얼굴과는 상반된다.

 

3.

 

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어린 아이 한 명일 뿐이었어요. 부모님이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그렇게 버려져서, 끔찍한 기억만을 안고. 그저 막연한 복수심만을 가진 채로 그 더러운 뒷골목에서 지독하게 살아가는 어린 아이. 그러다가 나는 당신을 만난 거예요. 내게 부모님을 죽인 자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과, 그 즐거움과, 내가 가야 할 길을 모두 가르쳐준 당신을. 내 삶의 구원자, 나의 사랑. 그렇게 생각했어요. …방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소리치고 싶어, 화내고 싶어, 울고 싶어. 내 부모님을 죽인 강도를 보낸 게 정말 당신이었느냐고, 배신감에 사무쳐서 소리 지르고 싶어. 그렇지만 나는 소리칠 수 없어. 내가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낄만한 위치였던가? 나는 단지 당신의 흥미를 위한 장기 말들 중 하나일 뿐인 걸.

…있잖아요, 조커님. 나는 당신을 내 구원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가르쳐주세요. 어디서부터 당신의 계획이었나요? 내게 총을 쥐어준 것도 당신의 계획이었나요? 아니, 처음부터 당신의 계획이 아니었던 게 있었긴 했나요? …그러나 어리석게도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해요. 당신이 너무 미운데,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4.

 

리즈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리모컨. 구조는 무척 단순하지만, 이 리모컨이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바로 핵무기 발사. 5분이 되면, 그녀는 이것을 누를 심산이었다. 다 같이 죽는 거예요, 사이좋게. 나는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어요. 당신이라고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이 스위치를 누를 수 있어, 당신을 죽일 수 있어.

…아니, 나는 누르지 못할 거예요, 당신을 죽이지 못할 거예요. 다른 이들을 전부 죽여도, 나는 당신만은 절대 죽이지 못해요.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거든. 당신의 사과를 바란다는 명목으로 이렇게 당신을 협박하고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사과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당신은 조커님이니까. 어쩌면 내 마지막 발악일 지도 모르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당신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싶어서. 어리석고도 모순적인, 그러나 진심인, 나의 마지막 발악.

 

“후, 흐히. 작은 나의 요정. 내게서 관심을 얻고 싶은 것이라면 성공이야. 오, 그렇고말고. 대단한걸. 그런데 내 작은 요정이, 후히, 세상을 날려버린다면 그건 재미없지. 리즈, 난 아직 뱃시와의 놀이가 즐거운 걸. 후, 하하하하!”

 

리즈는 조커를 바라보며 허무하게 웃었다. 새삼스러운 거 아니잖아. 이미 알고 있는데. 당신이 나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데,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서 기대라도 해버렸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뜨거운 액체가 내 눈을 적실 리가 없잖아.

 

“알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렇게도 가벼운 것을요.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미친 걸까요?”

 

나를 향한 당신의 스킨십, 내게 향한 당신의 관심, 나와 가졌던 당신과의 관계. 당신에겐 그게 그렇게 덧없고 가벼운 것들이었던 거지.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정말로 미쳐버린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런 당신에게 진심이었던 나는 역시 미친 게 맞아요. ‘미쳤다’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걸.

 

“…있죠. 나를 죽여요. 당신의 손에서라면 매우 기쁜 걸. 그건 내 소원이었어요.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말이 조금 떨렸을까. 리즈는 저의 품 안에서 총을 하나 꺼내 제 관자놀이에 겨누었다. 그녀의 소중한 총이다. 조커가 그녀에게 처음 사람을 죽이는 법을 가르쳐 줄 때, 작은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던, 바로 그 총.

 

“…내 스스로 죽겠어요.”

 

그녀는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진짜 인생이 시작되게 해준 그 물건이, 이제는 자신의 삶을 끝내는 물건이 되는 것. 꽤나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 내 시작과 끝을 바로 당신이 선사해준 것이나 다름없어요. 멋지지 않아요?

 

5.

 

그러나 정적뿐이다. 고요하기만 하다. 총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각오는 이미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나 봐요. 미약하던 손의 떨림은 점점 커져, 이제는 그 흔들림이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진정해야 되는데. 손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덜그럭거리는 총구가 제 목표물을 정확히 겨냥을 할 수가 없다. 표정이 싹 굳은 조커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리고 자신의 코앞까지.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여전히 조용하다.

…사실은 두려워. 무서워요, 조커님. 나는 죽음이 무서워요, 조커님.

 

6.

 

Why so serious? 나의 요정아,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떨쳐 버려. 후, 흐히. 무엇이 문제지? 나의 요정이 원하는 대로! 그래도 무섭다면, 내가 해주지. 하나, 둘, 셋, 꾹! 하나, 둘, 셋, 빵! 흐히, 흐, 후, 하하하하!

 

7.

 

“용감해, 후, 흐히. 아주 용감해, 내 작은 요정은.”

“…조커님?! 안 돼, 당신은 살아야 해. 당신만은 살아야 한다고요!”

“뱃시는 결국 우리를 막지 못했어. 그 완벽한 배트맨이! 후흐히. 흐, 그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야.”

 

조커는 상상만 해도 즐거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는 곧 리즈의 총을 뺏듯이 쥐어들곤, 그녀를 뒤에서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제 턱을 그녀의 뒤통수에 댄 채로, 총구를 그녀의 입 안에 넣은 채로. 입 안에 들어온 차가운 총구가 느껴진다. 여기서 총알이 발사된다면 그대로 내 머리를 뚫고 지나가겠지. 그야말로 죽음. …그러나 무섭지 않아. 아까는 그렇게도 두려웠는데. 덜덜 떨리던 몸은 이미 차분히 가라앉아 평온을 찾은 지 오래.

 

“그리고 우리가 죽는 것 또한 배트맨은 막아내지 못하겠지. 자아, 나의 요정아. 무서울 건 없어. 죽음은 늘 그렇듯, 우리의 편이니까!”

 

조커의 목소리에는 흥미와, 호기심과, 광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 말에 리즈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편해진 얼굴로, 두려움이 가신 얼굴로, 그저 그렇게 싱긋. 아아, 맞아요. 내가 괜한 말을 했어요. 과연 조커님이에요. 두근두근, 등 뒤에서 뛰는 당신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제 괜찮아요. 나는 이제 무섭지 않아요, 조커님.

 

“맞아요, 조커님. 죽음은 늘 그렇듯, 우리의 편이죠.”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고, 숨을 들이쉬고, 자아, 하나, 둘, 셋, 빵!

 

8.

 

타앙-

 

9.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큼 재밌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핵무기는 슈퍼맨이 알아서 하겠고, 죽는 것은 우리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배트맨을 무너트리기는 충분하지. 배트맨의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그 뿐이다. 후회는 없다. 흐, 나의 요정과 함께 맞이하는 죽음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걸. 이것도 나름의 유희라면 유희겠지. 흐히, 여기에 남겨질 우리는 너만을 위한 선물이다, 배트맨. 기쁘게 받아주라고! 후히, Why so serious?

 

10.

 

한여름 낮의 공기는 습하고 텁텁했으며 후덥지근했다. 뜨거우면서도 기분이 나쁠 정도로 끈적끈적하다. 훅 끼쳐오는 습기가 짜증을 돋웠고 익숙한 화약 냄새가 코를 살살 간지럽혔다. …그리고 또한 비릿한 피 냄새가 난다. 벌써부터 시체가 부패하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배트맨은 폐건물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핵무기는 발사되지 않았다. 죽은 것은 그 둘 뿐이다. 그래, 오로지 둘 뿐. 배트맨은 핵무기가 발사되는 것을 기어코 막아냈지만, 결국 그들이 죽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들이 원하던 세계 멸망은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지금 시체들을 보고 있는 복잡한 배트맨의 심정은 바로 그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또한 그들은 행복해 보인다. 지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배트맨과는 다르게.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우리가 행복하면 된 거지. 그러니까 이건 해피엔딩.

 

11.

 

어떤 후회가 우리를 흔들겠어요.

-유희경,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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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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