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수정공] 시간선 너머로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20.06.28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6,193자.

※2020.06.28 작업 완료

※영웅의 외관 및 성별 언급은 없습니다. 자유로이 상상해주세요.

※파이널판타지14 '칠흑의 반역자' 및 크리스탈 타워 연대기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시간선 너머로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1.

 

그라하 티아는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크리스탈 타워와 함께 잠들었다. 훗날 눈을 뜨게 될 미래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찬란한 문명이 꽃피고, 크리스탈 타워에 집약된 알라그의 기술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 발전이 이루어져있고, 그러면 나는 타워의 관리자로서 그 기술들이 이로운 곳에 사용될 수 있도록 미래의 사람들을 안내하리라는 그런 희망. 그러나 그가 눈을 떴을 때 본 풍경은 자신이 기대한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황폐화된 대지, 흘러넘치는 비명, 스러져버린 문명. 그야말로 참담한 현실. 자신을 깨운 자들에게 지금이 언제냐 물으니, 8재해가 일어난 지 이백여 년이 지난 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네 이름을 찾아볼게. 상황파악이 대충 끝나고, 그라하 티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약속했던 대로 역사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익숙한 이름을 찾아서, 자신이 잠들었던 동안의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으며 책장을 팔락였다. 이백여 년의 시간은 짧은 듯 길었기 때문에, 그는 7성력 시절을 찾아 천천히 내용을 훑어야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과 함께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했던 영웅의 이름이 나오자 그는 어쩌면 웃었을 지도 모르겠다. 용시전쟁을 종결내고, 도마와 알라미고를 해방시키고. 그래, 멋진 모험을 했구나. 어쩔 수 없이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었을 찰나,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8재해로 사망. 길었어야 할 그의 모험은 그 짧은 문장으로 끝나있었기에. 차마 믿기지 않아 뒷장을 두어 번은 더 읽었으나, 정말로 끝이었다. 정말로 끝. 고작 그 한 마디로, 고작….

그를 정신 차리게 한 것은 한 앳된 목소리였다. 저기, 하고 불러서는 정말 영웅과 친구냐며 크리스탈 타워를 함께 모험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보호자로 보이는 자가 아이의 당돌한 행동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자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기대하는 눈빛인 것이 아닌가. 그 얼굴들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더니,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책에 써진 거랑은 좀 다르네, 미숙한 영웅이었다니 인간적이잖아, 같은 속삭임이 종종 들렸으나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감동 가득 찬 감상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영웅이라고, 멋있다고,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다고. 역시 우리의 …라고.

 

3.

 

이백여 년 전 시드 갈론드와 그의 동료들이 연구를 시작할 적의 첫 목표는 8재해를 막는 것이었으나, 곧 그 목표는 영웅을 살리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8재해의 원인을 분석하고 연구에 도움을 주던 학자들 중 어느 누군가가 그 '영웅'이 살아있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그들에게 영웅을 살린다는 것은 재해를 막는다는 단순한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이상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까. 가령, 그 이후의 세계라거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8재해가 일어나지 않은 미래, 영웅이 이어나갈 미래, 비록 자신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어도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미래. 그러니까 그들에게 영웅 살리기 프로젝트는 재해가 일어나지 않고 이어질 역사와 미래 전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영웅, 영웅, 우리의 영웅. 그들은 영웅을 사랑했다. 그의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는 그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새 책이 헌 책이 되고, 다시 생긴 새 책이 또다시 헌 책이 되고. 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질려하는 이가 없었다. 계속되는 싸움에 지쳤을 때, 자신들의 계획이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을 때, 성공가능성에 대해 불안해질 때, 문득 두려워졌을 때. 그럴 때마다 그들은 영웅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고서 다시 소중하게 품어서는 더욱 견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다듬는 것이다. 그럴 때는 꼭 ‘영웅’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것 같다고 했다. 할 수 있다고, 같이 가자고.

그라하 티아가 그들과 지내며 알게 된 것은 이백여 년 동안 이어져와 그들을 있게 한 것은 바로 영웅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선조들부터 그러했다. 이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죽음을 목전에 뒀을 때, 무언가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영웅이 남긴 선의와 위업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이어져 후세대의 의지가 되었고, 그 자체로 연결고리가 되어서. 영웅, 그 자체로 그들에게는 희망과 미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영웅이 써내려갈 이야기를 기대하며 기꺼이 타워에 잠든 것이 아니겠는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뼈저리게 이해하고 만다. 8재해가 일어난 세계는 얼마나 절망적인지, 황폐한지. 그래서 그들에게 영웅이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어떠한 미래를 바라는지. 그들과 동화되면서….

 

4.

 

그 사람의 이름은 틀림없이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구하러 가는 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내 역할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슬픈 결말로 끝나게 하지 않을 거다. 이것은 비단 나의 소망만이 아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집념을 짊어지고 있어. 나는 그저 대리인이야. 나는 그에게 전해야만 해. 영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당신이라는 영웅이 걸어간 발자취는 여전히 우리들의 희망이었다고…. 나는 그들의 의지와 마음을 이어받아 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해주러 온, 그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하러 이 자리에 있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오직 나만이 가능한 일이야.

 

5.

 

낭패다. 너무 일찍 넘어와 버렸어. 역시 표식을 이용한다고 해도 두 세계와 시간을 건너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너는 샬레이안의 현자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생각해라, 그라하 티아. 생각해내야만 한다….

아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왜 1세계에 빛의 범람이 일어났는지, 이걸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할 시간이 생긴 거다.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이곳의 시간으로 원초세계에 통합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점인가. 보통 인간의 수명으로는 그 시간동안 살아있기란 절대 불가능할 테지.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니게 될 필요성이 있다. 해결책은 바로 크리스탈 타워에 있겠지. 게다가 나는 크리스탈 타워의 유일무이한 관리자고. …가능성은 분명 있다. 할 수 있어. 나 자신을 타워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동기화시키는 거다. 크리스탈 타워에 축척된 에너지는 거의 무한에 가까우니, 성공하게 된다면 나는 거의 영생을 살 수 있어. 부작용은 있겠지. 더 이상 내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점과, 타워와 멀리 떨어지면 안 될 거라는 것도 쉽게 예측할 수 있고, 내 신체가 수정으로 변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뭐가 두려우랴. 내가 제일 두려운 것은 결국 1세계의 통합을 막지 못해 8재해가 일어나 영웅이 죽는 것이다. 그깟 부작용 따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한다. 영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것이든 해보이겠어. 세계를 구하는 것마저도! 정신 차려라, 그라하 티아. 너는 8재해 이후의 참상을 직접 겪었어. 나는 나뿐만 많은 이들의 희망을 위해 세계를 넘고 시간을 넘었어. 너는, 나는 반드시 달라져야만 해.

 

6.

 

이, 이런. 벌써 사람들이 근처로 모이고 있잖아. 하긴, 갑자기 낯선 건축 양식의 드높은 건물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해. 그런데 어떻게 하지? 일단 정체모를 타워 안에서 나올 사람이니 나 역시 모습을 숨기는 것이 나을까? 그리고 타워를 일부 개방해서 내부의 알라그의 기계들을 이용하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래, 그러는 것이 낫겠어.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이 세계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도 빠를 테지.

 

7.

 

원초세계와는 어휘가 다른 것이 많아 소통에 불편함을 다소 겪었지만, 그동안 얻은 정보를 정리해볼까. 빛의 범람 때 휩쓸린 생명체들은 죄식자라는 존재가 되었고, 개중 강한 개체들은 다른 이들을 죄식자로 만들 수 있으며, 그들 중에서도 우두머리 급인 대죄식자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군. 대죄식자가 뿜는 빛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이며, 그 수는 여섯으로 추정. 대죄식자를 쓰러트리면 그가 가지고 있던 빛이 다른 대죄식자를 만든다고. 그 빛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는 계속해서 환생하고 있는 빛의 무녀 민필리아가 유일하다… 정도인가.

그러니까 1세계의 통합은 대죄식자들이 내보내는 빛에 의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 이를 막기 위해서는 대죄식자들을 쓰러트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죄식자는 빛의 무녀가 아니라면 아무나 쓰러트릴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율모어가 대대로 찾아내 교육시켜왔지. 게다가 언제까지고 율모어가 죄식자 토벌에 적극적으로 움직여줄 거라는 보장이 없어. 민필리아가 있음에도 1세계가 통합되었다는 건 미래에 율모어의 정책이 바뀌었거나 역부족이었다는 것이겠지. 결국 그 사람을 불러야 하는가. 똑같은 빛의 가호를 받은 이…. 우리의, 나의 영웅. 너를 구하기 위해서 너를 이용해야 하는구나.

 

8.

 

…그렇다면 다시 너를 볼 수 있는 건가? 활자로 남겨지고 삽화로 그려진 네가 아니라, 정말로 살아있는 너를, 크리스탈 타워 입구에서 헤어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너를.

…그러면 더더욱 준비를 철저히 해야지. 아직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이 노르브란트에 대해서라면 속속히 알아내고 말 테다. 이래 뵈도 나는 현자야. 충분히 할 수 있어. 아, 아예 도시를 세울까. 이미 크리스탈 타워를 중심으로 난민들이 모여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제대로 된 도시로 재정비하는 것은 쉬울 거다. 이곳을 거점으로 쓰는 거야. 언제든 너를 맞이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어. 먼 미래에 이곳으로 넘어올 네가 지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겠지? 네가 불편함이 없도록 이곳의 화폐 단위도 원초세계와 최대한 비슷하게 조정해야겠군. 타워 내부의 알라그 기술들과 에너지를 쓴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지 준비해놓을 거야. 많은 것이 소실되고 희망마저도 희미한 노르브란트지만, 네가 머물게 될 이곳만큼은 편히 쉴 수 있고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거다. 아, 그렇지. 마법 연구도 시작해야겠군. 나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 편이지만, 알라그의 기술력과 타워에 저장된 에너지는 이를 어느 정도 보완해줄 수 있겠지. 맞아, 너와 함께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 다양한 전투방식도 익혀둘까. 너 역시 대죄식자를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면 직접 싸워봐야 할 테니.

 

9.

 

백여 년만인가. 드디어 1세계와 원초세계의 시간이 비슷해졌다. 드디어 때가 왔어. 이 기나긴 계획의 끝이 머지않았군. 영웅 소환술에는 문제가 없나? 술식에 단 하나의 오차라도 있으면 안 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점검을 해야 해. 술식이 완벽하더라도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타워를 닫는 게 좋겠어. 가능한 한 최상의 상태로 타워를 유지해야 한다.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은 나를 걱정하겠지만… 라이나는 그들을 잘 달래줄 터다. 라이나는 어른스러운 아이야. 내가 따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내게 더 묻지 않아. …언젠가 네게 전부 설명할 수 있을 날이 오면 좋으련만.

 

10.

 

찾았다! 이번에야말로…! 자, 빠져나가지 말아 다오…! 유구한 시간을 넘어 지금, 시공을 초월하라―. 나에게 그 문을 열어라―!

 

11.

 

어째서 좌표가 틀어진 거지? 지난 현자들이 소환됐을 때와는 다르게, 이번 소환술은 아주 완벽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수정 거울로만 보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행히 크리스타리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소환된 모양이니, 내가 먼저 맞이해야 해. 어서 내가 가지 않으면 위병단과 충돌이 생길 지도 몰라. 나의 손님이다. 백여 년을 기다려온 나의 손님, 나의 영웅. 성견의 방을 내려가는 계단이 이리도 많았나. 하지만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고 설레고, 또 좋아서. 수정공, 어디를 그렇게 급히 뛰어가세요? 미안하네, 나중에 답해주겠네. 수정공,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지금 내 표정이 어떻지. 지나치게 들떠있나?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런, 이미 라이나와 마주친 모양이군. 그리고 저 앞에 영웅이 있고. 아직도 표정이 이상할까? 혹여 영웅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모든 계획이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진정해라, 수정공. 차분하고 근엄하게. 방금 라이나가 죄식자를 처치한 모양이니, 그것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너를 보고, 그렇지.

 

“그리고 이 사람은 내 손님이니, 도시로 데려가고 싶은데… 괜찮겠나?”

 

12.

영웅이 1세계에 그럭저럭 적응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계획을 곱씹고 또 곱씹었지만, 역시 영웅을 직접 대하게 되니 어린 아이마냥 잔뜩 설레고 긴장해버려서. 뒤에서 도움을 주는 조력자로 계획을 세운 게 천만다행이군. 홀민스터의 대죄식자 토벌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욕심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이후의 모험에서 나는 방해만 될 테지. 수정 거울로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렇게 지켜보다 다음 행동에 필요할 법한 정보와 물건을 준비해두는 것이 나의 역할이지. 더불어 대죄식자들을 토벌하고 다니는 그들을 쫓고 방해하는 율모어를 가로막는 것까지.

…하지만 내가 그를 이용만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음, 무엇이라도 해주는 게 좋을까.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그에게 직접적인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렇지, 음식은 어떨까. 언제 돌아올 지도 모르고, 이동 중에 먹을 지도 모르니 잘 상하지 않는 것, 보관이 쉬운 것, 먹기 편한 것이 좋겠군. 어디 보자, 샌드위치… 정도면 적합할까. 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틈을 타 거주관 관리인에게 부탁하면 될 테니, 정체를 들킬 염려도 없겠지. 좋아. 부디 이번 모험도, 다음 모험도 내내 평안하기를. 대죄식자 토벌이 어렵지 않기를, 또 다치지 않기를. 응원하고 있다고, 잘 부탁한다고, 앞으로도 힘내달라고, 결국 너를 위한 것이라고. 그런 마음을 담아서.

 

13.

 

아므 아랭의 대죄식자 토벌 보고를 들었다. 아므 아랭의 빛은 사라졌지만 영웅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지. 진정해라, 수정공. 그에게 무리가 갈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염두에 두고 짠 계획이 아니었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돼. 나는 나의 소망만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인간의 역사, 인간의 집념이 불러낸 대행자다. 크리스탈 타워, 시간의 날개. 저 너머에서 건너온 자가 차원을 뛰어넘어 관측한 현상. 나아가서는 그것들을 실제로 보게 될 천재들이 일생을 바쳐 남긴 놀라운 발상…. 나는 그 모든 마음과 기적을 짊어지고 이 자리에 서 있다. 운명에 반역하기 위해서. 단순히 영웅이 걱정된다고, 그가 버티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나를 믿고 기꺼이 시간선에서 사라지기를 선택한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백여 년을 이어져온 의지를, 희망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대죄식자, 콜루시아의 대죄식자까지가 한계일 거다. 자칫 늦으면 그가 새로운 대죄식자가 되겠지만, 그 전에 내가 빛을 모두 가져갈 테니 그 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는 충분히 버텨줄 거다. 그러니 이 이상의 실수는 해선 안 돼. 이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머무르는 거주실 앞까지 가버렸잖아. 결국 그와 마주치고 말았고. 들키면 어쩔 뻔했지? 샌드위치로도 만족하지 못했나. 너는 수정공이야. 그와 동료들까지 이곳으로 불러내어 자신의 세계를 도와달라고 하는 수정공이지. 그들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지만 맨얼굴 하나 보여주지도 않고, 자신의 이야기도 하지 않고, 몸의 일부는 수정이기까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로 남아있다 악역을 가장하고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렇게 나는 사라져야만 한다. 그것이 세계를 구함은 물론,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결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죽고 나서 이 모든 일의 진상을 알게 된 네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었다고, 너를 살리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를 포기했다고. 부디 바뀐 미래를 걸어가 달라고. 네게 닿았으면 좋겠어.

 

14.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모두의 소망뿐만 아니라 내 소망도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를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알아봐줘서 고맙다고. 네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사실은 많이 놀랐다고, 그 순간만큼은 노아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고. 그리 전하고 싶은데 전해질 수 있으려나.

 

15.

 

…사실은 책으로만 읽고 수정거울로만 지켜본 것이 아닌, 너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어. 어차피 닿지 못하고 흩어질 바람에 불과하니 좀 더 솔직해져볼까. 꼭 노르브란트가 아니어도 돼, 어디든 좋아. 너와 함께 여행하고 싶었어. 같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괜찮으니, 크리스탈 타워를 조사하고 모험하던 그 때처럼, 다시….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