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히카] '영웅'의 역사
20.02.01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5,102자.
※2020.02.01 작업 완료
※모험가의 외관, 성별 및 종족 언급은 없습니다. 자유로이 상상해주세요.
※파이널판타지14 '칠흑의 반역자'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영웅'의 역사
1.
수정공은 성견의 방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몸도, 기력도 충분히 회복되었다. 이 정도 쉬었으면 오래 쉰 거다. 슬슬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이 잔뜩 걱정할 터다. 사실 크리스타리움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컨디션은 천천히 회복되었지만, 당장 쉬라며 모험가까지 성화인 바람에…. 난 이제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었지. 수정공은 푸스스 웃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자연스레 후드로 손이 올라가다가 멈췄다. 뭔가 망설이는 듯 후드 자락을 매만지길 수어 차례, 마침내 수정공은 후드 자락을 놓아주었다. 각오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키면서. 이제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지 않은가. 끼이익, 쿵. 무거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리스탈 타워를 가득 울렸다.
2.
“어, 수정공!”
우주의 화음 시장에서 한 주민이 그를 알아보았다. ‘수정공’ 소리에 시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아…, 음.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수정공의 표정에 당황이 가득 어렸다. 그러고선 이내 웃어보였다. 자신은 이제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손도 가볍게 흔들었다. 비로소 현실감이 든 사람들이 수정공의 곁에 몰려들었다.
“몸은 어떠신가요? 괜찮으신거죠?”
“아아, 수정공! 당신께서 잘못되신 게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순식간에 많아진 인파에 가려져, 안 그래도 작은 수정공이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개중엔 다행이라며 우는 사람도 있었고, 호탕하게 웃는 사람도 있었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끌벅적한 시장이 더 시끄러워졌다. 수정공은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일단 그들이 뭐라고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수정공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웃으며 그들을 진정시키는 것뿐이었다.
“자자, 난 괜찮아. 다들 진정하게. 그래, 괜찮다니까. 상처도 다 나았어. 그런데… 말이네.”
그러면서 수정공은 슬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아 시야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모험가는 어디에 있는지 아나?”
모험가? 어둠의 전사님? 사람들이 술렁였다. 확실한 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 도시에는 없는 건가. 수정공이 속으로 한숨을 쉴 때 쯤, 한 사람이 말했다.
“어둠의 전사님이요? 아까 박물진열관에 계시던데!”
3.
모험가는 아래쪽이 소란스러워졌음을 알아챘다. 작은 소리들이었지만, 그게 한 데 모이면 소음이 되는 법이다. 특히나 이런… 박물진열관처럼 정적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더더욱. 장소가 장소인지라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흥분을 완전히 억누르는 것은 실패한 모양이다. 놀라는 소리, 웃음 소리, 기뻐하는 소리…. 결국 모렌이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어, 수정공?”
팔락이며 책장을 넘기던 모험가가 모렌의 말에 난간에 바싹 붙었다. 꼭대기층에서 머리 두 개가 쪼로록 나타난 모양새에 수정공은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미안하네. 아무래도 내가 소란스럽게 한 모양이군.”
“이제 몸은 괜찮은 거야?”
“아주 멀쩡해.”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모험가가 여기 있다고 해서 말이야.”
“날 찾았어? 왜?”
“대화하고 싶어서.”
“-어…. 조금만 기다려.”
난간이 덜컹 흔들렸다. 모렌이 비명을 질렀다.
“와아악! 난간에서 발 내리세요!! 뛰어내리지도 마세요!!!”
“내가! 내가 올라가겠네. 진정하게!!”
둘이 지르는 소리가 박물진열관을 가득 울리고 나서야 모험가는 비로소 진정할 수 있었다. 타박타박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잠시 뒤에 쫑긋 솟아오른 붉은 귀가 보였고, 이내 수정공이 완전하게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모렌의 입가가 잘게 떨렸다.
“-역시, 수정공은 미스텔 족이셨군요! 드디어 책을 개정할 수 있겠어요!”
미래의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역사가 하나 더 늘어난 순간입니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진심으로 행복해보이는 모렌과 크게 당황한 듯 보이는 수정공의 표정이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역시…라니?”
얼마나 당황했으면 말까지 더듬는지. 모험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앞으로의 대화가 뻔히 보이는 까닭이다.
“아, 설마 모르셨어요? 귀는 둘째 치고 로브 밑으로 꼬리가 종종 보였거든요. 아마 크리스타리움의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께서 그걸 숨기고 싶어하시는 것 같길래 쉬쉬했을 뿐이지만요.”
모험가는 이제 숨까지 참아야 했다.
4.
“-라하!”
내내 멍한 상태던 수정공은 모험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기는. 분명 모렌과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에테라이트 광장이다. 어리둥절한 수정공의 모습에 모험가가 쿡쿡 웃었다.
“어, 언제 여기로.”
“뭐야. 정체를 들켰었다는 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어?”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헤에….”
“그건 그렇고, 박물진열관에는 왜 갔었던 건가?”
“아. 너는 나를 잘 아는데, 나는 1세계로 넘어온 이후의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서….
“오호…?”
수정공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하나의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모험가의 입을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모렌한테 관련된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지. 그랬더니 이것만큼 간단명료하게 설명된 책이 없다며 ‘수정공 이야기’를 주던 걸.”
“그, 그건…!”
모험가가 품속에서 ‘수정공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인 건지,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느낌의 삽화가 표지로 실려 있었다. 수정공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어디 보자….”
잠깐, 하고 외치는 수정공의 절박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모험가는 책장을 넘겼다. 종이가 팔락이며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모험가는 동화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 대역죄인 빛의 전사들(모험가는 이 대목에서 얼굴을 찡그렸다.)이 그림자 왕을 쓰러트리면서 빛의 범람이 일어났습니다. 빛이 흘러넘치는 속도는 매우 빨랐습니다. 빛이 지나간 곳은 아무 것도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렸고, 사람과 동물들이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고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바로 그 때, 빛의 무녀 민필리아가 나타나 빛의 범람을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괴물들은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레이크랜드에 거대한 크리스탈 타워가 나타났습니다. 그 안에서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나와 말했습니다. 이 탑 안에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들이 많이 있을 걸세. 괴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패를 꺼낼 수도 있지. 그러니 나와 함께 이곳에 도시를 세우자. 그 말에 사람들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곧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크리스타리움입니다. 로브를 쓴 남자는 언젠가부터 수정공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정공은 지금까지 늙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도시를 지키고 있습니다. ….”
어느새 동화를 다 읽은 모험가가 책을 덮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후드를 잔뜩 뒤집어쓴 수정공이, 낭독이 끝난 것 같자 슬그머니 후드를 벗었다.
“…다 읽었는가?”
“이것만 읽어서는 ‘수정공’의 삶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는걸.”
“동화니까. 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생략된 이야기가 많거든.”
“그렇다면 다 담겨있는 책들도 있겠네?”
“그럴 수도. 하지만 너무 믿지는 마. 미화되고 왜곡된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라…? …내 얼굴에 뭐가 있나?”
“아니,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런 책들이 나오는 걸 막지 않았구나… 싶어서.”
그런 책? 내 이야기가 담긴 것 말인가?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공이 눈을 꿈뻑거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럴 리가 있나. 확실히… 민망하기는 해. 하지만 역사를 역사로 남게 해주는 건 바로 기록이야. 기록이 없는 역사는 그저 흘러간 시간일 뿐이지. 그리고 잊은 모양인데, 나는 역사에 내 이름을 남기는 게 꿈이었거든.”
네가 있는 원초세계의 역사가 아니라는 건 좀 아쉽긴 하지만. 입 밖으로 뱉지 않을 생각이다. 수정공은 책장을 몇 번 더 팔락이는 모험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같이 서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거야.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던 수정공은, 모험가가 끄응 소리를 내자 화들짝 놀라 표정을 풀었다. 다행스럽게도 모험가는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걸로는 모자라겠는데….”
“그… 내 삶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하는 건가?”
“당연하지! 나는 왜 네가 이야기를 모르고 있어야 해? 그…러니까, 네가 나를 영웅이라고 하듯이, 나한테는 네가 영웅인데, 왜 나는 영웅담을 모르고 있냐고.”
“…응?”
수정공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모험가가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야, 왜 그래? 아, 설마 영웅이라고 한 것 때문에 그래? 그렇지만 나한테는 네가 나를 구해준 영웅인 게 맞잖아. 어, 수정공, 수정공? …그라하? 얼굴이 엄청 빨개졌는데, 괜찮아?
“영, 웅이라니, 그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맞지요.”
“아니….”
수정공은 말문이 막혔다.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진지해진 모험가의 표정 탓이다. 그 시절에도 이렇게 확고한 모험가는 어떤 수를 써도 설득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영웅이라는 것은 여전히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누가 너를 이기겠나. 수정공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하여 결국 모험가가 승리하였다.
“그래, 좋아.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위인전은 미화되거나 혹은 아예 생략된 곳이 굉장히 많아. 그러니 내가 옆에서 정정하고 추가해주도록 하지. 그렇다고 해도, 자그마치 백 년의 시간이라 나 역시도 풍화된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줘.”
모험가가 활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수정공이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말했잖아. 왜곡되어있을 거라고. 내가 읽은 너의 이야기는 자그마치 2백 여 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야. 얼마나 변형되어있을지 짐작이 돼?”
“어…, 음.”
모험가가 고개를 저었다. 수정공의 눈이 일순 빛났다. 묘하게 들떠있는 그 표정이 꼭 재미있는 것을 찾은 어린 아이 같다고, 모험가는 생각했다. 수정공이 모험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수정공 이야기’가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네 이야기를 들려줘. 나도 진짜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 그렇지만, 네가 실망하면 어떡해. 잔뜩 미화된 나는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일 텐데.”
수정공이 고개를 저었다. 결국은 거짓 역사일 뿐이지. 나는 진짜 역사를 알고 싶어. 너의 진짜 역사 말이야. 나의 영웅의 진짜 역사. 모험가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너한테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지금도 충분히 멋진데 뭐 어떤가?”
“…낯간지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까…. 그래…. 너니까. 너한테는 알려줘야지.”
이번엔 수정공이 승리자였다. 수정공이 떨어진 책을 주워들어 먼지를 탁탁 털었다. 크게 오염된 것 같지는 않았다. ‘수정공 이야기’를 모험가에게 넘겨주며 웃었다.
“그럼, 가서 필요한 책을 빌려오도록 해. 나는 심려의 방에서 영웅전기를 꺼내올 테니 말이야. 새로이 역사가 써지는 순간이 기대되는군.”
5.
박물진열관은 새삼, 언제 와도 조용하다. 모험가는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 너머로 큼큼, 인기척을 냈다. 저 위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는 모렌이 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보고 밝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캉캉, 책장용 사다리에 발이 얹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렌이 곧 모험가의 앞에 섰다. 모험가가 모렌에게 ‘수정공 이야기’를 돌려주며 물었다.
“모렌. 여기는 책 대출 기간이 얼마나 해?”
“모험가님이라면 무제한도 가능한 걸요.”
“아니, 그 정도까지는….”
모험가가 손사래를 쳤다. 모험가님이 저희를 도와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예요. 모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래 읽어야 할 책이라도 있나 보죠?”
“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오래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
“들어요?”
“수정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이 역사가 써지는 순간’이랬어.”
“알 듯 말 듯하네요. 뭐, 그 분은 언제나 비밀이 많으신 분이셨으니까요. 그나저나 찾으시는 책이?”
“아. 수정공과 관련된 책. 그 간의 있던 일이 최대한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거. 위인전이라도 좋으니까.”
“그거라면… 확실히 한 권으로는 안 되겠어요. 오래 읽을 만하네요.”
모렌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여러 문장들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간간히 수정공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전부 책 이름인 것 같았다. 대단한 삶을 살았구나, 수정공. 모험가는 그와 관련된 책이 도대체 몇 권인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가 제대로 기억한 게 맞으면 가장 최근에 개정된 건… 서너 권정도? 그 정도만 읽으셔도 될 것 같네요.”
“개정?”
“모르셨어요? 수정공은 틈틈이 검수를 하시거든요. 역사는 바르게 쓰여야 한다고 하시면서요.”
“나한테는 자기 이야기가 엄청 왜곡되어 있을 거라고 하던데….”
“본인 입장에서야 그런 거 아닐까요? 아니면 부끄러웠다던가.”
“부끄러워?”
“모험가님께 이야기하기는 민망하다든가요. 그렇지만 수정공도 참 대단하신 분인데, 겸손이 너무 과하신 것 같아요.”
잠시만요, 하고 자리를 비웠던 모렌이 꽤나 두꺼워 보이는 책을 서너 권 꺼내 품에 안겨주었다. 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무게에 모험가는 하마터면 그대로 놓칠 뻔했다. 팔 떨어지겠다. 이래놓고 자기가 무슨 영웅이 아니래. 성견의 방으로 돌아가면 이 이야기도 해줘야지.
6.
그리고 말할 거야. ‘내’ 영웅의 역사도 새로이 쓰일 거라고. 그러니 백 년의 역사를 꼼꼼히 내게 새겨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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