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수정히카] 알피노만 모르는 이야기

20.02.01 작업 완료

※세라피(@freetalk_rapi)님께 드린 글입니다.

※공백미포함 7,217자.

※2020.02.01 작업 완료

※모험가의 외관, 성별 및 종족 언급은 없습니다. 자유로이 상상해주세요.

※파이널판타지14 '칠흑의 반역자'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알피노만 모르는 이야기

1.

“수정공과 모험가 말이네.”

세검을 정비하던 알리제, 롱카 유적의 문자를 해독하던 야슈톨라, 무의 대지에 대해 조사하던 산크레드와 린, 위리앙제. 제각기 할 일을 하던 ‘새벽’이 모두 멈췄다. 그 순간의 정적에는 묘한 긴장감마저 도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우라더니, 요즘 들어 사이가 더 돈독해보이지 않나? 원초세계에서 친구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벗을 위한 것이었다니!”

그럼 그렇지. 감명 받은 표정으로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 알피노를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새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선 다시 제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알리제가 다가와 알피노의 등을 팡팡 쳤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역시 눈치 없는 알피노라니까~”

“…무슨 뜻이지?”

“몰라도 돼~”

2.

모험가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달다. 달콤체 과수원에서 막 따온 거라더니, 시원하고 아삭한 식감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장터를 가로지르는 그를 한 상인이 불러 세웠다.

“어둠의 전사님! 웬일로 수정공과 함께 안 계시네요?”

“아, 최근에 협력 문제로 율모어에 다녀오더니 피곤해하는 것 같길래요.”

“그렇구나. 맞아, 이번에 아주 품질 좋은 각성제가 들어왔는데 혹시 필요하세요?”

“괜찮아요. 지금 이것저것 받은 게 많아서요.”

모험가가 턱짓으로 제 품을 가리켰다. 상인이 이해했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모험가에게 뭐라도 주지 못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다음번엔 꼭 일찍 만나서 드려야지.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모험가는 곧 장터를 벗어나 펜던트 거주관으로 향했다. 모험가가 한 걸음 디딜 때 품에서 달그락달그락, 덜걱덜걱 소리가 났다. 양 손 가득 잔뜩이었다. 어디 보자, 각종 과일이랑 채소, 도시락들, 피로회복제, 각종 영양제….

“잔뜩 받아버렸네….”

모험가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자신은 그저 산책도 할 겸 나왔을 뿐인데, 갑자기 사방에서 어둠의 전사님! 모험가님! 하며 이것저것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괜찮다며 거절해도 제발 받아달라며 한사코 듣지를 않던 사람들. 당신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다고 했다. 대신 싸워줄 수도, 당신의 장비를 만들어 줄 수(지금 모험가의 장비보다 더 좋은 건 찾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말이다. 이거라도 받지 않으면 자기들의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면서. 정 부담스러우면 뇌물로 생각하라나?

“뇌물이요?”

“수정공께서 당신과 함께 돌아오신 이후부터 표정이 많이 편안해보이셔요. 무언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요. 그리고 수정공의…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하고 좋아하고, 활짝 웃고… 그런 표정은 저희도 본 적이 없어요. 아마 어둠의 전사님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거겠죠.”

“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수정공을 잘 부탁드려요.”

…라고 했던가. 모험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옅은 한숨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내가 그라하에게 특별히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다고. 모험가는 사과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거주관 관리인의 인사를 받아주며 모험가는 생각했다. 내가 수정공에게 특별하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모험가의 입이 쉴 새 없이 오물거렸다. 사과는 이제 반밖에 남지 않았다.

‘당연하잖아. 나를 살리기 위해서 깨어난 거고, 그러니까 당연히 목적은 내가 될 수밖에. 그 전에도 나와 함께 여행했었고, 친했었고. 친구, 특별하지, 당연하지! 거기다가 나는 ’영웅‘이고, 그라하는 그 시절에도 영웅을 무척이나 동경하던 친구였고. 동경하던 대상이 눈앞에 있으면 당연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수정공에게 특별할 만한 존재가 맞다. 당연한 것 투성이다. 하지만 그건 산크레드에게 민필리아가 특별하고, 린이 특별한 것과 똑같은 거 아냐? 내가 그라하의 입장이었어도 이 세계를 위해 싸워준 영웅이 있으면 그에게 고마워서라도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게 될 걸. 모험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수정공에게 물어봐도 그리 답해줄 테지.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는데, 어쩐지 기대하게 되어버려서….

“-아. 다 먹었다.”

모험가가 어느새 씨앗부분만 앙상하게 남은 사과 꼭지를 잡고 흔들었다. 새삼 달라진 풍경에 모험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펜던트 거주관, 자신의 방이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다른 생각하느라고 주위를 전혀 둘러보지 않은 탓이다. 모험가는 대충 탁자 위에 받은 물건들과 다 먹은 사과를 놓고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모험가는 이불을 끌어안고 뒹구는 듯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천장을 보며 팔을 벌리고 누웠다. 깊은 한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수정공에게 특별하다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렇지만 아마도 너랑은 다른 의미로.

3.

쿵쿵, 둔탁한 소리가 크리스탈 타워를 가득 울렸다. 수정 거울로 크리스타리움을 살펴보던 수정공은 몸을 돌렸다. 아마 라이나일 것이다.

“수정공, 라이나입니다. 저번에 지시하신 레이크랜드의 죄식자 조사에 관한 보고입니다.”

“들어오게.”

허락을 받은 라이나가 문을 열고 성견의 방으로 들어왔다. 위병단식 경례를 한 그가 보고를 하려는 찰나,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주변을 살펴보던 것을 수정공이 눈치 챘다.

“…왜 그러지?”

“모험가님이 안 보이셔서요.”

“하하. 그는 지금 중용의 공예관 장인들과 함께 있네. 조달과의 캐시 레이와 프리스릭이 광물과 어류 조달을 의뢰하더군. 성스러운 군생지 목장에서도 새 아마로 먹이 조합에 대해서 그의 조언이 필요한 모양이야. 각종 공방 사람들도 그에게 도움을 청했고.”

수정공이 뒤쪽의 수정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예관에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으며 바삐 움직이는 모험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런 쪽에도 조예가 깊거든. 내 개인적 만족을 위해서 크리스타리움 주민들에게서 ‘영웅’을 독차지할 수는 없지.”

수정공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시선은 모험가의 모습이 보이는 수정 거울에 고정된 채였다. 더 이상 후드를 쓰지 않아, 수정공의 표정을 보기가 쉬워졌다. 독차지라. 라이나는 생각했다. 수정 거울은 모험가가 있는 장소를 계속 비추고 있었다. 본인 딴에는 크리스타리움을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모험가가 없어도 도시를 산책하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성견의 방으로 돌아왔다는 건….

“-그래서, 라이나. 보고 내용은?”

“아. 말씀하신 대로 레이크랜드의 죄식자 수는 확연히 감소해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현상이….”

라이나는 거울에 비치는 모험가의 모습을 힐긋 보았다가, 다시 아무 일도 없는 척 보고에 집중했다. 보고의 내용은 이랬다. 레이크랜드의 죄식자 수는 확실히 감소된 상태이나 이들이 소멸된 것인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이와 관련하여 무의 대지를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군. 마침 무의 대지는 지금 린 일행이 조사 중이다. 그들의 보고가 올라오면 위병단에 전달해두도록 하지.”

“또 다른 대죄식자가 존재할 가능성은….”

“그건 아닐 거다. 무의 대지에도 대죄식자가 뿜는 빛은 없으니까. 하지만 린의 보고가 있기 전까지는 그 곳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군….”

수정공은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어둠의 전사님께도 상황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라이나의 질문에 수정공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되도록이면 그는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그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임에도 노르브란트를 위해 열심히 해주었어. 그의 도움으로 빛은 사라지고 세계는 구원받았다. 반드시 그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쉬게 해주고 싶어. 그는 영웅이긴 하지만, 병기는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라이나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지하던 수정공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그가 나서야 될 만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수정공의 시선은 이번에도 수정 거울 속 모험가를 좇았다. 참으로 상냥한 눈빛이다.

“그 분의 편의를 무척이나 봐주시는군요.”

“음?”

수정공이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영웅’의 발자취를 쫓지. 그 강한 면모와 대단한 위업에 끌려서.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영웅’인 셈이지. 의외인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랑에 빠지신 분 같습니다.”

동경도 사랑의 일종이 아니겠나. 수정공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선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성견의 방을 가득 울렸다.

“이런! 시답잖은 이유로 위병단장님을 너무 오래 붙잡아뒀군. 무의 대지 조사 보고는 받는 대로 위병단에 보낼 테니, 그동안은 레이크랜드의 대대적 조사를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다시 위병단식 경례를 한 라이나가 성견의 방을 나섰다. 동경이라. 라이나는 생각했다. 수정공의 표정도 떠올린다. 아무래도 제 동경과 수정공의 동경은 다른 모양입니다. 제 생각을 수정공이 알았다면 펄쩍 뛰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라이나는 태연자약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생각 정도는 비밀로 해도 되겠지요? 아직도 숨기는 게 많으신 ‘할아버지.’

4.

노르브란트의 대죄식자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불길하기까지 했던 그 끝없는 빛도 모두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죄식자에게 생명을 위협받고, 율모어에게 도시의 안전을 위협받던 시대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달라진 하늘에 완벽히 적응할 날만 남은,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쾌청한 하늘 아래 크리스타리움은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쳤고,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 밤의 기쁨과 평온을 노래했다.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소소하지만 확실한 변화가 하나 있었다. 수정공이 예전보다 자주 크리스탈 타워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수정공은 산책하듯 도시 안을 살펴보듯 크리스타리움을 거닐었고, 그 옆에는 대부분 모험가가 있었다. 어쩌다 혼자 있으면 상대방은 어디 갔냐고 물어올 정도였으니, 둘이 함께 있는 것은 그만큼 일상적인 일이었다.

“아므 아랭의 대죄식자 토벌 보고를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 날도 그랬다. 그 날도 수정공은 모험가와 크리스타리움을 함께 걸었다. 간간히 마주치는 주민들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네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 되어버리니 도저히 진정이 안 되더군. 그래서…”

“아하하. 그래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면서 내 방에 찾아온 거였구나?”

“뭣…”

“맞잖아. 엄청 불안해했으면서.”

난 그렇게 평정심을 잃은 수정공은 처음 봤는걸? 모험가가 놀리듯 웃었다. 그 장난스러운 미소에 괜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모험가의 말에는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모험가의 명백한 승리였다. 수정공이 패배자의 한숨을 쉬었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오갔다.

“그런데 그라하. 이제는 후드 안 쓰네. 말투도 좀 묘하게 달라진 것 같고.”

내가 아는 그라하다워졌다고 해야 하나. 모험가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 어떠한 의도도 담지 않은 채 그냥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수정공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해서는 어쩐지 목까지 빨개진 얼굴로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아. 그, 그게. 그대가 부, 불편하다면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다. 이 나이에도 부릴 주책이 남아있던 모양이야. 조심하도록 하지.”

“아니, 싫은 게 아니고, 그, 안 벗은 쪽이 내가 알던 친구 같아서 더 친근하고 좋다고 해야 하나, 지금 이 쪽이 눈도 마주칠 수 있고, 표정도 볼 수 있고, 그 전까지는 왜 안 벗었는지 그냥 궁금해서…? 그렇다고 후드 쓴 쪽의 네가 싫다는 건 아닌데…!”

모험가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제대로 된 문장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기류가 오가더니, 곧 후드 아래로 붉은 눈이 조금씩 드러났다. 후드가 천천히 내려간다. 드러난 얼굴은 얼마나 빨개져있었는지, 머리카락과 피부색이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푸른 수정이 더욱 도드라져보였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나는 악역 행세를 하고 사라질 계획이었으니 내게 정을 붙였다가는 분명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도저히 정이 안 가는,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어.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주지도 않고….”

“만나자마자 알아볼 거라는 건 계산 안 했고?”

“그건… 넘어가자.”

수정공이 슬 시선을 돌리며 말을 피했다. 모험가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지금은 어때?”

“응?”

“내가 너한테 정을 붙이는 것 말이야. 지금도 싫어?”

“아니, 좋아. 기뻐.”

그 때도 싫은 건 아니었어. 이후에 네가 상처받을 게 싫었던 거지. 수정공이 덧붙였다. 모험가가 푸스스 웃었다.

“다행이야, 그라하가 날 싫어하지 않아서. 난 그라하가 좋거든.”

수정공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고 있는 걸 잡아낸 모험가가 급하게 덧붙였다. 물론 친구로서! 친구! 수정공이 진정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거 때문이 아니고….

“내가 왜 너를 싫어하겠어. 오히려 난,”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끝을 맺지 못하고 끊긴 문장에 모험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정공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얼굴이 파리해졌다. 크게 충격받은 표정 같기도 했다.

“…그라하?”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모험가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헉. 그의 귀와 꼬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모험가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오히려 난, 너를.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맞춰지던 시선이 계속 비틀리고 있었다. 수정공은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로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라하? 모험가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아, 아니. 그… 미안하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하고 겨우겨우 말하더니, 갑자기 후드를 쓰고 냅다 크리스탈 타워 쪽으로 뛰는 것이 아닌가.

“어, 뭐야, 무슨 일이야. 그라하? 그라하??? 그라하!!!!!!!!”

멀어지는 수정공을 크게 부르던 모험가는 상황파악이 덜 됐는지 그를 시선으로 좇으며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수정공을 뒤쫓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수정공을 쫓게 된 모험가가 생각했다. 갑자기 몸이 안 좋다니? 크리스탈 타워와 가까이 있을수록 몸 상태가 좋다는 걸 내가 아는데?? 몸이 안 좋아졌다고 거짓말을 할 거면 잘 달리지라도 말던가, 엄청 빠르잖아! 일단 멈춰보라고…!!!!

5.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크리스타리움 한복판에서 술래잡기를 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쫓기는 사람은 도시의 지도자였고, 쫓는 사람은 어둠의 전사였다. 이 날 이후 주민들은 둘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음을 알아챘고, 자연스레 크리스타리움의 인기 대화 주제는 그 둘이 되었다. 원래도 인기 주제이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수정공과 모험가의 업적에 대해 얘기하던 그들이 이제는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그 전부터도 알음알음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본격적으로 이러쿵저러쿵 추론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수정공은 아주 오랫동안 어둠의 전사님을 기다렸다는 것, 처음 크리스타리움에 도착한 전사님은 노르브란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수정공의 나이가 아주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사님은 그와 친한 친구로 보인다는 것. 지나치게 한정적인 정보로 인하여 아주 말도 안 되는 가설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모종의 이유로 그와 친구일 시절에 봉인된 전사님을 수정공이 오랜 시간을 걸쳐 힘쓴 끝에 깨어났다든지, 전사님은 수정공이 크리스탈 타워 내부에 있는 각종 신기한 물건으로 탄생시킨 신적인 존재라느니 등등….

당사자들이 들으면 경악해 마지않을 가설들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그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니, 당사자들의 확신은 받지 못했으니 정정하자. 그들 사이에서 기정사실화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둘의 분위기가 왜 달라졌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놀랄 만큼 눈치가 없는 자들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야 전부터 서로를 보는 눈빛이나, 대화할 때의 표정이나,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에서 잔뜩 묻어나왔으니까. 술래잡기 당시의 대화를 들은 이가 전달해준 내용은 지레짐작만 하고 있던 그들을 확신에 차게 만들었다. 이제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추측이 언제쯤 사실이 될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정공과 모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것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수정공이 갑자기 크리스탈 타워로 도망쳐 만남을 거부한 덕에 그 날은 그를 더 만날 수 없었지만, 바로 다음날부터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행동했다. 변함없이 함께 산책하며 거닐었다. 하지만 그 술래잡기는 주민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인사를 건네 온 주민이 그 얘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수정공은 빠져나가려 했으며 모험가는 그런 그를 붙잡느라 애를 썼다. 그런 와중에 모험가는 그가 대화 도중에 왜 갑자기 도망갔는지 그 이유를 듣지 못했다. 물어볼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관련 얘기만 나오면 수정공은 입을 굳게 다물기 일쑤였다. 결국 아무 것도 묻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그를 부담스럽게 했구나 싶어 눈치를 보고 몸을 사릴 뿐이었다. 나름대로 내쳐질 각오도 하면서.

한편 수정공은 그 나름대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중이었다. 내가 왜 너를 싫어하겠어. 그야….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이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수정공은 크리스탈 타워 벽에 머리를 세게 박고 싶은 충동을 아주 빈번하게 억눌러야 했다. 동경도 사랑의 일종이긴 하지.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 되어있었다. 아니야, 역시 동경이 맞아. …아닌 건가? 사실, 수정공은 아직도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었다.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지가 너무 오래된 탓이다. 뒤를 받쳐주는 조력자에 만족하다가도, 옆자리가 욕심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어쨌든 수정공은 이전처럼 모험가를 스스럼없이 대하기는 어려워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백 년이나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모험가를 볼 낯이 없었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은 속이 터졌다. 다 아는 걸 본인들만 몰라서 이렇게 빙 돌아가는지. 하지만 모두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었고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숨기고자 하는 감정마저도 존중해주었다. 아직 철없는 아이가 기어코 그것을 들춰내려고 하면 모두가 나서서 막아줄 정도로. 어쨌든 그들의 추측이 진짜 사실이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6.

“별들의 만남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아주 변덕스러워서…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도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뻔히 보이는 미래에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우리의 운명… 아니겠습니까.”

“당신, 또 알 수 없는 말만 하는군요.”

나아진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핀잔주듯 푸념을 늘어놓은 야슈톨라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위리앙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아, 한 사람만 빼고. 작은 웃음소리가 오가는 와중에,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소리쳤다. 자네들 지금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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