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트셀크] 바다에 잠긴 것들을 위하여
20.03.27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3,397자.
※2020.03.27 작업 완료
※파이널판타지14 '칠흑의 반역자'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5.0 당시에 작성된 글이라 설정 오류가 있습니다.
바다에 잠긴 것들을 위하여
1.
뺨이 다 아파올 정도로 휘몰아치는 바람, 집채만큼 몰려왔다가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 꼭 자신의 표정인 것처럼 잔뜩 흐린 하늘. 에메트셀크는 그 하늘에 서서 파도 밑, 수면 아래를 내려다본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칠흑, 그 심연. 그는 문득 귀를 가득 메운 바람과 파도 소리가 진혼곡 같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를 위한? 에메트셀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나의 동포들이여. 다시금 들려오는 진혼곡에 귀를 기울이며 부서지는 파도를 찰박여본다. 손에 감겨오는 파도의 거품이 저 밑으로 가라앉은 이들의 동포들의 손길 같았다. 에메트셀크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아아, 이곳이 그대들의 무덤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가라앉으리, 해저 밑바닥까지 침잠하리.
2.
에메트셀크는 아주 빈번하게 그 바다에 가라앉고는 했다. 그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내려앉으면, 기억할 필요 없는 불순물들을 차가운 바닷물이, 동포들의 눈물이 깨끗하게 씻겨주는 것이다. 무겁게 짓누르는 사명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려 그들의 숨을 들이마시면 그것은 몸 구석구석을 돌아, 곧 그를 기억으로 가득 채웠다. 잊어서는 안 될,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기억. 에메트셀크는 그 행위를 ‘잠을 잔다.’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채워지는 기억들은 꿈이 될 테지. 그는 바다 아래서 잠을 청하는 자였고, 때문에 그에게서는 언제나 눅진한 바다의 냄새가 났다. 어찌 되었든 에메트셀크는 오늘도 꿈을 꾸기로 했다. 자아, 오늘은 어떤 꿈을 꾸며 기억을 다시 새겨볼까.
3.
어느 날 갑자기 별의 이치가 무너지더니, 창세에 쓰인 술법이 폭주하여 야수가 태어났다. 그것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사람들을 해치고 건물을 무너트렸다. 재앙의 별똥별을 퍼붓던 야수, 괴성 한 번에 수많은 야수들을 부르던 야수, 그리고 메가테리온까지. 어찌저찌 야수들은 모두 쓰러트릴 수 있었으나…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듯, 야수들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들이 휩쓸고 간 흔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이 별의 마지막을 목도했으며…. 무너져버린 대지, 흘러넘치는 핏빛 강, 불타는 문명, 길거리 가득한 사람들의 울음소리, 생전 처음 겪어보는 죽음의 공포…. 찬란했던 과거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참담한 밤. 불에 그을린 먼지의 냄새, 참혹한 피의 냄새, 메말라버린 토양의 냄새.
재앙은 일단락되었으나 사람들은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별을 구해야만 했으므로. 하지만 그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엄청난 희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무너진 별의 섭리를 다시 세우려면 그에 걸맞은 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강하고 거대한 이데아의 창조가 될 것이다…. 지지부진하던 조디아크 소환계획에 박차가 가해진다. 마침내 소환이 확정된다. 종말에서 살아남은 동포들의 절반이 다시 이를 위해 희생한다. 그리고 에메트셀크는 조디아크의 주요 소환자로서 그런 그들을 지켜본다. 나도, 나 역시도 희생이 두렵지 않건만. 그 역시도 기꺼이 생명을 내놓을 수 있었으나 그는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는 것 뿐. 에메트셀크라는 좌는 숭고한 희생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에메트셀크가 책임과 함께 짊어진 것은 죄악감이었다. 나는 구차하게 살아남은 죄인이외다.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동포들이여, 그렇다면 나는 기필코 그대들께 목숨을 바쳐 사죄하리라.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지켜낸 이 세계를 이전보다 더욱 화려하게 번성시킴으로써. 이 목숨은 내 것이되, 더 이상 내 것이 아닐 지어다. 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는 울음소리와 함께 결의는 굳어진다.
4.
강렬한 빛이 한 번 번쩍하더니….
5.
어떻게 소생시킨 별인데, 이제야 겨우 다시 생명을 품기 시작한 세계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는가. 하이델린의 소환에 들어간 에테르가 적다고 해서 얕봐서는 안 되었는데. 우리의 실책이다. 우리의 염원을 이뤄줄 신마저 조각조각 나 산산이 흩어지고. 배은망덕한 자들. 누구 덕분에 재앙을 넘기고 여기까지 왔는지 진정 모른단 말인가!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조각난 세계와 생명들. 각자 저마다의 빛으로 반짝이던 혼들은 갈래갈래 찢어져, 그 빛은 미약하기 그지없고. 힘도, 지능도, 수명도 전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으로. 혐오스럽고 징그럽다. 찰나를 살다 죽는 보잘 것 없는 삶, 그것마저 살아있다며 각자의 역사와 세계를 갖는 것이 얼마나 우습던지! 완전했던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저급하고 추악한 행동이 끊이질 않고, 수많은 선례에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해 그 되먹지 못한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아, 이것들은 도저히 살아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꼴을 하며 살아가느니, 하루 빨리 완전해지는 것이 낫다. 현재의 인류는 별을 지키며 살아가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그럼에도 가능성을 찾고자 몇 번이나 녹아들어 재어보고 판정했다. 그만큼 짧은 생, 죽음을 반복하며 흐려지는 기억을 모두 지켜봤다. 우리는 그렇게 잊히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었던 그 시대, 우리가 사랑했던 세계, 우리가 아끼어 마지않았던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마침내는 전부. 애초부터 그런 시대는 없었노라고. 우리란 존재는 없었던 거라고, 그렇게. …결국 우리는 이렇게 저물어 가는가. 우리에게는 멸망만이, 소멸만이 남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기억하겠다. 갈 곳 없는 우리의 집념과 기억, 슬픔과 울분, 분노와 공포, 그 모두를 내가 끌어안겠다. 설령 모두가 잊었다고 해도 내가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이어가겠노라. 우리의 세계와 동포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꺼이 내가 그리하겠다. 우리의 신께서도 그리 말씀하신다. 온전한 나를 되찾기만 한다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노라고. 통합된 세계에선 그들도 돌아올 수 있다고. 아아, 계율왕 조디아크시여. 기꺼이 따르겠나이다!
6.
13세계는 망가져 쓰레기가 되었다. 게다가 이 불완전한 것들은 굉장히 편협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 눈앞의 세계에만 급급하고 더 큰 세계를 보지 못한다.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개중에서 조금 특출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라 불리는 것들은 언제나 우리들의 계획을 방해했으며, 그로 인해 동료 몇몇은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라하브레아마저도.
…그 기나긴 세월동안 통합된 세계는 이제야 7개. 앞으로 6개의 세계를 더 통합시켜야 하며, 망가진 13세계도 다시 살려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남은 원형은 이제 둘.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 조디아크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는가. 우리의 동포를 되찾아야만 한다. 마지막에 이 세계에서, 이 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여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바다는 시간이 갈수록 짙고 깊어지기만 했다. 만이천년의 세월 동안 점점 더 가라앉기만 하고. 바다는 그렇게 그를 집어삼켰다. 짊어진 바다는 어느새 에메트셀크를 채우는 것이 되었고, 그는 더 이상 바다에 잠기지 않으면 에메트셀크일 수 없게 되었다.
7.
그러니까 ‘너’는 기억해야지.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절을, 함께 걸었던 그 거리를, 함께 토론했던 동포들을. ‘너’는 떠올려야지. 그 끔찍한 빛을 머금은 하이델린의 사도로서. 네가 소환해낸 것이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우리의 사명을 방해하고 숙원을 막아서고 내 앞에 설 거라면 우리에게 답해줘야지. …아아, 그럼에도 너 역시 결국은 불완전한 것! 어느 쪽도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를 납득시켜! 네 세계가, ‘너’가 원한 세계가 우리의 세계보다 더 훌륭한지, 이들에게 미래를 맡길 수 있는지, 우리는 진정 저물어야만 하는지! 이들의 가치를 몸소 증명해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오너라, 바다 아래로 잠겨 껍데기만 남은 내 첫 이름이여! 세계의 존망을 건 싸움, 기꺼이 내 전부를 보여주마. 어느 쪽이 반역자가 될 지 정해보자꾸나! 자아, 마지막 판정을 시작하겠다….
8.
강렬한 빛이 한 번 번쩍하고, 판정은 내려졌다. 너희의 승리다.
9.
혼이 찢겨나갔음을 여실히 느낀다. 이제 남은 원형은 엘리디부스 뿐인가. 분명 우리의 목표는 이렇게 한 걸음 더 멀어진 것이겠지.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개운하다. 왜일까. 다시금 찬란하게 빛나는 ‘너’의 혼의 색 덕분일까, 그만큼 상쇄되어 사라진 어둠 때문일까. 마침내 납득할 수 있었다는 후련함? 글쎄…. 확실한 것은 곧 나는 소멸하여 명계로 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 그 전에 해야 하는 것이 있지.
이봐, 영웅님. 우리의 과거를 뒤로 하고 미래로 나아가기로 했다면… 그렇다면 기억해라. 우리는 분명 살아있었다는 걸. 바다 아래에 기억을 담아놓았어. 적어도 그 불완전한 생이 끝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거다. 네게는 기꺼이 모든 것을 알려주겠지, 그리 만들었으니. 그러니 잊지 마. 그리고 뒤돌아보지 마라. 미래는 뒤에 있지 않아.
10.
영웅의 답변을 본 에메트셀크가 작은 숨을 뱉으며 웃었다. 그러고선 별의 바다로 돌아갔다. 미소에 묻어나온 마지막 숨결에서는 햇빛 냄새가 난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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