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다프] 이별을 위한 레퀴엠
19.04.29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7,192자.
※2019.04.29 작업 완료
이별을 위한 레퀴엠
1.
다프네는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숨을 뱉었다. 내쉬어진 숨이 차가운 밤공기와 만나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 커르다스의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냉랭한 한기에 다프네는 몸을 떨었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역시 이슈가르드의 밤은 춥구나…’
휘황찬란하게 뜬 밝은 달은 밤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몰아내었고 별들은 반짝이며 제 빛을 뽐내고 있었지만 역시 커르다스는 얼어붙은 땅이다. 다프네는 추위에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너무 얇게 입고 왔나.
‘들어갈까…’
몸을 돌리려던 다프네는 그냥 거기에 있기로 했다. 등 뒤에서 따뜻한 노란색의 빛이 나오고 있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안에서는 감미로운 음악이 귀를 간지럽히고 맛있는 음식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 공간에 같이 있을 귀족들의 눈칫밥은 전혀 즐겁지 않다. 정신적으로 공격을 받느니 차라리 차가운 발코니가 낫다. …귀족들의 사교파티는 다 이런가. 나는 평민이라 모르겠네. 다프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다프네는 자신을 비추던 빛에 그림자가 생긴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치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마냥 점점 커지는 것도 보았다.
“여기서 뭐하나.”
“…로빈 씨.”
역시 당신이었구나.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 다프네는 생긋 웃었다. 다프네를 이슈가르드의 사교파티에 초대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덕분에 다프네는 평생 입어볼 일도 없었던 드레스도 입어보고, 사교댄스도 배워보고…
“그러는 로빈 씨는 여기 왜 왔는데요?”
“슬슬 결혼할 나이가 아니냐니, 봐둔 사람은 있냐느니, 자기 딸을 소개해주겠다니, 같이 온 여자랑은 어떤 사이냐느니, 별 같잖은 참견을 하길래 도망쳤다.”
“…그래서 무슨 사이라고 했어요?”
“친구이자 동료라고 했다. 안 믿는 눈치긴 하더만.”
차라리 혼자 올 걸 그랬나. 그딴 거 할 바에야 이슈가르드와 결혼을 하고 말겠어. 남의 일에 무슨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야. 안 그래도 구겨져있는 미간이 더 구겨졌다. 다프네가 킥킥 웃었다.
“귀족 나으리께서 못 버티시면 어떻게 한담.”
“시끄러워.”
여기 있느니 24시간 내내 훈련만 하는 게 낫다고. 로빈은 답답한지 목의 단추를 끌렀다. 소매 단추도 풀었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는지, 아까보다는 좀 더 편안해진 얼굴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훨씬 풀어진 자세로 다프네의 옆에 서서 난간에 기댔다. 다프네는 로빈을 한 번 올려다보곤 다시 시선을 거뒀다. 뭔가 생각하는 듯 손을 꼼질거렸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나뭇가지와 잎들이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잖아요, 로빈.”
“오냐.”
그러고서도 다프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이 벙긋거렸다가, 다시 닫히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로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에, 오물거리던 입은 마침내 다음 문장을 내놓았다.
“사실 저, 로빈을 좋아했어요.”
아니지, 지금도 좋아하는구나. 작게 덧붙였다. 어색한 적막감이 그들을 덮쳤다. 잔뜩 굳은 로빈의 모습에 다프네는 태연한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백은 안 하려고 했는데.”
2.
“미안. 나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제 기억이 흐릿해서 얼굴도 가물가물한 다프네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 점은 지금의 다프네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다프네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호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웃어줄 때마다, 호의를 보일 때마다 짜릿했고 초조했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했고 두근거렸다. 대체 이게 뭘까. 다프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상황을 그에게 터놓았다. 그에게만 이런 기분이 들기 때문에 그가 해결해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너도 알잖아. 나 동생들 많은 거. 나는 그냥 네가 동생 같아서…”
그는 다프네의 기대와는 다르게 난색을 표했다. 우물쭈물, 횡설수설. 저런 답을 주고서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남겨진 다프네는 드디어 알았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다프네에게 한낱 감정일 뿐이었고, 금세 사그라질 작은 불꽃일 뿐이었다. 마음이 거절당했다는 것은 다프네에게 타격이 되지 못했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다프네는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이후부터 그는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겨우 마주쳤을 때에도 전과 같이 웃어주지도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지도 않았다. 시선을 피했고, 대놓고 다프네를 불편해했으며, 당장이라도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적대감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다프네에게 꽤 상처였다. 한순간에 돌변한 태도에 몰래 숨어 울기도 했었다.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어린 다프네는 생각했다. 나는 그저 나 자신만을 생각했을 뿐이라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폐를 끼쳤을 뿐이라고. 상대방이 반기지 않는 감정은 마땅히 숨겨야 한다고.
그렇게 굳게 마음먹었건만…
3.
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마음먹은 대로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프네는 결국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무슨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에요.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파도는 잔잔함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렇게 말하는 다프네의 표정은 평온했다. 문득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그래서 혼자 조용히 정리하려고 했었던 건데. 그러나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결국에는. 하지만 그런 당신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도… 좋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띄엄띄엄, 딱딱하게 나온 로빈의 한 마디에 다프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을 띄우더니 이내 슬 웃었다. 봐요, 이렇게. 너무나도 친절한 당신을. 이런 순간까지도 나를 배려해주는 상냥한 사람. 하지만 애써 그렇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다프네가 했던 말대로, 그는 자기 혼자만의 감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보답 받지 못할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파도는 잔잔해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진짜 괜찮아요.”
“…그런가.”
로빈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미묘한 표정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던 탓이다. 항상 미간이 구겨진 채로 표정이 변하지 않았던 로빈의 얼굴이, 손으로 가려야 할 정도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프네는 보지 못했다. 어두웠던 것도 있지만,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로빈이 얼굴을 가린 이유가 당황한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길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 아주 솔직히 말해서, 손톱만큼은 다른 길을 생각했었다. 무릇 인간이란 실날같은 희망이라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니까. 하지만 이미 로빈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사이는 친구이자 동료라고.
“-하! 그래도 역시 털어놓으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는지!”
다프네는 후련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동안 오랜 속앓이를 했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한 번 토해냈으니 그 이후는 빠르게 가라앉을 것이다. 홀가분해진 다프네와는 다르게, 로빈은 아직도 굳어있었다. 입을 가린 손은 여전히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자기가 고백한 게 그렇게 큰 충격이었는지. 다프네는 장난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저 사람을 당황시켰다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도 그럴게, 로빈의 반응은 거의 언제나 일관됐었으니까.
“우리 대장님 표정관리 안 되는 거 처음 본다.”
로빈은 말이 없었다. 다프네는 고개를 기울이며 가려진 표정을 보려고 노력하는 체를 한 두 번 하더니, 이내 몸을 거뒀다. 딱히 진심으로 보고 싶은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저는 빠져야겠다! 우리 대장님도 진정해야 하니까요! 누가 음유시인 아니랄까봐, 감미로운 음색으로 노래하듯 말하고는 발코니 안쪽으로 사라졌다. 다프네가 사라지고 나서도, 로빈은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표정을 숨긴 채로,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서있었다.
“…하.”
바람소리와 희미한 연주소리만 들리던 발코니에 마침내 새로운 소리가 더해졌다. 드러난 눈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로빈 자신도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서로가 끔찍하게 어긋났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거지. 로빈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아마 다프네는, 로빈이 그 때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4.
다프네는 커르다스 서부고지 한가운데에서 숨을 뱉었다. 내쉬어진 숨이 휘몰아치는 바람과 만나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눈발과 함께 날리며 사라졌다. 커르다스의 거친 눈보라가 다프네를 때리고 지나갔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다프네는 휘청이기까지 했다. 바람 소리가 시끄럽기만 하다.
“여기…쯤이 맞는 것 같은데. …어어!”
다프네는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들었다. 바람이 너무 강해 하마터면 지도가 날아갈 뻔했다. 시끄럽게 펄럭대는 지도를 간신히 붙잡았다. 아무리 봐도 이쯤이 맞는 것 같은데, 이 눈보라 때문에 도저히 앞이 안 보인다. 아무래도 날짜를 잘못 잡았어. 다프네는 푸념에 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맞게 왔네.”
마침 바람이 잔잔해진 덕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고르가뉴 목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은… 다프네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안식을 찾고 잠들어있는 곳. 방금까지 날씨가 안 좋았던 탓에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다.
‘잘 됐네…’
다프네는 생각했다. 아무도 없다면 눈치 볼 필요 없이 당신에게 인사하고 마음껏 얘기할 수 있으리라. 다프네는 도착한 뒤로도 무언가를 찾으려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한 비석 앞에 멈추어 섰다. 다프네는 머뭇거리다, 손을 뻗어 비석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비석이 깨끗한 것이, 세운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다. 아는 이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로빈.”
다프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사룡의 권속과 홀로 맞서 싸우다가 용맹하게 전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흰 눈발이 내린다. 다프네는 긴 숨을 내쉬었다.
“나 참, 웬일로 먼저 편지를 보내나 했더니. 편지를 받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다프네는 파하,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항상 내가 먼저 보내는 쪽이었잖아요? 무슨 편지인지 얼마나 기대했는데! 다프네는 불만을 토로했다. 먼저 받는 소식이 이런 거라니! 다프네는 애써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장례식에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가 가면 또 귀족들의 눈길을 한 눈에 받을 것 같았단 말이에요. 변명하듯 빠르게 덧붙였다. 로빈도 그거 싫어했으니 무슨 느낌인지 알죠? 그리고 당장 빠르게 돌아와도 참석은 못할 것 같았어요. 알다시피, 나는 여행을 하고 있잖아요.
“…아프기도 했고. 로빈이 죽었다고 그래서 쓰러졌다고 하면 믿겠어요?”
나름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축 처진 기분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쓰러졌다는 건 과장이었다. 그러나 아팠다는 건 사실이었다. 편지의 내용을 읽고 나서, 다프네는 처음에 패닉에 빠졌다. 큰 충격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이후에 진정되고 나서는 손발이 덜덜 떨려서 물건을 집지도, 걷지도 못했다. 마지막에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살이 온 것 같았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누워만 있었다. 다프네는 충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저한테 고마워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로빈을 그렇게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제가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고 원망하면 안 돼요. 슬프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말해야 할 게 뭐가 있더라. 아, 맞다. 유산.
“유산은 이슈가르드에 기부했어요. 이슈가르드를 위해 헌신한 로빈이기도 했고, 또 저는 로빈의 유산을 받을 자격이 없는걸.”
대체 저한테 왜 준 거예요? 유언장이 위조되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다프네는 로빈의 재산 거의 대부분을 상속받았다. 처음에 로빈의 유언장이 잘못된 줄 알았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절친한 친구였던 것은 맞지만, 보통 유산 상속은 가족들이 받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래서 다프네는 이걸 상속받고 기부하기까지 그 짧은 과정 속에서 또 귀족들의 눈초리, 특히 로빈네 가문 사람들의 눈칫밥을 먹었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하지. 분명 친구라고 했는데 저 사람이 뭐길래 그걸 다 받아가는 거냐고 생각했을 거예요. 제가 무슨 염치가 있어서 그걸 다 가져가겠어요. 그리고 또… 또…
“…저, 아직도 로빈을 좋아하나 봐요.”
다프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을 말이 없다가 간신히 나온 말은 많이 흔들렸다.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한 대로만 마음이 따라주면 정말로, 정말로 좋을 텐데. 이때도 마음은 말을 듣지 않았다.
“미안… 미안해요. 막상 마주하니까 이건 좀 힘들어서.”
힘겹게 짜낸 목소리가 많이 떨렸다. 마지막까지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5.
몇 년 전이었을까요. 10년 정도는 된 것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솔직히 말해서 로빈의 첫 인상은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나랑 나이 차이는 몇 살 안 나는 것 같은데 벌써 한 기지의 대장이었고, 또 그만큼 욕도 많이 먹었으니까요.
이해해요. 그 시절의 저는 참 어설펐죠. 그래서 쌍사당에서도 저한테 중요한 임무는 시키지 않았어요. 누가 중요 임무를 맡기고 싶었겠어요. 당장 자기 활시위에 다치고, 자기 화살촉에 베이고, 물자를 들고 가다가 넘어지지를 않나, 화살통은 챙겨놓고 화살이 없다든지. 뭐…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당장 기억나는 게 저런 것뿐이네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진급도 당연히 느렸고, 그나마 시켜도 됐던 건 연락병? 그러니까 로빈이랑 만날 수 있었던 거지만… 말단도 아닌 주제에 하는 게 고작 연락병이면 알 만 하죠?
진짜… 정말 이것까지 말해도 되는 건가? 로빈이 너무 무서웠어요. 쌍사당에서도 실수하면 지적하긴 했지만, 로빈이 화내는 건 차원이 달랐어요. 너무 불같이 화를 내셔서. 힘들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기도 했었는데, 이건 뭐 이미 아시려나? 그래도… 그래도 좋았던 것 같아요. 엄밀히 말하면 자기 부하가 아니어서 그러셨던 거겠지만 저한테 과한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저는 그 때 엄청 자유로웠거든요. 간섭이 심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지라,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고요. …그거랑은 별개로 여전히 실수남발이었지만 그래도 차차 줄지 않았나요?! 아… 아니네. 음유시인까지 되어놓고 또 리라 줄 끊어먹고 노래 부르다가 목소리 갈라지고 목소리 안 나오고 다사다난했네. 죄송합니다. 나대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당장 내칠 것처럼 화를 내셔도 저를 챙겨주시는 게 너무 좋았어요. 붕대를 감아주시고, 지혈을 해주시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주시고… 여전히 로빈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그래서 안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그 때였던 것 같네요. 저, 로빈을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이것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것도 알면 좀 부끄러운데… 하여튼 저 때부터였던 거 같아요. 제가 로빈을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요. 그 때는 자각도 못했지만! 저는 최근까지 워낙 친해서 그런갑다- 하고 있었다고요.
어쨌든 점점 실수도 줄기 시작해서 진급 속도도 다시 빨라졌었는데… 제가 커르다스 쪽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 중앙고지에는 이크샬의 거점지가 있어서 그리다니아 쪽에서도 계속 주시해야 했고, 연락병으로 일하면서 그 지역에서 오래 지냈었으니까 제가 적임자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면 그냥 로빈이랑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 같고. 놀고먹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로빈이랑 연합해서 이크샬을 막아내는 것도 재밌… 음, 정정합니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어요. 왜냐면 그 전까지는 저 완전 허당이었으니까요? 드디어 제대로 제 역할을 해냈다는 생각에 엄청 기뻤다고. 촌뜨기, 촌뜨기 하다가 이름으로 불러주시기 시작한 시기도 그쯤이죠? 얼마나 좋았는데!
쌍사당을 나오고 여행을 다닐까 고민하고 있을 때,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하셔서 놀랐어요. 로빈이라면 왠지 나오지 말라고 할 줄 알았어. 쌍사당… 꽤 안정적인 직장이니까. 그러면서 뭐라고 덧붙이셨는지 기억나요? 어차피 자기 몸 하나 건사 못하는 놈도 아니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아무 생각 없이 던지신 말이었겠지만, 저는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몰라요. 이슈가르드 출입증도 주시고.
이후에는 정말 즐거웠어요. 여행을 하면서 로빈에게 편지를 쓰고. 비록 답장은 안 왔지만! 종종 이슈가르드에 들르면 가끔씩 선물도 주시고, 편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또 같이 여행도 가보고. 아! 커르다스 밖으로 처음 나와 본 로빈의 표정 정말 귀여웠는데! 그 표정을 재빠르게 그림으로 남겨놨어야 했는데, 제가 그림을 못 그린다는 게 이렇게 아쉽게 될 줄 몰랐네. 사교파티에도 초대해주시고. 전 파티에 가본 게 처음이었어요. 그래요, 제게 이렇게 잘해주셨는데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겨요. 그랬는데…
6.
“있잖아요, 로빈. 그 때 그거 무슨 뜻이었어요?”
다프네는 허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척했지만, 역시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나서 다프네는 후회했다. 울면서 제발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며 빌었어야 했나. 아니면 구질구질하게 거절당했어도 이슈가르드에 남았어야 했나. 남아서 당신과 함께 전투에 나섰으면 당신이 죽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로빈 역시 다프네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다. 그럼에도 다프네는 물었다. 이 상황을 도피하고자 당신이 그 때 제대로 말해줬어도- 하고 탓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이를 탓해서 무엇하리. 다프네는 문득 자신의 귀를 만졌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이어커프가 없었다. 로빈이 준 것이었다.
“아, 그… 이어커프… 역시, 아직은 힘들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귓바퀴가 허전했지만, 당분간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볼 때마다 로빈을 떠올리게 했고, 또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덤덤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다프네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했던 것처럼, 잊기 위해서도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다음에도 오고 싶은데… 그게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다프네는 흐리게 웃었다. 여전히 눈발이 거셌다. 그래도 꼭 올게요. 친구니까요. 우리는 언제까지고 친구예요. 맞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주섬주섬 리라를 꺼냈다. 다프네가 음유시인이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노래와 함께 한 리라다. 그저 막연하게 이 리라로는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노래만 연주할 줄 알았는데. 다프네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알았겠어. 최근까지 함께 한 친구에게 불러줘야 하는 노래가 이제는 진혼곡이라니.”
다프네는 천천히 리라 줄을 뜯었다. 리라 소리가 아예 묻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바람 소리가 너무 컸다. 그래도 뭐… 알아서 잘 들어요. 다프네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노래했다. 오랜 안식을 찾아 떠난 친구의 영혼을 위하여. 동시에 자신에게 친구의 죽음을 각인시키면서. 그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선율로.
7.
잘 자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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