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적 판타지는 F (1)
1화는 전체이용가
“자네는 F일세.”
쿠쿠쿵. 등 뒤에서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땅이 흔들리는 소리, 지축이 깨지고 창문이 만들어지고, 아무튼 천지가 재창조되는 것 같은 소리에 나는 휘청거렸다. 교수는 어림도 없다는 듯 다음 학생을 불렀다. 나는 그에게 밀려 어쩔 수 없이 내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낙제?”
내가 낙지도 아니고 낙제라니. 나 고윤형에게 도대체 낙제가 웬 말이란 말인가? 내 주변에 앉은 동기들이 저마다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열정적으로 톡을 주고받고 있었다. 보나마나 내가 낙제를 받았다는 내용의 톡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장학금을 못 받는다면, 다음 학기 등록금은 어쩌지? 기숙사에 합격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가 없는데…….
그야말로 완벽하게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던 내 대학 생활 플랜이 엉망이 된 그 시작은 바로 복학 후 3학년 2학기의 첫 수강 신청 날이었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신영철 교수님 수업이랑 김금남 교수님 수업이랑…….”
난 우리 과에서 유명한 아싸였다. 아싸가 어떻게 유명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늘 과탑을 차지하는 아싸가 되면 너도 할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게다가 우리 과 처럼 정원이 86명이라면 더더욱 유명세를 떨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남자놈들이 성적에 관심이 없대도 말이다.
어쨌든 쓸데없이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해서 뭐하겠는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는 수강 신청 방식이 장바구니를 이용한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문자를 대형 마트에서 보낸 건 줄 알고 차단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이미 수강 신청이 시작된 9시 2분 경이었다. 남들은 9시 1분이 되기 전에 수강 신청을 올클했는데 나는 가까스로 전공 수업 몇 개를 겨우 신청하고 꿀 빨기로 유명한 교양은 모조리 놓쳐버렸다. 내가 “판타지 문학의 이해”를 듣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었다.
“내가 낙제라니…….”
학교 근처에 있는 포차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며 궁상을 떨고 있으려니 옆 테이블에서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째려보자 그들은 곧바로 모르는 척을 했다. 나는 우울하게 고개를 돌리며 잔을 비웠다.
나는 남중, 남고, 공대, 군대, 또 공대를 다니고 있는 보편적인 남학생이다. MBTI는 ISTP인데, S와 T는 거의 100에 가까웠다. 그런 나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판타지에 대해 서술하시오.”라는 문제는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였다. 판타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나보고 어떻게 판타지에 대해 쓰란 말인가? 차라리 객관식 문제를 내주지.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썼는데…….”
기말고사 때 A 받으면 수습이 될까? 교수한테 뇌물이라도 바쳐야 하나? 차라리 휴학할까? 엄마랑 아빠한테는 뭐라고 변명하지? 학과장님한테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끊어졌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어우. 맛없어.”
뭐지? 나는 누군가의 진저리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다. 잠결에도 목소리가 매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새벽 2시쯤의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남자의 목소리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도 있구나. 어렴풋이 감탄을 하며 다시 의식이 흐려지려는 찰나…….
“살다 살다 이렇게 맛없는 환상은 처음이야.”
“뭐라고?”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감히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나에게 망발을 지껄인 남자의 멱살을 잡았는데…….
“어?”
“어?”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천사의 멱살을 잡은 건지 나를 의심했다. 남자는 스크램블 계란과 비슷한 색깔의 곱슬 머리에 시베리안 허스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파란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서 윤기가 흘렀고 입술은 무려 분홍색이었다. 이 세상에는 천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 당연히 천사일 리는 없지만 천사라고 해도 될 것 같은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손을 꾹 찔렀다.
“어?”
“어?”
남자와 나는 또다시 동시에 똑같은 소리를 냈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촉감이 너무 생생했다. 꼭 꿈이 아닌 것 처럼.
“뭐야? 지금 설마, 깨어있는 거야?”
“누구세요?”
“와. 몽마로 600년을 살았어도 이런 건 처음이네. 환상 영역이라는 게 없어서 그런가?”
“몽마라고요?”
몽마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몽마? 꿈에 나타나서 사람을 유혹하고 정기를 뺏어간다는? 근데……. 남자인데? 몽마는 보통 여자 아닌가?
“편협하긴. 남자 몽마도 있어.”
몽마는 내 생각을 읽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는 이런 인간은 처음이라는 둥, 내가 오래 살긴 한 것 같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하다가 그렇지! 하고 내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악!”
이마가 홍해 바다 처럼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내가 벙쪄있는 사이 몽마는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너 말이야. 힘들게 산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환상 영역은 남겨둬야할 거 아니야? 아예 영역 자체를 없애버리면 우리 몽마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라는 거야? 먹을 게 없잖아, 도대체.”
“뭐가 없어요?”
“환상 영역 말이야. 네 뇌에는 그 공간이 없어.”
“네? 왜요?”
내가 어지간히 멍청한 표정이었는지 몽마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내게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네가 없앴잖아. 필요 없다고.”
“전 그런 적 없는데요?”
“네 무의식이 그랬겠지, 그럼. 아무튼 난 이제 간다. 너때문에 배고파.”
“잠깐만요!”
몽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을 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사라지려는 것 같아 나는 얼른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몽마가 고운 얼굴을 찌푸리자 인상이 제법 험악해졌다. 그러나 나도 절실했기에 손을 놓지 않았다.
“저, 저, 그, 환상 영역이요……. 만들어 주시면 안 되나요?”
“뭐라고?”
“저, 그게 꼭 필요해서요. 만들어 주시면 안 되나요? 몽마면 그런 것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못 할 건 없지만 다른 인간 찾아가면 되지, 내가 왜 굳이 너한테 그걸 만들어줘야 해?”
“어……. 매번 맛있는 인간을 찾으러 다니기 번거로우니까요?”
몽마가 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아무렇게나 말했는데 그는 제법 혹했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이 몽마의 말대로 내가 환상 영역이라는 게 없어서 이번 시험에서 F를 받은 거라면, 환상 영역을 만들면 A를 받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그래. 난 성적에 미쳐있었다. 몽마가 꽤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나는 재차 그를 설득했다.
“저한테 환상 영역을 만들어주고 당신이 그 환상을 먹으면 되잖아요. 저는 그게 필요해서 그래요. 그럼 서로 윈윈 아니에요?”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만들어도 상관 없는 거야?”
“그게 돼요?”
“네가 협조한다면.”
“협조할게요!”
나는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나는 다음 학기 장학금을 받아야 하고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몽마는 내 말에 딱히 믿음이 가지 않는 건지 영 시원찮은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귀찮은데……. 알았어. 그래. 네 말대로 해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그건 알아둬.”
몽마가 나를 내려다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선하고 맑아 보이는지, 그가 악마가 아니라 천사처럼 보였다. 분명 그는 자기 자신을 몽마라고 소개했는데.
“악마는 절대로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는 거. 알겠지?”
“……. 네.”
그의 목소리는 꼭 버터가 프라이팬 위에서 녹는 소리 같았다. 유리창에서 빗방울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소음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내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럼 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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