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대협.”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더 자고 싶어서 무시했더니 목소리는 더 가까운 곳에서, 더 크게 들렸다. 자신을 흔드는 손길이 느껴진다.
“일어나세요, 문두 대협. 언제까지 길거리에서 자고 있을겁니까, 문두 대협. 당장 일어나세요.”
묘하게 서늘한 그 부름에 일어나니 그곳은 산길이었다. 안개까지 낀 숲길에서 자고 있었다고? 언제 잠든거람.
“일어나셨네요.”
“고씨, 여기서 뭐해?”
“길에 잠든 대협 깨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공은 자신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다. 검은 장포를 어깨에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 외모는 변하지 않았군. 안개 속으로 먼저 걷기 시작한 고공의 뒤를 따라서 문두도 걷기 시작했다.
“고씨, 술 있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술을 찾네요.”
“에잉,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거 아냐~.”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펄럭이는 장포 안에서 술병 하나를 꺼낸다. 안에 주머니도 없는 거 같은데 당가의 소매 마냥 물건이 잘도 튀어나오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런 걸 일일히 묻는 대신 술병을 받아 술을 마시는 걸 택했다.
“그동안 뭐하면서 지냈남? 저번에 만났을 때에는 농사 짓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뭐, 네. 지금은 다른 일 하고 있지만요.”
“무슨 일을 하는데?”
“안내인?”
“거, 부지런하게 사네.”
길은 여전히 안개로 쌓여 있지만 고공은 어디로 가야할지 잘 안다는 조금 앞장 서서 걸어간다. 문두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술도 있고 아는 얼굴도 있으니 낯선 장소 따윈 소소한 문제일 것이다. 물론 완전히 방심하는 건 아니지만 깊게 생각하기에는 피곤하지 않는가. 다시 한 번 술을 삼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보니 전쟁 때 괜찮았나?”
“아, 정마대전말입니까? 전쟁이 다 그렇죠. 당신은 어땠나요?”
“아저씨야 그냥 다녔지. 칼을 휘두르는 거 말고 할 거 있나? 없지~.”
“그러네요. 저도 그냥 제가 있는 곳에서 무기를 휘둘렀죠.”
“그래도 무사했네?”
고공이 웃었다. 안개에 반쯤 가려진 얼굴임에도 웃고 있는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마지막 남은 술 한모금을 목구멍을 넘긴다. 저 멀리 길의 끝이 보인다.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 소리에 맞춰서 고공이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느껴진다. 안내인이라, 무엇을 안내한다는 이야기인가. 그가 잠든 자신을 부를 때 몇 번 불렀던가. 세번의 부름, 세차게 흐르는 강. 불현듯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간다. 술과 함께 아쉬움을 삼킨다. 고씨, 부르는 소리에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책을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든다.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 얼굴로 나타난다고 하더니 고씨는 고씨가 맞나?”
“맞으면 어떻고 틀리면 어떻습니까?”
“에잉, 아니지. 가는 길 아는 사람이 있는 게 좋지. 아는 사람 얼굴로 있는 낯선 사람이라니 아저씨는 싫엉~.”
“저 맞습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걸 인지했는데 별로 안 당황하는 거 같네요.”
“칼밥 먹고 사는데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거지.”
“부정하고 날뛰는 혼령들 보다는 낫네요.”
“아저씨 가는 길 안 심심하게 해줄거지?”
“심심한지 안 한지는 모르겠고 안전하고 끝까지는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다음 생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강물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배에 올라타기 전 남은 술 한모금을 땅을 향해 뿌린다. 나쁘지 않았던 인생을 향해 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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