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상의 온도
2022. 05. 08 (5265자)
경기가 열리는 빙상장에는 상반되는 온도가 공존한다. 얼음을 얼리기 위해 차갑게 유지되는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의 열정은 그 온도를 높인다.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관중석 천장에 자리 잡은 스피커의 음량이 생각보다도 더 크다.
"역시 신축이야."
"오늘도 기대를 안 배신하네."
음향을 점검하던 관계자들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말 오랜만에 지어진 신설 빙상장이다. 올림픽이라는 대회를 위해, 이 종목만을 위해 지어진 경기장. 신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플러스를 먹고 들어가는데 한 종목만을 위한 경기장이라면 얼마나 더 신경을 썼을까. 스피드 스케이팅 관계자들은 건설 소식만 듣고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감탄사는 다른 곳에서도 터져나왔다.
"이야. 이게 얼음이야 거울이야?"
아까 얼음 얼리는 작업이 끝났을 때도 그랬지만, 마무리로 정빙기를 돌리고 나니 정말 투명하다.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담당 아이스 테크니션이 이런 얼음을 만들어보겠다고 얼마의 시간과 노력을 갈아넣었을까.
"정빙기 다 돌렸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조금 전까지 정빙기 위에 앉아계시던 분이 운영석으로 등장하셨다.
"수고하셨어요."
"얼음이 거울이 되었는데요?"
"허허. 감사합니다. 선수들이 타고 뭐라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아이스 테크니션이 사람 좋게 웃고는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걷는 내내 어깨를 계속 돌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몸이 찌뿌둥하신 모양이다. 빙판도 마이크도 준비되었다. 맞은편 관중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 찼네 다 찼어."
누가 최고권위의 국제대회 아니랄까 봐. 입장 시작 시간이 얼마 안 지났는데도 벌써 사람이 많이 찼다. 티켓이 다 팔렸다고 들었다. 조금만 있으면 관계자용 좌석을 제외한 자리는 다 차겠군.
"어우..."
자원봉사자 한 명이 팔을 쓸어내리며 등장했다.
"어디 다녀오세요?"
"중앙 카메라 확인하고 왔어요."
빙판 중앙 선수 대기실에 들어갔다 오신 건가? 막 얼린 빙판을 건너오셨겠구나. 여기도 지금 추워서 패딩을 껴입고 있는데 저기는 오죽할까. 챙겨온 핫팩 하나를 뜯어 손에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얼음이 되는 줄 알았어요."
"거기 지금 체감기온 영하 십 도죠?"
"십 도가 뭐에요. 삼십 도에요. 영하 삼십 도."
킥킥 웃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죄송한데, 무슨 일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늘 스타팅 심판입니다."
"아! 부지런하시네요. 벌써 나오시다니."
"너무 설레서 말이에요. 심판들에게도 올림픽은 꿈이거든요."
목소리에 장난스러움을 한껏 담아 말했다. 하지만 진심이다. 선수들이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서기를 원하는 만큼 심판들 또한 권위 있는 대회에서 심판이 되기를 원하니까. 내가 오늘 이 경기를 맡아보고 싶다고 얼마나 ISU를 귀찮게 했는가. 나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은 아니었겠지. 그런데도 내가 뽑혔다. 나의 커리어에 올림픽 심판이라는 한 줄이 더 적히게 되었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꿈꿔왔는가.
"봉사자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미디어 담당이에요."
"송출 영상 담당이세요?"
"네. 저희가 실수라도 하면 전세계 방송사에 방송사고 나는거에요."
가벼운 웃음이 대답과 함께 돌아왔다. 카메라 담당자구나. 실수하면 전 세계 방송에 대참사가 나겠지. 책임이 아주 무겁겠어. 그래도 카메라 담당으로 선발되신 걸 보니 보통 인물은 아니시겠는데.
"마음 크게 먹고 오셨겠어요?"
"그럼요. 일만 잔뜩 시키고 사람 부려만 먹는 회사 때려치우고 왔어요."
"고생 많으셨네요."
"합격 소식 듣자마자 사직서 날리고 뛰어왔다니까요?"
듣자 하니 방송계가 원래도 일이 많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이라던데. 그래도 여기서 일했다는 내용 한 줄을 적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음 직장은 조금 더 순탄한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작게나마 행운을 빌어주었다.
"여기 일은 어때요?"
"훨씬 살만해요. 담당 경기 시간 되면 바쁜 건 마찬가지인데, 아닐 때는 여유있어요. 언제든 다른 경기도 구경하러 다닐 수 있으니 심심할 틈도 없고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심심할 때는 다른 경기 구경이 최고죠. 아니면 식당에 가서 간식거리를 집어 오거나."
기분 좋은 웃음이 대답과 함께 돌아왔다.
"식당 음식 맛있지 않아요? 일 끝나면 식사시간이 언제인가 시계부터 보게 되던데요."
"같은 생각이에요. 어제 저녁으로만 몇 접시를 채워서 먹었는지 모르겠어요."
"오늘도 끝나면 식당이 거덜 나도록 먹어줘야겠어요. 있는 동안 먹어야지 다른 때는 못 먹어요."
"시간 되면, 빙상장 북동쪽에 있는 국가 홍보 부스로 가봐요. 거기도 요리사들이 맛있는 음식 많이 만들어 두더라고요."
"다른 곳은 가봤는데 그쪽은 안 가봤어요. 정보 고맙습니다."
지직. 자원봉사자의 왼쪽 주머니에서 무전기가 울렸다.
'카메라 테스트 진행합니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가야겠네요."
"무사히 마무리하고 식당에서 봐요."
자원봉사자가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돌렸다. 관중석 다 찼네. 빈자리를 찾자면 진행석 뒤편의 관계자용 좌석 정도? 인기 좋네.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함성과 열기가 넘치는 빙상장에는 서 있기만 해도 행복하다. 내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곧 벌어질 레이스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다.
"즐거워 보인다?"
이제 나오셨군. 오늘 판정을 맡을 레프리 심판이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제 곧 시작인데."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고 심판의 길을 택했다. 올림픽이라는 무대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여기가 그렇게 좋냐? 얼굴에서 다 보여."
"당연하지. 얼마 만에 밟아보는 올림픽 무대인데. 너도 얼굴에 신난다고 다 써놨으면서?"
웃는 사이 장내 방송이 한 번 더 울렸다. 시합 시작 전 관중들이 지켜줘야 할 매너 안내가 이어졌다.
"오늘 경기 초반부 스타터 심판은 너야?"
"응. 시작은 내가 하기로 했다."
첫 경기 첫 순서를 내게 달라고, 뽑기의 신에게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안 된다고 하면 제발 바꿔달라고 다른 심판들에게 빌어볼 생각도 했는데. 다행히 신은 나를 배신하지 않으셨다.
"오죽 신났으면 자기 첫 순서라고 축하주로 비싼 와인까지 사왔겠어?"
때맞춰서 오늘 심판을 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큰일났다. 방금 나온 사람들 중에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문제인 사람이 있는데.
"와인? 나를 빼놓고 마셨다고?"
"그래. 난 얘가 초반부 스타터 심판을 이렇게 하고 싶어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니까? 난 금메달 선수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별 관심 없었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와인을 뜯어서 파티를 열었는데, 거기에 날 안 불렀다고?"
왜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는건데.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별거 안 했어. 스타터 심판 네 명만 모여서 먹었거든."
"내가 와인이라면 환장하는 거 잘 알면서 왜 빼놨어!"
아이쿠야. 이럴 것 같아서 말 안 하려 했지. 쓴웃음이 절로 입가에서 새어나왔다.
"한 병 더 있어. 너 내일 시합 없지?"
"없어. 내일은 경기 없잖아."
"오늘 끝나고 지금 모인 사람끼리 마시자."
미심쩍은 눈빛이 날아와 심장에 꽂혔다. 그것도 잠시. 장내 방송이 울렸다.
"곧 시합이 시작됩니다. 관중 여러분은 착석해주세요."
"와인, 잊지 마라?"
"안주 고민부터 해."
가벼운 핀잔을 끝으로 전부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레프리들은 채점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타터 심판인 나와 다른 동료는 심판석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살짝 시선을 돌려 진행석을 바라보았다. 시작 전부터 분주하게 자원봉사자들과 방송관계자들이 오갈 정도로 바빴는데. 지금은 필요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를 떴다.
빙판이 어두워졌다. 화려한 조명이 장내를 장식했다. 시작한다. 괜히 신경 쓰여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래봐야 패딩이라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사람 생각은 다 똑같은지, 다른 심판들도 옷을 확인하고 있었다.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조명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장내 아나운서들 차례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감미롭고 좋은 목소리가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가며 빙상장에 울렸다.
"오늘 시합의 심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심판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하나씩 불렸다.
"스타터 심판. 최 한영."
그중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관중석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곧 진행석에 있는 장내 아나운서 두 분의 소개까지 마무리되었다.
"출전 선수들은 중앙 대기실로 입장해주세요."
시합을 준비하는 선수들이 중앙 대기실에 하나둘 나타났다. 같은 국가끼리, 혹은 같은 대륙끼리, 혹은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앉은 선수들이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스케이트 복을 이제야 입기도 하고, 누군가는 준비하지 않은 채 몸을 풀며 대기했다. 지퍼만 채우면 되도록 준비가 다 된 선수들도 있었다.
그중 시작을 장식할 두 선수가 눈에 띄었다.
올림픽은 스케이트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나서야 밟을 수 있는 무대다. 메달권이 아닌 선수들은 더더욱. 그래서일까? 한 명이 눈에 띄게 굳었다. 아무래도 첫 올림픽인 모양이다. 저러다 부정 출발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데. 반면 다른 한 명은 비교적 편해 보였다. 노련해 보이는 모습을 보아 첫 출전은 아닐 것 같다. 선수 명단을 슬쩍 봤다. 짐작이 맞았다. 마지막으로 올림픽 퀄리파이를 획득한 선수와 이번이 두 번째 올림픽인 선수다.
"이제 곧 시합이 시작됩니다."
4년을 기다린 올림픽이 시작된다. 선수 생활 전체를 걸고 뛰어들더라도 수십 명만 참가할 수 있는 꿈의 무대가. 경기의 주역이 되지 못하는 심판들도 한 번 이상은 서보고 싶어 하는 꿈의 대회가.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 시작을 알릴 두 선수가 경기복을 채웠다. 옆에 놓인 신호총과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경기가 곧 시작된다. 지금부터 60초 뒤에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언제나 해온 일이다. 하지만 이날을 얼마나 꿈꿔왔던가.
선수들이 빙판 중앙 대기실에서 나와 스타트라인에 자리를 잡고 섰다. 하늘을 향해 신호총을 들었다. 왼손에 쥔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다 댔다. 여기까지 약 50초가 걸렸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명료하고 간단하다.
"Ready."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준비 신호를 보내고
"탕-!"
나와 빙판에 선 선수들의 인생을 좌우할 한발을 빙상장에 쏘아 올린다.
두 선수가 빙판을 박차고 달리다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떠나갈 듯한 함성이 빙상장을 가득 채웠다. 마이크와 총을 손에서 내렸다. 작은 웃음이 입가로 새어나왔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열정을 열기로 바꿀 수 있다면 저 얼음을 다 녹이고도 빙상장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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