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생일기념 로그

2020. 11. 22 (3992자)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눈을 떴다. 덮고 있던 것을 치우니 한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주변의 초목이 빛을 잃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건물 안까지 한기가 점령한 걸 보면 이제는 완전한 겨울인 모양이다. 추위를 조금이나마 떨치고 주변을 살필 생각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태양이 남동쪽 하늘에 떠 있다. 아침 열 시쯤 되었을까. 주변에 별다른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 하나의 기척을 제외하면.

 

“깼냐?”

 

주변에서 느껴지는 유일한 기척의 주인이다. 오늘의 불침번도 당신이었지. T. 간밤에 별일 없었는지 말끔한 모습에 조금 마음을 놓았다.

 

“깼으면 준비해. 갈 곳 있으니까.”

 

“어딜 갑니까?”

 

“가면 알아.”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건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당신을 얼떨떨하게 따라갔다. 원래도 제멋대로 튀는 기색이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럴 때면 늘 당황스럽다. 그를 따라 한참을 걸으니 간판 한쪽이 떨어져 길을 반쯤 막고 있는 입구가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는 T를 따라 나도 발을 들였다.

 

입구처럼 안도 멀쩡하진 않다. 입구부터 저 안까지 부서진 장식물이 가득하다. 놀이기구는 전부 전력이 없어 멈춰있다. 곳곳에 가시덤불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바싹 말라버린 잔디가 점령한 길목까지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며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 없는 놀이공원이 원래도 이렇게 오싹한 장소였을까. 원래도 평화로운 세상은 아니지만 이곳은 배로 위험한 느낌이 든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중요한 일이 있어. 쳐지지 말고 따라와.”

 

중요한 일? 거침없이 걷던 그가 들어간 곳은 실내 롤러코스터 탑승장이다. 어느 건물이 그렇듯 이곳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 대기자용 펜스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거나 녹이 슬어있다. 살짝 시선을 돌리면 관리자 부스가 보인다. 유리에는 금이 가 있고 문짝은 반쯤 부서지기까지 한 상태다. 그 옆에 서 있는 롤러코스터는 주변에 비하면 멀쩡해 보인다. 관리가 되지 않아 깨끗하지는 않지만. 주변이 이래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곳에는 왜 온 걸까.

 

‘덜컹’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소리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열린 문 안으로 T가 들어갔다. 저기에 뭐가 있을지 알고는 가는 것인가? 무얼 하려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를 따라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에서 이어지는 계단을 전부 내려가니 통로가 나왔다. 직원들이 놀이기구를 관리할 용도로 만든 길일까. 밖은 콘크리트가 깔린 바닥이 무작위로 피어나려는 식물들을 억제해 기괴한 모양새였는데 여기는 실내라 그런지 초목의 흔적조차 없다. 안에 있는 것은 우주의 모습을 연출하려는 듯한 벽장식과 내부를 꾸미고 있는 장식 정도. 바닥을 꾸미고 있는 장식물 뒤에는 무언가가 숨어있기 딱 좋아보인다.

 

당신은 어디까지 가려는 걸까.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를 따라 통로를 걸었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 벽에 붙어있는 철제상자 같은 것이 있다. T가 그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전선 여러 개가 정리되지 않은 채 들어 있고 스위치가 여럿 있다. 놀이기구의 부속장치인가? T가 스위치를 조작하고 뚜껑을 닫았다. 통로의 반 정도 걸으면 또 하나가 있다. 이번 것도 마찬가지로 T가 철제상자의 뚜껑을 열고 이것저것 조작했다.

 

이쯤 오니... 우리 외에 다른 기척이 느껴진다. 크리쳐다. 이 앞에 둘... 아니, 셋. 금속형 둘에 생체형 하나다. 길목을 막고 있다. 탄환도 아껴야 하는데 불필요한 전투는 피해서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잠시. T가 제 총을 장전하고 크리쳐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잡을 생각인가?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지만 앞서가는 당신의 기세가 심각하다. 마찬가지로 산탄총을 장전했다.

 

당신을 따라 몇 걸음 걷다 본능적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방금 딛고 있던 바닥이 순식간에 반파됐다. 우리를 제외한 움직임이 하나가 아니다. 근처에 있던 세 녀석이 전부 온 모양이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법이 없군.

 

“쯧.”

T가 혀를 차는 동시에 산성액이 발 딛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다시 날렵하게 몸을 굴려 피했다.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와 질척이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금속음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구체에서 돋아난 뾰족한 가시들이 고슴도치 같은 형상을 자아내고 있다.

 

“... 이런 곳에는 왜 온 겁니까?”

 

“있어 봐. 할 일이 있다니까.”

 

당신에게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당최 감이 안 잡힌다. 지금은 저것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겠지. 셋이 전부 이쪽을 향해 모이려는 기색이다. 총을 쓰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거리가 너무 가깝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향해 박차고 달렸다. 쫓아오려는 크리쳐들을 T가 막아섰다. 세 크리쳐의 공격이 모두 당신에게 몰렸다.

 

여기면 거리는 충분하다. 자세를 돌려 장전한 총을 크리쳐를 향해 겨누고 섰다. 셋을 한 번에 처리하기 좋은 최고의 구도다. 계속 자신을 공격하는 원뿔 가시를 흘려보내듯 피한 T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이다.

 

T가 날렵하게 자세를 숙여 두 크리쳐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굉음과 함께 발사된 탄환이 몰려있던 크리쳐들 사이로 날아간다. 다시 방아쇠를 당기니 파고든 탄환이 쪼개지며 세 크리쳐의 핵으로 파고들어갔다. 고슴도치 같던 구체들이 비명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녹아내린 것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크리쳐와 가까이 있었던 시어도어에게 달려갔다.

 

“괜찮습니까?”

 

안도하던 당신의 시선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런. 하나가 아직 살아있었나. 곧바로 자세를 숙였다. 금속이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린다. 발악도 잠시, 우드득 거리며 부러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이제야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 고맙습니다.”

 

신세만 지는군. 늘 짐만 되는 건가. 한없이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으려는 듯 무심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일어나.”

 

자세를 일으켰다. 주변에는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 흔적이 가득하다. 긁혀서 패인 흔적이 가득한 바닥, 탄환에 맞아 엉망으로 녹아내린 살덩어리와 금속체 하나, 반쯤 부서진 핵이 뜯어진 채 방치된 금속체 하나. 당신이 다친 흔적이 없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던 차, 당신이 남아있는 잔해들을 벽에 보이는 비상문 밖으로 던져서 치웠다.

 

... 굳이?

 

그러고는 또 남은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따라가면 또 하나의 금속 상자가 있다. 이번 것도 조작한 당신이 성큼 탑승장으로 돌아갔다.

 

“... 이제는 제대로 대답해 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뭘?”

 

“여기는 왜 온 겁니까?”

 

대답을 요구하며 당신과 눈을 마주쳤다. 당신이 턱을 살짝 들어 옆에 멈춰있는 롤러코스터를 가리켰다.

 

“타.”

 

“... 예?”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나도 모르게 멍한 표정으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저거 타라고.”

 

당신의 말대로 롤러코스터에 탑승했다. 당신이 관리자 부스에 들어갔다. 철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승강장이 갑자기 밝아졌다. 전력이 들어왔다. 롤러코스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스에서 나온 당신이 옆자리에 빠르게 올라탔다. 안전바가 내려오고, 롤러코스터가 코너를 돌며 느릿하게 올라간다. 당신이 손깍지를 껴 뒤통수에 댔다.

 

“네놈 자식 곧 생일이니까 신경 좀 써봤다.”

 

“...”

 

깜깜하던 주변에 빛이 들어왔다. 롤러코스터가 급격하게 속도를 내며 하강하더니 빠른 속도로 레일을 따라 오르내린다. 우주를 연상하게 하는 주변의 장식품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까 탑승 중에 크리쳐를 만나면 속수무책일 테니 그 전에 크리쳐를 처리하고, 타는 동안 주변을 보면서 기분 안 상하게 하려 시체까지 밖으로 치워버린 건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는데... 이 정도 수고를 할 가치가 있었을까? 괜히 번거롭게 한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졌지만 롤러코스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롤러코스터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뺨을 때리던 바람의 세기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다시 탑승장으로 돌아왔다. 옆에 앉아있던 당신이 일어나며 박수를 쳤다.

 

“세계 멸망하고 타니까 존나 재밌네~!”

 

그게 당신의 감상입니까. 멍하니 그 얼굴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한 번 더 탈건데, 네놈도 탈거냐?”

 

특유의 비릿한 웃음에서 장난기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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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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