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지나지 않은 이야기

2022. 11. 29 (7363자)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갑자기 추워지고 아침 바람이 시린 날. 본능적으로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날. 그래서 알람 다섯개를 모두 놓치는... 내가 미쳤구나. 책을 챙겨 전공관까지 달렸다. 20분 거리를 10분만에 내달려 건물 삼층까지 뛰어올랐다. 강의실 근처까지 발을 내딛은 순간 내 이름이 들렸다.

 

"서유진!"

"네!!"

 

혹시라도 안 들릴까 목청 높여 외쳤다. 출석부에 줄이 그일까 급히 강의실로 뛰어들었다. 교실 곳곳에서 장난스러운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반응할 기운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무리했다. 숨을 몰아쉬는 중에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야. 운 좋네?"

"죄송합니다."

 

바닥난 기력을 짜내어 대답했다. 이정인 교수님. 교수님까지 저를 놀리시다니.

 

앉을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색이 빠져 백금발이 된 긴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같은 학과 학생이다. 왼쪽이 비어 있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빈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지각을 다 하고."

 

금발머리 학생 오른쪽에 앉아있던 승우가 소곤소곤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섯번의 알람이 다 울리는데도 소리조차 못 들은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게으름 피운 것도 아니고 자느라 못 들었다니. 어제 무리하지도 않았는데.

 

"빠진 사람 많다?"

 

교수님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한껏 묻어나왔다. 나같은 사람이 많나? 평소보다 강의실이 많이 비었다.

 

"오늘 시험 힌트 많이 내줄거야.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점수 가져가."

 

필통에서 색이 섞인 펜을 꺼냈다. 재수없는 날이 될 줄 알았더니.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인 날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재수없는 날 맞았다. 교수님 컨디션 안 좋으신가? 오늘 강의력 무슨 일이야?

 

정치외교학과에서 강의력 탑으로 꼽히는 교수님이다. 가능한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는 교수님의 배려심 때문에 이분의 수업은 학부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안 그래도 현대 정치사는 난장판이라 힘든데 갑자기 이러시면. 안 돌아가는 머리로 교수님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다 포기하고 열심히 필기만 했다.

 

다른 학생들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시험 힌트를 주시기는 했는데 정말 힌트 맞나. 오늘 수업에서 말한 내용을 다 적으라는 문제를 하나 내겠다니.

 

"오늘 교수님 왜 저러시지?"

"그러니까. 지난 학기에는 이런 적 없잖아."

 

잊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배고파. 쿠키 반 조각이라도 먹고싶다.

 

"교수님도 교수님이지만 문제는 일 친 놈들 아냐?"

"그러니까. 사고 안 치면 이거 안 배워도 되잖아."

"안 귀찮나? 그냥 권력에 집착하지 말고 편하게 살면 될텐데?"

 

승우가 가벼운 불평을 던졌다. 그게 안 되니까 이 난장판이 났겠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저랬을걸? 평소 같았으면 거리낌 없이 대답 했지만, 옆에 계신 금발머리 유학생의 모국도 독재로 유명한지라 얌전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이정인 교수님, 점수 후하게 주셔."

"그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서술형은 싫어."

 

동감한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교수님도 50대잖아. 저 시기에 화염병 던지셨을까?"

"말하시는거 봐. 안 던졌어도 학생운동 했다는 건 알겠더라."

 

유학생과 승우가 떠드는 사이 가방을 다 챙겼다. 전에 들은게 있었는데.

 

"사회과학대에 있는 교수님 중에서 학생운동 안 한 사람 찾는게 더 빨라. 윤아진 교수님 피셜."

"나도 들었다. 윤 교수님은 민주화 세대 아닌데도 성향 확실하지 않아? 선배들 말로는 김도윤 교수님이랑 같이 자기 스타일 제일 확실하게 드러내는 교수라는데."

"난 처음 들어."

"밀레나는 2학기에 왔잖아. 1학기 종강총회에서 들은 이야기야. 그때 두 분, 사적으로도 사이 나쁘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 두 분, 전에 이정인 교수님이 호통친 젊은 교수님들이야?"

"어? 두 분 싸우려다가 이교수님이 연구실로 잡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밀레나도 봤어?"

"응. 전에 어떤 젊은 남자 교수님이 복도 뛰어가는거 보고 여자 교수님이 혀 차더라. 그걸 들었는지 남자 교수님이 혀 차던 교수님 죽일듯이 노려보던데? 타이밍 좋게 지나가던 이정인 교수님이 '자네들 뭐 하는 짓이야!'라고 호통쳤어."

 

이정인 교수님이 화를 내셨구나. 얼마나 싸워댔으면 저 인자하신 교수님이 그러셨을까... 아니다. 어느정도인지 짐작은 간다.

 

"그럴만... 하네. 두 분은 논문으로도 치열하게 싸우시더라."

 

레포트 쓰려고 참고자료를 찾다가 두 분의 논문을 봤다. 건조한 학술논문에서 서로의 멱살을 잡고싶어하는 모습이 보여서 신기했다. 토론도 아니고 논문으로 그렇게까지 싸울 수 있다니. 글이 그정도였다. 현실관계도... 납득은 간다.

 

"그걸 읽어?"

"이 수업 레포트 과제 있잖아. 그거 쓴다고."

"벌써?"

"미리 했어. 다른 수업 과제도 시험 직전에 마감이라."

"얘 수강신청 실패했잖아. 덕분에 1학년 2학기에 4전공 3연강~."

 

민승우 저걸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 시간표 대차게 망했다. 오늘도 이 수업 하나 들으려고 기숙사를 박차고 나왔고. 전공필수 아니었으면 진작에 드랍했다. 아니면 내가 오늘 하는 다른 수업 수강 신청만 성공했어도 전공만 네 개를 듣는 불상사는 피했을텐데...

 

"그거 러시아 대학에서 해봤어. 못할 짓이던데. 할만 해?"

"아니. 제발 날 죽여줘."

"넌 지난학기에도 망하더니 또 망하냐?"

"그래. 내가 정외과 대표 망한 시간표 장인이다..."

 

지난 학기에도 이번 학기에도 망한 시간표대회 일 등이 나였잖아. 선배들도 혀를 찼다고. 책 때문에 묵직해진 가방을 들고 전공관 밖으로 나왔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신경도 못 썼는데 날이 화창했다.

 

"우리 유진이, 다음 학기는 자신 있어?"

"하늘에 빌어 봐야지. 민승우 넌?"

"난 자신있지. 내가 수강신청 장인 아니냐. 티켓팅도 잘하고."

 

하여튼 자뻑은. 그런데 티켓팅? 잠깐 생각하고 나서야 떠올랐다. 몇 주 전에 밀레나가 유명 아이돌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도와달라며 용병을 있는대로 모았지.

 

"그때... 네가 모은 티켓팅 용병만 열 명은 넘었나?"

"응. 그런데 승우만 성공했어."

"그래~. 내 하나뿐인 재능이지."

 

슬쩍 민승우를 흘겨봤다. 말도 안되는 소리. 이 학교 들어온 시점에서 공부 머리도 인정받았으면서.

 

"너 공부도 잘 하잖아. 내일 봐."

"내일 봐."

"잘 가~."

 

친구들과 헤어져 캠퍼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떠들었다고 기운이 더 빠졌다. 배고파. 아침도 못 먹었어. 강의실에 꼬르륵 소리 안 났나 모르겠다.

 

빵 먹고싶다. 복습도 해야하는데 카페 갈까? 자주 가는 곳은 오늘 휴무일이지.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모르겠다. 이어폰을 귀에 끼웠다. 어디든 가자.

 

한참을 걷다 어느 건물 앞에서 멈췄다. 돌아본 곳에는 빵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최근 대학가 빵가게 인테리어 기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굳이 비슷한 모습을 찾는다면 시장에 있는 좁은 빵집 같은? 머뭇거리는 사이 맛있는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앉아서 공부하면서 먹을 수 있는 자리는 없을텐데.

 

"어서오세요."

 

홀린 듯 빵집 문고리 위로 손을 뻗었다. 문을 열었던가? 정신을 차리니 이미 빵집 안이었다. 언제 들어왔지? 배고파서 정신이 나갔나? 정신을 차리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파. 너무 세게 눌렀다. 욱신거리는 왼쪽머리를 애써 무시하며 빵 트레이를 찾았다. 그런데 트레이는 커녕 집게도 보이질 않았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부분의 빵이 진열대 안에 있었다. 직원 여러명이 진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저... 필요한 빵 제가 꺼내면 되나요?"

"원하시는 빵 말씀해주시면 꺼내드릴게요."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직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애써 불안한 기분을 무시하며 말을 건넸다.

 

"카스텔라랑 단팥빵 하나 주세요."

"카스텔라 묶음으로 드릴까요?"

"네."

"드시고 가시나요?"

"아니요. 포장해주세요."

 

직원이 빵을 가지고 오는 사이 가게 문 너머를 보았다. 창 너머가 흐릿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이유 모를 불안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신경을 분산하려 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이 파란색이야. 어머. 그렇네? 외국인? 아마도?

 

"이천삼백 원입니다."

 

찬장에서 빵을 꺼낸 직원이 빵을 봉지에 담으며 말했다. 잠깐만. 뭐? 이천삼백 원? 휴대폰 뒷면에서 카드를 꺼내려던 손이 멈췄다.

 

"... 네?"

"이천삼백 원입니다."

 

칠천 원 이상은 각오해야 하는 양이다. 현실적으로 이 가격에 빵을 판매하는 건 불가능하다. 원재료 값과 인건비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가격 아닌가?

 

애써 밀어둔 불안감이 다시 몰려왔다. 처음부터 이상하지 않았어? 비어있어야 할 건물에 순식간에 빵집이 생길 리 없잖아. 이런 인테리어를 하려면 며칠은 필요해.

 

지갑을 뒤적이다, 신권 지폐와 달러화 뒤에 잠들어있던 구권 몇 장을 찾았다. 어머니가 수집품으로 많이 모아뒀다면서 주셨는데. 설마 이걸 받겠어? 반신반의 하며 지폐를 내밀었다. 거스름돈으로 나온 지폐는 당연하다는 듯 구권이었다.

 

난 오랜만에 본다는 반응을 기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구권 지폐가 통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1983년이다. 신권지폐가 보편화된 건 내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였어.

 

"저, 손님? 혹시 외국에서 오셨어요?"

"네?"

 

뭐라고 대답해야 해? 복수국적은 맞지만... 잠깐 갈등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다. 일 꼬였을 때 외국인이라 말 못 알아듣는 척 하면 편하긴 하니까.

 

"이 주변에 경찰 많아요. 조심하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빵 봉투를 챙겨들었다. 주변에 경찰이 올 일이라고 해봐야, 오토바이 잡으려고 합동단속을 나오거나, 행사 때문에 파견되는 일이 전부 아닌가? 아니면 어느 미친놈이 학내에서 사고쳐서 조사하러 오거나.

 

"어제 옆 대학교 학생이 학교 밖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거든요. 뭔가 석연치 않아요."

"네. 고맙습니다."

 

그렇구나. 사람이 죽었으면 올 수밖에 없지. 이런 일이면 경찰을 조심하라고 말할 이유가 없는데? 살인범이 무섭다는 이야기라면 모를까. 왼쪽 이어폰을 귀에 밀어넣고 빵가게 문을 열었다.

 

당연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생경한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천 년대는 무슨. 기억에도 없는 옛날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본 적은 있나? 기억을 더듬고 나서야 떠올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 유명한 드라마 배경이 이런 모습이었어. 그제야 빵가게 인테리어가 왜 저런 모습인지 이해가 되었다.

 

잠깐만. 말이 돼? 지금 여기가 과거라고? 나 지금 수업 중에 졸고 있나? 휴대폰 볼륨을 쭉 올렸다가 귀가 터질뻔했다. 반사적으로 이어폰을 귀에서 뽑았다. 귀가 먹먹한 와중에도 눈 앞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공부한다고 정신 없어서 그 드라마 제대로 안 봤어. 이런 모습이 꿈에 나오겠냐? 하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게 꿈이 아니면 뭔데?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게 뭐야..."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상황부정이었다.

 

* * *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겉옷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다. 두툼한 과잠을 대충 접어 가방에 밀어넣고 단팥빵을 하나 뜯었다. 생각보다 크다. 평소였으면 아침으로 먹기 약간 부담스러운 양이지만 한창 배가 고팠던 덕분에 순식간에 빵 하나를 다 먹었다.

 

대충 허기는 달랬는데 이제 어쩌지.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당연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려다 멈췄다. 주변에 전화기를 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척 워치를 봤다.

 

'발신자 불명.

거기 가만히 있어! 금방 갈게!'

 

가만히 있으라니... 한숨이 나왔다. 한국인의 인내심은 짧은데. 누군지 몰라도 빨리 와서 집에 보내줘.

 

문득 시선이 닿은 곳에 신문을 파는 작은 노점이 보였다. 신문 종류가 대체 몇개야. 요즘 신문 가판대라고 해봐야 지역신문이나 학교신문 하나 들어가 있는게 전부인데. 신문을 쭉 훑어봤다. 한문이 섞인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내가 살면서 보는 한문 섞인 글은 아버지의 낡은 법전과 어머니가 찾아온 오래된 논문이 끝이라 생각했는데. 법전도 한글화가 진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이런 신문을 길거리에서 보게 되다니. 아까 받은 거스름돈 중 동전을 건네고 신문을 꺼내 펼쳤다.

 

동아일보. 1987년 1월 16일. 87년? 그것도 상반기? 잠깐만. 지난주 수업 내용이었는데. 민주화 운동의 정점이었던 시기. 당시 지식인 계층의 상징이었던 최상위 대학의 학생이 죽으면서 크게 불이 붙어버린... 1월 15일에 벌어진 고문치사 사건을 기점으로 87년의 모든 일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졌었다. 설마. 시선을 돌리자마자 대학교 정문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신문을 구겼다. 야단났다. 하필이면 폭풍전야의 대학가야!

 

열이 너무 올랐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좋게 생각하자. 고문치사라는 사실이 밝혀진 날은 19일이다. 그때 취재 결과가 제대로 터져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졌다고 했어. 그러니 아직은 괜찮을거야. 숨을 조금 들이켰다.

 

"거... 괜찮습니까?"

"네? 네."

 

안색이 많이 안 좋았나. 신문 가판대에 있었던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기사가 섬뜩한 내용이라 놀랐어요."

 

최대한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가판대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사복경찰 때문인가? 잠시 뒤, 아저씨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렸다.

 

"원래 이동네가 좀 그렇습니다. 툭하면 학생들이 시위한다고 휴교도 해요."

"음...열정적이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지도 않다. 걸리면 끌려가겠지. 권력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생명까지도 우습게 여기던 시대였다. 정권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쯤은 권력이 겨눈 칼 끝에 목숨을 위협당한 적이 있었으리라. 문득 헌법 교수님 들려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시대였다고. 자기도 끌려갈 상황에 영장 가져오라고 했다가 매만 벌고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하셨던가.

 

"오늘 동아일보 많이 나갔네요?"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신문 한 장을 꺼냈다. 약간 다르지만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게 누구야. 유성이?"

"유성이는 강의 들으러 갔어요."

"유준이구나?"

 

익숙한 이름이다.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 얼굴을 본 순간 깨달았다.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본 아버지의 얼굴과 똑같다. 놀란 표정을 가리려 구겨쥐었던 신문을 다시 펼쳤다.

 

"교수님과 1대1 강의 유성이 차례냐?"

"네. 동기들에게 뿌릴 필기 사본까지 만들어 오겠다고 갔는데...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금방 포기하고 자기 필기만 들고 나오겠군."

"안 봐도 뻔해요. 또 내가 유성이 등짝 때리고 대신 만들겠지."

 

목소리에서 장난스러움과 신중함이 묻어나왔다. 세월의 흐름을 맞지 않은 목소리는 정말 이런 빛을 띄고 있었을까.

 

시선을 피해 한문이 섞인 신문을 눈으로 읽어내렸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글을 잘 안 읽어서 그런지 읽기 어려웠다. 번역기가 아주 절실하다. 여기서 휴대폰 꺼내면 이상한 시선이나 받겠지. 더듬더듬 읽어 내려갈수록 있어서는 안 될 시공간에 떨어진 이방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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