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을 쫓아서 11화 중 일부

2023. 07. 08 (3380자)

현 바이올린과 1등, 한재현이 한국에 오기 전의 일이었다. 첫 콩쿠르부터 세현예고 입학 실기 시험날까지. 대회에 나갈 때마다 세기의 천재, 이유현과 얼굴을 맞대곤 했다.

 

"또 같은 결과야?"

"언제나처럼."

 

처음 만난 대회장에서부터 마지막으로 봤던 세현예고 실기장까지. 유현이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결과는 늘 뻔했다. 부모님도 나도 갑갑했지만 어쩌랴. 처음 만난 날부터 '저놈은 진짜다'라며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얼핏 들어도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다 알 정도였다.

 

천상계와 지상계의 차이를 귀에다 때려 박는 수준. 신이 내린 재능을 가진 사람이 미친 듯이 노력한다면? 게임 끝. 조작이라도 하지 않는 한 누가 손을 쓸 수 있겠는가. 나와 부모님은 그런 짓을 할 정도의 인물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결과는 항상 같았다. 나가는 대회마다 1등은 이유현.

 

이렇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으니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내면서도 이유현과 트러블이 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등으로 올라오는 데만 오 년이 걸렸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입상권에 들어갔다. 그 이후는 쭉 같은 결과였다. 일 등 이유현. 2~3위권은 치고박는 싸움. 나는 잘 하면 이 등이고 삐끗하면 입상권 아래까지도 내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 대회가 아닌 곳에서 이유현을 밀어낸 적이 있었다.

 

"이번 연주회는 한시현에게 악장 역할을 맡기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 네?"

 

중학교 2학년 오케스트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대표하는 자리는 제1바이올리니스트가 주로 맡는 직책이다. 그때까지는 이유현이 이 자리를 도맡아 왔는데, 나에게 기회가 왔다.

 

"왜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나요?"

"아니. 그 반대야. 항상 잘 해왔지."

 

제1바이올리니스트, 이유현의 실력에는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지휘자의 괜찮은 통솔력과 악장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잘 맞물려 결과물은 항상 좋았으니까. 유일한 문제는 악장의 성격이었지. 좀 잘 대해줬으면 몰라. 실수가 한 번 나올 때마다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 하. 다들 너 같은 천재가 아니라고 조금만 참아 보라고 얼마나 사정사정했는지.

 

"이번 대회가 끝나면 3학년들은 전부 졸업하잖아. 그 김에 변화를 주고 싶어. 그간 독주에 힘을 많이 주는 구성이었지? 이번에는 앙상블 위주로 채워보려고."

 

그때 이유현의 표정이 꽤 놀라웠다. 언제나 세상이 자기 것인 듯 당당하고 여유롭던 표정이었는데 처음으로 그게 깨졌다. 검은 눈동자는 그 짙은 색깔이 감정을 잘 숨겨줬지만 녹빛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해서 은은한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당연하게 자기 자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한시현이 적임이라고 생각했다. 그간 유현이 많이 도와줬다며? 어때. 해볼..."

"기회를 주세요."

 

거절할 이유 따위 없었다. 이유현만큼 제1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까? 아니. 하지만 악장이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친구들의 소리를 조율하는 일은 내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내 독주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해내고 말리라. 천재적인 연주를 해낼 수는 없어도 오케스트라에 녹아들 수 있는 소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할래요."

 

그때는 그 기회를 너무 잡고 싶었다.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었던 관계로 단원 투표가 진행되었고, 압도적인 표차로 그 연주회에서는 내가 제1바이올리니스트의 역할을 맡았다. 연주회 준비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도 그다지 많진 않았다. 평소대로 친구들과 지휘자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소하게 신경쓰이는 것들을 조율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유현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으니 한 번만 눈감아달라는 조언이나 신호를 보낼 정도의 사이는 되었는데. 그게 언제었느냐는 듯 냉랭한 태도가 꽤 큰 상처로 다가왔었다.

 

그래도 오케스트라 운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우현이는 지휘자 선생님의 지시를 잘 따르는 편이었고, 음악적인 감각이 뛰어난 편이어서 굳이 지적할 것이 없기도 했으니까. 서운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변한 건 이유현의 태도만이 아니었다.

 

"한시현! 너 이번 주말에 콩쿠르 나가?"

"응. 거기 입상 기록 입시에 반영된다고 해서."

"이유현도 나온다던데."

"그래? 같은 학교 준비하나."

"유현이 없으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너, 걔 이겨보고 싶은 생각 없어?"

"그건 왜?"

"얼마 전에 악장 자리 망설이지도 않고 하겠다고 하길래."

 

없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바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가능성이 너무 희박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

 

"별 생각 없어. 매번 아무한테도 안 진다는 각오로 덤비고, 결과 나오면 현실 인정하면서 살아서."

 

대수롭지 않게 던졌던 이야기가 어떻게 변형이 되었는지. 졸지에 이유현과 대립 구도가 생겼다. 걔만 없으면 한시현이 일 등이라는 비아냥과 뒷담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누가 일 등 하고 싶대? 너희 때문에 자리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차서 다른 꿈은 꾸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들었다.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변의 이야기가, 어쩌다 가지게 된 기대감이 나에게 얼마나 크게 자리 잡았는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 입시 때려치울까?"

"뭔 소리야? 실기시험은 치고 이야기해."

 

숨이 막혀서 당장 바이올린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놓고싶다고 울었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입시까지는 치라는 잔소리였고... 덕분에 어떻게든 악기를 잡았다. 그렇게 콩쿠르는 물론 세현예고 입시 시험날까지 달렸다.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대로였다.

 

'수석, 이유현.'

 

"야...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겨보냐."

 

나는 차석이었다. 그때 어땠더라. 기대한 것보다 잘해서 기뻤고, 이유현이 부러웠고, 한편으로 후련했고...

 

"이게 너랑 나의 차이야."

 

여기에 당사자가 싸늘한 대답을 얹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옆에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욕심 없어 보이는 척 하더니?"

"한 번쯤은 꿈꿔보고 싶었어. 널 넘어서는걸 목표로 삼지 않은 사람 찾는게 더 어려울걸?"

"그래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비아냥 섞인 말투에는 도발하려는 의도가 가득 담겨 있었다. 충분히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는 속상하고 억울했다.

 

"하다 보면 견적 나오겠지."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치고받다 보면 내가 얼마나 더 잘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도망이나 치지 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안 도망가. 삼 년 더 보자."

 

알면서도 나는 싸움에 응했다. 하지만, 먼저 싸움을 건 당사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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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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