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날씨다. 모용주뢰는 잠시 하늘을 봤다가 정원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평소모습 그대라 기분이 묘하다. 좀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익숙한 정원의 나무 사이로 정자가 보이고,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나뭇잎들이 어울린다고 매번 생각하게 된다.
걸음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하다. 생각해보면 그의 뒷모습을 볼 일이 별로 없었구나. 자신은 언제나 그의 앞모습, 아니면 발끝을 보는 편이었고 오히려 그가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편이었지.
“뭐 해요? 이리와서 앉아요.”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오랜만에 마주 앉아 본 그의 얼굴은 담담하게 보여서 입안이 썼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나요?”
“아뇨, 아직 시간이 멀었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침묵이 어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침묵을 즐길 시간이 거의 없기에 주뢰는 고공을 불렀다. 네, 하고 덤덤히 대답한 고공이 고개만 살짝 기우뚱하더니 다시 웃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습니다, 주뢰. 평소처럼 구세요. 웃어도 좋고.”
“친우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웃습니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는 웃어야죠. 나라를 좀 먹던 폭군이 드디어 죽는데 박수 쳐야할 일 아닙니까.”
태연하게 말하는 친우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너무 무거워 보여서 벗겨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농담합니까? 친우의 죽음을 앞에 두고 웃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반란군의 수장이라면 폭군의 사형에는 웃어야죠.”
“농담이 과합니다. 당신이 잘못한게 어디있습니까?”
“있죠. 왕좌에 앉은 이가 아무것도 못했으니 그게 잘못이죠.”
그것이 잘못이라면 후계자 없이 죽은 선왕도, 그 선왕과 한 번 연을 맺은 여인의 아이라고 확실하지 않으면서 데려온 아이를 왕좌에 앉힌 이들도, 그가 아무것도 못하게 막은 이들도 잘못이지 않나. 자리에서 일어난 고공이 정원 한 구석에 심겨진 묘목으로 다가 가 물뿌리개를 집어 들고 물을 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이제 쑥쑥 자라기 시작하는 나무는 저대로 큰다면 아마 앞으로 2, 3년 뒤에는 꽃이 피지 않을까 싶다.
나무는 함께 심었는데 꽃이 피는 걸 함께 보지 못한다니. 주뢰는 결국 품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어요, 고공.”
“사형은 누가 당하고요? 대타라도 구하셨습니까?”
“말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습니다.”
“됐습니다. 난 언제나 사람들을 믿지 못했고 미움 속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 걸요.”
“진작 당신을 그 왕좌에서 내려오게 해야했는데 말입니다.”
“귀족들이 그렇게 뒀을리가 없잖아요.”
“시도는 해봤어야 했는데 말이죠.”
“반란군 간부가 그런 말 하다니 웃기네요.”
“반란군에 자금을 몰래 댄 왕에 비하면 별 거 아니잖아요.”
“어라, 알고 있었습니까?”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다. 떨리는 친우의 손을 잡아주면서 모용주뢰는 긴 숨을 토해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무엇을 선택할지, 친우를 설득할지 열심히 생각을 이어간다.
“우리 바다에 가기로 했잖아요.”
“다음 생에는 바다에서 만나는 걸로 하죠.”
“미안합니다.”
“사과는 됐고 남은 시간 동안 이야기나 해주십시요. 궁 밖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마지막 명을 받듭니다, 폐하.”
하하,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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