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유년기의 끝에 대하여 .2

훈련을 하고, 임무에 나가고, 다시 비는 시간에는 훈련장에 나서거나, 아레나에 도전하는 것이 전부인 일상. 스위치를 내리듯 까무룩 잠들어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거나, 누군가 일으켜 주기 전까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강화 인간의 수면 기능. 인간답지 못한 그것을 혐오했기에 그는 잠들기를 거부했다. 쉬지 못하는 뇌를 이끌고 인간답지 않은 것을 피하려 인간답지 못한 일을 행했기에 자연스레 그에게 여유 시간은 많았다. 길고 휴식없이 이어지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매일, 그 시간들은 길게 늘어져 흐르는 것 같지 않게 느껴지면서도 착실히 흘렀다. 그가 틀어박힌 사이에도 들개는 간단히 태양을 향해 솟구쳤다. 그가 악에 받혀 소리질러도 간극은 메워지지 않는다.

미시간의 손에 끌려가 아이스 웜에 대한 브리핑 자리에 강제로 앉혀졌을 때,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저 녀석은 B등급, 저 녀석은 A등급. 가뜩이나 난이도 높은 임무에다가 이곳에 선 이들 중 중하위 성적을 기록한 사람은 그 자신밖에 없다. 있으나 마나 한 들러리. 그게 그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역할의 전부일 터였다. 어차피 주인공은 정해져있을 무대. 그 무대의 배경으로나 쓰일 것이라면 차라리 그럴 시간에 훈련이나 더 하거나, 아이스 웜 파괴와 동시에 진행될 다른 전장에 투입되는 것이 건설적일 터였다. “난 빠지겠어.”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미시간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다. 씩 웃으며 등을 떠밀어버리는 미친 노인네. 미시간은 결코 그가 바라는 대로 해준 적이 없었다.

끝내 코랄 집적지로 가는 길목이 열리고, 레드 건은 간만에 들뜬 분위기가 찾아왔다. 본질적으로는 코랄의 채굴을 위해 파견된 부대였으니, 곧 이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본성으로 돌아가 짧은 휴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술렁이는 듯 했다. 그에겐 돌아갈 고향 행성 따위의 따뜻한 곳 따위는 없었지만 루비콘을 떠나면 더 이상 이 곳에서 마주친 지긋지긋한 인연들을 더는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주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나 다름 없는 워치 포인트의 탐사 임무. PCA의 보안 시스템으로 인해 정체된 심도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후방에서 뒤쫓아 올 타 세력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전혀 반갑지 못한 손님이었다.

그가 쓰러져있던 사이, 레드 건은 궤멸되었다. 레드 건의 정신적 지주이자 용의 머리인 미시간은 당연스럽게도 죽어있었다. 이구아수, 그는 미시간을 꺾기 위해 7년을 매달려왔다. 아직도 먼 일이라 생각하였음에도 끝에서 그를 꺾는 것은 자신이었어야 했다. 자신이어야만 했는데, …미시간, 그는 자신에게 있어 자신을 지옥에 처박은 원수였는가, 사람 구실을 하게 배경을 대어 준 은인이었는가? 혼란스럽다. 무엇이 정답이었는지 죽은 친우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복수를 가로채인 시점에서 그가 해야할 것은 하나였다. 빼앗긴 복수에 대한 복수. 레드 건 몫의 시체와 고철더미가 전부인 공동의 잔해를 뒤져 부품을 뜯어낸 그는 자신의 기체를 간신히 제 기능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수리해냈고, 들개의 뒤를 쫓아 홀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기묘하게도 망가진 것이 분명했던 통신 회선을 뚫고 나타난 메시지의 이정표를 훑어보면서.

그렇게나 노력해 왔는데, 끝내 닿을 수 없는가. 끝끝내 살아남은 자신의 질긴 명줄을 저주하며 완전히 부서져 고철 폐기물로나 다시 쓰일 헤드 브링어를 뒤로하고 맨몸으로 나선 심도. 들개도 어디로 홀연히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고, 기절했다 깨어난 정신은 오히려 이전보다 침착했다. 미시간은 죽었고, 우 화하이도 죽었고, 다른 레드 건들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심도로 함께 향했던 인원들 중 남은 AC 파일럿은… 레드. 후방을 맡았던 그와 같이 레드 건의 본대가 아닌 다른 위치의 통로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녀석. 그 녀석을 찾아 함께 발람의 베이스 캠프로 돌아간다. 이 개미굴에서 먼저 빠져나가고,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게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끝. 완전히 끝이다. 레드 건의 종지부는 여기서 맺어진다. 그는 제 목에 걸려있던 인식표를 뜯어 던지고 천장으로 막힌 지하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가, 정처 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발자국 하나 하나에 레드 건의 이름과, 남겨졌던 인식표들과, 그동안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다가, 끝내 틀어보지 못한 녀석의 마지막 통신 로그가 후회로 남았다. 그는 계산이 빠르다. 레드 건이 궤멸한 이상 그들의 베이스 캠프는 이미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 뻔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없고, 희망이라는 것은 한번 저지되니 더 품을 가치가 없어보였다. 그리고, 악마는 그런 틈을 파고들어 찾아오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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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하냐냐 창작자

    매번 더 나은 걸 드리고싶습니다만 자가복제밖에 안 되는것같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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