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은 최근 본인이 겁이 많아졌다 생각했다. 지켜야할 것이 많아진 순간부터 그녀는 예전처럼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몸을 던지는 것도, 싸우는 것도, 자신을 희생해가며 전투를 빠르게 끝내는 것도 모두 지킬 것이 없었을 때보다 어려웠다. 그녀의 작은 애인-이라고 하지만 제법 거대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1년이란 유예기간 동안 어떻게 그를 현세에 붙들
이수진이 누구인가?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동시에 가진 기묘한 이상성애자, 한마디 말도 없이 정해진 대로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냉혈한, 그러고서 남편의 복수를 할 때는 줄줄 울었던 미친 여자.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녀는 모순적이었다. 수진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경아는 그런 수진을 바라보았다. 짧은 곱
시작은 아버지가 주식투자를 아주 크게 실패한 것이었다. 수진은 당시 공부도 잘하고 인망도 좋은 열아홉살이었다. 막 대학에 가야할 나이에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은 것이다. 물론 수진은 등록금으로 쓰기 위해 아껴놓은 돈이 있었다. 하지만 아래로 두 명 있는 동생들을 보면 차마 제 알량한 지식욕 하나 채우자고 그 어린것들 밥을 굶길 순 없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빨리 찔러. 그 애를 찌르는거야. 그에게 복수해 우리의 복수를 해 네가 해야해 우리를 모두 죽인 그 여자에게 복수하는거야 귓가를 스치는 잡음에 백조희는 눈을 감았다. 그 악당이 왕자가 아니면 어떡할래. 인간이 되어버린 인어라면 어떻게 할거야? 혼자 아가미 없이 마른 수조를 견디고 있었다면 어쩌려고. 여자의 요람에서 여전히 바다 비린내가 나고 짠 눈
이수진은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냈다. 살점과 함께 시뻘건 덩어리가 밖으로 훅 튀었다. 그런 두수의 한쪽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신주림이었다. "주림아...." "왜 불러?" "인생이 원래 이렇게 비참하냐." 그녀의 말에 주림은 피식하고 바람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새삼스럽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다에 사람 하나 공구리치
たった1つの想い 파도가 치는 고동에 맹세해요 모두 불타오를 때까지 계속 달려요 ─달칵.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는다. ‘아, 아---’ 따위의 어색한 소리가 들린다. 그녀다. 과거의 그녀가 오늘의 당신을 만난다. 이윽고 말을 시작한다. 「 전략. 테이프를 듣고 계실 시각에선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전의 날이 목전에
Fluquor 언젠가 이 추억은 네 손에 춤추듯 내려앉아 닿으면 녹아가겠지, 생명의 상냥함으로 왜 국가 안보 특수 전투대대에 지원을 하셨나요? 국가안보와 사회안정을 위해 지원했습니다. 악마와 마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간도 인간을 죽입니다. 악마도 악마를 죽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 해가 되는 존재인가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종말론
Gnossienne No. 4 비명의 악마는 ‘말’을 가져간다. 단순히 소리를 못 내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가로서 바치는 말은 ‘안녕’, ‘고마워’, ‘사랑해’ 와 같은 표현들이다. 빼앗긴 말은 글이나, 외어(外語)나, 수화로도 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말을 빼앗긴 계약자는 언어를 잃는다. 그저 울부짖으며
Gymnopédie No. 2 1999년의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이에 그녀가 1995년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1999년 12월 24일. <국립발레단 극장 붕괴 사건>.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1999년 12월 25일. 종말의 악마야. 발레리나, 너는 그를 죽일 유일한 사람이야. 크리스트교에서 녹(綠)은 악
Gymnopédie No. 3 ─백조희. 발레에 조예가 있다면 그녀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수 많은 공연에서 얼굴을 비추고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샛별같은 발레리나. 무대 위의 그녀는 아름답게 웃고, 비극적으로 울고, 사뿐히 날아올랐으며, 그녀의 몸짓에 모든 이가 감탄하고 눈물을 흘렸다. ─1995년. 국립발레단, 크리스마스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