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나의 너에게

사랑했던 나의 너에게 上

네임리스 X

TAKE OFF-ER by 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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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오는 가끔 생각한다. 차라리 내가 다쳤다면 좀 나았을까? 알 수 없다. 차라리 그랬다면, 마음은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시오.”

“응? 쿠로, 나 괜찮아. 아~…, 뭐. ……이제 피겨는 더는 못하겠지만.”

나는 그냥, 웃었다. 객관적으로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닌 걸 내가 알고, 쿠로오가 알고, 켄마가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냥 웃었다. 웃음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그냥 웃음이 났다.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걸 빼놓고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떡하지, 쿠로? 나 이제 뭐 하고 살지? 피겨가 없는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누구에게 어떤 위로를 들어도 도저히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쿠로가, 켄마가 대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모르겠다. 사실, 내 표정마저도 어땠는지 모르겠다. 쿠로가 드물게 나 대신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걸 보면, 역시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나 보다.

“왜 그런 표정이야? 나 진짜 괜찮다니까.”

쿠로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쿠로가 미안할 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켄마는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다 떠났다.

보쿠토 씨도, 케이지도 나를 보러 왔다. 보쿠토 씨는 가만히 나를 보다가, 본인이 사과했다. 왜? 알 수 없다. 뭐가 미안한 건지 모르겠다. 케이지도 나를 빤히 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꼭 메일 보내라며 몇 번을 당부하고 떠났다. 나는 그냥 웃었다.

……아, 그래. 나기 선배도 나를 보러 왔다. 나기 선배에게만큼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선 울어도 나기 선배 앞에선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그냥 웃었다. 미안하다고 말했던가? 나기 선배는 잔뜩 울 것 같은 얼굴로 애써 웃으면서 푹 쉬라고 한마디 했다. 아, 그리고 나기 선배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실이 1인실로 업그레이드됐다. 쿠로는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나를 보러 왔다., 부활동 하러 안 가? 물어보면 쿠로는 내게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쿠로는 배구를 사랑하잖아. 쿠로는 잠깐 허공을 한 번 봤다가, 다시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시오. 물론 배구도 중요하지만, 나한테 너희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 말엔 조금 감동받았던 것도 같다. 켄마도 가끔은 아니지만, 자주 날 보러 왔다. 켄마가 와서 하는 건 그냥, 와서 게임, 정도. 아, 내 말동무도 해줬다.

그런데 치이만큼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나는 치이가 궁금했다. 치이는 뭘 하고 지낼까? 잘 지내고 있나? 네코마 시험 기간은 언제지? 나는 치이와 오래 알고 지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애에 대해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래도 쿠로보단 켄마가 치이를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켄마가 올 때마다 치이는 뭘 하고 지내냐고 물었다. 그러면 켄마는 나를 한 번 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대답해주곤 했다.

“치이는 안 와.”

이유라도 알려주지. 내가 피겨를 못하게 된 게 치이에게 그렇게 큰 상처였을까? 아니면 피겨를 하지 못하는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까? 알 수 없다. 치이를 볼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제 한동안은 이 병실 밖으로 더는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한 번쯤 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중에야 치이가 내 미래를 알고 있단 걸 알았다. 정확히는, 치이가 알던 미래에 내가 다치고, 피겨 스케이팅을 부상으로 관두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애는 이유 모를 죄책감에 차마 나를 찾아오지 못한 거다. 그런 거 상관없는데. 나는 그냥 네가 보고 싶을 뿐이었는데. 네가 나를 한 번만이라도 보러 와 줬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괜찮아졌을까, 치이?

어느 날, 쿠로가 부모님과 함께 찾아왔다. 쿠로는 그 옆에서 자기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부모님은 나를 한 번, 쿠로를 한 번, 보더니 희미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시오 쨩, 네코마로 갈래?

나는 다시 웃었다.

네코마로 갈래?

그 말이, 마치 내게는 ‘너는 다시는 피겨를 할 수 없다’고 선고하는 것 같았다.

판결은, 사형이었다.

 

네코마로의 전학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학교 측에서도 내 편의를 봐줬고, 케이지랑 나기 선배는 정말정말 아쉬워했지만 이 결정에 내 의사가 거의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의연하게 나를 보내주었다. 나는 정작 학교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반 친구들은 내게 롤링 페이퍼를 써 줬다. 전달은 당연히 케이지가 했다. 나는 그걸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별 감정이 들진 않았다. 감수성이 메마른 건지 이걸 고맙다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내가 망가진 건지 감이 안 왔다. 읽어봤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다시 네가 피겨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그건 내가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건데.

케이지는 그걸 전해주고, 금방 떠났다. 이걸 전해주려고 부활동에 늦게 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왔다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너는 배구를 잃지 않았잖아, 케이지.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잖아.

쿠로. 내가 만약 너한테 배구를 하지 말라고 한다면, 너는 그래줄까? 하지만 나는 그걸 쿠로에게, 배구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쿠로에게, 말할 자신까지는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지금의 쿠로는 내가 배구를 관두라고 하면 관둘 테니까. 나 때문에 빛나지 않는 쿠로를 보는 건, 나로서도 그리 달갑지 않으니까.

내가 없는 곳에서도 수속은 금방이었다. 나는 이제 후쿠로다니 학원 학생이 아니라 네코마 고교 학생이 되었다. 대체 언제 한 건지,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배구부 소속이란다. 아마 켄마가 한 거겠지? 그 애는 생각보다 훨씬 세심하니까.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스포츠 같은 거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재활은 한참 후에나 할 수 있다던데. 내가 올해 열다섯이니, 기적적으로 1년 안에 재활을 끝낸다 치면, 열여섯. 그럼 그때부터 다시 피겨 연습을 해서 다시 1년 만에 복귀한다 치면, 열일곱. 시니어로 올라갈 수 있는 나이긴 하지만… 내가 참가 신청을 하면, 초청이 될까? 나를 ‘복귀 선수’로서 봐 주나? 아니면, 그냥 주니어에 잔류해야 하나? 그렇다면 나는 일본이 내게 출전권을 써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일까? 주니어에 올라간 후로 단 한 번도 국가대표를 놓친 적은 없지만, 그래봐야 2년이다. 나보다 뛰어난 선수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돌아간다 해도 체형 변화가 왔을 거고, 당연히 기량은 한참 떨어졌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피겨 선수로서 다시 살 수 있는 방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게 조금 서러워서.

울었나?

모르겠다.

이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날은 쿠로를 병실에 못 들어오게 했다. 쿠로를 보면 쿠로에게 비난의 말을 잔뜩 쏟아낼 것 같아서. 쿠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이건 그냥 피치 못할 사고였을 뿐이고, 쿠로도 거기에 휘말린 피해자니까. 가해자는 아무도 없는데 내가 쿠로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쿠로는 분명히 죄책감을 느낄 거다. 그 애는 다정하니까.

휠체어에 앉을 수 있게 됐을 때쯤, 의사 선생님을 보러 갔다. 말로는, 왼쪽 발목의 뼈가 아예 박살이 난 걸 맞추느라 수술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아마 한동안은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 거라고 했다. 슬쩍 피겨 복귀 이야기를 꺼냈다가 10분 동안 혼났다.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할 수도 있는데 지금 피겨가 중요하냐고.

그럼 안 중요해요? 내 인생에서 이걸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데? ……라고 말하려다 관두고 그냥 웃었다. 나 어쩐지 다친 후로부터 웃음이 엄청 많아졌는데. 그래도 웃는 게 우는 것보단 나으니까. 내가 울었을 때 애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괜히 불편하다. 그러니까 이게 더 좋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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