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후 100년
당보청명 생환검존 환생당보 / 역키잡 성공을 위한 당보의 분투기
아보야, 아보야. 너 게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테냐.
아보,
그는 곧잘 다정한 목소리로 저를 그리 불러왔으나 이번은 달랐다. 미련하구나, 타박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이젠 신물이 난다는 것처럼 들려와 듣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시비들을 전부 물린 그의 침소 앞, 적막한 복도에 우두커니 한참 서 있던 시간이 일 시진이었다. 자신이 여기서 이러고 한참 서 있는 걸 그의 뛰어난 기감으로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알아도 진즉에 알았을 터. 여태 모른 척 외면하다가 이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말을 걸어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열어버리고 싶은 문을 사이에 두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당보는 최대한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애처롭게 들리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네 어르신, 저 여기 있습니다. 한참 전부터 어르신께서 저를 들여보내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
“…그래? 그것 참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그렇습니까? 그러나 요 며칠 간 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으시더니, 이제야 그리 다정하게 저를 불러주셨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단 생각이 듭니다. 이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 마디를 지지 않는구나. ”
“당신께서 고집불통이시니, 어린 제가 할 수 있는 건 맹랑하게 입을 놀리는 것 뿐입니다. 이마저도 어르신께서 저에게 허해주시니 가능한 것이지만요.”
그러자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냐? 그렇다면 내 더는 허락해선 안 되겠구나. 아해는 한참 잘 시간이 아니더냐? 네 침소로 돌아가. ”
“…싫다면요? 이젠 제 얼굴도 보기 싫으십니까?”
당보는 평온한 척 꾸며냈던 제 목소리에 점점 퉁명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을 느꼈으나 애써 감출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처럼 굴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문 너머 저이는 자신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해, 그 이상으론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진짜 안 보고 싶어? 그럴 리가 없을텐데? 보고싶어 죽고 싶으실 지경이실텐데. 지난 십 수년간, 그가 자신을 얼마나 어여뻐 했던가. 금지옥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혀 안에 당과같이 구니 너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늘 저에게 그리 말해주지 않으셨던가. 근데 어떻게 사람의 태도가 이리도 손바닥 뒤집히듯 뒤바뀔 수 있는건지, 당보는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어르신,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어르신께서 저를 아끼시는 것을 압니다.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아는데 왜 외면하려 하십니까? 뵈지 못한 나날들이 길어질수록 이 당모는 시름이 깊어져 지금 침소에 가도 잠에 들지 못합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그 말이 참 맞는 말입니다. 어르신 곁에서만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으니 들여 보내 주십시오.”
“네 나이가 몇인데…!!”
“제 나이가 몇이긴요? 제가 몇 살을 쳐먹건 간에, 어르신 품 아니면 잠들지 못하는 아해밖에 더 되겠습니까? 저를 그리 대하고 계시잖아요.”
이젠 오만불손하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집안 어른들이 옆에서 듣고 있었다면 혓바닥이 길다며 진작에 경을 칠 대화였다. 그리 생각하는 건 문 너머 그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거칠게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쿵 쿵 발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당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시겠구나.
부서트릴 기세로 살벌하게 미닫이 문이 열리고, 당보의 시야 아주 조금 아래, 하얀 백발을 길게 아래로 묶은 남자가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꽉 깨문 채 나타났다. ‘어르신’이라고 불리기엔 이립과 불혹 중간쯤 돼 보이는 풍모의 사내. 그의 투명한 피부가 달빛 아래 하얗게 질려있었다. 옅은 눈가의 주름과 홍매화빛 눈동자에 가득 차 있는 수심의 깊이가 남자가 살아온 세월이 그리 짧지도, 녹록치도 않았음을 가늠하게 할 뿐이었다. 꽉 다물려 있는 남자의 입매 끝엔 딱딱한 노기가 가득 뭉쳐있었다.
누군가 그 표정을 보았다면 당보가 당장이라도 찢겨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테지만, 눈에 뵈는 게 없는 당보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좋아 올라가는 입매 끝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시네요.”
“당장 꺼지지 못해?”
“어째서요?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보고픈 얼굴을 보여주셨는데, 제가 쉬이 그러겠습니다. 하겠습니까?”
한 마디도 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당보의 대답에 와락 미간 사이가 일그러진다. 이제 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차 하는 사이 쫙 벌어진 무지막지한 손아귀가 눈 앞을 덮쳐왔다. 순식간에 멱살이 잡힌 당보는 고꾸라질 뻔 한 것을 가까스로 그의 어깨를 잡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따귀 맞는 것부터 각오하고 있었던 당보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떴다가, 이내 숨 쉬는 것도 잊고 몸을 굳혔다. 끌어잡은 멱살을 좀 더 세게 잡아당기며 당보의 목덜미 깊이, 그가 코를 박고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있었다. 한 대 맞겠구나 싶었는데 예상과는 영 다른 전개에 당보는 눈을 끔벅였다. 이대로 끌어안아도 될까? 당보는 고민했다.
“너….”
“…..네?”
“뭘 쳐 바르고 온게야.”
킁킁, 코 끝을 찡긋거리며 그가 당보에게 답을 요구해왔다. 뭘 바르고 왔느냐고? 당보는 자신의 침방을 나서기 전, 정성들여 목욕을 했다. 그리고 그윽한 향이 일품인 매화 향유를 몸 구석구석에 발랐다. 왜 발랐느냐고? 그야, 연모하는 이의 침방으로 저를 받아들여 주십사 청하러 걸음 하는 것인데 이정도 정성은 쏟아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이 암향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그의 향기이기도 했다.
“향이 좋지요? 이 향을 묻히고 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하실까 하여 바르고 왔는데요.”
하, 어이없다는 듯 또 혀를 찬다. 기가 차 죽겠다는 그 반응은 각오했던 바여도 역시 내심 상처받는다. 시선에도 온도가 있다면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차가운 시선은 북해빙궁의 빙정이라도 만들어낼 기세였다.
“도대체 내가 너의 무엇에 동해야 한단 말이냐.”
그가 물어왔다. 매섭고 준엄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참 사람 마음을 칼날로 찢어놓는 듯한 비수같은 한 마디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참으로 궁금합니다. 당보는 한숨을 내 쉬었다. 그 답을 알 수만 있다면 심장이라도 내놓고 싶은게 지금 제 심정인데. 그래서 당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제가 묻겠습니다. 100년 전엔 저의 무엇에 그리 동하셔서 함께 운우지락을 나누셨답니까?”
“………..”
“좀 알려주시지요.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정하게 굴지만 마시고 제게 좀 알려주시지요.”
“…진정 몰라서 묻는 게냐?”
“네,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르신… 아니, 이 호칭도 이제 집어 치울랍니다.”
안 되면 이판사판이다. 수청을 들게 해달라는 청을 퇴짜 맞은 것만 오늘로 몇번째인지. 복수하는 심정으로 당보는 그가, 청명이 가장 질색하며 듣기 싫어하는 그 호칭을 입에 담았다.
“형님, 이 아우를 더는 사랑하지 않으세요?”
당보는 안 그래도 하얬던 청명의 낯빛이 더욱 희게 질려가는 것을 보았다. 청명에게 멱살이 붙잡혀 목이 졸려지고 있는 건 자신인데, 안색만 보았을 땐 청명의 숨이 죄여지는 중인 것 같았다. 퍼석하게 마른 입술이 달싹거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렸다. 명백하게 동요한 청명의 낯을 당보는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당보야, 보야. 그가 저를 예전처럼 그리 불러주길 바랐다. 아니, 정인까지는 이제 바라지 않을테니 하다못해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 시절만큼이라도 취급해주길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런 간절한 소망을 담고 당보는 청명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기다렸으나…
“아보야,”
이런 제기랄.
진짜 해도해도 너무합니다. 그 지긋지긋한 칭호에, 당보가 이제 더는 못 참겠다며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려던 찰나였다. 청명은 그대로 당보의 멱살을 잡고 긴 복도를 지나 앞뜰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천하제일인의 완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당보는 청명의 아귀 힘에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끌려가다 이윽고 붕, 하고 허공을 가르며 흙 마당 한복판에 내동댕이 쳐졌다. 가주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려고 곳곳에 숨어있던 시비들의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쯤이면 어딜 내놓아도 부끄러운 우리 당가 첫째 도련님이 검존 어르신께 또 소박을 맞았다는 소문이 가중 사람들의 입에 쉴새없이 오르내릴 것이다.
“꺼져.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내가 널 어여삐 여겨 온 세월이 있으니 이것으로 끝내는 게다.”
“형님……!”
“또 한 번 나를 그리 부르면 다음 번엔 내가 손수 간 날붙이 위에 네 놈 혀를 올려놓을 것이다. 가서 잠이나 자거라.”
살벌하기 짝이 없는 밤인사를 건네며, 흙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당보의 전신을 흘겨 본 청명은 미련없이 등을 돌려 다시 처소로 자취를 감추었다. 던져진 몸의 뼈 마디 마디가 욱신거리는 것보다, 작신작신 짓밟힌 마음이 더 아팠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
웃음을 멈출 수 없는 제 모습이 얼마나 미친 놈 같을지 알고있었으나 한 번 터진 웃음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보는 대자로 드러누운 채 별이 가득 뜬 밤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댔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받아줄건데. 이 말코야. 이 말코 자식아. 나를 버리고 가시니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났으면 좋겠다는 어느 유행가의 한 구절이 지금처럼 마음에 사무친 적이 없다.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청명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사실 당보 또한 그 답을 알고는 있었다. 마음으로 납득이 안 되니 문제인 것이지.
100년, 그 놈의 100년이 문제였다. 이제 자신한텐 문제가 되지 않고, 청명에겐 아주 문제가 되는 그 세월. 그 지랄 맞은 세월이 바로 청명이 저를 거부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매화검존이 천마의 목을 베고 100년이 지났을 때, 사천당가의 가주의 첫째 아들로 귀한 손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더 흐르고, 그 귀한 손은 한 밤 중 흙바닥에 몸을 뉘인 채 벌써 몇 십번 째 수청을 거부당한 충격으로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왕 다시 태어날거라면, 100년만 더 일찍 태어날 걸 그랬소.
무위, 외모, 지성, 성격, 이 모든 건 노력으로 어찌 해 볼 여지가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이는 도무지 방도가 없었다. 환생 전에도 기껏 해야 대여섯살 밖에 되지 않는 나이 차이로, 늘 자신을 ‘어린 놈’이라고 부르며 착실히 형님으로 대접하도록 단도리했던 양반이었다. 그러니 지금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청명의 나이 200세,
그리고 당보의 나이 20세,
청명에게 자신은 그 말 그대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였다.
이번 주어진 생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당보는 이제 소학을 막 뗀 6살 아이였다. 전생의 기억은 되찾지 못한 시점이었다. 가주인 아버지의 부름으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가주실로 향한 당보는 그날 따라 집안의 분위기가 부산스럽다고 느꼈다. 직계와 방계 사람, 집안의 하인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들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물며 늘 근엄한 자태를 유지했던 아버지조차, 그 날은 아침부터 다소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비들에게 오늘은 귀하고 특별한 분께서 방문하시는 날이니 부족함 없도록 당보의 치장에 신경 쓸 것을 신신당부했다. 도대체 누가 오길래 이렇게 요란법석인지. 명문 사천 당가에서 귀하다 여길 손님은 황궁의 인물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손님의 정체를 무척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더군다나 그 손님은 당보의 아버지에게 그대의 첫째 아들을 꼭 보고 싶노라 말해왔다고 한다. 어린 당보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너만 들어오거라, 보야.”
문 너머 부름에, 긴장한 어머니를 남겨두고 당보는 홀로 가주실에 발을 들였다. 집안의 중요한 대소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긴 탁상 중앙에는 아버지 당군악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왼편, 한 남자가 이쪽을 비스듬히 곁눈질 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당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 남자의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이었다. 그는 자기 머리칼만큼이나 새하얀 무복을 입고 있었고 무복의 가슴 오른편엔 붉은 꽃자수가 수 놓아져 있었다. 늘 탄 풀내음이 감도는 당가에서, 오직 이 장소에서만 생소한 꽃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듯 싶다 했더니 그 향의 원천은 이 남자인 듯 싶었다. 아버지보다 훨씬 체격도 좋고, 떡 벌어진 어깨는 누가 보나 무인의 풍모였다.
마치 나비가 꽃 향에 이끌려 날개짓 하듯, 어린 당보는 아버지가 아닌 처음 보는 남자에게로 총총거리며 걸어갔다. 당보의 거리낌없는 접근을 만류하려 엄한 목소리로 보야, 하며 부르는 당군악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당보는 남자의 옆으로 다가선지 오래였다. 당보는 가까이 가서야 그의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가 옷 아래로 비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가까이서 올려다 본 남자는 거대하게 느껴졌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풍성한 하얀 속눈썹 아래 붉은 눈동자는 무심해보이는 한편, 조금 놀라워하는 기색이 섞여있었다. 당보는 물끄러미 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어린 마음이 콩닥콩닥 뛰어왔다. 당보는 자신이 사내에게 품은 커다란 호감이 이 사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라며 작은 입술을 열었다.
“아름다우신 분, 존함이 어떻게 되세요? 꽃의 신선이신가요? 참으로 좋은 향이 납니다.”
쿨럭,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급하게 숨을 삼킨 아버지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아랑곳 할 당보가 아니었다. 그의 무릎에 매달려 홍조를 띄우고 베시시한 웃음을 지었다. 당보는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좋았다. 이 칙칙한 당가에서 좋은 향기를 풍기며 제 눈 앞에 나타난 이 남자는, 한 겨울 설눈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어난 붉은 꽃같아 잠시도 눈을 떼기가 싫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남자에게서 당보를 떼어 놓기위해 황급히 다가왔으나 남자는 시선을 당보에게 고정한 채 조용히 좌수를 들어 보였다.
“내버려두게.”
“예를 갖춰 인사를 먼저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듯 합니다. 어찌 이리 제멋대로 구느냐.”
“괜찮대도. 낯 가리지도 않고 살갑게 맞이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지.”
꽃의 신선이냐니, 화산의 도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 아닌가. 그리 너스레를 떨며 남자는 다정한 눈길을 당보에게로 떨어트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에 호의가 담겨 있다는 걸 느끼자 당보의 마음엔 환희가 차올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 저를 기꺼워하니 신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없었다.
“저는 당보라고 합니다. 신선님께선 존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소가주!”
“신선으로 추앙 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인성의 수양이 부족해 내 그 칭호로 불리기엔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구나. 나는 ‘청명’이라 한다. 혹여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청명, 청명…
그 이름을 짧은 혀 위에서 끊임없이 굴려보다 당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남자를 올려보았다. 어미와 유모가 곧잘 베갯머리에서 들려주었던 옛 영웅의 무용담에 나오는 이름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100년 전 천마를 벤 중원의 고금제일인,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는 전설적인 천하제일인의 이름이 바로 청명이었다.
“매화검존?”
“그래, 그런 별호로 불리기도 한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이가 퍽 귀여웠는지, 청명은 피식 웃었다. 당보의 살 오른 둥근 볼은 흥분으로 금세 발개졌다.
매화검존이 우리 집에 오다니, 요 며칠간 소란스럽기 짝이 없던 당가의 분위기와 남자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게 구는 아비의 태도가 전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중원 모든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자, 호걸 중의 호걸이라 칭송받는 이가 아닌가. 넋이 나간 당보를 나무라듯, 당군악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꾸짖었다.
“이제 귀인께 몸가짐을 바로 하고 예를 갖춰 다시 인사 올리거라. 사천당가의 소가주라는 자가 경거망동해서야 되겠느냐.”
“아직 어린 아이 아닌가. 너무 엄하게 다그치지 말게.”
“검존께서 아량이 넓으셔서 이해해주셨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에서도 이리 굴었다간 제가 낯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태 파악을 끝낸 당보는 황급히 두 손을 공수하며, 깊이 고개를 숙여 청명의 앞에 엎드렸다.
“천하를 구하신 영웅께 사천 당가의 소가주, 당보가 다시 인사 올립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주십쇼. ”
“무례라니, 되었다. 듣기 좋더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서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어보겠느냐. 고맙구나.”
청명은 그대로 왼손을 들어올려 숙인 당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당혹스러울 때만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이 아니다. 너무 좋아도 머리 속이 온통 새하얘질 수 있다는 걸 그 날 당보는 깨달았다.
- 내 너를 보러 사천에 왔구나. 네 이름을 너의 아비에게 전해듣고, 얼굴이 보고싶어 찾아 왔다.
- 아직 나이가 어린데도 문중 사람 누구보다 비도를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다.
그 뒤 청명이 조심스럽게 하나씩 꺼낸 이야기들에 얼마나 마음이 터질 것처럼 설렜는지, 당보는 자신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청명은 당보에게 관심이 많았다.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비도의 실력은 어떻게 갈고닦고 있는지, 의술에도 관심이 많은지, 독을 먹는 것이 괴롭진 않은지, 부모보다 더 살뜰하게 당보의 속내와 상황을 살펴왔다. 당보는 누군가 자신에 대해 꼬치꼬치 캐 묻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묻는 것에 전부 답해주는 호락호락한 성격도 아니었으나 그 대상이 청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당보는 청명이 더이상 묻지 않아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청명이 전부 알아주면 좋겠다 싶어질 정도로 그가 좋아졌다. 당보를 보러 사천까지 걸음했다던 청명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일주일을 머물며 당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당보의 수련을 봐 주었고, 사천의 시전 거리를 둘러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당가에 지내는 모든 아이들이 보내는 흠모의 시선에 어린 당보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사천에 사는 그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을만큼, 검존 어르신은 자신을 손 안에 든 보옥처럼 중히 여기고 있었다.
“어르신께선 이제 화산으로 돌아가십니까?”
“그곳이 내 집이니 그래야지. 종종 네 얼굴을 보러 걸음하마.”
당보는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언제 다시 오실겁니까? 그냥 당가에 계속 머무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리 묻고 원하는 답을 얻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건만, 아버지가 검존 어르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얼마나 당부를 했던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간다 하니 아쉬우냐?”
그러나 당보가 말하지 않아도, 100년이 넘게 산 청명에게 6살 아이의 속마음이란 눈에 빤히 보이는 것이었다. 웃음기가 가득 섞여있는 질문을 듣자 당보는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만 너무 어르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니, 물론 청명도 저를 귀여워 한다는 걸 어린 당보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의 간절함은 자신 쪽이 더 깊다 느꼈다.
“이제 가시면 또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으니 그러지요.”
“금방 올테니 너무 성내지 말거라.”
“제, 제가 언제 씅을 냈다고 그럽니까!”
“지금 내고 있지 않느냐.”
“…….어르신!”
놀려먹는 맛이 있다며 자신 쪽을 바라보곤 샐샐 웃는 청명의 얼굴이 그렇게 얄미워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부시다 생각했다. 봄 나들이 겸 꽃구경을 하러 나온 것이었기에, 곳곳에 꽃나무들이 만개해 있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스미는 하얀 햇살을 받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청명은 정말로 꽃의 신선 같았다. 그리고 신화 속 존재들이 으레 그렇듯, 청명 또한 이토록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는 이상한 불안감마저 들었다. 아, 정말이지. 당보는 이 사람과 잠시도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분 돌풍에 청명의 길게 푸른 하얀 머리칼이 파란 하늘을 뒤로 하고 휘날렸다. 꽃잎 바람 속에 우뚝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명에게, 당보는 아이가 감당하기엔 터질 것 같이 벅찬 경애와, 불안감을 품고 그의 허리를 양팔 가득 끌어안았다. 그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르신, 어르신이 없으면 화산은 안 되는 곳입니까?”
잔뜩 물 먹은 목소리로 당보가 물어왔다. 청명은 말이 없었다.
갑작스레 안겨와 제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아이의 움직임을, 콩닥거리는 맥박의 움직임을 생경하게 느끼느라 당보의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탓이었다.
어르신, 하고 다시 칭얼대며 불러오는 목소리에 청명은 당보의 어깨를 끌어안고 어색하게 토닥여 주었다.
“아니, 화산은 이제 내가 없어도 괜찮은 곳이지. 오히려 이젠 화산이 나에게 없어선 안될 곳이 되었다. 아무리 꽃이 만발한 화려한 나무라 하더라도, 결국 그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땅 아래 깊숙히 뻗어나간 뿌리 아니겠느냐. 내게 화산이 그런 곳이다.”
네가 너희 가문을 아끼는 것처럼, 나 또한 마찬가지구나.
어린 당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청명은 조곤조곤 타이르는 어투였다. 당보는 조금 더 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그리 말해오셔도 전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은 걸요. 당보는 조금 더 응석을 부리기로 했다. 어르신을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했던 아버지의 당부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원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에 넣고 봐야 하는 당가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당보 안에서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어르신께 화산은 가족같은 곳이군요.”
“그래, 알아주는구나.”
“하지만 가족은, 평생 변함없이 바뀌지 않게 정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언제까지고 부모 품안에 있지 않듯이요.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 또다른 자신만의 가정을 만들지요. 꼭 가정이 아니더라도, 막역한 친우, 마음을 나눌 짐승, 인연이 닿는 것들과 새로운 가족의 연을 맺고 살아가기도 하지 않습니까.”
“……?”
이 아이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아이들의 화법은, 그 중에서도 당보의 화법은 아무리 주의 깊게 들어 보아도 청명이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다. 당보는 청명의 품 깊이 박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도 꽉 누르고 있어 살짝 빨개진 이마 자국 아래, 동그란 두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역경을 타파할 해답을 찾아냈다는 듯이 말이다.
“이제 어르신의 가족을 저로 바꾸세요!!!”
“………? ”
꽤 엄청난 선언이었다. 그 압도적인 선언 앞에 청명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뒤에 당보가 쏟아낼 말들이 궁금해진 청명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안 아이는 고사리같은 손으로 청명의 옷자락을 꼬옥 잡은 채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화산은 어르신이 없어도 잘 돌아갈 겁니다. 아니, 그래야지요. 이미 어르신이 100년이 넘게 돌보아온 곳이 아닙니까? 이젠 제 앞가림 정도는 해야지요. 하지만 저는, 제 앞가림을 못하는 여섯 살 꼬마 아이입니다. 화산과 저, 둘 중 어느쪽이 더 어르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습니까?”
“…아보야, 떼 쓰는 것이냐.”
“아니오. 저는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어르신의 남은 세월을 저에게 주세요. 100년이 넘게 화산과 가족으로 사셨으니, 저랑도 100년은 가족으로 지내셔야 공평합니다. 아니면, 화산이 아닌 저는 어르신의 가족이 될 수 없나요?”
“네 가족은 사천 당가의 사람들이지.”
“어르신께서도 저희 당가에서 사시면 되잖아요.”
듣고 보니 네 말이 참 맞구나, 하며 그가 제 말에 동조해주었으면 했으나 청명은 묵묵부답이었다. 청명이 아무 말 않고 있자, 당보의 커다란 두 눈엔 그렁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닭똥같은 눈물이 또르륵 당보의 둥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당보의 눈물을 보자 청명은 적잖게 동요했다. 허둥대며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청명의 손길을 피하며, 당보는 시선을 땅으로 고정한 채 흐느끼며 물었다.
“…어르신은 제가 커 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지 않으세요?”
청명은 눈을 끔벅였다.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니 다시 오겠다 약조한 것 아닌가. 그러나 당보가 원하는 건 더 큰 것이었다.
“어르신의 남은 날들을, 저도 보고 싶단 말입니다. 저는, 욕심이 많아 어르신처럼 한 두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 여섯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 그리 질금질금 잠깐씩 보면서는 못삽니다. 어르신의 모든 나날들을 곁에서 보고싶단 말입니다. 화산에 가지 마세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겨우 모든 하고 싶은 말을 끝마치고, 당보에겐 천년같이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 동안 청명은 침묵했다. 이윽고 청명은 입을 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한 소리 들을 것도 각오한 당보에게, 청명은 퍽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보야,”
“네, 어르신.”
“내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가실 거예요?”
“..뚝 그쳐라. 울지 말고. 어쨌거나 화산엔 돌아가야 한다. 생각을 좀 하고, 정리를 하고 나면 다시 네게 오마.”
청명의 대답에 당보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당보는 어르신, 하며 청명을 꼭 끌어안았다. 기대도 못했던 대답을 돌려받았다. 어르신, 어르신 끝없이 자신을 부르며 좋아 죽겠다고 온 몸으로 말해오는 당보를 보며 청명은 웃고 말았다. 자신을 꽉 붙들고 놓지 않는 당보의 보드라운 이마를 검지로 매만졌다. 요 작은 머리통으로 얼마나 열심히 자길 붙잡아 놓기 위해 고민했을까. 아이의 이마가 따끈했다.
거짓말이 아니니, 기다리고 있거라.
청명이 느린 입모양으로 말해온 말을 마음에 새긴 당보는 베시시 웃었다.
“네, 꼭 입니다!”
“그리 좋더냐.”
“네, 너무 좋습니다. 빨리 오셔야 합니다!”
“그래”
화산하고 100년 넘게 지냈으니 나하고도 100년을 같이 지내자.
그리 말해오는 어린아이의 셈이란게 참으로 간단했고, 그만큼 원하는 바가 명료했고.
자기 딴엔 공평하다 생각해 열심히 생각해 내놓은 결론이겠지만, 결국은 자기밖에 모르는 그 마음이, 기어코 요구하고야 마는 태도가…
청명에게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면 거짓이었다. 100년 전의 청명이 알던 전쟁영웅 ‘당보’에게선 기대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네 이름과 같은 아이가, 너와 쏙 빼닮은 아이가 나와 가족이 되자 한다. 보야.
피비린내가 나는 전쟁 한복판에 서 있던 지난 어느 날, 당가에 들어와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던 건 그저 그의 곁에서 남은 생을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상상으로만 그려보았던 그 미래가, 100년이 흘러 ‘당보’를 빼닮은 여섯 살이 된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말마따나,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몰랐다. 그러니 조금은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아이가 전한 욕심이, 청명 자신도 몰랐던 심중 가장 아래에서 품고 있던 욕심을 건드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화산의 매화검존이 사천당가에 둥지를 틀어 그들을 비호해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개방의 입을 통해 중원 곳곳에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화산과 사천이 뒤에서 정치적 연맹의 연을 맺은게 분명하다 했다. 과거 정마대전의 주역이자, 검존의 친우였던 암존과의 연을 보아 검존이 자신의 마지막 거처를 사천으로 정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이 돌았다. 아무리 무신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영웅이고 홀로 노쇠를 초월한 신체를 가졌다고는 하나, 그의 나이가 벌써 180세 언저리였다. 평생을 살아온 화산을 벗어나 사천에 살아가기로 결심한 청명의 심경 변화를 모두가 주목했다. 검존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냐며, 집중적인 치료를 위해 의료술과 약 제조에 탁월한 당문에 기거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검존께서 늘그막에 만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여긴 한 어린 아이를 위해 그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당가 입장에선 청명의 결정을 반가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청명은 백년 전 정마대전 직후부터 지금까지, 마교로 막심한 피해를 입어 재기가 불가능할 것 같던 당가의 뒤를 돌보고 다시 사천의 패자라는 명성을 되찾게 해주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집안의 은인이었다. 더군다나 청명이 당가에 머문다면, 검존에게 보은을 입은 자들, 아직까지도 마교 잔당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검존의 보호 아래 있고 싶어하는 자들이 얼마나 사천으로 밀려들어올까. 사천이란 도시는 검존의 세력권으로 지금보다 더욱 성장할 것이고, 그건 당가 입장에서는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청명은 당가의 식객이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사천에서 몇 번의 계절의 순환을 맞이하고, 어느덧 다시 봄이었다.
뒷짐을 지고, 누각에 서서 훈풍을 쐬고 있던 청명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에게 눈길을 주었다. 오늘 있었던 특별한 일정 때문인지, 때깔 곱게 차려입은 당보가 계단을 걸어 올라오다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웃어보였다. 청명이 가장 좋아하는 미소였다.
아이는 정말 빨리 자라는구나.
옆에 선 당보를 보며 청명은 세월을 실감했다. 자신의 장딴지 근처까지밖에 오지 않았던 아이의 키가, 제 어깨만치 컸을 때도 내심 속으로 감탄했는데 이제는 자신보다 조금 더 위에 시야를 차지할만큼 자라있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해 오면서, 당보는 청명의 각별한 관심과 당가의 돌봄 아래 무위도 지략도, 후지기수 중에선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뛰어난 무재로 자라났다. ‘당보’ 그 녀석이 딱 약관일 때 이런 기백을 가진 청년이었을까. 청명이 알지 못하는 시절의 친우의 모습을, 100년이란 세월을 넘어 이 아이를 통해 가늠할 수 있었다. 당보는 이제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청년이었다.
그렇다보니 사천 당가에 밀려 들어오는 혼담 요청이 근 2년 간 끊이질 않았다. 드디어 사천 당가에서 천하제일인의 이름을 뒤이을 자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며 사천은 물론이거니와 사천이 아닌 곳에서도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데, 용모 또한 출중하다 하니 여식이 있는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탐을 낼 법도 했다. 오늘도, 당보는 가주의 부름으로 유력 세가의 여식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이것 또한 소가주의 책무 중 하나라며 진지하게 임하라는 아버지의 호령을 들을 때마다 소가주 직을 내려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며 당보가 늘어놓은 푸념을 청명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지난 번 만남 때보다는 낯빛이 좀 좋아 보였다. 상대가 생각보다 괜찮았던걸까. 청명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좋은 시간 보내고 왔더냐.”
“말도 마십쇼. 빨리 빠져나와 어르신을 뵈러 가고 싶은 걸 참느라 말도 못하게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걸 시비들에게 물어 확인하자마자 곧장 달려왔지요.”
팔자로 눈썹을 늘어트린 채 칭얼대며 말해오는 당보의 말 끝에 어리냥이 가득 묻어있었다. 늘 자기 세상의 중심이 청명이라도 되는 냥 맹목적으로 구는 당보의 말과 태도는 청명의 기분을 조금 우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그대로 티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당군악이 얼마 전 자신을 붙들고, 어르신께서 진지하게 혼인을 생각해보라고 한 마디 해 주시면 저 녀석이 정신 차릴지도 모르겠다고 얼마나 부탁을 해 왔던가. 청명은 부러 더 무뚝뚝한 목소리를 꾸며내 당보를 꾸짖었다.
“…도대체 넌 뭐가 문제길래 예쁜 아가씨들보다 다 늙은 중노인네를 더 찾는 거냐. 오늘 만난 소저가 지금 네 말을 듣는다면 어처구니가 없어 할게다.”
“어르신이 더 좋은게 사실인 걸 어찌합니까? 가문의 득실을 위해 서로 고아한 척 하며 혀 위엔 꿀을, 혀 아래엔 독을 품고 의중을 가늠하는 자리보다는 어르신과 비무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제겐 더 소중한걸요. ”
“참나…”
아주 어릴 때부터 낌새가 보이더라니, 이제는 도무지 말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청명이 혀를 차며 당보에게서 시선을 거두자 당보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좀 더 가까이 청명의 곁에 붙어 섰다. 정말 진심인데도 청명의 귀엔 투정으로만 들릴 거라고 생각하니 살짝 속이 상했다.
“혼인하기 싫습니다.”
“오늘 만난 처자도 별로였느냐?”
“……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저한테 시집오면 마음 고생 꽤나 할텐데,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요. ”
당보가 이 정도로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청명이 의외라는 얼굴로 당보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청명이 무슨 말을 더 얹을 새라 당보가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어르신, 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려 합니다. 어차피 사랑 없이 하게 될 부부 생활, 몇 년이라도 함께 덜 사는 편이 서로에게 좋습니다.”
“….당보야,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너, 여자가 싫으냐?”
“딱히 싫다 여겨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뭐야, 고자냐? 단수냐?”
“…..어르신…”
당보가 울상을 짓자 청명이 새초롬한 눈으로 당보를 흘겨보았다. 요즘 젊은 애들 머릿속이 영 이해가 안 간다 싶을 때마다 청명이 곧잘 짓는 표정이었다. 당보의 속이 타 들어갔다. 이 양반은 내 속도 모르고! 혼인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대라면 백 가지도 더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 하나부터 백까지 전부 어르신에 대한 내 마음과 관련이 있다고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청명은 아마 진저리를 칠 것이다. 노망은 내가 들어야 하는데 왜 네가 망령 든 것 같은 소리를 하냐며, 곧 죽을 늙은이가 젊은이 앞길 막으면서까지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다며 곧장 짐을 싸 화산으로 떠날 뒷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니 솔직히 말할 수 있겠는가. 당보가 청명을, 나보다 100년을 넘게 훌쩍 더 살아온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마 자신의 고백이 청명의 귀엔, ‘나중에 커서 아버지랑 결혼할래요!’라고 아이가 뭣모르고 말해오는 정도로 들릴 거란 사실은 확실했다.
하지만 적어도 청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당보는 청명 아닌 다른 누군가와 형식적으로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다만, 받아들여지질 운명이 뻔히 보이는데 지금의 관계를 망치면서까지 제 감정을 입에 올릴 용기가 당보에겐 아직 없었을 뿐이다.
“군악이가 너 때문에 속이 썩어들어간다고 가슴을 치며 하소연 하던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에게까지 네 혼사와 관련해 한 마디 해주십사 부탁을 해올까. 네 아비가 불쌍하다, 이젠.”
“때 되면 알아서 할텐데 가주께선 걱정이 너무 많으십니다.”
“네가 소가주이고, 맏이이니 더 신경쓰이는게 당연하지 않겠어.”
“…혼사 건이 아니라면, 소가주로서 해야 하는 모든 책무와 의무에 저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소가주 직에 그리 목매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자격이 부족하다 판단되면 제 아래 동생 패에게 어련히 그 자리를 넘겨주실 테지요.”
“…이리도 완고하니, 네 너에게 선물 주려고 했던 걸 전해주기가 꺼려지는구나.”
“…무엇을 말입니까?”
청명의 말에 당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르신께서 나를 위해 준비한 것? 청명은 당보에게 뼈에 새겨질 만큼 많은 무형의 가르침을 전수해주었으나, 단 한 번도 눈에 보이는 유형의 무언가를 준 적은 없었다. 그런 청명이 ‘선물’이라는 말까지 해가며 줄 것이 있다고 하니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요. 어르신께서 제게 주시는 거라면 길가에 돌맹이라도 제가 얼마나 소중히 대할지 아시지요? 빨리 주십쇼.”
혼담에 관해 조금 잔소리를 하려 할 땐 마냥 딱딱하게 굴더니, 선물이라는 말을 듣자 대번에 뾰족했던 눈매가 풀어지는 것을 보며 청명이 작게 웃었다. 이제 보채기까지 하니 역시 애는 애다.
“손을 내밀어 보거라.”
당보가 얼른 두 손바닥을 공손히 펴 내밀었다. 청명은 가로로 길쭉한 작은 나무 함 하나를 당보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열어보아라, 청명의 허락이 조용히 떨어지자 당보는 조심스레 함의 뚜껑을 열었다. 청명의 눈 색과 똑같이, 투명한 붉음을 품은 비녀 하나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나중에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비녀를 선물해주면 어떨까 하여 준비해 보았다.”
크흠, 헛기침을 하고 이어지는 청명의 목소리에 살짝 민망한 기색이 느껴졌다. 당보는 함에서 조심스럽게 비녀를 꺼내들었다. 붉은 산호 보석으로 만든 비녀임이 분명해 보였다. 어느정도 세월을 탄 물건인 것 같았다. 그러나 굉장히 귀중히 여기며 보관해왔는지 조금도 바래지지 않은 비녀의 광채에, 당보는 이 물건이 청명이 굉장히 애지중지 관리해 온 물건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당보 또한 이 물건이 익숙했다. 손 안에 들려있는 비녀의 무게감과 촉감을 느끼고 있자니, 가슴이 술렁거려왔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어르신의 물건이 아닙니까?”
“이제는 네 것이야.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 네가 해도 잘 어울리겠어.”
청명은 비녀에 담긴 비화까지 당보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혼인할 사람에게 주라는 의도를 담아 건넨 물건이었지만, 내가 어르신을 연모해서일까. 비녀를 받아들이는 당보의 마음은 그리 담담할 수 없었다.
“…산호는, 재해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힘을 갖고 있다지요. 이제 강호행을 떠나게 되면, 어르신 대신 이 비녀가 절 지켜주신단 생각으로 늘 머리에 꽂고 다니겠습니다.”
“…징그럽다, 이녀석아.”
말은 그렇게 해도, 당보를 바라보는 청명의 시선은 온화했다. 비녀는 그 옛날, 청명이 당보에게 선물해 주었고, 유품으로 다시 청명의 손에 되돌아왔던 물건이었다.
-형님, 비녀를 선물해주시다니요.
-…비녀를 선물한다는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진 알고 계신거지요?
알다마다. 이 자식아. 네가 바라던 대답이 아니더냐?
미심쩍은 눈으로 그가 바라보는게 얄미워서 성질을 내며 쏘아붙이자, 바라다 마다요. 하고 당보는 웃었다.
- 돌산 벽창호인 줄로만 알았더니, 참으로 능글맞으십니다. 제가 형님께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기쁩니다, 기억 속 당보의 얼굴을 떠올리며 청명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떴다. 산호가 그 혹독한 시대로부터 자신의 정인을 지켜주진 못했지만, 이 아이만큼은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지켜주길 바랐다.
한 때, 청명은 아이인 당보가 자기 정인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적도 있었다. 당군악의 아들의 이름이 선조와 똑같은 당보이고, 그 아해가 아직 지학도 되지 않은 나이에 독과 날붙이 다루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가에 들렀다. 도가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도사로서 가져선 안 될 기대감이지만. 만약 환생이라는게 정말 존재한다면…
청명은 아이를 볼때마다 당보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자신의 정인이었던 당보보다 나았다.
그와 달리 당보는 이제는 암기 다루기를 결코 등한시 하지 않고, 독만큼이나 당가의 중요한 무학으로 비도술을 받아들인 사천당가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라면 과거 자신의 정인보다 특기인 비도술을 더 잘 연마하고 갈고 닦아 사천당가를 강한 가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만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 그럴 수 있을 만한 자리에 앉을 아이였다. 그리고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으로 취급 당하지도 않을테니 정 붙일 곳 없어 부평초 같이 떠돌며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만들고, 뿌리를 내려 살아갈 수 있겠지.
고독함에 허덕이다 자기랑 똑같이 세상과 동 떨어져 모나게 사는 것 같은 도사에게 연정을 품을 일도 없을 테고, 가문을 돌보지도 못하고, 가솔들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전쟁 한 가운데서 비명횡사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그런 일은 겪지 않을 거다. 외로울 일 없이 살아갈테지.
너는 그와 다르게 널 아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주어진 수명만큼 평온히 살다 갈 수 있지 않을까. 자기 뒤에 남겨질 어떤 것도 부탁할 필요없는 후회없는 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청명은 부디 당보가 그의 환생이 아니길 바랐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완전히 다른 사람이길 바랐다.
당보의 행복.
청명이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었다.
“…잘 간직하거라.”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이어질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아 건넨 그 비녀 하나가 확실한 계기가 될 줄도 모르고. 청명은 자신의 손에서 오래도록 간직해 온 물건을 떠나보냈다.
청명에게 비녀를 선물받은 그 날 밤, 당보는 긴 꿈을 꾸었다. 어렸을 때부터, 청명의 곁에서 몸을 옹송그리고 잘 때면 늘 단편적으로 조각조각 꾸었던 누군가의 기억 같은 꿈을, 그 날 밤은 아주 길게, 그리고 선명하게 보았다.
내 것이 아닐텐데, 마치 내 것 같은 기억들이었다.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깊은 꿈 속을 헤매며 꿈 속의 당보는 어르신을, 청명을 ‘형님’ 하고 불렀다. 그 사람을 그리 부르는 건 자신 밖에 없을 거라는, 그리 부르는 걸 허락해주는 대상도 자신 뿐일거라는 우월감이 부르는 매 순간 담겨있었다. 꿈 속의 청명은 머리가 하얗게 새지도 않았고, 지금보다 더 강건했으며, 점잖은 구석 없이 치기 어렸고, 험악한 말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칠 때면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왔다. 싸울 때면 거리낌 없이 등을 맡겨왔다. 자신이 맘 졸이며 건넨 사랑한단 고백을 말도 안 되는 농으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그래, 오늘 받았던 이 비녀. 이미 전에 한 번 받았던 적이 있는 물건이었지.
정인에게 주었던 물건을 내게 주신 것이었소?
그런데 비녀, 분명 내가 선물받았던건데. 왜 형님이 다시 가지고 계셨던 걸까.
몽중에 떠올린 의문은 얼마 안가 다시 떠올려 낸 기억으로 풀렸다. 내가 다시 형님에게 돌려주었다. 피 젖은 손으로 뭉친 머리카락 터럭에서 비녀를 빼냈다. 덜덜 떨리던 그 손 안에 쥘 수 있도록 넘겨 주었지.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정표로서 말이다.
왜 잊고 있었을까?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그 다짐은 어디로 가고.
당보가 겨우 눈을 떴을 때, 당보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자면서 도대체 얼마나 울었던 건지, 들썩거리는 가슴 아래 심장이 널뛰며 방망이질을 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6살 자신과 청명의 만남이 첫만남이 아니라 재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님… 형님, 형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당보는 꿈과 현실을 분간 못한 채 한참 동안이나 청명을 찾다가,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어르신. 아니 우리 형님. 형님 얼굴을 당장 보아야겠어.
그가 또 다치진 않았는지, 내가 꼬매줬던 팔은 지금은 멀쩡한 지 확인해야한다. 그런 생각을 두서없이 떠올리다가 그의 우수는 이미 비어버린 지 오래고 그 비어버린 팔 안 쪽에 늘 몸을 뉘여 안겨 잠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기억이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그러나 또다시 완벽하게 둘로 쪼개질 것처럼 어지러이 뒤섞였다 양분되었다 난리도 아니었다.
당보는 청명이 기거하는 당가의 별채로 나섰다. 침의를 입은 그대로 나와 맨 발로 흙을 밟으며 뛰다시피 걸음을 내디뎠다. 새벽 찬 바람이 당보의 머리 속을 점점 맑게 만들어주었고 그럴수록 당보는 자신이 누구인지 더 확고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100년 전 당가의 태상장로였던, 이 사천 당가의 천덕꾸러기였던 암존 당보다. 매화검존의 등 뒤를 지키다 바라 마지 않았던 최후대로 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었다. 운 좋게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또다시 사천 당가의 이름을 받고, 나는 또… 형님을 만나게 되었어.
처음 만난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더라니. 원래 품고 있던 혈기 가득한 애모하는 마음 위에, 100년 분의 그리움과 연모가 더 얹어지고나니 지독한 열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이곳까지 뛰어 오는 당보를, 청명은 이미 기감으로 알아챘던건지 당보와 마찬가지로 하얀 침의만 입고 별채 앞마당에 나와있었다. 여간해서 잘 놀라지 않는 청명의 두 눈동자에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이 야밤 중에 도대체 무슨 야단이 났길래 이러느냐.”
머리는 산발이 되어 맨 발로 옷도 제대로 갖춰입지 않고 이리 요란하게 뛰어들어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당보는 대답을 하는 대신 청명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으니 새삼 청명의 근육이 정마대전 시절에 비해 굉장히 빠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를 두고 남겨두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마지막이 떠올라서, 당보는 안은 등을 더듬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르신, 어르신..
당보의 흐느낌에 청명은 말없이 끌어안겨 있다가, 이내 그를 마주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당보의 충년 시절이 새삼스레 다시 떠올랐다. 조막만한 어린 녀석이 무서운 꿈을 꿨다고 칭얼대며 안겨오면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달래주곤 했었는데. 그러나 그건 정말 어렸을 때 일이고, 지금의 당보는 무서운 꿈을 꿨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울며 달려오기엔 체면치레를 할 줄 아는 다 큰 청년이었다. 어린 취급을 하면 어르신 저도 사내입니다, 하며 의젓한 척 굴던 당보는 어딜 가고, 아해 때랑 다름없이 이렇게 거리낌없이 안겨온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악몽에 시달렸길래.
“너… 무서운 꿈이라도 꾼 게야? 어찌 이리 몸을 떨어.”
“네, 꾸었지요. ….어르신이 나오는 꿈이었습니다.”
“그래, 꿈 속에서 내가 너에게 무언갈 했느냐?”
“…어르신께선 잘못한 것 없습니다. 제가 큰 죄를 지었지요.”
그래서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죄송스러워서요. 그리곤 청명을 끌어안는 힘이 더 강해졌다. 대관절 무슨 일인진 몰라도, 덩치는 산만한 것이 이리 안겨와 떨고 있으니 청명은 당보가 안쓰러웠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 더 있다간 감기에 걸리겠어.”
안아주었던 몸을 떼며, 청명은 당보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기려다 순간 멈칫했다. 당보가 손에 쥐고 있는 물건은 낮에 자신이 넘겨주었던 그 비녀였다. 이 물건은 왜 여까지 갖고 왔나 싶어,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당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어르신, 하나만 답해 주십쇼.”
“..무엇을?”
“이 비녀, 왜 제게 주셨습니까?”
“그야, 네게 정인이 생기면 선물로 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 말해주지 않았느냐.”
“제 정인에게요? 아무에게나 줘도 좋을 그런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 정인이 내게 아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도대체 뭐가 불만인게야.”
“…절대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요. 제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당보였다. 눈시울이 빨개진 채 으드득 이를 갈며 저리 말해오니 청명은 정말 어찌 반응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낮에는 그리 기쁜 낯으로 선물을 받아들더니, 도대체 어디에서 심사가 단단히 뒤틀린건지 모를 노릇이다. 아니면, 어디… 아픈건가? 날이 밝자마자 당보가 먹을 보약을 지으러 당가의 약방 사용인들에게 가야겠다고 청명은 생각했다. 여기서 더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한 숨 재우는게 낫겠지. 깊게 한숨을 내 쉰 청명은 다시 당보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래, 내 뜻대로 하거라. 알겠으니 이제 들어가서….”
“형님이 제게 주신 물건 아닙니까.”
그 말을 내뱉자마자, 당보는 잡힌 손 너머로 청명의 기혈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당보에 대한 걱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던 청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져갔다. 당보는 청명이 자신의 손을 놓을 수 없도록, 이번엔 자신이 청명의 손목을 콱 붙들었다. 그러자 청명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소, 형님. 당보는 속으로 실소를 흘리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보의 생각대로, 형님, 그 단어를 듣자마자 청명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형님이 저에게 주신 물건이잖아요… 이제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더이상 몸에 지니며 절 추억하는 일도 질렸다, 그리 말씀하진 말아주세요..”
뚝, 뚝 아롱져 흘러내리는 눈물 방울이 당보가 숙인 고개 탓에, 청명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청명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녀석아… 장난치지 마라. 어디서 무슨 얘길 듣고서 이런 흉내를...”
“흉내 같은게 아닙니다. 형님. 형님의 아우, 당보가 맞습니다. 형님의 정인, 당보가 맞다고요.”
“말도 안 되는…”
부정하는 청명의 얘기를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당보는 청명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저항할 틈도 없이 안긴 청명의 귓가에 더운 숨결이 닿는가 싶더니 꾸욱, 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입술 위에 눌러졌다. 헉, 하고 놀라 들이킨 숨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당보는 그대로 청명에게 깊이 파고들었다. 쪼옥, 하고 입술을 맞추고, 혀를 얽으려 하자 청명 쪽에서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지 말아요 형님, 응석을 담아 볼을 부비자 품 안에 느껴지는 청명의 몸은 더 경직되어갔다. 당보에겐 달게만 느껴지는 숨이 몇 번이고 오갔다. 청명이 먼저 이를 세워 당보의 입술을 깨물지 않았더라면, 이 접문이 언제까지 이어졌을지, 과연 입맞춤 몇번으로 끝낼 수 있었을지 당보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터진 입술의 핏물을 목 너머로 삼킨 당보는 창백해진 청명의 낯과는 대조적으로 양 볼에 혈색이 감돌았다. 당보는 미소 지었다. 전생에 우리가 어떤 인연이었는데, 180세 차이가 뭐 대수인가. 기억을 떠올리기 전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던 그 세월의 차가, 지금와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당보는 그 시절과 똑같이 이 사람을 연모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때의 저나, 지금의 저나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뭣 모를 시절부터 자신이 청명에게 느껴 온 이 강렬한 감정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부처께, 원시천존께 검증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환생, 만만세였다.
“기억해냈습니다. 형님. 전부 다요. 이제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습니다.”
“……..문제 될게 없어? 뭐가?”
“저 형님을 사랑합니다. 이 마음은 다시 태어나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전생에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호시절을, 이 시대에서 마저 이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나처럼 형님도 기쁘시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자신의 모습 속에서 청명도 줄곧 정인이었던 저의 모습을 찾아왔던게 분명해 보였다. 나를 그리 귀애하시는 이유가 있었어. 이제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으니, 예전처럼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당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에게 준 비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 말씀하신 건 섭섭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귀하게 간직하고 있던 걸 보아 청명 또한 자신을 많이 그리워하며 살아왔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저희 다시 시작합시다, 형님. 이번 생에선 꼭 부부의 연을 맺어요.”
“………………보야,”
“이럴게 아니라, 당장 제 앞으로 들어온 모든 혼담을 무르고 가주께 가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 생각인데?”
“어르신… 아니, 형님과 결혼하겠다고요.”
당보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곧이어 당보는 미소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골통이 심하게 울렸고 복통이 밀려왔다. 동시에 당보의 시야는 반 바퀴를 돌았다. 흐려진 시야 앞에 별이 반짝거렸다. 커헉, 하고 뱉어낸 무언가는 내상을 입어 토해낸 핏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아무래도 지금 형님께, 몇 군데를 빠르게 얻어맞은 것 같은데.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현생에서는 청명에게 한 번도 이리 맞아본 적이 없었다. 당보는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
“미안한데, 그건 안 되겠다. 당보야.”
의식을 잃기 직전, 누가 들어도 섬찟할 것 같은 청명의 차디찬 목소리가 칼날처럼 떨어졌다.
“앞으로 네 얼굴 볼 일은 없을게야.”
청명의 말이 위쪽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쓰러져 청명의 발치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건 아무래도 좋을 일이고. 덧붙여진 말은, 마치 사형선고였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멀어져가는 청명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뻗었으나 청명이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거기서 당보의 의식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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