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여당여청] 바람

귀신 당보 X 검협 청명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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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정마대전 이후 시점입니다.


청명은 손에 쥔 공명등을 놓았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작은 바람을 담은 노란 빛이 둥실 떠올라 밤하늘의 별이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적었지만, 그것이 네가 이 곳에 내려오길 바라며 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네 얼굴, 목소리, 냄새 모두 잊어버린 나에게 다시 한번 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랄 뿐이다.

"당가에 왔다고 아침부터 태평한 거 아닙니까?"

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청명은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전부 환청일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오랜만에 당가에 와서, 하필 어제 널 생각하며 등을 날려서, 당가의 모든 것들이 널 떠올리게 만들어서. 널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만들어낸 환청일 것이다.

"오늘은 날이 흐릴 것 같으니 나갈 거면 우산 챙겨요. 빗소리 들으며 먹는 술이 또 기가 막힌 데, 이걸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참 아쉽구먼."

들어본적은 없지만 당보가 할 법한 말에 청명은 입술을 씹었다. 정말로 당보가 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누워있으면 계속 들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청명은 욕망을 뿌리치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방안에 저 이외의 다른 기척은 없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으니, 이제 더는 들을 수 없겠지.

청명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몸을 움직여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았다. 네가 곁에 있는 것이 맞다면 어련히 맡아졌어야 할 연초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다. 목소리도 조용했고. 오랜만에 왔다고 들려줬던 거냐? 그런 거면 좀 더 들려주지, 이렇게 끊어버리면 감질나잖냐. 청명은 듣는 이 없는 타박을 속으로 삼키며 시선을 내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익숙한 바닥과 제 발, 조금 더 올리면 보이는 벽과 의자, 그리고 그 위에 앉아있는 녹색의 장포...?

"으악, 뭐야!?"

간절히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던 사람이 청명의 시야에 잡혔다. 놀란 청명은 재빠르게 검을 겨눴고 덩달아 눈을 동그랗게 뜬 귀신은 몸을 물리며 양 손바닥을 보이며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몸을 물림과 동시에 의자를 통과한 몸과 반투명한 다리, 죽은 정인을 복사한 듯한 모습까지, 절대 살아있는 인간으로는 볼 수 없었다.

"넌 뭐냐."

"어... 우리 이거부터 치우고 대화하는 건 어떠십니까? 어차피 어디 가지도 못하고, 공격도 못하니까요."

당보는 의자에 팔을 휘휘 저으며 세상에 물리력을 가지지 못하는 제 몸을 보여주었다. 제게 겨눠지던 검이 물러났으니 목적은 달성했다만 떨리는 팔 하며 절망을 한가득 끌어안은 얼굴을 보면 실패한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그 모습으로..."

"글쎄요. 정신을 차려보니 이렇게 되어있던 거라 이유는 저도 모르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양반이 갑자기 절 보게 된 이유도 모르고요."

"그동안? 너 언제부터 이곳에, 아니. 당보가 맞긴 하냐? 넌... 죽었잖아."

그래. 청명은 당보의 유언을 들었다. 온통 피바다인 전장에서 싸늘히 식어가는 널 어찌하지 못하고 기어코 당가를 부탁하는 말을 들었다. 피에 젖어 빨개진 장포에 축 늘어진 몸을 안아 들 수가 없어 추혼비만 회수할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제 눈앞의 당보는 겉으로 보이는 외상도 없었고 옷도 깔끔했다. 꼭 전쟁 같은 건 몰랐던 때처럼.

"죽었죠. 언니가 기억하시는 대로 죽었습니다. 빌어먹을 유언도 남기고요. 그렇게 죽은 줄 알았는데 한 30년 전쯤 부터 몸이 이리 되어서는 돌아 다닐 수 있더라고요? 말도 할 수 있고,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당보는 앉아있던 의자를 지나 청명을 마주 보았다. 매화검존일 때보다 작은 키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다 하면 싫어하려나. 오랜 기억과는 다른 모습이지만 자신을 보는 두 눈에 담긴 감정은 여전했다. 두려움과 그리움이 좀 많다는 것만 빼면? 당보는 제 손을 들어 청명의 얼굴 옆으로 가져갔다. 당연히 통과해버릴걸 알지만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엥? 이게 왜.."

그러나 당보의 예상과는 다르게 청명은 분명하게 제 얼굴에 닿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자의 손이라기에는 차갑지만 기억 속 당보의 손보다는 따뜻한. 부드러운 손을 쥐면 만져지던 굳은살이 있고, 흉터가 남아있는 제가 사랑하던 당보의 손이었다.

"왜... 뭐가 좋다고 이런 모습으로 돌아와. 그냥 선계에서 나 하는 거 구경이나 하고 있지... 네가 왜."

덜덜 떨리는 몸으로 어떻게든 눈물을 참으려는 모습이 애처로워 당보는 눈앞의 작은 등을 꼬옥 안아주었다. 다행히 제대로 청명을 안을 수 있었고, 등을 토닥이며 괜찮습니다.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말을 건네니 그제야 저를 마주 안고 흐느끼는 모습에 그저 조용히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이고. 아해의 몸이 되더니 눈물도 많아지셨나 봐요."

둘은 반 시진 가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청명은 다시 만난 정인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며 당보는 그런 청명의 뜻에 반할 생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네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울 일도 없었다."

"저도 도사 언니가 볼 수 있다는걸 알았으면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왜?"

청명은 안겨있던 고개를 들어 당보를 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당보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몸으로 나타나서 뭐 하려고요. 꿈에서 한번 봤다고 청승 떠는 양반한테 못 할 짓 아닙니까."

"너... 다 봤냐?'

"당연하죠! 적어도 당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봤습니다. 당가와 친우가 되어주신 것도, 천우맹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는 것도 전부요. 이제 와서 숨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부끄러운 청명이 시선을 내리면 뭐가 좋은지 깔깔 웃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 중에서도 청명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던 웃음소리. 비록 두근거리는 심장은 없지만 날 보는 표정, 웃음소리, 냄새 모두 너였다.

"화산에나 한번 와주지 그랬냐. 술 마시는 내 옆에서 바람 한번 불어주면 너 인걸 바로 알았을 텐데."

"저도 가고야 싶었죠. 상처는 제때 치료하나 확인도 하고, 악몽이라도 꾸면 곁에서 안아주고, 그새 어린애들한테 빠지지는 않았나 감시도 하고... 저는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갔던 겁니다."

당보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그간 있던일을 조곤조곤 말해주었다.

"제가 당가에서 눈을 뜨고 가장 처음 한일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멀쩡한 당가의 건물들은 제 기억 속 모습들과는 많이 달랐으니까요. 사람이고 사물이고 전부 통과해 버리니 기록을 볼 수도 없어 가주로 보이는 아해 곁을 맴돌며 상황을 파악했고, 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났으며 화산파는 멸문에 가까워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주저 없이 화산으로 달려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담을 넘는 것도, 대문을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 하더군요. 비도라도 쥘 수 있다면 던져보겠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그저 언제 또 들려주시려나 하고 언니를 기다릴 수밖에요. 혹시 해서 말하지만 절 보거나 만질 수 있던 건 도사 언니가 처음입니다. 이제 와서 다른 녀석들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고요.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저와 보내주시면 안됩니까?"

당보가 묻지 않더라도 청명은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너를 내가 모르는 사이 떠나보낼 수는 없었으니.

"오냐. 오늘만이 아니더라도, 네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든 곁에 있어 주마."

청명은 한손에는 우산을, 한손에는 당보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걸었다. 비에 젖어 축 늘어진 꽃만 가득한데도 당보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꽃들에 대해 재잘거렸다. 네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은 집안의 정원이 아닌 넓은 세상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정원이라도 걷고 싶다는 말에 청명은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빗물에 출렁이는 연못에서 한번, 이름 모를 독초에서 또 한 번, 분명 손을 잡았고 옆에서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옴에도 갑자기 사라져 버릴까 청명은 몇번이고 당보의 얼굴을 돌아봤다. 예전이면 내려봐야 했을 얼굴이 고개만 돌리면 바로 마주하는 것에 안심이 되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다.

당보와 우산을 나누어 쓰느라 한쪽 어깨가 젖은 채 도착한 정자에는 100년 전처럼 청명을 위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입맛이 도는 식사는 당연하지만 1인분이 준비되어있었다. 숟가락, 젓가락, 술잔 모두 하나씩. 청명은 품속에서 술잔 하나를 꺼내 제 앞에 두고, 준비되어있던 잔은 당보 쪽으로 밀어 술을 따라 주었다.

"오, 다시 태어나니 언니가 따라준 술도 받고 좋네요."

청명은 피식 웃고 병째로 술을 마셨다. 한 번에 반이나 비워진 술병에 안주를 이것저것 집어 먹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당보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새 정인이라도 만드신 것 아니냐며 놀려댈 때는 그러게 잘 하지 그랬어 하고 대답했고, 제가 그리웠던 적은 없었냐 물을 때는 하루도 널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별거 아닌 대답에도 얼굴을 붉히고 장포 자락으로 감추려는 모습이 귀여웠다. 탁자 밑으로 다리를 건들면 움찔하며 노려보는 것도 그렇고, 손을 뻗으면 냉큼 잡아 오는 것도 그렇고. 그리워한 지 30년은 지나 이제 그런 쪽으로는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여전히 좋았다. 긴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다 손바닥을 꾹 눌러보기도 하고 여전히 저보다 작은 손에 깍지 껴 잡으면 배시시 웃으니 몇 병 마시지도 않았는데 취한 것 마냥 기분이 들떴다.

"오늘 왜 이리 귀엽게 굴어요? 저한테 잘 못한거라도 있나."

"그냥 좋아서. 술도 맛있고... 내 앞에 네가 살아 움직이는 게 보기 좋네."

"제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행복해요?"

".....그래.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랄 만큼 행복하다."

당보가 건넨 질문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이미 한번 겪은 이별이고, 그때와는 다르게 대비할 시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멀쩡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내 곁에서 웃고 떠들고 가끔 장난도 치고. 나에겐 딱 그 정도면 충분했는데.

어느새 가라앉은 분위기에 청명은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고 자연스럽게 안주를 집어 먹었다. 놓으면 사라질까 하는 불안감에 맞잡은 손을 풀지 않았지만 당보라면 이 정도는 넘어가 줄 것이다.

"..천마도 베었겠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건 없습니까? 술 마시는 건 지금도 하고 있고, 축제 구경이나 유람... 정인과의 혼례 같은 거 말이에요."

당보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보니 축제하는 것 같긴 하더라. 공명등도 날리고 객잔마다 사람이 가득하더라고."

"아마 새해를 맞이해 열린 축제일 겁니다. 저희도 전쟁 전에 날렸었는데, 기억나요?"

"전쟁 전에? 너랑 나랑?"

"기억 안 나십니까? 그날 제게 어울린다며 귀걸이도 사주시고 제가 제일 곱다고 해주셔놓고는. 됐습니다. 헌앙한 아해들을 옆에 두니 저랑 있던 일들은 잊으실 만 하죠."

뚱한 표정으로 툴툴대는 모습에 청명은 머리를 굴려 당보가 말한 날을 떠올리려 애썼다. 혹시 귀걸이를 보면 생각날까 힐끗 당보의 얼굴을 봤지만 양쪽 귀엔 아무것도 없었다. 제가 당보와 즐긴 축제를 잊을 리가 없다. 귀걸이를 사줄 정도면 정인이 된 이후라는 이야긴데... 도대체 언제지?

"한가지 말해드리자면 그 귀걸이는 언니가 직접 깨트리셨습니다. 아주 부끄러워 하시면서요."

"야! 넌 그런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제가 직접 깨트렸다는 말에 청명은 당보가 말하던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축제가 열렸던 건 몰랐지만 그날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른 날도 아니고, 너랑 처음 접문한 날이잖냐.

"너무 예전이라 잊으신 줄 알았죠. 혼자일 때는 온갖 청승은 다 떨었으면서 지금은 손만 잡고 있잖아요."

"참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

"참을 이유가 뭐 있답니까. 언제 갑자기 제가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그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제 손등을 손가락으로 긁어 대는 게 영락없는 유혹이라 청명은 한숨을 쉬었다. 귀신이랑 하는 것도 찝찝한데 다른 사람들은 당보의 목소리는 못 들으니 제가 미친 줄 알 것 아닌가. 아무리 제가 매화검존이라는 게 은근히 퍼져있다 하더라도 이런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100년 전 정인 모습의 귀신과 정을 나누는 선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제정신이냐? 너는 어차피 안 들리니까 상관 없다 이거야?"

"그럼 접문까지만? 그 정도는 들켜도.. 대충 넘어가 주지 않을까요?"

당보는 실실 웃으며 청명의 눈치를 봤다.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매화검존 혼자 있는 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고, 혹시 아해에게 손이라도 대신 건지 걱정해야 할 판 아닌가.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는 당보의 생각은 여전했다. 지켜보기만 30년인데,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당보는 맞잡은 손을 풀고 제 앞에 있는 상을 통과해 청명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리둥절한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움직이기만 해도 닿을 정도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당보는 청명에게 속삭였다.

"남들이 뭐라 하면 귀신에 홀렸다고 해요. 100년 전 암존한테 말이에요."

"아니, 내 의지다."

청명은 당보의 뒷머리를 잡고 그대로 당겨 입을 맞췄다. 놀라 동그래진 눈은 금세 휘어져서 제 얼굴을 감싸고 오랫동안 입술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 입을 떼면 정말 사라져 버릴까 봐, 이 온기를 영영 다시 느끼지 못하게 될까 봐. 아무것도 오가지 않는 입맞춤이었지만 그렇기에 더 오래 서로를 느끼고,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둘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쨍그랑 하고 병들이 깨지는 소리와 놀란 시비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지, 지금 누구와 계시는 겁니까?"

청명이 시비의 접근을 몰랐다기보다는 접근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 정확했다. 봐봤자 청명이 하는 행동 정도는 모른 척 해줄 것이고, 혹여 당군악에게 들어가더라도 충분히 변명할 수 있는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예상하지 못했다.

당보는 제 입으로 30년간 본 사람이 없다 했으며 상차림이 한 명 몫인 것만 봐도 당보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시비는 분명히 저와 당보 두사람을 보았고 제 뒤의 당보를 보고도 누구와 있냐 물었으니 적어도 당보가 사람으로 보이기는 한다는 거겠지.

청명은 팔을 뻗어 당보를 제 뒤로 보내고 놀라 떠는 시비를 진정시켰다. 자꾸만 날 선 살기를 날리려는 당보를 저지하고, 주저앉은 시비를 일으켜 세우며 최대한 무해한 미소로 물었다.

"지금 내 뒤의 사람이 보이는가?"

시비는 당보를 힐끗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에게는 보이고... 청명은 당보의 손을 당겨 시비에게 내밀었다.

"한번 잡아 보겠나."

제 뒤에서 이미 들켰다고요 투덜대는 당보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묵묵히 손을 내밀고 있으니 시비가 떨리는 손으로 당보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까처럼 통과하지도 않고, 온전히 잡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말은?

"목소리는, 이 녀석이 말하는 게 들리는가?"

"들린다니까요. 제가 말할 때 마다 시선이 저한테 오잖아요."

당보의 말대로 당보가 입을 열 때마다 시비의 시선이 당보에게로 향했다 제게로 돌아왔다. 청명은 이대로면 실신할 것 같은 시비를 돌려보내고 아까 당보가 했던 것처럼 당보의 손을 상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턱, 하고 가로막히는 손은 정말 사람 같아서, 청명은 손목을 쥐고 온 신경을 손가락에 집중했다.

두근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두근

정말로? 이렇게 갑자기?

검은 무복을 풀어헤치고 붕대를 맨 가슴 위에 귀를 대 간절히 바라는 그 울림이 들리기를 바랬다. 제 착각이 아니기를. 정말로, 내 소원이 이루어졌기를.

두근 두근 두근

130년이 지나야 들을 수 있는 소리라니. 너무 비싼 거 아니냐...

청명은 당보의 등을 끌어안아 당보가 제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고정한 채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일정한 박자로 두근거리는 심장은 너를 떠나보내던 날보단 빠르고, 제 심장보단 느리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네가 돌아온 이상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을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두 번 다시 널 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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