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여청] 귀여워서 그랬다, 귀여워서
... 저 귀여워요?
*여당여청 1.5편입니다.
*1편과 흐름이 동일하며 1편에서 생략된 청명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결제창은 외전입니다.
미시가 되어서도 오지 않는 당보가 이상했다. 아침 일찍 만나 꽃도 보고, 술도 마시고 싶다며 재잘거렸었는데.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신 건 아니었으니 까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련을 하며 괜히 산문 앞도 서성여보고, 기감도 넓게 펼쳐보고, 서신이라도 오면 당가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둥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래도 보이지 않아서 짜증을 담아 검을 휘두르자, 지나가던 청진이 그럴 거면 그냥 당가에 가보시라 말했다.
"내가 왜? 걔가 올 텐데."
"그럼 가만히 좀 계시던가요! 애들이 눈치만 보고 있잖습니까."
"이게 나 때문이냐? 온다고 해놓고 지금 안 오는 게 문제지."
"설마 암존께서 까먹으신.., 아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
청명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청진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쯧, 청명은 검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걸 보니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유시가 되어서야 나타난 당보에게 왜 이리 늦었냐며 타박했다. 분명 미안하다며 애교를 부리겠지 싶어 마음을 다잡았으나 돌아온 것은 비가 와서 늦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었다. 하늘을 보니 곧 비가 쏟아질 것 같긴 한데..
옷이 젖어 드는 느낌에 청명은 당보의 차림새를 훑어봤다. 평소랑 같은 녹색 장포에 제가 준 비녀. 머리와 옷이 젖어있는걸 보면 사천에는 비가 오는 모양이다. 비를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웃는 얼굴이 평소랑은 달라서. 우선 처소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하는 짜증 좀 들어주고 술 좀 먹이면 괜찮아 지겠지.
처소로 가는 사이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비에 젖을 수록 당보의 얼굴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게다가 옷이 몸에 붙는데도 당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건지. 가는 길에 들은 헛소리는 대충 넘기고 서둘러 처소로 들어갔다.
청명은 젖은 당보를 앉혀두고 방을 나왔다. 갈아입을 옷과 닦을만한 천이 필요했다. 그리고 보니 어제 새 옷을 입겠다 한 것 같았는데. 제가 선물한 비녀가 있는 건 만족스러웠으나 새 옷이 아니라는건 분명했다. 설마, 옷 때문에 저러는 건가? 새 옷을 입고 싶었는데, 그걸 못 입어서? 장신구 하나하나 신경 쓰는 세가 놈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생각이었다.
당보에게 입힐만한 것으로는 하얀색과 매화색, 녹색, 검은색 장포가 눈에 들어왔다. 녹색은 빼고, 무복도 검정인데 장포도 검정일 필요가 있나 싶어 제외했다. 문득 비녀로 머리를 올려주었을 때 당보의 얼굴이 꼭 홍매화 같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비녀랑 같은 색으로 물든 얼굴이 참 곱다 싶었는데, 거기에 장포도 매화색...?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 이보다 잘 어울리는 색은 없을 것 같았다.
항상 툴툴거리면서도 당가를 애정하는 녀석인걸 안다. 그런 당보에게 매화색장포를 입혀도 될까? 진작에 녹색을 제하긴 했지만, 도사로서의 양심은 남아있었다. 저 장포를 입히고 객잔이라도 가면, 사천당가의 암존이 매화색장포를 입고 매화검존과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나겠지. 녹색도 아니고 매화색을 입었으니 말 거는 놈들도 없어질 거고, 안 그래도 혼담이 들어온다며 툴툴거렸으니 혼담도 없애고. 내 거라고 티도 내고.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선택을 마치고 방으로 가니 당보는 눈을 찌푸린 채 청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들고 있는 옷을 보면 놀릴게 분명해 당보에게 천을 던져 시야를 가리고 옷을 내려두었다.
"...뭐에요?"
"다 젖었잖아."
"그냥 두면 알아서 마를 텐데요."
"닦으라고 했다. 아니면 맞고 닦을래?"
당보는 청명을 째려보고, 말코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숙였다. 당보의 말을 듣고 열이 받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게 챙겨줘도 기어오르네? 하지만 앞에 엎드린 당보가 아파하는 게 보여서.
"보야!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파? 약은? 의약당에 갈까? 장포에 약 있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청명은 신음하는 당보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프다면 아프다고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냐. 야바위라고 해도 화내지 않을게, 때리지도 않을 거니까. 제발, 제발 아프지 말아라 당보야.
순간 나서는 안되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심지어 점점 진해지니 몸의 어딘가에서 피가 나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늦은 게 이것 때문이었나. 그러면, 그렇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청명은 당보를 안고 의약당으로 달려갔다.
"야!"
청명은 의약당 문을 발로 차 열었다. 빈 자리에 당보를 눕히고, 아파하는 당보의 손을 잡고 괜찮아, 내가 있잖아라고 말을 건넸다.
당보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네진 질문에 하나씩 대답했다. 맥을 짚고 약을 먹으니 표정이 한결 나아 보여 다행이다 하고 안심했는데, 당가에 연락을 해달라는 말에 의약당주을 보았다.
"...그 정도로 심각하냐?
"독이라면 저희보다는 당가쪽이 더 잘 알겠죠. 암존정도 되는 분의 병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 뭐라도 알게 되면 바로 말하고."
당가의 사정이라면 이곳에선 할 수 있는 게 없다. 존자도 단 놈이 아플정도면.. 보통일은 아니겠지. 청명은 오가는 시간을 가늠해본 뒤 몸을 일으켜 의약당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생리통인 것 같다는 말에 발이 멈췄다. 아까 아파하던 게 생리통이었다고? 고작 그거 때문에?
자신은 생리통이 없었으나 사매중에 유독 생리통이 심한 녀석이 있긴 했다. 그마저도 약을 먹으면 금방 나았고, 제 입으로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었는데. 그렇지만 당보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아파하지 않았나. 청명은 제가 아는 상식과 당보의 행동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새끼 이거 야바위네. 아까의 다짐을 잊은 주먹이 당보의 머리에 꽂혔다.
"이게 별것도 아닌 거로 사람 떨리게 만들고 있어!"
당보는 청명을 노려보며 한두 마디 하다 부들부들 떨었다. 화낼 기운은 있나 보지? 하고 코웃음 치니 당보의 눈가가 붉어지고 곧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물이 맺혔다. 우, 울어? 머리 좀 맞았다고? 우는 것도 귀엽긴 한데.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 의약당..! 청명은 장포 속에 들어간 당보의 손을 막으려 했으나, 탁 하고 암기가 벽에 박혔다.
"사람 마음도 모르고! 언니는 정말 최악이에요!!"
라는 말에 내가 뭘 했다고! 하고 억울함을 토로하려 했다. 그러나
"사랑싸움은 나가서 하세요!"
"사랑싸움 아니거든!?"
습관처럼 부정의 말이 나오는 것이 훨씬 빨랐다.
"윽, 나 아프다고... 말코야..."
"헉, 야 너 우냐?"
"아프다고 했는데에, 걱정해주지도 않고. 때리고..흡, 정인 하자면서.., 아니라고..흑, 계속 부정하고"
당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고, 제게 향하는 따가운 시선들도 하나씩 늘어났다. 때린다느니, 협박한다느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해대길래 어이가 없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당보가 움찔하니 따가운 시선들이 경멸하는 눈빛들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이건 사파한테도 안 받아봤는데! 청명은 정말 억울했으나 우선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는 당보를 품에 안고 처소로 돌아갔다.
당보의 젖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히며 생리할 때의 제자들이 어땠는지를 생각했다. 평소보다 기운이 없고, 쓸데없는 걸로 예민했고, 밥을 잘 먹었던가? 안 먹으면 기운이 없을 텐데. 약은 의약당에서 먹긴 했지만 당보에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약효가 길지 않겠지. 그래, 먹고 재우자. 짧은 생각 끝에 청명이 몸을 일으켰고, 당보는 그런 청명을 붙잡았다.
"왜, 아직도 아파?"
"어디 가요."
청명은 제 소매를 잡은 당보를 떼어내고자 했다. 괜히 기운 빼지 않도록 살살. 그러나 그럴수록 붙잡은 소매가 당겨져서, 청명은 당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무것도 안 먹은 거 같아서 뭐라도 가져오려고."
"옆에 있어 줘요.."
눈꼬리를 살살 내리고 가지 말라 붙잡는 정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일단 난 아니다. 누구라고 저 녀석의 얼굴을 보면 옆에 있어 주고 싶어질게 분명하다. 물론 아무도 못 보게 할거지만.
남아있는 눈물 자국에 미안한 것도 사실이라, 청명은 못이기는 척 침상에 누웠다. 당보가 제 팔을 배고 누울 수 있도록 팔을 한쪽으로 뻗어 당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실실거리며 팔과 몸 사이에 눕길래, 머리 사이 팔을 끼우고 내력으로 손을 따뜻하게 해 당보의 배를 살살 만져주었다.
"이제 괜찮아?"
"언니가 계속 옆에 있어 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냐."
붉어진 귀가 귀여웠다. 팔베개 하나 가지고도 이러는데 접문이라도 하면 터지는 거 아닌가. 나니까 참는 거지 다른 놈들은 보자마자 홀랑 잡아먹을게 분명하다. 귓가만이 아니라 얼굴, 목, 쇄골, 가슴, 배... 아니, 이건 절대 못 보여준다. 요즘 들어 아무 데서나 옷 좀 벗지 말라거나, 웃어주지 말라는 헛소리를 하는데 진짜 문제는 자기란걸 모르나? 안 그렇게 생겨도 허당짓만 하는 녀석이니 누굴 홀려올 수도 있다. 화산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차라리 단장애에 데려가면, 둘만 있고 방해할 놈들도 없다. 좋은데?
꾸욱, 무언가 볼을 찌르는 느낌에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 묻길래, 네 생각을 한다고 대답했다. 이 정도 말로도 부끄러워 하니 괜히 놀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아까까지 아파하던 것도 생각나서 당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럴 때만 잘해주지, 망할 말코."
"평소에도 잘해줬잖아."
"밖에서도 정인처럼 대해달라는 말이에요."
"손잡고 팔짱 껴도 가만히 있잖아. 같이 걷고 술도 마시고. 가끔 꽃구경 가고 이게 정인 아니야?"
오늘도 같이 있잖아. 팔베개도 해달래서 해준 건데.
"밖에서 저랑 정인 취급받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도사 언니가 매화검존에 천하제일인이고, 대화산파의 장로이니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는 건 알지만 화산에서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 정인인 거 다 아는데. 사천당가가 다른 제자들이나 장문인 눈에 안 차"
아니, 내가 언제? 진짜 싫어하면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지. 그걸 제일 잘 아는 게 너잖아.
"안 싫어해."
"서 그런..., 네?"
"안 싫어한다고. 너랑 정인 취급 받는 거."
"그럼 왜 맨날 아니라고 해요? 오늘도 사랑의 도피다, 사랑싸움이다 했을 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무슨, 너는 그런걸 다 기억하고 있어. 청명은 붉은 기가 남은 당보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당보의 눈빛은 누가 보면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 같았으나 청명이 보기엔 전부 애교와 투정에 불과했다.
"다른 놈들 보여주기 싫어 그랬다. 거기서 맞다 하면 얼굴 빨개져서 다닐 거 아니야."
"그렇게 못납니까? 어디 가서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뭘 또 꼬아서 듣냐."
"못난 아우가 부끄럽다는 거잖아요. 그래도 정인인데 곱다는 말은 한번 안 해주고, 너무하시오."
청명은 삐죽 내민 채 툴툴거리는 당보의 입에 입을 맞췄다. 어휴, 허당자식. 이렇게 귀여운걸 누굴 보여주냐, 나만 봐야지.
"귀여워서 그랬다, 귀여워서. 다른 놈들 보여주기 싫어서. 미인이 붉어진 얼굴로 웃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냐? 지 입으로 사천제일미니 뭐니 하면서 이런 쪽으로는 영 생각을 못하네."
"...제가 귀여워서 그런 거라고요?"
"그래. 쪼그만 게 애교도 부리고, 웃으면서 언니 언니 거리는데 누가 안 넘어가냐. 청진이한테 들어보니까 요즘도 화음에서 한놈씩 고백한다며. 여기가 사천도 아니고, 헤실거리면서 다니는데 누가 암존이라고 생각하겠냐."
안그래도 화산에서 당보가 맞는걸 자주 보다 보니 제자들도 당보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고, 종종 암존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걸 보면 관심이 생긴 녀석들도 많아진 것 같았다. 화산도 이런데 화음은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것이다.
당보는 제 입술을 만지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동안 질투가 나서... 그런 거라고...? 그 매화검존이? 당보가 시야를 올려 청명과 눈을 마주 보았다. 가만히 눈을 마주 보자 당보의 애정 가득한 눈이 휘어졌다. 그리고는 얼굴 모든 곳에 입을 맞추겠다는 듯 쪽쪽 거리니 심장이 간지러워 당보의 얼굴을 살짝 떼어냈다.
"이거 봐라. 귀엽다는 말 한마디에 좋아서 풀어지는데. 누구 좋으라고 보여줘."
당보는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잡은 청명의 손에 입을 맞췄다.
"도사 언니."
"그래."
"진심으로 연모해요"
"알고 있다."
"이럴 때는 나도 연모한다 말해주셔야죠!"
"그래, 나도 연모한다."
당보는 연모한다는 말에 신이 나서는 혼자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청명은 무슨 꽃이 향기가 좋다는 말에 제 품 안의 약초향을, 사랑 노래가 유행한다는 말에 술에 취해 흥얼거리던 당보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청명은 살며시 눈을 떴다. 밖을 보니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진 않았다. 잠든 당보의 머리를 살짝 들어 제 팔을 빼고, 조심히 침상을 벗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당보가 얼굴을 찌푸린 채 자고 있어서, 금방 다녀오겠다 속삭이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의약당에 가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약을 건네주었다. 이건 진통계열이고, 이건 수면 효과가 있어요. 암존께서 아파하시면 따뜻하게 해주시고, 손, 발을 주물러 주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싫어하시면 하지 마시고요. 무엇보다 평소보다 예민하실 텐데 절대 때리시면 안 됩니다!
"크흠, 고맙다"
청명은 건네준 약을 받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되새겼다. 그리고 돌아가려는데 제자가 무언가 묻고 싶은 것처럼 눈치를 보길래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그.., 암존께서도 생리를 하세요?"
"어?"
"암존께서 장로님이랑 나이가 비슷하시다면 오래전에 끝나셨을 것 같아서요."
듣고 보니 그렇네? 당보 저 녀석이 겉보기엔 어려 보여도 속은 노인네였다. 6살이나 어리다고는 하지만 진작에 끝났을 나이인데. 진짜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아니면 독 때문일 수도 있고요."
"독?"
"네, 사천당가잖아요. 독이 생리가 끝나지 않게 하거나, 더 아프게 하거나 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자세한건 암존께 물어보시면 알지 않으실까요? 오늘 모습을 보면 모르셨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래, 가보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제 입으로 온갖 독을 먹으며 자라왔다고 했으니까. 당보에게 묻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자는 애를 깨워서까지 알아내야 할 것은 아니었다.
살짝 방문을 여니 당보는 조용히 자고 있었다. 약을 두고 피가 묻은 옷들을 빨고 정리했다. 무복도, 장포도 깨끗하게 개서 탁자에 올려두려니 아까 가져온 옷이 눈에 밟혔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생각은 없어서, 녹색 장포에 들어있던 것들을 대충 매화색 장포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녹색은 옷장 깊숙한 곳에 넣으니 일어난 당보가 입을 수 있는 건 꺼내 둔 이 장포 뿐이다.
매화색에 휩싸인 당보를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둘러싸인 것만이 아니라, 온 몸이 매화색으로 물들었으면 좋겠다. 제가 이런 생각 하는걸 알면 당보가 도사 맞냐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청명은 당보의 옆에 몸을 눕혔다. 흐트러진 이불을 가슴 위로 덮어주고, 당보를 꼬옥 안고 배를 살살 토닥이며 잠에 들었다.
"흑.., 윽..언니, 언니이..."
"그래 보야. 응응, 괜찮다. 더 자"
벌써 3번째다. 조금 잤다 하면 아프다며 절 찾는 게. 처음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약을 먹여야 하나 싶어 당보를 깨우려는데 눈을 감고 낑낑거리길래, 괜찮다 토닥여주니 금방 진정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게 한 시진도 안돼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이다.
잠자긴 글렀으니 수련이나 할까 몸을 일으키면 귀신같이 칭얼거리길래 다시 누웠다. 잘 자다가도 아파하는 정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조금 울적해졌다. 엄살도 심하고, 몸도 조그만 게 아플 곳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아파하는지. 청명은 이불을 덮은 채 당보의 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당보가 꿈이라도 꾸는지 중얼거렸다.
"우웅... 따뜻해."
"그래."
"헤헤... 좋아요."
"좋냐?"
"네에. 연모한다구요."
당보가 헤실거리며 제 품을 파고들었다. 혹시 깬 건가 싶어 당보를 보니 웃는 얼굴로 자고 있었다. 잠결이지만 정인의 연모한다는 말은 듣기 좋아서, 청명은 당보가 하고 싶어 하던 것들을 생각했다. 꽃구경이랑, 술 마시기? 하고 싶다 말한 것은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전에 당보랑 간 곳이 술맛이 좋았는데 거기나 가자고 할까. 근데 생리하는 동안 술을 마셔도 되나?
품안의 당보는 따뜻했고, 은은한 약초향이 났다. 무엇보다도 연초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잠든 당보를 껴안고 잠을 청했다.
"아으..,아파, 아파요. 윽, 흐으.."
어어..자자. 청명은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당보를 토닥였다. 슬쩍 밖을 보니 조금씩 밝아지는 게 조금만 기다리면 해 뜨는 것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죽겠다. 청명은 손으로 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점점 간격이 길어지긴 했으나 깊게 자지 못하니 눈과 정신이 피곤했다. 걱정도 한두 번이지 5번이 넘고 나서는 귀찮음이 더 컸다. 청명은 짜증을 담아 자는 당보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보야. 잠 좀 자자."
청명은 한숨을 쉬면서도 당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또 개기기만 해봐. 정인처럼은 무슨, 정인이 아니라 상전인 줄 알겠다. 그거 좀 건드렸다고 인상이나 쓰고 말이야.
검지 손가락으로 당보의 찌푸린 미간을 눌러 주름을 폈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바뀌는 얼굴은 깨어있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잠을 자면서도 뭐가 그렇게 바쁜지 웃다가 찌푸리다가, 당보의 얼굴만 구경해도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피곤함이 더 컸다.
당보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이 쓰여 긴장했는지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모양이다. 당보는 언제 아팠냐는 듯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안심이 되어 청명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음..? 얼굴 위로 시선이 느껴진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눈에서 코, 코에서 입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살기보다는 애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손길, 코 끝에 스치는 약초 냄새. 아, 당보구나. 평소엔 늦게까지 자더니 오늘은 일찍 깬 모양이다. 갑자기 입술을 꾹 누르길래 당장이라도 눈을 떠 무슨 짓이냐 묻고 싶었으나 피곤하기도 했고, 귀찮기도 하여 그냥 두었다.
당보는 혼자 낑낑거리더니 자냐고 묻고, 등에 추혼비를 박겠다며 헛소리를 해댔다. 그 모습이 웃겨서 청명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 진짜 자요?"
당보는 평소에 귀신같이 알아차리면서 지금은 자냐고 볼을 찌르고 있다. 혹시 야바위인가 싶어 당보를 휙 당겼다. 당보는 당기는 대로 따라와 제 위에 엎어졌다. 당보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흐트러진 침의 너머로 가슴골이 보여서, 당보를 끌어안아 제 시야를 가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침부터 사람 죽일 일 있어요?"
죽이는건 내가 아니라 너지. 야해빠져가지고.
"어제부터 앵알앵알 거리더니 몸은 좀 어떠냐"
"앗, 언니가 접문한번 해주면 나을 것 같은데"
"상태가 안 좋긴 한가보네"
"그쵸, 접문 한번 어때요?"
당보의 눈에는 은근한 기대가 담겨있었다. 어제의 일 때문에 청명도 나름 느낀 게 있어서. 접문을 해줄까, 말까 고민했다. 근데 이 새끼 아까 추혼비 박겠다고 했는데. 내가 어제 잠도 못 자고 돌봐준 건 생각도 안 하고 일어나자마자 추혼비?? 순간 짜증이 났다. 저 실실 웃는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야겠다.
당보의 목덜미를 잡고 입을 맞췄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혀를 집어넣고, 당보의 등허리를 쓸었다. 그러자 뒤로 손을 뻗어오길래 마주 잡고 깍지를 꼈다. 살살 손등을 쓸어주니 찡그리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숨이 차는지 어깨를 툭툭 치길래 고개를 기울여 더 깊이 혀를 섞었다. 항상 받기만 해서 몰랐는데, 몽롱한 두 눈을 보니 접문만 하면 제 몸을 만져대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마주보던 당보의 눈이 사르르 감기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돼. 하루를 이렇게 날릴 수는 없다. 그것도 화산에서는, 절대 안 된다.
청명은 대충 핑계를 대고 몸을 벌떡 일으켜 침의를 갈아입었다. 아무 끈이나 집어 머리를 질끈 묶고 방을 나갔다. 당보의 얼굴이라도 보면 짐승 새끼 마냥 덮칠 것 같아서 서둘렀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청명은 지나가던 청진을 잡아두고 당보를 기다렸다. 당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청진이 꼭 필요했다. 이걸 진짜 해? 청명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보고 싶다는 것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계속 충돌했다. 미치도록 고울 게 분명해서, 누가 보지 못하도록 꽁꽁 싸매고 싶었다. 이런 순간에 지나가는 청진을 잡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사저, 저 진짜 바쁘다고요!"
갑자기 붙잡아 놓고 아무 말도 없이 한숨만 쉬니 또 왜 이러나 싶었다. 암존이랑 잘 지내셨던 거 아닌가. 같은 방에서 머무시는 것 같던데. 청진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익숙한 녹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암존은 왜 같이 안 오셨지?
"진아, 나 좀 도와줘라."
네? 제가요? 청명에게서 처음 듣는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나요? 사저께는 암존이 계신데. 그런데 암존 아프시다고 하지... 않으셨나? 설마 죽이신 건 아니겠지. 정인이신데. 사저라면 죽이고도 남겠지만, 그래도 당가의 태상장로이신데. 아니죠..? 사저, 제발 아니죠? 청진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암존께서는 지금 어디계십니까..?"
"네가 그걸 왜 궁금해해?"
청명이 청진을 못마땅 하다는 듯 보았다. 청명의 얼굴은 당보가 누군가와 이야기라도 할 때면 보이는 표정이라, 그 모습에 청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질투구나. 청명이 사고라도 쳤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큰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곧 당보가 나올 거거든? 여기 있다가 걔 오면 평소처럼 행동해."
"평소처럼요? 뭘 또 하시려고."
"그리고 당보오면 여기 있다가 눈치껏 빠져."
"할 일이 산더미인데 고작 서 있으라고 붙잡으신 겁니까?"
"잠깐, 온다. 뭐라도 말해봐"
"아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해요??"
"평소에 애들이랑 하는 말들 있잖아! 객잔 같은 거!"
청진은 청명에게 대들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럴 때는 빨리 들어주고 피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였다.
"화음에 사천 음식을 하는 객잔이 생겼다는걸 들은 것도 같습니다. 어린 제자들이 먹기엔 매운데, 암존께서는 사천분이시니 입에 맞을 수도, 잠시만요 사저. 지금 제 눈이 잘못된 겁니까?? 왜, 왜 암존께서..."
청명의 뒤로 녹색 하나 두르지 않은 당보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청명은 다 알면서도 어어, 거기 맛있지, 하며 당보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대꾸하였다.
청진은 정말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왜 이 꼴을 봐야 하는지. 당보가 왔으니 빠져야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청명의 눈빛이 가만히 있어라 라고 말하고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도사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요?"
청명은 당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갈색 머리에 꽂힌 붉은 비녀, 은은한 볼의 열기와 반짝이는 두 눈, 그리고 장포까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고운 모습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대로 한 바퀴 돌며 흔들리는 장포 자락이 꼭 나비의 날갯짓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보는 눈웃음을 치며 청명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청진을 잡아둔 것인데, 막상말로 전하려니 부끄러웠다. 그러나 당보의 얼굴이 나 기대하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듯해서. 청명은 기대에 부응하듯 당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곱다. 매화색도 잘 어울려."
청명이 당보의 손을 잡고 산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러면 화산에는 확실히 소문이 날것이다. 왜 이런걸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좋아하니, 그걸로 되었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짙은 풀 냄새가 불어왔다. 앞서가던 걸음을 늦추니 뒤따라오던 당보가 청명의 옆에 서 나란히 걸었다. 청명은 당보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래, 음, 괜찮네 하고 적당히 대답했다. 비가 내렸다고는 볼 수 없는 맑은 하늘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당보까지. 하루의 시작이 좋았다.
그렇게 걷는데 당보가 자리에 멈추어 서는 게 느껴졌다. 당보를 돌아보니 눈을 몇 번 깜박깜박 하고는, 장포로 눈을 비벼 댔다. 애교라도 부리나 싶었는데 눈이 촉촉해지는 것이 보였다.
"뭐해"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아서요. 잘 안 빠지네요."
청명은 당보의 눈을 살펴봤다. 눈물이 고인 것 말고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여, 약하게 바람을 불었다. 바람이 닿아 감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길래 손가락으로 닦아내 주었다. 그러자 당보는 눈을 뜨고 이상한 질문을 내뱉었다.
"... 아까 접문은 왜 한 거에요?"
"네가 해달라며."
"눈도 뜨고 있었잖아요. 평소엔 안 그러면서."
눈을 뜨고 해서 불만인가? 아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거다.
"또 뭐 때문에 그러는데."
"그냥... 아까 왜 그런 건지 궁금해서요. 별 이유는 없습니다."
청명은 대가리를 깨서 불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말만 잘하던 놈이 풀 죽어서는 땅만 보고 있으니 황당했다. 해달라는 건 다 해줬건만, 차라리 말로 하던가. 누가 보면 정인이 아니라 짝사랑인 줄 알겠네. 한참을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웃길래 역시 야바위였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도 괜찮고 다시 갈까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뭐라도 먹고 싶어요."
야바위맞네. 나는 이 그린 듯한 웃음을 본적이 있다. 나를 연모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아무 말 없자 저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었지. 그때 뭐라고 했더라, 연모한다.. 속상하다.. 아, 안아달라고 했네.
"안아줘?"
"... 네?"
"안아주냐고."
"왜, 왜요?"
저 얼빠진 표정, 이게 당보지. 귀여운 자식. 청명은 당보를 안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갔고, 이에 맞춰 당보가 한걸음 물러났다. 또 한걸음 가면 물러나고, 가면 물러난다. 청명은 한숨을 한번 쉬고 당보에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당보는 고개를 끄덕였고, 청명은 당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당보의 몸이 긴장한 듯 굳어있었다. 당보에게 팔을 두르라 말하니 경계하면서도 팔을 두르길래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당보를 안아 올리자 당보가 꺅 소리를 내며 제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안긴 당보는 생각 이상으로 가벼웠다. 허리도 얇고, 엉덩이는 말랑한 게 무인이 맞나 싶었다. 굳어있던 당보는 어느샌가 제 얼굴을 갖고 놀고 있어서, 안은 자세 그대로 길을 걸었다.
허리에 감은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머리 끈을 가지고 노는 걸 보니 아해가 따로 없었다. 품에서 나는 약초향,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와 손길. 당보에게서 전해져 오는 애정은 언제나 청명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순간 바람이 불어 머리가 흐트러졌다. 잠시 멈춰서서 머리를 정리하려는데 손길이 느껴져 시야를 들었다. 하얀 손가락이 까만 제 머리카락 사이를 움직인다. 제멋대로인 머리카락을 쓸더니 일부는 귀 뒤로, 일부는 가지런히 내린다. 집중했는지 벌어진 입과 제 머리카락에 고정된 암녹색 눈. 정리가 끝난 건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모습까지. 당보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쳤다. 어, 눈 커졌다.
당보가 두 손으로 청명의 양 뺨을 감쌌다. 얼굴에 닿은 당보의 손이 서늘해서, 청명은 그제야 제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당보는 눈을 감고, 청명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도 입을 떼지 않길래 살짝 입을 벌리니 그 틈으로 당보의 혀가 들어왔다.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니 급하게 혀를 섞어댄다.
당보는 입을 떼고, 새빨개진 얼굴과 흥분한 얼굴로 청명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숨이 차나 싶으면 그만하라며 어깨를 쳐댔는데, 뭐에 흥분한건진 몰라도 숨이 넘어가도록 입을 떼지 않는 것이 좋았다. 당보가 어느 정도 진정된 것처럼 보여서, 청명은 말했다.
"접문은 왜 했어."
청명의 질문에 당보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혼자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언니가.. 너무 좋아서요."
당보는 다 아는 듯 굴면서도 꼭 한 번씩 뒤로 물러나 제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제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에 벌벌 떤다. 지금도 내가 거절이라도 한다는 양 긴장을 하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조차 사랑스러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를 좋아하기에 나오는 행동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청명은 말해주었다. 나 역시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도 그래. 날 보는 네가 좋아서, 그래서 그랬다."
당보는 붉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두 다리로 제 허리를 감고, 목을 끌어안더니 귓가에 웃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뒤는 객잔가서 할까요?"
청명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 풀렸네. 되지도 않는 도발도 하고.
"머리에 든게 그런거 밖에 없지?"
"그런 저를 연모하시면서. 빨리 가시죠, 딱딱한 흙바닥 보단 푹신한 침상이 좋소."
당보의 말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비슷한 심정이라 청명은 걸음을 빨리했다. 기껏 계획한 일정이 어그러지겠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지. 미소를 짓던 당보는 이제 입가를 가리고 웃어댔다. 잡아먹겠다는 헛소리로 도발하길래 받아쳐 주니 까르르 웃는다. 가봤자 또 술이나 마실게 뻔하지만 오늘은 좀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미시-오후 1시~3시
*유시-오후 5시~7시
외전 - 비녀를 주던 날의 이야기
"...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거길 뛰쳐나왔다니까요. 이제 막 걷기 시작할 때 독을 먹이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음, 그렇지"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애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저처럼 되는 거죠! 항상 독이 아니라 암기가 중요하다고..."
청명은 당보가 하는 말을 들으며 술을 삼켰다. 당보의 머리에는 녹색의 비녀가 꽂혀있었고, 장포 역시 녹색이라 멀리서 봐도 당가의 무인임을 알 수 있었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지탱하는 비녀, 그래. 다 저 비녀 때문이다. 답지 않게 비녀를 산 것도, 그 비녀가 며칠째 제 품 안에 있는 것도, 전부 저 녹색의 비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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