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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여청] 정인처럼 대해달라는 말이에요

해주고 있잖아. 이게 정인 아니야?

마노 글 모음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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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여청 1편입니다.


"내가 치우라고 하지 않았나?"

당보의 짜증 섞인 말에 시비들은 눈치를 보며 서둘러 상을 치웠다. 시비들은 어젯밤 처음 보는 비녀를 꽂고, 도사 언니가 선물해준 것이라며 즐거워 하던 당보를 기억했다. 비녀와 어울리는 옷을 꺼내 걸쳐보고, 여러 장신구들을 대보는 당보는 꼭 사랑에 빠진 아가씨의 모습인지라, 어린 아가씨를 보는 것 같아 흐뭇해했었다.

좋았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당보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무거웠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청명이 저를 화산에 부른 날 하필 비가 내린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저께 새로운 독을 먹었으니 몸 상태가 다른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쁜 새 옷을 입고 술을 마시며 도사 언니에게 애교도 떨어보고 그러다 품에서 잠드는 끝내주는 계획을 세운 당보에게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 수가 없어 애꿎은 시비들에게 화풀이를 하던 것이 아침의 전말인 것이다.

당보는 끝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한숨만 쉬어댔다. 청명이 연초냄새를 싫어해서 만나는 날이면 피지 않았는데. 청명에게 맞더라도 장죽을 피워야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은 날이었다. 비를 뚫고 화산을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채 청명을 만나고 싶진 않아서 하늘만 노려보았다.

정오가 지나자 한참 쏟아 내리던 비는 조금씩 잦아들었고, 당보는 평소와 비슷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검은 무복에 짙은 녹색 장포, 한가지 다른 것은 홍매화로 장식된 붉은 비녀가 당보의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공을 펼치며 서둘러 화산에 도착한 것은 좋았다. 비록 비 때문에 새 장포를 꺼내입진 못했지만, 청명의 머리 끈과 같은 색의 장포는 둘이 정인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러나 공기 중에 섞인 비 냄새는 몸을 무겁게 만들었고 어딜 가든 진흙 투성이인 길은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장포의 끝이 축축해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문 앞에 서서 한 제자에게 매화검존을 불러달라 이르려던 찰나 멀리서 달려오는 청명을 보고 당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사 언니!"

"뭐 이렇게 늦어."

"비가 와서요. 많이 기다렸어요?"

당보는 청명의 팔짱을 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의복에 청명의 옷도 젖어 들었다. 하늘을 보니 화산에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청명은 우선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어딜요?"

"내 방."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당보는 장난스레 대답하며 청명을 따라갔다. 주먹을 쥔 청명의 손을 보고 농입니다! 를 덧붙이며.

그 사이 비가 와 둘은 쫄딱 젖은 채 청명의 처소로 들어갔다. 청명은 제 방에 당보를 두고 닦을 천을 찾으러 나갔다. 이래서 비 안 올 때 나온 건데. 비가 와 찝찝하고, 물을 먹어 무거워진 옷은 당보의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처소로 가다 만난 제자들이 사랑의 도피라도 하시냐며 놀려댈 때 청명이 그런 거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니 당보의 서운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청명에 내력을 써 몸을 말리려던 찰나 문을 열고 청명이 들어왔다. 청명은 당보에게 마른 천을 던지며 가지고 온 옷들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뭐에요?"

"다 젖었잖아."

"그냥 두면 알아서 마를 텐데요."

"닦으라고 했다. 아니면 맞고 닦을래?"

닦여줄것도 아니면서, 사람 마음도 모르고 말코 도사. 당보는 작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천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순간 머리기 핑 돌더니 아랫배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무거워져 당보는 제 배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독을 처음 먹은 것처럼 속이 뒤집히는듯한 느낌은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다. 그보단 심한 듯하지만 그때는 원인이라도 알았지 이번은 원인도 모르니 맞는 해약이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청명은 말코라는 말에 오냐, 네가 매를 버는구나 하고 주먹을 들었으나 제 앞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억누르는 당보를 보자 손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보야!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파? 약은? 의약당에 갈까? 장포에 약 있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청명이 말을 했지만 당보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원인을 모르는 통증이었다. 독과는 다른, 배를 쥐어짜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은 익숙하지 않아서 배를 움켜잡고 고통을 참고자 했다. 청명은 아무 말 없이 신음하는 당보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괜찮아하고 말을 건넸는데.

혈향이다. 순간 청명의 코를 스친 이질적인 향은 혈향이였다. 점점 짙어지니 당보에게서 나는 것이 분명하다. 외상이었던 건가? 이곳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의약당에 가서. 당보를 살려야 한다.

청명은 아직도 젖어있는 당보를 안고 곧장 의약당으로 달려갔다. 옷을 말리지 않아 축축했음에도 제 옷이 젖는 것보다 당장의 당보가 더 중요했다.

"야!"

의약당 문을 벌컥 연 청명은 비어있는 자리에 당보를 눕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의약당원들은 청명의 표정에 1차로 놀라고, 그 청명의 손에 들린 암존에 2차로 놀랐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으나 느껴지는 혈향과 고통스러운 표정, 빗물과 함께 떨어진 핏방울들이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의약당원들은 당보의 맥을 짚고, 상태를 보고는 약을 몇가지 가져와 먹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갑자기 쓰러져서는 고통스러워 했다. 피 냄새가 나는 거로 봐서는 독 때문일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장로님께선 당가에 연락을 넣어주시죠."

"...그 정도로 심각하냐?

"독이라면 저희보다는 당가쪽이 더 잘 알겠죠. 암존정도 되는 분의 병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 뭐라도 알게 되면 바로 말하고."

그렇게 청명은 몸을 돌려 의약당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장로님!! 암존께선 생리통이신 것 같습니다!"

저를 붙잡는 의약당원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뭐? 고작 생리통 때문에 저런다고?

화산의 도사들은 생리통이 없다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있는 사람들도 약한 복통을 호소하는 것 정도라. 오히려 흐르는 느낌이 불쾌한 것이지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심지어 둘은 겉모습만 젊지 속은 노인네들이라 완경한지 오래인 나이인 것이다.

"이게 별것도 아닌 거로 사람 떨리게 만들고 있어!"

청명이 아는 생리통은 조금 불편하고 마는 것이기에, 야바위에 속았다는 짜증을 담아 당보의 머리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맞은 당보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청명을 노려봤다.

"별것도 아닌 거요? 언니는 제가 아픈 게 별것도 아닌 거라고 하는거에요?"

"아까는 죽는 것처럼 엎어지더니 지금은 또 멀쩡하네. 아까도 야바위였지?"

헹, 또 속을 줄 알고. 이젠 안 통한다 당보야. 청명은 코웃음 치며 당보를 보았다. 눈물을 참는 듯한 붉어진 눈으로 당보는 장포 속에 손을 넣은 채 청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얘 왜 이래. 잠깐만 당보야 진정하고. 여기 의약당이야. 당장이라도 암기를 던질 것 같은 당보의 손을 장포 속에서 빼내려 했으나

"사람 마음도 모르고! 언니는 정말 최악이에요!!"

당보의 암기가 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청명이 피한 암기들은 청명의 뒤쪽 벽에 박혔다.

"사랑싸움은 나가서 하세요!"

"사랑싸움 아니거든!?"

습관처럼 나온 부정의 말이었다. 내력 없이 쏘아진 암기는 당보의 몸에 부담을 주긴 충분했고, 또다시 배를 쥐어짜는 느낌과 함께 서운함이 밀려와 당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윽, 나 아프다고... 말코야..."

"헉, 야 너 우냐?"

"아프다고 했는데에, 걱정해주지도 않고. 때리고..흡, 정인 하자면서.., 아니라고..흑, 계속 부정하고"

말할수록 서운해서, 눈물이 흘렀다. 이 상황에서 달래주지도 않고 보기만 하는 청명이 정말 미웠다. 좋다고 했으면서 맨날 때리고 협박하고, 나는 언니 보고 싶어서 왔는데 언니는 야바위라고만 하고..흐흑..

당보의 말이 나올수록 청명 자신을 향한 비난의 눈빛이 하나둘 늘어났다. 저 말을 계속 듣고 있다가는 쓰레기로 소문나는 건 순식간이라 울고 있는 당보를 안아 제 처소로 돌아갔다. 다행히 비가 그쳐 더 젖지 않을 수 있었다.

당보를 침대에 앉히고 천으로 머리를 닦았다. 피가 묻은 옷을 갈아입혀야 했기에 입고 있던 장포를 벗기고 허리끈을 잡아 풀었다. 제 옷을 벗기는 청명의 모습에 도사가 유혹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청명을 보니 두 눈에 담긴 건 걱정뿐이라 어느새 마음이 풀어졌다. 당보를 침의로 갈아입힌 청명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고, 당보는 그런 청명의 소매를 붙잡았다.

"왜, 아직도 아파?"

"어디 가요."

"아무것도 안 먹은 거 같아서 뭐라도 가져오려고."

"옆에 있어 줘요."

어디가지 말고... 나 환자잖아.

붉어진 눈에서 흐른 눈물 자국이 양 뺨에 남아있었다. 맨날 우는소리에 우는 척을 할 땐 없었던 게 보이니 마음이 약해졌다. 안 그래도 아까 서운하다 말한 것들이 머리에 남아있어서 아닌 척 속상했겠구나 싶었다.

청명은 침상 위로 올라 한쪽 팔을 뻗어 옆으로 눕고 당보에게 손짓했다. 당보는 갑자기 누우라 손짓하는 청명에 의아했다. 옆에 있어 달라 하긴 했지만 같이 누울 줄은 몰랐는데. 막상 눈물보니까 미안하긴 했나 보지? 당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비녀를 풀고는 청명의 옆자리에 누웠다.

"머리."

"네?"

"머리 들어보라고."

머리는 왜? 당보가 머리를 들자 당보의 머리 아래로 청명의 팔이 들어왔다. 팔베개를 해준 것도 놀라운데 누워있는 당보의 배를 살살 만져주니 왜 이러나 싶다가도 좋아서 귓가가 붉어졌다.

"이제 괜찮아?"

"언니가 계속 옆에 있어 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러냐."

청명은 피식 웃으며 당보의 어리광을 받아줬다. 별거 아닌 걸로도 좋아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래서 다들 정인 만드나 싶고, 이렇게 좋아하는데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청명의 생각이 깊어 질 때쯤 당보가 청명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왜."

"무슨 생각해요?"

"너 생각."

"가, 갑자기 뭐에요..!"

당보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져서, 청명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이럴 때만 잘해주지, 망할 말코."

"평소에도 잘해줬잖아."

"밖에서도 정인처럼 대해달라는 말이에요."

"손잡고 팔짱 껴도 가만히 있잖아. 같이 걷고 술도 마시고. 가끔 꽃구경 가고 이게 정인 아니야?"

"밖에서 저랑 정인 취급받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도사 언니가 매화검존에 천하제일인이고, 대화산파의 장로이니 다른 사람들 눈치 보는 건 알지만 화산에서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 정인인거 다 아는데. 사천당가가 다른 제자들이나 장문인 눈에 안 차"

"안 싫어해."

"서 그런..., 네?"

"안 싫어한다고. 너랑 정인 취급 받는 거."

"그럼 왜 맨날 아니라고 해요? 오늘도 사랑의 도피다, 사랑싸움이다 했을 때 아니라고 했잖아요!"

다른 정인들은 다 하는 곱다, 어여쁘다도 안 해주고, 손잡는 것도, 접문도 안 해주고. 이게 싫어하는 게 아니면 뭡니까?

당보는 청명의 몸에서 얼굴을 떼 무슨 변명을 하나 보자 하는 눈빛으로 청명을 보았다. 그런 당보와 눈이 마주치자 픽 웃고는 배에 있던 손을 떼 당보의 눈가를 문질렀다.

"다른 놈들 보여주기 싫어 그랬다. 거기서 맞다 하면 얼굴 빨개져서 다닐 거 아니야."

"그렇게 못납니까? 어디 가서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뭘 또 꼬아서 듣냐."

당보는 입을 삐죽 내민 채 툴툴거렸다.

"못난 아우가 부끄럽다는 거잖아요. 그래도 정인인데 곱다는 말은 한번 안 해주고, 너무하시오."

청명은 삐죽 내민 당보의 입에 입을 맞췄다. 당보는 움찔하더니,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당보의 두 눈은 방금의 일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귀여워서 그랬다, 귀여워서. 다른 놈들 보여주기 싫어서. 미인이 붉어진 얼굴로 웃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있냐? 지 입으로 사천제일미니 뭐니 하면서 이런 쪽으로는 영 생각을 못하네."

"...제가 귀여워서 그런 거라고요?"

"그래. 쪼그만 게 애교도 부리고, 웃으면서 언니 언니 거리는데 누가 안 넘어가냐. 청진이한테 들어보니까 요즘도 화음에서 한놈씩 고백한다며. 여기가 사천도 아니고, 헤실거리면서 다니는데 누가 암존이라고 생각하겠냐."

화음에서 고백을 받은 거야 사실이지만 한 달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마저도 청명과 다니면서 횟수가 확 줄었고. 헤실거린 것도 청명 앞에서만 그런 건데. 그걸 다 알고, 질투 나서 그런 거라고? 천하의 매화검존이?

당보는 애정으로 가득 찬 눈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마주 본 청명의 눈 역시 넘치는 애정을 담고 있어서, 당보는 청명의 얼굴에 쪽쪽쪽 입을 맞추며 제 마음을 마음껏 드러냈다.

"이거 봐라. 귀엽다는 말 한마디에 좋아서 풀어지는데. 누구 좋으라고 보여줘."

굳이 따지자면 귀엽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지만, 오해한 채로 두는 것도 나쁘진 않아 정정하지 않았다. 질투다 뭐다 하면 부끄러워서 도망갈게 뻔하니까.

"도사 언니."

"그래."

"진심으로 연모해요"

"알고 있다."

"이럴 때는 나도 연모한다 말해주셔야죠!"

"그래, 나도 연모한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당보는 기분이 좋아져 청명을 꼬옥 껴안고 재잘거렸다. 여름엔 무슨 꽃이 피는데 향기가 좋아서 같이 보고 싶다거나, 요즘 사천에 유행하는 사랑 노래가 우리 이야기 같았다거나.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당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새 청명의 품에서 잠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 당보는 눈을 떴다. 생각보단 오래 잔 것 같았다. 눈을 뜨니 보이는 건 침의 차림의 청명이었다. 잘 땐 도복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갈아입은 모양이다.

옷을 갈아입고자 주변을 보니 탁자 위에 입고 온 무복이 깨끗하게 개어져 있었다. 시비가 있는 세가가 아니니 청명이 했을 것이 분명해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해가 떴으니 곧 청명이 일어날 것이다. 항상 먼저 일어나서 깨우는 건 청명이었는데, 아직 자는 것이 의아했다. 깨운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당보는 자는 청명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니 곱다 볼 수 있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청명의 눈썹, 눈, 코, 입을 찬찬히 뜯어보니 안 이쁜 구석이 없어서. 자신이 사천제일미면 청명은 섬서제일미일것이 분명하다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뻔했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걸 알긴 하는지, 항상 못된 말만 하는 청명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정인 취급이 싫다는 것은 오해였지만 뭐만 하면 수작이다부터 시작해서 술이나 먹어라, 맞고 싶냐 등등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도사언니이... 자요?"

당보는 저 못된 입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청명이 눈을 뜨면 자는 사람에게 뭐 하는 것이냐며 못된 소리만 할 테니까, 확실히 자는지 확인해야 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청명이었지만 유독 당보에게는 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는 청명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도 보고, 일어나지 않으면 추혼비를 등에 박아주겠다는 말도 했으나 청명은 미동도 없었다.

"... 진짜 자요?"

이정도면 일어날법한데... 당보는 손가락으로 청명의 볼을 콕콕 찔러보았다. 그러자 청명이 당보의 손을 제 쪽으로 획 당겨 당보를 끌어안았다. 당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손 잡는 것도 종일 해달라고 해야 겨우 해주는 사람인데. 거절은 없지만 그렇다고 먼저 해주지도 않는 것이 청명이라서, 당보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부터 사람 죽일 일 있어요?"

"어제부터 앵알앵알 거리더니 몸은 좀 어떠냐"

"앗, 언니가 접문한번 해주면 나을 것 같은데"

"상태가 안 좋긴 한가보네"

"그쵸, 접문 한번 어때요?"

당보는 은근한 기대가 담긴 눈으로 청명을 보았다. 왠지 청명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해서, 조르면 접문도 해줄 것 같았다. 안 해주면 내가 하면 되고. 그렇게 잠시동안 청명을 보는데도 별 반응이 없어서 화난 건가 싶었다. 아까까진 좋아 보였는데, 접문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농이었어요, 그냥 하는 말, 읍!"

벌어진 당보의 입안으로 청명의 혀가 들어왔다. 청명은 당보의 목덜미와 등허리를 쓸며 혀를 섞었다. 갈 곳 잃은 손으로 허리를 만지는 청명을 제지하려 손을 뻗었다. 청명의 손을 잡자 손을 깍지 끼고 손등을 만져대길래, 이도 저도 못하고 마주 잡았다. 하으.. 흐, 숨이 찼다. 당보는 얼굴을 빼려 했으나 목덜미가 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만두라는 의미로 청명의 어깨를 두드리자 고개를 기울여 더 깊게 입을 맞추길래 항의의 표시로 청명을 보았다. 

언제나 접문할 때면 부끄럽다며 눈을 감아오던 청명이라서 당연히 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매화색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쳐 보였고, 두 눈동자에 담긴 욕망이 저와 다르지 않아서. 당보는 청명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자 팔을 청명의 목에 두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 됐지? 이제 밥 먹자. 너 뭐 좀 먹어야 해"

청명은 당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당보는 순식간에 침의를 갈아입고 홀랑 나가는 청명을 지켜봤다. 당보는 황당해서 청명을 붙잡지도 못했다. 방금 뭐야? 이러고 그냥 간다고? 아니, 그보다 저 말코가 먼저 접문한거야? 지금??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 동한걸 봤는데, 뭐에 동한 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당보는 옷을 갈아입고 청명을 쫓고자 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탁자엔 입고 온 무복과 전에 청명에게 선물한 매화색 장포가 개어져 있었다. 청명이 두고 간 건가 싶었는데 어딜 봐도 익숙한 녹색 장포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매화색장포는 청명이 제게 입으라고 꺼내둔 게 분명했다.

"진짜로, 언니가 꺼내둔 거야...? 내가 입은 게 보고 싶어서?"

잠시 가라앉은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터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면경을 보지 않아도 제 모습이 어떨지는 훤히 보여서, 생전 외우지 않던 도덕경을 중얼거리며 진정하고자 했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아서 청명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작게 소리도 질렀다.

피부색이 돌아오자 당보는 매화색 장포를 입고, 매화색 비녀로 머리를 반만 틀어올려 방을 나섰다. 매화색으로 감싸진 절 보고 지을 청명의 표정이 기대가 되었다.

처소를 나와 청명의 기척을 따라가니 청진과 대화 중인 모습이 보였다. 대화를 들어보니 어디 객잔이 맛있다더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아침은 밖에서 먹나 싶었다. 거리를 두고 멈춰서서 제 차림을 정돈하고 천천히 청명에게 다가갔다.

"도사 언니! 기다리고 있었어요?"

청명은 당보의 옷차림을 위아래 훑어보더니 툭 내뱉었다.

"별로"

"제 장포는 안보이고 이거밖에 없더라고요. 그래도 암존인데 장포도 없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한번 입어봤습니다. 어때요,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나쁘진 않네"

"아이참, 좀 더 자세히 보십쇼"

당보는 청명의 앞에서 빙글 돌아보았다. 누가 제 장포는 숨겨두고 매화색만 꺼내두었더라고요. 어때요, 다른 할 말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청명은 옆에 있던 청진의 눈치를 한번 슥 보고, 당보에게 다가왔다.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정도로 다가와서, 마주 선 당보의 눈을 보며 말했다.

"곱다. 매화색도 잘 어울려."

말을 마친 청명은 당보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보는 열이 오르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청명을 따라갔다. 말없이 앞서가는 청명의 귀가 붉은 게 보였다. 아닌 척 챙겨주는 청명의 다정함이 너무 좋았다. 붉어진걸 보여주기 싫다고 솔직히 표현해주는 것도 좋았고, 앞서 감에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청명은 처음엔 앞서가더니 어느 순간 제 걸음에 맞춰 주었다. 당보는 그런 청명의 옆에 붙어 청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요즘 양민들 사이에 도는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순간 눈에 무언가 들어간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췄다. 눈을 몇 번 깜빡거렸음에도 이물감은 그대로라 멈춰 서서 장포로 눈을 비볐다. 

"뭐해"

"눈에 뭔가 들어간 것 같아서요. 잘 안 빠지네요."

청명은 당보의 얼굴을 잡고 눈을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보이는 게 없어서 눈에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뜨자 청명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연지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붉은 입술은 아침의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허리를 만지던 손, 물기 어린 호흡, 절 바라보던 매화색 눈동자. 

"... 아까 접문은 왜 한 거에요?"

당보의 질문에 청명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해달라며."

"눈도 뜨고 있었잖아요. 평소엔 안 그러면서."

"또 뭐 때문에 그러는데."

"그냥... 아까 왜 그런 건지 궁금해서요. 별 이유는 없습니다."

당보는 제 발끝을 보며 대답했다. 때리지도 않고 이유를 묻는 것은 청명이 상당히 참고 있음을 의미했다. 알고 있음에도 괜히 말로 듣고 싶었다. 청명의 말투, 행동, 눈빛 하나하나가 연모를 담더라도 구태여 말로 해주길 바랬다. 청명의 말 하나하나에 기분이 하늘과 땅을 오간다는 것을, 언니는 알고 있을까? 

청명은 당보가 발로 바닥을 툭툭 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청진이 보는 앞에서 곱다고도 하고, 접문도 해주고, 해달라는 건 다 해줬는데? 눈만 보고도 제 생각을 아는 녀석이 아닌 척 시무룩한 게 황당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해달라는 건 다 해줬잖아."

당보는 흘깃 청명을 보고는 다시 시야를 내렸다. 도사 언니는 다 해줬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곱다고도 말하고, 접문하자하니 접문도 해주고. 마음이 심란했다. 분명 좋은데 속상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분에 휘둘려 청명과의 시간을 버리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 웃자. 언제나처럼. 평소처럼 웃으면 넘어갈 일이다. 실실 웃으면 야바위였냐며 맞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당보는 고개를 들고 밝게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눈도 괜찮고 다시 갈까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뭐라도 먹고싶어요."

청명은 그런 당보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뭐지? 말도, 표정도 이상한 게 없는데. 당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명을 불렀다.

"도사 언니? 제 말 듣고 있죠?"

당보는 청명의 눈앞에 손을 휘휘 흔들어 보았다. 손을 따라 눈이 움직이는걸 보면 듣고는 있는데, 고민 중인 건가? 때릴지 말지? 당보는 청명이 손을 올리면 바로 방어할수 있도록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안아줘?"

"... 네?"

갑작스러운 청명의 말에 몸에 힘이 빠졌다. 갑자기...? 누가 봐도 맞는 상황 아니었나. 물론 애교를 부리긴 했지만, 언니는 아무 반응도 없었잖아.

"안아주냐고."

"왜, 왜요?"

당보가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청명이 말없이 한 걸음 다가오면 당보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가오면 멀어지는 상황이 두세번 반복되자 청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만히 있어."

당보는 고개를 끄덕였고, 청명은 다가와 당보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청명이 목에 팔을 두르라 하길래 팔을 둘렀더니 그대로 당보를 안아 올렸다. 

꺅! 당보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당보는 두 다리로 청명의 허리를 감싸고 청명에게 안겼다. 항상 올려다보던 얼굴이 시야 아래에 있었다. 올려보거나 정면으로만 봤었는데, 이렇게 보는 건 또 새로워서 안긴 것도 잊고 청명의 얼굴을 하나하나 만져봤다. 청명은 당보가 만지던 말던 당보의 허리와 엉덩이를 바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당보는 청명에게 안긴 채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적당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 은은한 매화향과 절 받쳐주는 손. 안긴 모습이 아해같아 부끄럽기도 했지만 좋은 마음이 더 커서 청명의 머리끈을 제 손에 꼬며 장난치기도 했다.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어 청명의 앞머리가 흐트러졌다. 당보는 머리끈을 놓고 손가락으로 청명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손가락이 빗인 양 머리카락을 쓸고 잔머리는 귀 뒤로, 앞머리는 가지런히 내렸다. 음, 됐다. 당보는 만족스러운듯 고개를 끄덕였다. 까만 머리카락과 그 사이의 붉은 색이 참 예뻐보였.. 붉은색? 정돈된 머리카락 사이로 청명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앞머리를 만질 즈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던걸 보면 그때부터 보고 있었던가 싶었다. 

내려본 청명의 양 뺨이 붉어져 있길래, 당보는 두 손으로 청명의 얼굴을 감쌌다. 손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열기와 저 만을 담고 있는 눈이 좋아서. 당보는 홀린듯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몇초간 입을 맞대고 있다가 서로의 입술 사이로 혀를 섞었다. 깊지 않은 접문임에도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금세 숨이 찼다. 달다. 너무 달아서 중독 돼도 좋을 것 같다. 좀 더, 더 깊이. 흐으, 좋아. 

접문은 점점 진해져 꼭 당보가 청명을 잡아 먹는 듯 보였다. 서로를 잡아 먹듯 한참 동안 이어진 접문은 당보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끝이 났다. 당보는 숨을 고르며 번들거리는 청명의 입술을 보았다. 그리고 새빨개진 얼굴을, 그럼에도 빛나는 눈을. 당보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청명이 물었다.

"접문은 왜 했어."

당보는 청명의 말에 곰곰히 생각했다. 왜 했을까... 단순히 동해서? 그렇다면 뭐에 동한 것인가. 분위기, 눈빛, 손길... 아니다. 나는, 나는 그냥 언니가 좋아서. 연모하는 마음을 참을수가 없어서, 더 닿고 싶었다. 더 깊이. 이 넘치는 마음으로 청명을 채우고 싶었다.

"언니가.. 너무 좋아서요."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하는 아해마냥 긴장 되었다. 청명에게 연심을 고백할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던것 같은데. 청명이 거절이라도 하면 당장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청명의 얼굴을 보자 청명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당보를 보고 있었다. 

"나도 그래. 날 보는 네가 좋아서, 그래서 그랬다."

청명은 언제나 말하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연모한다고. 말로 듣고 싶어한다는걸 알고 말로 표현해주는 사람을, 투정인걸 알면서도 전부 받아주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분명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을 사랑할것이다. 

당보는 두 다리를 청명에게 감고 청명의 귀에 속삭였다. 

"이 뒤는 객잔가서 할까요?"

청명은 어이없다는듯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에 든게 그런거 밖에 없지?"

"그런 저를 연모하시면서. 빨리 가시죠, 딱딱한 흙바닥 보단 푹신한 침상이 좋소."

청명은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으나, 청명에게 안긴 당보는 웃어댔다. 청명이 뛰는듯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가는거 아니에요? 제가 언니 잡아먹으면 어떡하려고요. 오냐, 세가 방중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좀 보자. 넌 오늘 당가로 못 갈줄알아. 청명의 말에 당보는 꺄르르 웃어댔다. 당보는 잠시후가 정말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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