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여청] 정인 연습 上
현대 당보 X 검존 청명
*현대의 당보와 암존 당보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설정입니다.
“도사언니, 부탁 하나만 합시다.”
“부탁?”
“네. 닷새 뒤 밤, 제 처소로 와서 저 좀 지켜주세요.”
난데없는 부탁에 청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곳도 아닌 당가에서 한밤중에 널 지켜줘야 할 정도로 큰일이 벌어진단 말 아닌가. 요 며칠 사천에서 지냈지만 저조차 습격이나 살기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적은 상당한 실력자일 테고, 굳이 네 처소를 장소로 정했다는 건 당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대체 누구지? 어떤 간 큰 새끼가 당가에서 감히 당보를 건들 생각을 하냔 말이다.
“별건 아니고 혹시나 해서 그런 겁니다. 보험 같은 거죠.”
당보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는 청명을 지켜보다 한장의 서신을 건넸다.
“닷새가 지나고 제가 일어나 서신을 달라하기 전까진 절대 열어보시면 안 됩니다.”
“뭔데. 급한 거 아니야?”
청명은 하얀 종이의 앞뒤를 살펴보고, 촛불에 비춰 어렴풋이 보이는 글자들을 읽어보려 했다. 이런 제 행동을 예상했는지 여러 겹으로 접힌 종이에 글자들이 겹쳐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겨우 영, 강 정도의 글자 뿐이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제 얼굴안보실 생각이면 읽어도 됩니다.”
“알았다, 알았어. 안 보면 될 거 아니냐.”
청명은 툴툴대면서 서신을 옷 속에 집어넣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얼굴까지 안 본다고 하냐! 달라고 안 하기만 해봐, 네 눈앞에서 바로 읽어줄 테다.
당보는 누군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감은 채로 옆자리를 더듬어보면 부드러운 이불만 만져질 뿐이라 어디 가셨지... 하고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눈을 떠 언니를 찾으려니
“꺅!”
처음보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어 이불로 급히 제 몸을 감쌌다. 도둑이라기엔 얼굴을 전부 드러내고 이상한 옷과 저건 뭐야, 칼인가? 아무튼 절대 평범한 도둑의 모습은 아니었다. 제 소리를 들었다면 곧바로 달려와 주었을 사람이 오지 않으니 저 미친놈이 죽였거나, 들이닥치기 전 운동하러 나간 경우 둘 중 하나겠지. 당보는 제발 후자였길 바라며 조금씩 몸을 물려 미친놈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놈의 생각은 달랐는지 성큼성큼 다가오길래 당보는 눈을 질끈 감고 제발 살려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
“살, 살려주세요!”
“..뭐?”
“살려만 주시면 얌전히 있을게요.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소리도 안 지르고, 정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게 있을게요..”
급한대로 살려달라 빌긴 했지만 제 말이 이어질수록 혼란스러워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당보는 제가 말실수라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프레라도 하는 것처럼 입고 있는 사람이 저를 잡으러 보내진 사람일 리는 없고, 이미 소리를 지른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납작 기는 것 뿐인데.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기만 하니 억울함과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거기 가만히 있어.”
당보는 고개를 끄덕이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소매로 재빨리 닦아냈다. 괜히 울먹거려 책잡힐 일을 만드느니 제 옷을 희생시키는 게 백배 천배 나았다.
청명은 혼자 겁먹고 훌쩍이기 시작한 당보를 뒤로하고 재빨리 탁자에 올려둔 서신을 열었다. 일어나서도 달라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낯선 사람 인양 대하는 당보가 도저히 이해되질 않았다. 그리고 제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내용에 종이를 바닥으로 패대기쳐 분노를 표출했다.
“아니, 이 새끼는 나이를 헛으로 먹었나??”
서신에는 미래의 자신과 영혼을 바꾼다는 술법에 성공했으며 제 앞의 당보는 겉모습만 사천당가의 당보지, 영혼은 환생한 영혼이 들어있다고 적혀있었다. 환생한 이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니 누구던 제압 가능한 제게 부탁한 거고 미래의 기술을 알아 와 강해져서 돌아오겠다는 황당한 말로 끝나있으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언제 술법이 풀리는지,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말도 없이 언니만 믿겠다고 적어두면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흐읍, 훌쩍.”
“넌 또 왜 우냐..“
청명은 한숨을 한번 쉬고 당보를 안아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가가면 놀라 몸을 떨긴 하지만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걸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 당보가 돌아올지 모르니 그동안 다치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수련은 무리더라도 식사는 제때 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정 말을 안 들으면 가둬두고 억지로 먹이는 방법도 있지만...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잘 지내보면 되겠지.
한참을 훌쩍거린 당보는 눈물이 멎자 절 안은 사람의 품에서 벗어났다. 다행히 순순히 자신을 놔주었고 남은 눈물도 닦아주니 제 생각만큼 끔찍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애초에 사극에서나 볼법한 방에다 종이를 돌처럼 바닥에 내리꽂는 사람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는 게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고, 아침부터 울어 배도 고프고, 거울에 비친 내가 녹색 눈에 갈색 머리인 게 예쁘네 싶어서… 잠시만, 녹색에 갈색 머리??
당보는 제 앞의 사람을 지나 홀린 듯 거울 앞에 섰다. 몇번이나 눈을 깜박여도 제 눈은 어두운 녹색에 머리는 허리까지 오는 갈색 머리였다. 자는 사이 렌즈를 끼웠나 하는 생각에 손으로 찔러봐도 곧바로 눈이 만져져 눈물이 나왔다. 하얀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허리끈을 풀러 상체를 보면 이 역시 상처투성이였으며, 배에 있는 근육이 신기해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굴곡이 느껴지는 게 틀림없는 제 것이었다. 손으로 가슴을 쥐어보니 조금 작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손이 커졌는지 정말 가슴이 작아진 건지 알 수가 없어 몇 번 주물러보고 말았다.
“내가 꿈이라도 꾸나?”
“.. 꿈은 아니다. 그, 옷은 다시 입고.”
꿈이 아니라는 대답에 당보는 몸을 휙 돌려 상대를 마주 보았다. 곧바로 마주치는 시선과 새빨간 귀, 그리고 제 상체를 보다 덧붙여진 말까지. 당보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옷으로 몸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허리끈을 잡아 묶어보려 해도 잘 묶이지 않아 허둥대고 있자 커다란 손으로 허리끈만 묶고 몸을 물리니 더더욱 민망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긴 네 전생이라고 생각하면 돼. 니 몸의 주인이 너랑 자기 영혼을 바꾼 거라 원래 몸도 멀쩡하니까 걱정 말고.”
“제 전생이라고요? 여기가요?”
“서신을 보면 그렇긴 한데 아마 맞을 거다. 이런 거로 거짓말하는 애는 아니거든.”
“와… 그럼 이게 진짜 제 전생의 몸이라는 거죠?”
당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제 몸을 더듬었다. 군살 하나 없이 탄탄한 근육으로 구성된 팔과 다리, 선명한 복근,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악력과 높아진 시야. 거울로 겉모습은 봤으니 이제는 내면을 확인할 차례다 싶어 당보는 제 옆의 의자를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원래였다면 흠집은 무슨 제 손에 멍이나 들었을 테지만 이 몸이라면 다르겠지!
쾅!!
“헙!”
예상치 못한 큰 소리와 함께 당보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힘이 좋을 줄이야 알았지만 그게 나무로 된 의자를 박살 내고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의 힘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의, 의자가 낡아 있었나 봐요”
제 결백을 증명하고자 살아남은 조각을 쥐었지만... 이상하게 멀쩡해 당보는 살짝 힘을 주어 부러트리고 슬쩍 청명을 보았다. 그러면서 이 힘이면 도망칠 수 있겠다 싶었으나 웃음기 하나 없이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보니 몸에 힘이 싹 빠지고 단단히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다. 사죄의 뜻으로 무릎을 꿇고자 바닥을 짚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 바닥이 손가락 모양대로 파이고, 깜짝 놀라 책상다리를 잡으면 그대로 다리가 부러져 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것들이 죄다 쏟아지고 깨져 방이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정말 울고 싶었다.
한편, 청명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주먹을 쥔 손에 내력이 모이기에 뭔가 일을 치겠구나 싶었으나 의자 하나 부순 거로 눈치를 보니 끝났나 싶었지. 그러나 당보가 제 예상안의 인물이던가. 혼자 몸을 꼼지락대더니 바닥을 파내고, 그도 모자라 책상다리를 부숴 그 위에 있던 온갖 병들을 깨트렸으니 청명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보는 당보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게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일어나려고 잡았는데 그냥 부러진거에요... 의, 의자는 친 게 맞는데 바닥이랑 책상은 진짜 실수고 잠깐 나갔다 오시면 깨끗하게 정리해 둘게요. 병들도 다시 사 오고, 의자랑 책상도 조립해서 똑같이 만들어올게요. 진짜로요..”
당보는 눈치를 보며 줄줄 말을 쏟아냈다. 알코올 냄새와 검은색 액체들은 딱 봐도 위험해 보였고, 어디서 가구를 구하나 싶지만 거울도 있는 집안에서 저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우선 뱉은 말들이었다.
“그래. 어차피 네 물건인데 돌아오면 알아서 하겠지.”
“어.. 여기 그쪽 집 아니에요?”
“여기 너네집인데.”
어리둥절한 당보를 두고 청명은 서랍에서 당보가 입을 무복과 장포를 꺼내 주었다. 옷을 받고도 멀뚱히 들고만 있으니 빠르게 위아래 침의를 벗겨 무복과 장포로 갈아입히고, 언젠가 뭉텅이로 받은 머리 끈으로 저처럼 올려묶어 주었다. 그래도 세가 놈인데 뭐라도 발라줄까 하는 생각에 뺨을 감싸 만지작거리면 눈을 감고 얼굴을 기대니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뭐지? 나 좋아하나? 혹시 지금 접문하자고.. 이러나? 미래에는 얼굴만 만져도 정인하고 그래? 얼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좋으면 우선 몸부터 부비고 보는 거야?
“잠깐 당보야. 이건 너무 빠른,”
“엥? 제 이름 알고 계셨어요?”
당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말한 기억은 없는데 자연스러운 호명은 친한 친구를 부르듯 친근한 울림이었다.
환생했다고 이름까지 같을 수가 있나... 청명은 당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행동이야 비슷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이름도 똑같을 수 있냔 말이다.
“이름이 진짜 당보라고?”
“네. 성이 당씨고 이름이 보입니다. 그쪽은요?”
왠지 지금의 당보에게 온전한 이름으로만 불리면 안된다는 느낌에 청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검존이라 부르면 거리감이 느껴지고 도사언니는 너에게만 불리고 싶었으니, 자신이 착각하지 않도록 적당히 낯설면서도 친근감 있는 호칭을 붙이는 게 좋은 듯했다.
“도장. 청명 도장이라고 불러.”
“청명 도장이요? 그게 풀네임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원래 부르던 거랑 다르게 불러 헷갈리지 않고, 원래 영혼이 돌아왔을 때 알 수 있는 게 좋지 않아요?”
“시끄럽다. 하라는 대로 해.”
“네네.”
청명은 당보와 손을 잡고 자주 가던 객잔으로 향했다. 당가에서 아침을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영혼이 바뀐 게 들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차라리 밖에서 방을 잡고 먹는 게 안전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익숙하게 방으로 올라가 늘 먹던 음식을 주문하는 사이 당보는 신기하다는 듯 이것저것 만져보다 방의 장신구를 서너개는 더 깼고, 청명에게 양손이 봉인 당한 채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아까 있던 건물이 다 내 집이에요? 아파트 보다는 옛날 궁 같은 느낌이던데. 알고 보니 저는 공주고 그쪽은 호위무사라던가?”
“호위무사는 무슨.”
“왜요! 검도 들고 다니고, 길 잃지 않도록 손도 잡아주고, 저보다 힘도 세 보이고 제 옆에서 떨어지질 않고 지켜주는데 아닐 이유가 없잖아요. 이름도 대충에 나이, 생일, 가족관계, 직업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이 정도는 알려주면 안 돼요?”
“알면 뭐가 달라지냐. 어차피 돌아가면 끝인데.”
“많은 게 달라지죠. 지금처럼 도망갈까 손 잡을 필요도 없고, 눈치만 보는 게 아니라 진솔한 대화도 나누고. 그런 게 친구잖아요.”
당보는 청명을 보며 눈웃음 지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모습이나, 몸 좀 봤다고 부끄러워 하는 모습은 단순한 친구 사이에서 보일 행동은 아니었다. 언니처럼 녹색으로 머릴 묶고, 무뚝뚝하게 대해도 눈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닮아 신경이 쓰이니. 이런 사람에게는 변화구보다는 직구가 정답이겠지.
“아니면 애인이에요? 그래서 이 모습이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건 싫으니까 옆에 두고 감시하는 중?”
청명은 아무 대답 없이 저와 마주 보려는 눈을 피했다. 네가 부탁하긴 했지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하면 핑계처럼 들릴게 뻔했다.
“흐응. 확실히 같은 여자가 봐도 예쁘긴 하죠. 얼굴은 미인에 나이는 30살도 안돼 보이고, 아까 보니까 집도 넓고 성격은… 모르겠지만. 그쪽이랑 사귈 정도면 나쁜 편은 아니겠죠.”
“개소리.”
“것 봐요. 마음에 안 들면 욕부터 하잖아. 저한테 솔직하게 말해본 적도 별로 없죠? 말로 안 되면 주먹부터 나가고 본인 감정도 몰라서 우선 화내고 짜증 내고, 그러다가 헤어지면 어떡하려고요.”
“…안 사귀면 헤어질 일도 없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보는 씩씩대며 청명의 말은 전제부터 틀려먹었음을 지적하고 사귀지도 않으면서 옷은 왜 갈아입혀 주는지, 자는 건 왜 보고 있는지 등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아하면서 헤어지기 싫어 사귀질 않는다고? 귀엽다는 듯 얼굴 만져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도대체 왜 이런 행동까지 닮아있는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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