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과도기

ⓒ 왕초

Nostalgia by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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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의 호그스미드는 고요했다. 한때 북적이는 사람과 대화 소리로 그 끝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번화가는, 이제 눈으로 희게 뒤덮인 바닥을 훤히 내보이며 번영했던 시기의 쇠퇴를 알리고 있었다. 일찍이 죽음의 왕에게 헌신하기로 마음먹은 늑대 인간이나 인간 사냥꾼, 혹은 저급 마법사들이 들뜬 표정의 어린 마법사들을 대신해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그들의 그림자와 함께 다니는 개들은 종종 아무 까닭 없이 멈춰서서 하늘을 향해 긴 울음을 뱉곤 했는데. 간혹 여러 개의 울음이 겹치는 경우에 그 소리는 서투른 장송곡처럼 들리기 일쑤였다. 드레이코 말포이는 입을 열지 않고. 전처럼 비아냥거리는 말씨로 그들의 천박함을 비웃지도 않고. 다만 혼자서. 저택에서 출발할 때 나시사가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어깨에 덮어준 로브를 더 끌어 내렸다. 다행히 로브의 모자 부분은 순순히 끌려와 말포이의 푸른 눈 조금 위를 가려주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탓에 위로 쌓이고 다시 쌓이기를 반복한 눈은 발을 디딜 때마다 말포이의 걸음을 따라 정확히 그의 보폭만 한 자국을 만들었다. 그것이 발자국의 선명함만큼이나 정확히 심기를 거슬렀다.

 

드레이코 말포이에게 말포이란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영혼의 일부를 공유하도록 인도된 존재였다.

공유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말포이는 공유라는 단어를 머릿속의 양피지에서 지워내고, 대신 지배나 제물 같은 종류의 단어들을 동일한 자리에 채워 넣었다. 영광의 명암은 암흑의 시대 안에서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조명되었다. 루시우스는 여전히 하나뿐인 아들을 사랑했으나 아들로 하여금 제 군주에게 말포이 가의 건재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나시사는 이전보다 적은 수의 언어로 심경을 비추었다. 많지 않은 말수가 현명한 여인의 증거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녀 역시 유일한 아들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고 꾸미고 있는 분위기였지만 그 준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포이 앞에 밝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온화한 얼굴로 이따금 말포이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의 손은 여느 때와 동일하게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말포이는 가끔 제 앞에 닥친 너무 이른 재앙이 모두 물러간 것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충동은 그가 어리석은 기분을 충분히 만끽할 새도 없이 가셨다. 가만히 둘을 응시하던 루시우스가 지팡이를 크게 내리치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고. 그러면 언제나 그는 돌아와야만 했다. 어둡고 침침한 그의 고향. 긴 식탁에 숱하게 자리한 빈자리들과, 도저히 그 자신이 그 자신이지 않고서는 안되었던, 탈출 불가능한 나날들.

그런데도 가족이란. 제 유년을 전부 기억하고 이름을 지어 준 존재란 얼마나 달콤함을 주는지. 호그와트가 가진 특유의 젊은 공기와 공간에 속한 자를 더없이 밝은 쪽으로 이끌려는 본능적인 의지가 이질적으로 느껴진 순간부터. 말포이는 의식적으로 학교에서 떠나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해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선택해서 드레이코 말포이가 된 게 아니라면 사유는 불필요한 사치재였다. 말포이는 단지 말포이면 되었다. 불쾌하리만치 빛나는 좌석에 앉아 왕의 충신으로 군림하면서. 죽음을 흩뿌려 온 혈족의 역사가 또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기실 그 외에는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말포이는 다시 떠오른 몇 개의 얼굴들을 지워냈다.

 

조금 더 걷자 눈이 간판에 수북이 쌓여 철자를 알아보기 힘든 가게 앞에 도달했다. 말포이는 무심결에 제 앞의 가게가 푸디풋 부인의 찻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매일 같이 깨끗이 닦여있던 창은 먼지로 부옇게 물들어 있었고, 가게 내부는 운영하지 않은 지 오래인 듯 움직이는 작은 천사들이 그려진 마법 찻잔 세트만이 진열장에 걸린 채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말포이는 저도 모르게 가만히 서서 손의 날카로운 옆 날로 창가의 먼지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말포이 가의 문양이 새겨진 비싼 가죽 장갑에 먼지가 뭉텅이를 이루어 엉겨 붙었다. 어쩌면 행인이 보기에 말포이는 조금 실성한 마법사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려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깨끗해진 부분 위로 말포이의 얼굴이 비쳤다.

그곳에는 오직 말포이 스스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해진 한 청년의 이목구비뿐이었다.

그의 고독을 감지한 불안은 쏜살같이 달려와 어린 날 말포이가 전신에 두르고 있던 오만을 걷어갔다. 청년은 창백했고, 애써 뭔가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초조해 보였다. 말포이는 창을 짚은 손을 옮겨 청년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입김이 희게 부서지며 청년의 초상을 흐렸다. 말포이는 그가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흐려지길 바랐다. 그래서 그의 사라짐과 동시에 마음 또한 가져가 버리기를. 그럴 리 없는데도 느끼기엔 뼈에 사무치게 시린 추위마저 거둬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말포이가 아무리 입김을 불어대도, 청년의 푸른 두 눈은 그 외에 아무도 볼 수 없도록 훈련된 짐승처럼 아직 드레이코 말포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뺨 위로 떨리던 손은 끝내 곱아들어 주먹의 형태를 취했다. 말포이에게 있어 가장 따뜻한 자세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말포이 외에는 침입할 수 없는 불가결한 형태.

 

곧이어 거리 끝에서 돌연 찢어지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경보였다.

그것은 오늘 밤 이 거리에 돌아와서는 안 되었을 남자. 한편으론 드레이코 말포이가 아버지의 기대에 충족하기 위해 반드시 찾아냈어야 할 남자가 아주 근접하게 나타났다는 증표기도 했다. 말포이는 근심에 젖은 게 언제였냐는 기세로 발걸음을 옮겼다. 흥분한 무리가 그의 기척을 알아채고 가까이 다가왔다가 로브 아래의 신원을 확인하곤 약간 실망한 기색으로 반대편 방향을 향해 뛰어갔다. 말포이는 머리론 내내 기다린 수확을 거두기 위해 적어도 그들을 좇아가야 할 필요성을 이해했지만. 정작 행동으론 한층 짙어진 호그스미드 거리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몇 개의 인영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그들과 정 반대편으로 방향을 옮겼다.

 

 

 

 

그리핀도르와 몇몇 기숙사에서 자원한 그들의 지지자가 간과한 유일한 사실이라면 호그와트의 새로운 교장으로 부임한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그들의 예측 이상으로 비밀 암호에 능숙한 사내라는 점이었다. “번개가 쳤다” 는 통신을 엿들은 세베루스는 불안정한 상황을 고려한 비상 회의를 핑계로 삼십 분 후 교수를 포함한 전체 구성원 소집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단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었다.

살아남은 아이의 귀환.

다이앤은 반쯤 기대, 반쯤 두려움으로 가득 차 웅성거리는 후플푸프 학생들 사이에 앉아 난롯불을 바라보았다. 턱을 괸 오른팔이 슬슬 저려오려 했다.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로 돌아왔다는 건 단순한 귀환을 훌쩍 넘어서는 사건이라는 걸 모두 알았다. 머글 식 비유로 따졌을 때. 그것은 긴긴 어둠으로 들어찬 지하 터널에서 벽을 부수고 지상으로 나아갈 단 하나의 방안이었다. 해리 포터는 그러기 위해 빚어진 아이였고. 세계의 운명에 대해서는 반역이면서 해리 포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길이었다. 조금 잔인하네, 라고 다이앤은 이따금 중얼거렸으나. 솔직히 말해 그녀는 한 소년의 운명 밖에 다른 운명들에는. 심지어 그녀 자신의 운명을 포함해서조차 그다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이십 분 후면 스네이프가 고지한 소집 시각이었다. 구태여 딱 맞게 도착하든지 다소 늦든지 해서 체벌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학생들은 허무할 정도로 빨리 몰아치는 파도처럼 기숙사를 흔들었던 소란과 함께 사라졌다. 개중 몇이 다이앤에게 서둘러 함께 갈 것을 제안했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서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명료한 직감이 심장 저편에서 따끔거렸다. 다이앤은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저어 상냥한 제안을 거절하고, 달빛이 들어오는 따스한 분위기의 로비에서 조금 더 직감의 주인을 기다렸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러지 않겠지. 다만 그뿐이라면 그녀는 기다리고 싶었다. 난로 위에 줄지은 선인장들이 그녀를 내다보듯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구리로 만든 식물 걸이의 끄트머리가 조곤히, 답을 요하지 않는 다정한 손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파삭, 하고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기숙사와 가까운 쪽에서 들렸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다이앤은 이것이 고대하던 뭔가 대단한 일의 징후임을 납득했다.

다이앤은 지팡이를 들고 일어서 연회장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러니까 굉음의 근원인 부엌으로 가는 복도를 골라 걸었다.

 

비상 체제에 따라 불필요한 촛대가 소거된 복도는 어둡고 비린 냄새를 풍겼다. 컴컴한 바닥은 금방이라도 디멘터를 뭉치로 뱉어낼 것 같았지만 다이앤은 개의치 않았다. 다이앤이 작게 루모스 주문을 속삭이자 지팡이는 주인의 앞을 열듯 재깍 약간의 불을 밝혀내었다. 호그와트가 예전의 활기를 잃었을 때 부엌도 진즉 따스하고 고소한 온정을 잃었다. 이 안에 전과 같이 넉살 좋은 유령들이나, 덤블도어가 배고픈 새벽의 모험가들을 위해 남겨놓도록 지시한 빵 덩이는 없었다. 우울과 공포를 즐기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그녀가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다이앤은 문고리를 쥔 다음.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다.

 

거기 드레이코 말포이가 있었다.

깨진 유리조각과 접시 사이에, 언제나 그녀만은 그럴 것을 알고 기꺼이 마주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예외 없이.

 

“얼굴이 좀 야위었네. 드레이코. 이틀은 굶은 세스트랄 같은걸.”

“… 시간이 없어. 아델바이스. 너도 이미 알겠지만, 그 사람이 곧 여기 올 거야.”

“응. 그렇겠지.”

“빌어먹을 그따위 식으로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달을 등지고 선 말포이는 학교를 떠나기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창백했고, 희었고, 사랑스러웠다. 적어도 다이앤에 의해서는 그렇게 보였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첨예하게 나뉘어 꼭 먼 옛날 미술관에서나 본 인상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의 얼굴을 다이앤은 유심히 관찰했다. 빗물에 젖어 필사적으로 파닥거리는 새처럼, 말포이는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함께 가자. 아델바이스. 네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난 죽지 않을 거야. 네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면 말이야.”

“아니. 넌 죽어. 그 사람은 그 정도로 강해.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거고 그게 유일한 정답이야. 같이, 같이… 간다면. 네가 날 돕는다면 살길은 찾을 수 있겠지.”

“넌 두려운 모양이구나.”

내가 널 선택했다는 뜻이야! 넌 대답해야 해. 내 선택을 따르는 올바른 결정을 할지. 어리석게 개죽음이나 당할지.”

 

다이앤은 안타깝다는 희미한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그에게서 몇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불 꺼진 부엌의 어둠에 묻혀 몸 전반의 둥근 실루엣만 남기곤 흐려졌다. 그녀는 사람이 발견할 수 없는 깊숙한 곳. 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든 작은 은신처 안에서 튀어나온 음성 같았다. 말포이의 고개가 툭 떨어졌고. 옅은 밤바람에 실린 부드러운 백금발이 나란히 술렁였다.

 

“난 이 길을 선택했어. 그러니까 네가 와. 늘 그랬던 것처럼.”

“드레이코. 난 모든 항로에 돌아갈 길이 마련되어 있다고 믿어. 그걸 깨닫기만 한다면 이번에도 넌 잘할 테지만. 지금은 일러.”

“제발.”

“…… 그러니까 안녕.”

 

금방 또 만나. 작은 음성이 따라붙었다. 말포이는 무력하게 서서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 교정을 배경 삼아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으로 자부하고 켜켜이 쌓아온 시간의 축이 끝에서부터 바스러졌다. 호그와트의 눈부신 하늘, 푸른 잔디, 빗자루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동안 즐긴 청명한 공기…. 이 이상 높은 곳에 도달한 자는 없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과 또 그런 확신이 가득 채워주었던 포만감. 그저 아름다운 감각들. 그런 것이 일단 부서지고 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란 것. 사실 죽음을 맞이한 지 반세기는 지난 케케묵은 귀신들마저 한때 그와 같은 교정을 걸으며 그와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드레이코 말포이는 인지했다. 마치 지난 짧은 젊음을 뒤로 감는 것처럼. 드레이코 말포이를 향해 다가올 줄만 아는 것 같았던 다이앤 아델바이스의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흐릿해졌다. 드레이코 말포이는 순간 짧게나마. 다시 한번 그녀의 입으로 안녕이라는 인사를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심술을 부리지 않겠다고. 온갖 비꼼과 짓궂은 말로 그녀의 다정함을 비웃을 게 아니라. 대답 없이 등을 돌려 보이는 것만으로라도 이 투박한 호의를 표하겠다고.

 

실은 나도 햇살 속을 나란히 걸을 친구를 기도해본 적이 있었다고.

 

 

드레이코 말포이의 등 뒤편에서 세베루스 스네이프가 자신을 환대하는 이 하나 없어진 밤을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역사에 기록될 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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