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17일의 화요일

ⓒ 해저

Nostalgia by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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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of 17th

13일의 금요일, 주에 한 번 있는 경음악부 합주 시간을 놓쳤다. 정말이지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율을 마친 바이올린은 비어있는 음악실에서 몇 번 섬세한 소리를 내다 말고 얼마 안 가 멈춰버렸다. 심란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기 탓이었다. 날이 이렇게나 불행할 수가 있나? 드레이코는 공허한 부실에 앉아, 활에 신경질적으로 송진을 묻혀가며 뇌까렸다. 무려 아버지의 캐딜락-플리트우드-브로엄을 타고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출발했는데. 지각이라니, 연습이 이미 끝났다니.

그렇다고 대단한 모범생인 그가 합주 시간을 착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당연하게도 말이다). 보다 초현실적이고 어이없는 이유였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고. 집에서 나서자마자 은색 머리에 웬 은색 팔찌를 한 여자와 부딪히고 나서부터 그랬다. 오리 떼가 횡단보도를 네 번이나 지나가질 않나, 까마귀가 기분 나쁘게 울질 않나, 검은 고양이가 차 선루프 위에 오르질 않나, 신호에 열여덟 번이나 걸리질 않나, 그렇게 신호에 걸린 채로 가만히 있으니까, 간만에 같이 나온 정치인 아버지를 알아본 시위 단체가 느닷없이 토마토를 던지질 않나……. 그러니까 이 모든 불행이 전부 우연적 요소로 구성된 동시에 상당히 필연적으로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하게 생겼군. 연습은 한참 글러 먹은 듯했다. 루시우스 말포이 상원의원은 30피트 떨어진 도로변에 발갛게 물든 캐딜락을 세운 채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체념한 마음의 드레이코가 몸을 부드럽게 일으켰다. 그때—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가 뒤로 고꾸라지고 활 털이 사정없이 끊어졌다.

…… 이런 미친, 젠장할!

“대체 뭐냔 말이야!!!”




«13일의 금요일»이 처음으로 개봉한 지는 벌써 5년이 더 지난 날이었다. 80년 5월 9일의 불행적 신드롬이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건 썩 논리적인 상황이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드레이코는 공포 영화에 큰 취미가 없었다. 겁을 먹기 위해 영화를 본다니, 맙소사. 이상 취향이 따로 없지. 물론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는 84년 ‘더-파이널-챕터’로 막을 내리고도 금년 3월 또다시 ‘어-뉴-비기닝’으로 찾아왔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로서는, ‘13일의 금요일'이나 ‘검은 고양이'나 하는 것들은 전부 미신일 뿐이니 유의미한 불행이 될 수는 없다는 논지였다. 거대한 까마귀 날개깃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괴담을 겁낼 나이는 한참 지났다(적어도 드레이코는 그렇게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요일에는 사려던 마지막 BLT 샌드위치를 럭비부의 포터—그 재수 없는!—에게 넘겨야 했고, 기가 빨려 집에만 처박혀 있었던 일요일에는 그가 사는 업타운에만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월요일 아침에는 그레인저의 앞에서 책을 떨어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침 그 밑에 있던 구정물에 교재가 잔뜩 젖는 수모마저 겪어야만 했다. 구둣발에 튀긴 진흙을 보고 붉은 머리 위즐리가 얼마나 즐거워하며 웃던지! 몹시 불행하게도, 그날 이후로도 머피의 연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미신을 믿지 않는 이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실상 도출해 낼 수 있는 정답은 하나였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귀신이나, 그에게만 특별히 일어난 신이 내린 불우일 리는 만무했다. ‘17일의 화요일’이 되고도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고양이나 까마귀 따위는 답이 되지 못했다. 그 말인즉슨, 이건.


“안녕, 말포이.”

“—스토커의 짓이 분명해.”

은색 머리. 간신히 그 나름의 답을 낸 그의 앞에 부스스한 잿빛이 흔들렸다. 적당한 키에 흐릿한 인상.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드레이코가 느릿느릿 노골적으로 그 전신을 훑어보는 데에도 상대방은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이상한 여자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손목께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묘하게 생긴 은색 팔찌. “요즘 기가 허하거나 불행한 일이 자주 생기지 않니?” 여자가 부드럽게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다이앤 아델바이스야.”

“—아델바이스.”

다이앤이 밝게 웃자, 드레이코는 무언가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은색 머리, 상냥한 웃음, 흐릿한 인상에, 이상한 은색 팔찌! 이 녀석이었잖아!

“빌어먹을, 내 스토커가 너였군.”

“무슨 소리니? 가엾게도….” 그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얇게 찌푸리고 웃었다. “네 불행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럼 대체 뭔데? 너하고 부딪힌 이후로 삶이 계속 엉망이라고!”

“그건 네가 게르마늄 팔찌를 차지 않아서 그래.”

“무, 뭐?”

“게르마늄 팔찌.”

그 순간 드레이코는 그대로 졸도해, 어젯밤 포장을 마친 복도 위로 머리를 박을 뻔했다.

“표정이 파리해 보인다. 우선 물이라도 마시는 건 어때? 나한테 있어.”

“….”

“육각수야. 오컬트 부 부원들이 어제 나눠줬거든. 소지하고 다니길 잘했네.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그쯤에서, 그는 다이앤이 건네준 물을 정신없이 마시다 말고 생각하는 법을 망각하길 택했다. 10초 남짓의 정적이 지나고 드레이코는 경직된 채 가까스로 사고했다. 미친 여자다. 현실주의자인 말포이의 장자에게, 소문난 ‘루니'인 프레시맨의 루나 러브굿보다도 이 오컬트 광신도가 더 미친 것처럼 보이는 건 그야말로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도망갈 수가 없었다. 맑은 눈을 한 그가 그의 ‘육각수’를 든 드레이코를 걱정스레 살피고 있었다. 이게 사이비 같은 건가. 확실히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피해를 본 서민층 때문에 사이비 같은 게 급증했을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나와는 거리가 있어서 그렇지, 일리노이라고 썩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근방에는 미국에서 가장 큰 농업 기구가 있으니까. 얘도 그런 건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이앤은 농촌 출신이 맞긴 했다) 어쩌고저쩌고.

판단 능력에 금이 간 것 같았다. 드레이코는 다이앤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이유에 당위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쟤가 이상해서 그래. 너무 사이비같이 굴어서 그래. 어느 어귀에 설득돼서 그래. 이 불행을 막을 방법이 쟤한테 있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한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흰자 께에 은빛 잔영들이 보였다. 아직 밝은 미소가 내걸린 입. 드레이코가 왼발을 느리게 뒤로 빼냈다. 안 되겠다, 도망쳐야지.

“넌 그냥 하필 ‘누군가 일주일 정도 불행해지는 운명의 섭리’에 휘말린 거야.”

“제발, 제발 좀.”

도망치려다 말고 말로 붙잡힌 드레이코는, 신경질을 내는가 하면서도 다만 은색 팔찌에 시선을 박을 수밖에 없었다. 저 눈은 거미줄 같은 것이다. 걸려들고 말 거야. 포식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모르는 덫에 섣불리 발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야 그는 «13일의 금요일»도 손틈 새로 겨우 보는 새가슴이니까!

“그렇지만 이젠 괜찮아.”

“…뭐?”

“나하고 만났잖아.” 다이앤이 맑게 웃었다. “이걸로 어떻게든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드레이코의 손에 연둣빛 종이 쪼가리를 쥐여 주었다. 세 잎 클로버가 섬세하게 그려진 종이 위에, 모르는 언어—


“산스크리트어야.”


—그 말에 별안간 소름이 돋았다. 드레이코는 직전에 든 어떠한 ‘이끌림’의 감상들은 죄 차치하고, 당장 이곳에서 떠나든지, 아니면 이걸 버려버리든지 해야겠다는 충동에 둘러싸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드레이코 말포이는 그야말로 겁쟁이라는 사실이다!

일요일 내내 집 안에 있던 그가 해결해야 했던 숙제는 바로, 이 불행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양친의 서재를 들락날락하면서—동서양을 막론하고—온갖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찾아본 그는, 역으로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 채 활자의 저주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언어가 ‘산스크리트어’였다. 옛 아리아 말로 쓰인 저주며 부적의 개수는 셀 수도 없다나 뭐라나. 그러니 산스크리트어를 조심해라!

상식과 현실로 도배된 삶을 사는 그는, 이런 ‘미신’ 따위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 하리라 굳게 믿었으나—생각이라는 게 다 무엇인가? 생각은 곧 전염병 같은 것이지.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생각하게 되는. 어쨌거나 드레이코는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현실주의자의 말로라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만약 포터가 있었다면 ‘물불 가릴 때냐, 말포이?’라며 면박을 날렸겠지.’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이 든 시점은 이미 다이앤이 준 부적을 두 조각으로 찢어버리고 난 후였다.


“세상에, 말포이.”

생글생글 웃던 얼굴이 금세 묘한 경악과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건데. 못 미더운 스토커 후보군을 향한 의심은 그다음 장면에 얼마간의 후회로 뒤바뀌고 말았다. 미리 말해두자면 다이앤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행복의 부적이었어. 산스크리트어로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라고 쓰여 있는.”

“….”

까마귀가 무자비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부적이 손을 떠난 직후였다. 루시우스 말포이의 클락션 소리는 반복해서 울리고 있었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포의 갈까마귀 떼가 그들 위를 덮었다. 태양을 가리는 새들은 달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금환일식 같은 진풍경에도—그의 뇌에서는 아버지의 클락션 소리만이 경종 소리마냥 변주되어 울리고 있었다. 아… 일 났다.

“…부적 더 없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이런 미친, 젠장할….

가뜩이나 창백한 그의 얼굴이 시시각각 시퍼렇게 질려가기 시작했다(다시, 우리는 그가 그의 생각보다도 훨씬 겁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아주 이상하긴 하지만, 상냥한 거미줄 안의 상냥한 은신처를 어쩐지 그의 손으로 끊어 파괴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이랬지. 체념한 얼굴의 드레이코가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때, 미지근한 손이 그를 붙잡았다.

“임시방편이 있어.”

결연하고 진지한 낯의 다이앤 아델바이스가 그를 향해 또박또박 뱉어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7시에 깨서 몸을 청결히 하고 육각수를 마셔. 그리고, 게르마늄 팔찌로 행운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유지하고 있는 나하고… 당분간 함께 있으면 될 거야. 등하교를 같이하자. 에반스워크 거리부터는 자가용 말고 걸어서. 내일 아침부터 기다릴게.”

그 순간 드레이코는 그대로 기가 빨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심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무른 낯에 대고 욕지거리를 뱉을 수도 없었다. 아, 젠장….

“오, 이런. 괜찮니?”

“…그래.”

“뭐가?”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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